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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8일 수요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2테살 3,6-10.16-18
복 음 : 마태 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바오로 사도가 신자들에게 하였던 말이고,
특히 그 자신과 같이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권고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복음으로 생활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1코린 9,14)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폐를 끼치지 않고자, 그리고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그것으로 먹고살 때, 더구나 여유 있는 삶을 누릴 때,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하였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아모 7,12) 같은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다 하여도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복음 선포조차 돈벌이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정말 믿을 수 있어서
오해를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던 필리피 신자들에게서만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른 교회들도 자신이 복음을 처음 전하여 주었고 자신이 세운 교회들이었지만,
그는 그 교회들에서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분명히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복음 선포도 얼마든지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하여 쓰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려고까지 할 때는,
이것은 이미 걸림돌이나 오해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나는 바오로 사도보다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느라고 천막 만드는 일을 할 시간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따로 있을까요?
따로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굳이 나눈다면 행복이라 여기는 사람과
불행이라 여기는 사람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
또 형체를 확인할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각자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행복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불행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지만 불행이라는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불행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은데도 행복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행복은 자기만 꺼낼 수가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라면서 사람과 환경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하지만,
외적인 것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복은 내가 마음 안에 만들고 보관해서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게 행복이다.”
행복을 멀리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또 세상의 것에서만 찾는 것도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우리는 행복을 자기 마음 안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으며,
이로써 언제든지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부르면서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입으로 하느님을 끊임없이 외치고 있지만,
실상 하느님의 것을 찾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지만,
실상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했습니다.
위선과 불법은 하느님의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다.”라고 꾸짖으십니다.
무덤의 겉은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된 것 같지만,
무덤 속은 시신이 부패하면서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마음이 더럽고 추한 것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위선의 끝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마음에 품고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또 받아주시기에 더 큰 행복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위선을 주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도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 생명의 본성을 뿜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냄새를 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 때문에
무덤을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은
그들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마태 23,27-28)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거짓된 선', 곧 '선으로 꾸며진 위선'입니다.
마치 자신이 '선'인 양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위선’ 중에서도 ‘종교적 위선’은 악취가 더 심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나 자선이나 단식, 혹은 미사나 전례나 성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나아가서, ‘위선’(ùποκρισισ)은 단지 못된 속셈을
교묘한 방법으로 감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올가미에 씌우기도 합니다(예레 18,18).
실제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그러했습니다(마태 22,18).
또한 ‘위선’은 자신을 완고하게 하고 자신의 탐욕과 방종을 위해
하느님을 도구로 삼고,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기도 합니다.’(루카 18,9; 20,20)
그래서 ‘눈먼 길잡이’(마태 15,3-14)가 되어
잘못 가르치는 ‘나쁜 누룩’(루카 12,1)이 되기도 합니다.
혹 우리가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잘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지만 실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아무리 진실을 가리려 해도,
진리는 가리고 있는 허울을 어김없이 벗기고 말 뿐입니다.
어둠이 드러난 진실마저 덮고 조작하려 할지라도,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막을 태우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더러운 속을 감추고, 겉을 그럴싸하게 꾸미고 치장하고 은폐하고 기만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하는 우리의 위선을 주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당신이 담아주신 마음속 진리를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마태 23,31)
주님!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허물이 드러날까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제 손바닥을 치우게 하시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내소서.
핍박과 폭행을 당해도 물러서지 않게 하시고,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알맹이가 중요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꾸중을 하였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얘기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이사29,13). 하였고,
주님께서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 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신 말씀이 새롭습니다.
아무리 겉이 화려하더라도 실속이 있는 것은 알맹이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삶을 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마니교
(3세기경에 페르시아인 마니가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입니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 바빌로니아 원시 신앙 등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니교의 교리는 세계를 선과 악, 광명과 암흑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핵심으로 합니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이 뒤섞인 세계에서 광명과 암흑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사자로서 마니가 왔다는 것입니다)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간절한 기도와 희생,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 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성 아우구스티노).
또 말합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과거가 중요하지 않고 새 삶을 시작 한 날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과거는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입니다.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앞날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며
주어진 오늘, 이 순간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며 위선과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에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며칠 전에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일 더하기 일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너무 힘듦’이랍니다.
일이 많아지면 힘들기 마련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1달간 한국으로 휴가를 갔을 때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듯이 일정이 생겼습니다.
오기로 한 미국 신부님이 못 오신다고 해서 영어 미사를 했고,
대건회 모임, 사목회의, 구역모임을 다녀왔습니다.
구역장 회의, 세례식, 미사가 있었습니다.
장례미사, 병원방문, 포트워스 한인 성당 미사가 있었습니다.
냉탕과 열탕을 오가듯이 실내는 에어컨의 힘으로 서늘한데,
바깥은 따가운 햇볕이 강해서 목감기도 찾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 더하기 일’의 정답을 ‘너무 신남’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일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겁고, 아픈 사람이 위로를 받고,
힘든 사람이 용기를 얻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이고,
이렇게 일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일 더하기 일’은 ‘너무 감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사람 만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원고 교정하고, 신문 홍보 다니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도 팬데믹 때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 더하기 일’의 정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적당한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
긍정적인 생각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 사람,
이웃을 위한 봉사와 나눔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삶이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웃을 도우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불규칙적인 식사와 지나친 음주를 하는 사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 게임과 노름에 빠진 사람,
자신만 알고 나눔에 인색한 사람은 삶이 고달프고, 불행합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은 물론 이웃에게도 걱정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늘 감사하는 사람,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신앙생활에도 사랑의 꽃이 피고, 믿음이 열매 맺습니다.
시련 중에도 희망의 등불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영적인 독서를 자주하고, 미사참례를 꾸준히 하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단체 활동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아서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 단체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유혹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많은 책을 남겨 주었습니다.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은 초기 가톨릭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분명 시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핸드폰에 일정표가 있고, 약속이 잡혀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 가지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의 시간, 위선의 시간, 탐욕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텅텅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평가하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난하는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와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어도 하나의 숲을 이루는데
왜 우리는 하나의 숲을 이루지 못하나!’
우리 안에 있는 시기, 갈등, 질투, 욕망, 원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숲을 이루어야 합니다.
희망의 시간, 믿음의 시간,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하시면서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7~28절)라고 하신다.
의인들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다.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의 몸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무덤은 닫혀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무덤을 열면 그 광경은 참혹하다.
위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실체를 모르면 모두 칭찬받을 만한 이들로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모습은 역겹다.
위선은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이 아니다.
이것은 의로움을 가장한 모든 것은 죽은 것이며, 의로움이 아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때문에 거짓으로 행하는 덕은 죽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이 아니면서도 그 사람과 똑같이 하는 배우들과 같다.
이런 사람들은 속은 죽은 이들의 뼈로 가득 찼지만,
겉으로는 의로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겉만 아름답게 보이는 회칠한 무덤이 된다.
회칠한 무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경고이다.
그렇게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참사랑이 담긴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자세를 항상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겉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속이 썩어있다면 그것은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는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원하시지, 죽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그래서 주님의 참된 영광이 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것은
그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식들로 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31절)
그들은 결국 똑같이 사악한 짓, 아니 훨씬 더 사악한 짓을 벌이려고 한다.
그들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다.”(사도 3,15) 그리고 사도들까지도 죽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32절) 하신다.
우리는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올바로 따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제 생각에 진짜 불행은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거나 더 나아가 행복한 줄 알고
계속 그렇게 살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불행을 키워왔음을 알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세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고,
호의호식에 떵떵거리던 권력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불행한 줄 모르고 살면 불행합니다.
저는 불행한 줄 모르고 행복한 줄 아는, 이런 행복을
<행복 착각> 또는 <착각 행복>이라고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인생이 이런 착각을 하며 삽니다.
이런 착각이라도 없으면 살기가 힘드니까 착각을 하는 것이요,
불행하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하는 소박한 행복을 살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불행은 불행일지라도 소박한 불행일 것입니다.
속으며 살고 속아서 산다는 사람에게는 인생이란 어차피
이런 소박한 행복과 불행을 살다가 가는 거지 뭐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런 불행에 대해서는
오늘 바리사이에게처럼 그렇게 거창한 불행 선언을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만일 그러신다면 소 잡는 칼로 파리 잡으시겠다는 식이 될 테니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불행 선언을 하시는 것은 소박한 불행이 아니라
남을 불행에 빠트리고 예언자를 죽이는 어마어마한 죄악의 불행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비판하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조상들이 죽였던 예언자들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며
자기들은 조상들과 다르다고 착각하지만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인데
사실 옛 예언자가 아니라 지금의 예언자,
그것도 나에게 예언을 퍼부어대는 예언자를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래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하느님의 사람인데,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왜 파견하시겠습니까?
하느님 계명을 잘 따른다면 왜 파견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언자는 하느님 계명을 어기는 자들,
특히 종교 사회 지도자들에게 파견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잘못을 꼬집으니 좋아할 리 있겠습니까?
다윗과 같은 사람이라야 즉시 그것을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회개하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개뼉다귀처럼 여기는 예언자들이 하는 개소리라고 여기지요.
사실 우리 삶에도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하면 예언자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언자처럼 거룩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 눈에 그야말로 개뼉다귀같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예언자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고,
그런 사람을 고마워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개뼈다귀 같은 사람이 하는 쓴소리가 개소리가 아닌
하느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 곧 예언이 될 것입니다.
저도 머리로는 이것을 압니다.
그리고 억지로 그 예언을 받아들이기는 하고,
적어도 예언자를 죽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예언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고마워하는 데까지 아직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바리사이들을 보면 이런 점을 반성합니다.
너무 늦게 일어나 새로운 강론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왜 자녀는 미운 부모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여자 주인공 테레자는 어머니를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어머니와 닮은 남자를 사귑니다.
어머니는 외도 하는 것을 딸에게 자랑할 정도였고 테레자를 무시하였습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비슷한 바람기가 있는 의사 토마시와 사귑니다.
토마시도 자기 내연녀인 사비나에게 테레자를 소개할 정도로 사랑을 가볍게 여깁니다.
어쩌면 테레자가 토마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둘이 반씩 양보하는 상황이 됩니다.
토마시는 결혼을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테레자는 자신도 외도하면서 토마시에게 미안함을 갖습니다.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습니다.
부모를 원망했지만, 결국 부모를 닮아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부모를 싫어하면서도 부모를 닮거나 자기가 싫어하는 부모와 같은 배우자를 만나는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태도에서는 분명히 부모 중 한 명과 경쟁을 하게 됩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어머니보다 우월해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해 그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고 믿는 딸은
자신도 술주정뱅이와 결혼해 어머니보다 잘사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누군가를 심판하면
이제 나는 그 누군가와 경쟁 관계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속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그들이 조상들을 비난하며
여전히 그들의 조상을 자기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조상들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조상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조상들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비난하며 부모처럼 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아예 그 족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족보를 주러 오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는 ‘새로 태어남’이 새로운 족보에 들어옴과 같습니다.
영화 ‘오블리비언’(2013)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지구인을 위해 외계인과 싸운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를 만든 것이 외계인이고 그는 지구인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겉은 지구인이지만 조상은 외계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안의 조상을 모시고 삽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 대로 삽니다.
만약 ‘진화론’을 믿는다면 우리 조상은 누가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원숭이를 비웃지만, 실상 사는 것은 원숭이와 다름없이 비윤리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가 되고 싶은 전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참으로 착했지만, 소풍 가는 날 개울을 건널 때는
자신이 개구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영을 할 수 없는 전갈은 자기를 태우고 가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고 자신도 죽습니다.
자기 조상이 전갈이라고 믿으면 아무리 자기가 전갈의 조상들을 비난하더라도
그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개구리처럼 온순하여지려면 그냥 개구리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맞서서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그 부모의 수준밖에 안 됩니다.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려면 인간을 비판하며
그 비판하는 인간들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 결심해도 소용없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다른 부족한 면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조상으로 여기면 그들을 비난해도 그들의 습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갈비뼈로 탄생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냥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면서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신이 신처럼 살지 못하는 것만 보이며 인간의 죄의 습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비난하는 것으로는 절대 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23, 27.29)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휴가 때는 수도원에서 먹던 음식과 다른, 색다른 음식을 먹게 되지만,
사실 맛있는 음식도 한두 번 이면 충분하더군요.
그런데 며칠 동안 계속 외식만 하다 보면 질리는 것처럼,
지난 토요일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에 이어 오늘까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내용을 듣다 보니 별 감흥이 없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도 어제에 이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겉과 속이 다름으로 인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행위를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외적인 행위보다 내적 지향(=동기)을 더 강조하셨지요.
예를 들면, 진복팔단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5,8)하는 말씀을 통해서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라는
말씀으로 강조하신 것은 사람의 안(=생각과 지향, 내적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
본인과 이웃과 세상을 오염시키는 요인이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정결 예식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
즉 컵과 그릇은 닦는 것보다 먼저 잔 속(=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외적 행동)과 속(=내적 동기)이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기에 그런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회칠한 무덤이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골에 있는 무덤들을
사람들이 즉시 알아보고 우발적으로라도 무덤을 만지지 않도록 회를 발랐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에 닿게 되면 의식상 부정하게 되어
기도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풍습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호칭한 한 까닭은,
회를 칠함으로써 무덤의 겉이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실상 그 속은 썩은 것으로 가득 차 있듯이,
그들도 겉으로는 의로운 사람같이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저는 모든 과일을 좋아하지만 어렸을 땐 이상하게 수박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제게 왜 수박을 좋아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면,
수박은 겉과 속이 달라서 싫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벳남에서 살면서 벳남 양성자들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가장 싸고 흔한 게 수박이다 보니 그때부터 수박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나이 들어가면서 체질이 바뀐 까닭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체질적으로도 그랬지만, 아무튼 어렸을 때 겉과 속이 다른 수박을 저는 좋아하지 않았고,
그러기에 저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참사람이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언행일치言行一致하는 사람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2테3, 7-10)
삶을 통한 가르침보다 더 강력한 모범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 안에서는 자기 소임에 충실하지 않고
무질서(=게으르게)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을 걸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강하게 질타하였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말합니다.
“우리의 선조들과 사도들이 그랬듯이 직접 손으로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진정한 수도사라 할 수 있다.” 라고.
그래서 성인은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시고,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 Ora et labora”는 모토 아래
일과 기도의 균형 잡힌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성인은 단지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우신 것만이 아니라,
노동이 분열을 조장할 수 있는 위험성도 일찍부터 깨달으셨기에
노동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강조하였습니다.
곧, “그 어떤 것도 예배보다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하고 일갈하셨습니다.
결국 명상하는 삶은 노동하는 삶으로 인해 지탱되며,
다시 말해 인간의 모든 행위는 내적 성찰에 의해 심화된다, 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와 노동이 함께 있는 곳에서 비로소 인간은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의 핵심이며, 영성의 본질이다, 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13세부터 조그만 공장에서 청소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전 7시에서 오후 1시까지 일하고, 점심 식사 후 학교에 가서 저녁 8시까지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내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노동하면서 나는 인간의 노력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 손으로 벌어먹을 수 있도록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을 심어주셨으니 찬미하옵니다.
오늘도 제게 주어진 소임지에서 제게 주어진 소임을 충실히 행함으로써
당신의 영광과 저의 구원을 위해 힘써 일하게 하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