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기준이 되는 금본위 제도와 기축 통화 화폐의 역사를 보면 아래와 같다.
금속은 다른 물질에 비해 강도가 강하며, 마모의 위험이 적고, 부피가 작아서 화폐로
각광을 받았다. 그 중에 금과 은이 가장 화폐로서 애용되었는데 고대에 만들어진
금괴나 금반지중에 그 품질이나 크기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주화는 금의 무게를 재고 순도를 확인하는 지겨운 작업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독창적인 발명품이였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럽 및 近東에서의 은의 가치는 금의 5~8%였다.
로마제국의 주 통용 화폐는 은화였다. 아우구스티우스는 1 아우레우스(금화 7.8그램) =12 데나리우스(은화 3.9그램) = 100 세스테르티우스(동화27그램)으로 화폐제도를 정하였다.
금과 은의 교환비율은 12.5대 1 이였다.
그 후 로마제국이 쇠락해지면서 여러 황제들이 데나리우스 은화의 은 함량을 낮추었다.
그로 인하여 인플레가 발생했는데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는
동로마제국은 베잔트 금화를, 과 이슬람 제국은 디나르 금화를 발행하였다.
1252년 유럽의 금 가격이 은 가격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낮아지자 제노바는
제노비노(혹은 제노인)라는 이름의 24캐럿짜리 금화를 발행하였다. 이 주화의 무게는
3.5g으로 콘스탄티누스가 처음 만들었던 베잔트 금화보다 1그램 모자랐지만,
24캐럿이라는 순도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작용했다.
제노바에서 금화를 만들자 피렌체에서는 플로린 금화를, 베니스에서는 두카트 금화를
만들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만든 마르크 은화 등 여러 종류의 화폐가 유럽에서 쓰였지만 베니스의 두카트 금화가 등장한 후로는 두카트 금화가 유럽의 대표 통화로 자리 잡았다.
1202년 베니스의 단돌로 원수는 제4차 십자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로소 디
아르젠토'라는 은화를 만들었다. 흔히 대은화라고 불렀다. 지름은 22밀리미터.
무게는 2.18그램. 순도는 0.968이였다. 이것은 이후 300년간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동 지중해의 유통화가 되었다.
1284년 베니스는 두카토 금화를 만들었는데 무게는 3.56그램. 순도는 0.997이였다.
1797년 베니스가 망할 때까지 그 순도가 유지 되었다. 1328년 두 화폐의 교환비율은
'1 두카트 = 24 대은화'로 고정 되었다. 금 대 은의 교환 비율은 14.7대 1이였다
두카트 금화는 순도가 정확하고 상업 강국이자 신용 강국인 베니스(베니스의 국채는
단 한번도 이자 지급이 연체 되거나 지급 거절 된 적이 없다)가 제조하였기 때문에
스페인,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등 타 국가끼리의 금전거래도 당사국의 통화가 아닌
두카트 금화로 이루어 지는 경우가 많았다. 명실상부한 최초의 국제통화였다.
11세기 초 1023년 北宋 때 민간에서 이용되던 어음을 참고로 정부에서 교자라는
지폐를 발행했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의 지폐로 추정된다. 당시 주화가 무거워 교역
및 운송이 어려웠기 때문에 발명 되었다.
교자의 발행은 새 지폐와의 태환방법, 액면 단위 등 필요한 내용이 규정되어 정기적으로 발행이 가능토록 했으며, 3년이 지나면 새 지폐와 교환 할 수 있었다. 정부발행 첫해의 발행액은 388만 4600관이었고, 그 후 남발의 결과로 신용을 상실하여 1122년경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는 18세기에 들어 은행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은행이 고객에 대한 대출금을 약속어음 형태로 지불하는 것이 관례화 되었다. 다양한 화폐단위로 표시되어 있으며 위조를 막기 위해 투명무늬가 새겨진 이 어음은 화폐로서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유통되었다.
1694년에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어 첫 대출로 정부에 120만 파운드를 빌려주었을 때, 이 금액의 일부는 잉글랜드 은행의 은행권 형태로 정부에 지불되었으며 정부는 이 은행권을 이용해서 루이 14세와 싸우기 위한 전쟁의 보급품을 사들였다.
이 은행권들은 기업 사이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돈처럼 유통되었다. 지폐가 금속으로의 兌換性은 곧 그 지폐의 가치를 대변했는데, 미국에서는 그린백이 등장할 때까지 수 천종의 은행권이 거래되었으며 그 액면가치와 교환가치가 같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헨리 손턴이라는 영국인이 지폐의 금 교환 비율이 변경 되었을 때의 문제점을 제기하였고, 영국의회가 지폐의 액면가가 변경 될 수 없음을 법으로 규정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종결 6년 후인 1821년 잉글랜드 은행권과 금을 교환하는 兌換性이 회복되면서 금본위제가 확립되었다. 세계 다른 나라들도 그 후 거의 100년 동안 영국의 이러한 제도를 모범으로 삼았다. 자국의 화폐를 가지고 오면 언제든지 해당하는 금으로 바꾸어 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재산축적을 위한 금의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리고 이때 재산
추적을 위해 금을 원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중앙은행들과 미국 재무부 등이었다.
금을 비축해두는 것은 투자자본의 갑작스러운 유입이나 다른 금융 센타로의
갑작스러운 유출에 대비하기 위한 중요한 방어수단이었다. 경제활동과 국제 무역 및
투자가 엄청나게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금을 비축하는 것은 국가가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고 새로운 자본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창구에 와서 금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즉시 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은 “안전한 돈”과 “안전한 은행”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http://cafe.daum.net/saju1472/D5Ch/236
첫댓글 13세기 베니스의 경제적 지위가 상당했군요. 그들의 금화가 무려 500년간 유럽의 기축 통화로 쓰였다니, 정말 놀라운 사실이네요.
요즘 경제,통화 에 관련된 이야기가 자주 올라오네요. 최근 관심이 생겨서 좋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경영학에서는 주로 마케팅, 조직관리를 가르치죠. 그래서 지방대 경영학도들은 특별히 관심같지 않는 한 저런 내용은 잘 모를겁니다. 하지만 흥미를 가지고 경제학에도 관심을 가지면 의외로 쉽게 이해가 되더군요. 저도 회계학 전공이지만 어느날부턴가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책도 여러권 읽게 되다보니 대충 감이 오더군요.
경제학의 장점이자 단점은 아직도 완벽하지 못하다는 점에 있지요. 이미 확립된 학문을 습득하기 보다는 아직도 여러가지 이론들이 나오는 점이 바로 경제학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케인스 이론같은 경제학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건지, 어느정도 논의가 되었던 건지 궁금한데 알고계신분 있나요?
케인즈 이론은 수정자본주의라고 하며 기존 고전학파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부정했죠. 시장의 자율성을 중시하던 아담스미스의 이론이 경제대공황 이후 의심받기 시작했을 때 시장은 완전하지 않다며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게 케인즈 학파입니다.
읭? 보이지 않는 손=시장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가격 형성입니다. 이걸 근본적으로 부정하면 자본주의라 할 수 없어요;;;; 다만 극단적 방임주의에 대해 국가의 적극적인 통제와 참여를 요구한다는 것이 획기적이긴 하지만;
오르쿠트//가격형성에 대해.... 그건 아닙니다. 시장논리식 가격설정론이라면 우선 공급곡선과 수요곡선이 만들어져서 가격이 설정되는겁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거 하나. 물건이 '안팔렸는데' 수요곡선이라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가격형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경제학분파들에 따라 이야기가 틀리죠. 우선 고전학파와 신자유주의 계열은 수요공급곡선을 이용하며 맑스쪽은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네오케인지언들은 역사적 가격설정론과 독점가격설정론을 사용하지요.
또한 그 보이지 않는손=시장논리.. 이것도 정확히말해 보이지 않는손=시장의 '균형'논리지요. 애시당초 케인즈와 그 이후 네오케인지언들은 이 '균형'을 그다지 신봉하지 않습니다. 설령 이 균형이 생성되더라도 그 균형점은 최상의 결과가 아닌 차상의 결과나 그 밑의 결과가 나온다고 하지요. 따라서 최상점을 찍기위해서는 적절한 제도와 참여가 필요하다고 하는것이 네오케인지언입니다.
아담스미스는 시장에 맡겨두면 알아서 '이기적 경쟁심'에 의해 저절로 잘 돌아간다고 했죠. 물론 "완전경쟁체제"하에서 말이죠. 하지만 국부론에선 완전경쟁체제는 불가능하니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언급했으나 위정자들은 그말은 쏙 빼놓고 무조건 시장의 자율성만 강조했습니다. 그게 처음엔 그럴듯해 보였는데 대공황이 오게 되니깐 사람들이 이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 때 혜성처럼 등장한게 케인즈 학파였습니다. 완전자율방임시장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정부가 적절히 컨트롤 해줘야 한다는 말이죠.
백숙의왕//케인즈이론계통의 시작은 독일역사학파로부터 비롯됩니다. 19세기 초, 영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고전학파에 맞서 독일같은 후기발전국가는 국가에서 어느정도 시장을 조정해야 한다는 이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이 미국의 초기제도학파인 베블런과 커먼즈를 거처 케인즈에 이르러서 케인즈학파인 수정자본주의로 형성이 되지요. 물론.... 맑시즘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흠. 그렇군요. 역시 경제학 쪽에는 더 공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캐리어님의 말씀에 덧붙이자면 원래 아담스미스는 경제학자(당시는 경제학이라는 단어도 없었음 ㅋㅋ)가 아닌 철학자였습니다. 도덕정조론등을 비롯한 그의 저서에서는 자본가의 윤리에 대한것도 나오나... 이런것들이 쏙 빠진채로 마셜, 왈라스, 하이에크를 거치며 자유시장주의로 정립되지요. 그전 고전경제학... 즉,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가치론도 있었던 만큼 실제로 신고전학파와 고전학파의 경제학은 좀 다릅니다.
우와~ Roiche님 내공이 대단하시군요. 저도 아직 관심을 갖고 배우는 중이라 내심 조마조마하거든요 ㅎ 아담스미스는 영국 국세청 공무원이었다고 하네요 ㅋ
아니.. 저는 이걸로 밥먹고 사는지라... ^^; 오.. 국세청 공무원이라.. 그건 몰랐네요. 하긴 국부론 안에 조세론도 있으니까 역시 경험인걸까요? ㅎㅎ
답변 감사합니다. 질문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많은것 같지만 상관없뜸.
Roiche//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유물론과 케인즈의 저서들을 비교해가면 읽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읽기쉽게 나오는 책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학교도서관에서 하품꽤나 날려가며 읽던 기억이 나네요...
케인즈는 알프레드 마샬의 제자입니다. 물론 제도적 접근을 통한 논의가 그쪽에 영향을 아예 주지 않은건 아니겠지만 엄밀히 따져볼 때 케인즈주의는 1차 대전으로 인해 정부의 경제통제능력이 크게 발전한 것에 기인합니다. 이건 케인즈가 재무성 관리로 일한것과도 관련이 있겠죠. 아무튼간에 케인즈가 제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근거는 상당히 낮으며 오히려 기존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고 보는게 보다 올바른 관점이겠지요.
동로마 제국의 베잔트 금화는 처음 들어 봅니다만... 일반적으로 비잔티움의 기축 금화는 노미스마 화페이고, 후기로 제국이 망가져 가면서 순도가 낮아진 히페르피론금화를 썻다고 알고 있습니다.
베잔트라고부릅기도합니다. 원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제국시절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솔리두스를 창안했고 이게 그리스어로 돈인 노미스마로써 만지케르트 몰락후 미카엘 7세의 경제말아먹은 파멸적인 정책전까지. 멀리로는 중국과 초원지대의 부족에게 유럽전역과 중동에서 쓰인 국제통화엿습니다. 중세의 달러라고 하지요 ^^ 미카엘 7세가 망가뜨린 경제를 후대의 알렉시우스 1세가 다시 화폐개혁을 하면서 "히르페리온을 새로이 찍어내 다시금 비잔티움의 경제적위상을 세웁니다. 4차십자군이전까지 제국은 맛탱이가 갓어도 당대 유럽국가중 부유했던 강대국이였습니다
심지어 본문에서 나오는 저 디나르도 초기에는 동로마제국령토의 조페소를 접수한뒤 거기 보관된 황금을 가지고 버젓이 비잔티훔황제들의 얼굴이 새겨진 금화를 찍어내다가 디나르를 새로이 만든것이지요. 디나르도 금화로써역활을 충실히했지만.오히려 금화에경우비잔티움의 베잔트가 더 높은위상을 차지했습니다.
흠흠.. 노미스마 금화가 베잔트 금화라고 불리우기도 하는군요. 히페르피론이 그정도의 순도를 유지했을줄은 몰랏네요. 좋은거 많이 배우고 갑니다.
그리고 베네치아 두캇말고도 플로렌스지방에서 찍어낸 플로렌도 꽤 높은위상을 차지한것으로압니다. 애당초 금화의 위상이 가장높앗고 유명세를 오래 떨친것은 비잔티움이고 그뒤에 유럽과 중동에서 찍어낸금화들은 모두 이 베잔트를 본뜬 모조품들에 지나지 않았던것이지요 .애당초 금화를 오래도록 찍어내고 금화를 가지고 경제를 오래도록 돌린국가는 비잔티움이였습니까요
오오.. 저는 비잔티움에 대해서 아는게 없고 그저 대도시 하나만 지키다가 이슬람에 의해 서서히 몰락한 나라라고만 생각했는데 제법 역량있는 강국이었나 보군요. 그러고보니 베네치아가 4차 십자군원정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급부상한걸보면 굉장히 부국이었나봅니다.
'달러'라는 책을 봤는데 달러 들고 FRB에 가도 치환 안해준다는데 사실인가요? FRB와 유럽 자본가들을 엄청 까던데..
'금'태환을 말씀하시는건가요? 현재는 금본위제가 아닙니다. 70년대에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서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신용법정화폐 제도로 바꿉니다. 1달러당 금 몇 온스가 아니라 현재는 1달러는 미국의 국채 1달러에 해당합니다. 금융재벌들이 이뤄놓은 작품이지요. 그들은 달러를 발행하는 댓가로 엄청난 이자수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감사..
제가 알기로는 프랑스가 천조국에게 대들었다가 천조의 분노로 그렇게 변했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이번에는 중국이 채권을 가지고 대들면 어떻게 하고 궁금하긴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