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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게 뭔가를 궁리하는 척하던 장추삼은 침상의 안온함에 모든 고뇌를
잊고 공자님을 만나는 것으로 그날의 저녁을 대신했다. 밖에 나갔던 유한초
자가 방문을 열기도 전에 코고는 소리로 그의 상태를 짐작했을 정도였다.
역시... 머리를 굴리는 건 그와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저녁도 거르고 청한 잠이니 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은 뻔한 노릇. 의도야
‘공자님 알현’이었지만 장추삼이 맞닥트린 상대는 온갖 마물에 식충이
귀신이었고, 새벽녘에 깬 그를 제일 먼저 반긴 건 뱃속에서부터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쪼르륵 소리였다.
‘왜 배가 고프지?’
보통 어중간한 시간에 잠이 들면 낮, 밤이 혼동되는 경우가 많고 잠들기 전
일들이 마구 뒤엉키곤 한다.
‘얼레, 왜 깜깜한 거지?’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가 어제의 일들을 가까스로 정리하
고는 입을 떡 벌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보처럼 또 반나절을 그냥 날려
버렸잖은가.
이런 식으로 보내버린 하루...
‘이럴 때가 아닌데 정말 뭐하자는 거냐. 장추삼아, 장추삼아, 네놈은 진정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살기는 하는 거냐. 아니면 머리에 똥만 잔뜩 들어있는
동물인거냐.’
회한의 자책에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였는데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
가에 묘한 사선을 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늘 그러하지만 진지
한 얼굴로 일각 이상을 버틴다는 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좋게 말해서 낙천적이고, 직설적으로 꼬집는다면 대단히 자아도취적 경향이
있기에 나쁜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좋게 보려고 노력하는 것... 이 아니라
나쁜 일 자체를 좋게 만들어버리는 순발력이 발동하기에 그에게 있어서 안
좋은 사건은 금새 모양을 바꿔 버린다.
‘맞아! 해 다 떨어져서 남정네가 할 일 이라곤 기껏해서 술이나 홀짝이는
게 다가 아닌가! 아마도 잠이라는 도피처를 무의식적으로 이용해서 그런 사
악한 자리를 피한 걸 거야. 음, 역시 난 대단해!’
이쯤 되면 중증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지만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지장
은 없으니 뭐라고 하겠는가. 남에게 피해주는 일은 없으니.
천천히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며 장추삼이 빙글 돌아섰다. 그의 얼굴엔 누
구도 범접하지 못할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기에 떠오르는 태양도 빛을 잃을
듯 했다.
‘지난 일에 연연하는 건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 했지. 오늘에 최선을 다하
는 거야! 그래, 그래야 하고말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을 격려하던 그가 문득 끄덕이던 고개를 멈추었다.
‘음...’
뭔가를 하려고 해도 너무 이르다. 이런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단 한 가지.
‘잠시 후를 위한 충전의 시간을 갖자! 괜히 마음만 조급해서야 뭘 하겠는
가!’
침상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늘의 자신은
평소와 다를 거라 다짐하면서.
“이보게, 해가 벌써 중천일세. 어서 일어나게!”
“우웅...”
“젊은 사람이 이렇게 잠이 많아서야... 어서 일어나래도!”
“음냐...”
“도대체 몇 시진을 침상에서 허비하는 게야!”
장추삼을 흔들어 깨우던 유한초자의 얼굴에 슬슬 노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고 하지만 본시 그는 게으른 인간을 혐오하고,
잠으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을 경멸한다.
거기다 젊은 놈이 이런 꼴을 보이는 건 참지 못한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한
후라면 몰라도 며칠동안 사람이나 만나고 다는 게 전부인 주제에 뭐 큰일이
라도 한 사람마냥 이리 빌빌거린다는 건가.
그의 하얀 눈썹이 역 팔자를 그리고 뭔가 무시무시한 일갈을 터트릴 준비를
하는데 느닷없이 벌떡 상체를 세운 장추삼이 놀란 토끼의 눈이 되어 유한
초자를 멀뚱멀뚱 응시했다.
“어? 지금 몇 시야?”
“몇 시긴! 저기 태양의 위치를 보게! 오시(午時)가 지나도 한참을 지났단
말이네 얼마나 잠을 자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아따, 성질하고는... 엑, 오시!”
툴툴거리던 장추삼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오시라니, 잠시 눈을 붙였다
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세시진 하고도 반시진이 후딱 지나가 버렸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아아, 난 안돼! 난 안돼!”
마구 자기의 머리를 쥐어박던 그가 갑자기 손가락을 꼽아 뭔가를 세어보기
시작했다. 이런 장추삼의 엉뚱한 행동은 그야말로 예기치 못했기에 뭐라 말
하려던 유한초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옆에 섰다.
연신 뭐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고 손가락을 꼽던 장추삼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젖히자 다가서던 유한초자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누구나 발
작하는 인간을 좋아할 리 없고 그건 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무슨 일이기에...”
“세상에! 이럴 수가!”
꼽던 손가락을 꾹 쥐고 부르르 치를 떨던 그가 유한초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음?”
대단히 열 받은 얼굴, 아마도 흘려보낸 시간에의 안타까움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나보다. 조금은 기분이 좋아진 유한초자가 사람 좋게 웃으며 장추삼
의 어깨를 두드렸다. 모름지기 이럴 땐 다독여줘야 한다.
‘하여튼 젊음이란...’
사실 장추삼을 그리 젊다고 보긴 어렵다. 흔한 말로 첫사랑에 성공했더라면
아이가 벌써 사서오경을 줄줄 꿰고 있을 나이였고, 어딜 가도 ‘이봐, 총
각!’ 따위의 접대성 부름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유한초자의 눈엔 마냥 어려 보였고, 어쩌면 젊다고 불러준 것도
그로서는 많이 배려한 걸지도 모른다.
“괜찮네, 괜찮아. 비록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부터 서두른다면 오늘
할 일은 충분히...”
“지금 그게 문제요?!”
꽥 소리 지르는 통에 점잖게 충고하던 유한초자가 비틀 몸의 균형을 잃었다
. 여태까지 수면으로 축적해두었던 힘을 성대를 통해서 모조리 발산하려는
걸까?
여기서 한걸음만 더 간다면 사자후(獅子吼)가 따로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 심통 맞은 녀석의 분노는 어디서 기인한 걸까?
“무, 무려... 아홉 시진... 아홉 시진동안...”
부들거리며 손가락을 아홉 개 꼽고 손을 쳐든 그가 다신 한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속에 비통한 무엇이 담겨 있어서 노련한 유한초자도 얼른 내용
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장추삼의 외침은 절절했다.
“아홉 시진동안을 한 끼도 먹지 못했다니! 어찌 이러고도 사람의 삶이라
하겠는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강아지나, 진흙으로 목욕을 하는 돼지
라도 이보다는 나은 복지를 누릴 거야!”
머엉~
대단한 분노의 원인은 그저 굶주림이었다는 건가?
“제기랄! 하필 오늘 같은 날에 꼭 이런다냐! 에휴~ 그저 나란 인간은 죽어
버리는 게 나...”
“듣던 중 옳은 소리로군.”
“예?”
쓸쓸한 독백으로 장황한 한탄을 마무리하려는 그의 말을 자르며 유한초자가
맞장구를 쳤다. 누군가가 자신의 얘기에 호응을 해 줄 때처럼 기분 좋은
순간이 어디 있을까 만은 그가 뱉은 말의 의미는 맞장구를 즐기기에 썩 좋
은 내용이 아니었다.
“차라리 죽어버리게.”
냉정하게 한마디 던지고 횡 하니 나가는 유한초자의 뒷등을 보며 볼이 불룩
해진 장추삼이 입술을 꼼지락거렸지만 차마 입을 떼지는 못했다. 제가 한
말이니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쪼로록...
아무것도 모르는 뱃속은 무던히도 자신의 처지를 표출하고 있었지만 장추삼
은 바로 일층의 식당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벌떡 일어선 그가 한 일은 급하
게 세수를 하고 자신의 짐 꾸러미를 뒤지는 일이었다.
“분명 엊그제 사두었는데 이게 어디 있지?”
중얼중얼 푸념을 늘어놓으며 짐을 뒤지던 그가 반색을 하며 꺼내든 물건은
놀랍게도 동경(銅鏡)이었다.
세상에 동경이라니!
깔끔을 떠는 편이긴 하지만 거울 따위를 보며 얼굴 가꾸기에 연연하는 화화
공자(花花公子)와는 거리가 먼 장추삼의 손에 동경이 들린 건 누가 보아도
희극적인 것이었으나 정작 본인으로는 별로 우습지 않은 듯했다.
아니, 숙연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조차도 어떤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경건해 보였다.
“푸석푸석하지는 않구나. 그나마 다행이야.”
낮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정갈하게 옷매무새를 다듬은 장추삼이 목을 한번
우드득 소리 나게 꺾고는 양 팔을 휘휘 돌려 근육을 풀었다. 흡사 한바탕
싸우기 전의 모습과도 같았지만 누구라도 싸우려나가는 마당에 이리도 차림
새를 따지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잔뜩 긴장했다는 말인데 천하의 장추삼을 아침 - 해가 중천이니
아침이라고 말하기 뭐하지만 일어난 순간부터로 따지면 그에게는 아침이다
- 부터 이리도 굳게 했단 말인가.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가 다시 한번 거울을 들여다보고 됐다 싶었는지 자리
에서 일어났지만 목울대를 넘기는 침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질 정도였으
니 장추삼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경작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아, 밥을 먹자. 이러면 안 되지.”
손을 비벼 손바닥에 베인 땀을 닦아내며 그가 방을 나섰다. 왠지 무겁지만
어둡지는 않은 무엇이 방을 감싸고돌았지만 끝내 실체적인 느낌으로 자리하
지는 못했다.
마치 장추삼의 불안정한 상태처럼.
***
“어디 가는 건가?”
“알아 뭐하게요.”
무심한 질문에 냉랭한 응대.
둘의 대화는 벌써 한 시진가량 이런 모양새로 흐르고 있었다. 특히 장추삼
의 눈매는 먹이를 발견한 매의 그것처럼 번뜩이며 말을 거는 유한초자를 노
려보았는데 웬만한 강심장이라도 함부로 말을 붙이지 못할 분위기를 뿜어냈
다.
문제는 유한초자 쪽이었는데 분위기파악을 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웬만
한 강심장을 능가하는 심장을 가지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거의 살기에 가까
운 장추삼의 기세를 받으면서도 이것저것을 툭툭 물어왔다.
“알아서 뭐하냐고? 자네는 어디 갈 때 어디 가는지도 모르면서 어디 가나?
천하의 바보라도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네.”
찌리릿!
섬광처럼 타오르는 눈빛? 아무튼 그런 거랑 비스무리 했나보다. 태평하게
말을 붙이던 유한초자가 장추삼의 눈을 슬쩍 피하며 딴청을 부린 것은 그가
발산하는 짜증성 살기 때문만은 아닐 테니.
터덜터덜.
아무리 넉살좋은 사람이라도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라 유한초자도 곧 입을 다물고 말없이 장추삼의 뒤를 쫓았다. 어디로
가는지 말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목적지는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귀찮은 건 죽도록 싫어하는 녀석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배회하거나 하지
는 않겠지. 뭘 어쩌려는지 몰라도 일단은 그냥 따라가 보자.’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처음에는 생각한대로 암 말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지만 마냥 걷기만 하기
를 반시진이 넘어가자 슬슬 갑갑하기도 하려니와 심술로 중무장한 동행이
뭘 꾸미려는지 궁금해져 - 궁금하기야 처음부터 궁금했다 - 아니, 궁금증이
증폭되어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누구... 만나나?”
“계속 옆에서 그럴 거면 차라리 객방에 가라니까 자꾸 귀찮게 그러네!”
‘비싸게 굴긴.’
기분 나빴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이 말을 해주지 않으니 별 도리가 없
다.
치사하게 아까의 핀잔을 이런 식으로 앙갚음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이 드
니 더럽고 아니꼽지만 그걸 가지고 한마디 했다간 어떤 식으로든 발작을 할
놈이란 걸 잘 알기에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사내자식이 쫀쫀하기는!’
“지금 날 치사하고 쫀쫀한 놈이라고 생각했죠?”
‘헉!’
정곡을 찔리면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이라도 순간적인 당황을 어떻
게 처리하지 못한다.
하물며 마음속이라도 사람에 대한 욕일 경우에야!
능구렁이라도 울고 갈 노련미의 유한초자였건만 장추삼의 한마디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입을 떡 벌리고 버벅이는 노인을 무심한
눈으로 한번 보고 고개를 돌린 그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괜히 불안해진 유
한초자가 횡설수설 떠들기 시작했다.
“아, 아니야! 노부가 왜 자네를 욕하겠나?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거고 대
답을 안 해주니까 조금 답답했을 뿐이라네. 정말이야! 아주 조~금 답답했었
다고! 그래서 얼굴이 약간 굳어졌던 거야! 괜한 오해는 하지 말게!”
그 왜 있지 않은가. 뭔가 잘못을 들켰을 때 야단맞지 않으면 도리어 불안한
심리.
평소의 장추삼이라면 난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콧방귀 한번이나 사람 속을 벅
벅 긁는 비꼼으로 반드시 응수를 할 텐데, 그래야 정상인데 이런 반응이라
니.
“어허험!”
그래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유한초자의 불안감은 눈 내린 비탈길에 굴려놓
은 돌 마냥 새록새록 커져 입을 떼기조차 어려워졌다. 눈빛에 이은 침묵.
이 연환공격은 매우 위력적인 것이라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유한초자의 마지
막 전의를 산산이 부셔버렸다.
나이는 귓구멍으로 먹은 게 아니다. 이럴 땐 찍소리 말고 꼬리 내려야 한다.
터벅터벅.
장추삼의 발걸음은 다소 무거웠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걸 일일이 파악할 여유까지는 없었지만 적어도 유한초자에게 요 며칠간 홀
로 나다니던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 정도는 받게 해주었다.
하지만 뭘 도모하기에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건가. 오늘의 장추삼은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얼마 전에 산 새 옷으로 갈아입은 탓만은 아니다. 깨끗한 면도 때문도 아니
다. 늦은 아침 겸 점심을 하며 한마디의 말도 뱉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저
다른 거다. 이런 건 말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느낌으로 안다.
분명... 뭔가가 있다.
“어라? 역시 누굴 만나는 거였군?”
그도 그럴 것이 장추삼은 한적한 마을의 어귀에 위치한 객잔을 보더니 서슴
없이 발길을 옮겼으니까. 마침 출출하던 차라 유한초자도 반색을 하며 객잔
에 들어섰으나 곧 고개를 갸우뚱 거려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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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지 않고 뭘 하는가? 기다리는 이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인데 차나 한잔
하면서 느긋하게 기다리자고!”
“노인이나 많이 기다리시오. 이보게, 점소이!”
“예, 옛!”
손살같이 달려온 점소이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떡 버티고 서 있는 사내에게
서 돈 냄새를 맡지 못했기에 곧 고개를 돌리고 뒤따라 들어온 노인에게 거
의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서옵쇼~ 저희 동만객잔으로 말씀드리자면...”
“탕 되나?”
소리는 뒤쪽에서 들렸다.
‘탕 안 되는 객잔도 있나.’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기에 점소이는 불룩해지는 볼
을 밀어 넣으며 철저하게 접대용 응대로 사내를 상대했다. 돈만 벌면 그만
이다.
“어떤 탕을 원하십니까? 모든 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든 탕은 필요 없고 그저 최고의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줘. 영양도 풍부
하게 말이야. 전복 같은 놈도 있으면 아낌없이 넣으라고.”
‘돈도 없어 보이는 놈이 최고의 재료는 무슨!’
점소이는 불만어린 눈초리로 사내를 힐끗 보고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노인
에게 자리를 권했다. 일행으로 보이지만 옷매무새나 기타의 조건을 보더라
도 붙어야할 쪽은 노인이라고 판단해서였다.
주종관계?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누가 봐도 차이는 확실했다. 최소한
물주는 노인일거란 말이다. 비록 새 옷으로 몸을 감았다고는 해도 눈 찢어
지고 심술 맞아 보이는 청년이 학처럼 고고한 노인은 비교 자체가 무리다.
별 볼일 없는 사내가 음식을 시킨 건 아마도 입성 좋은 노인이 평소에 즐기
는 것이라 물어볼 필요도 없기 때문이리라. 주머니를 쥔 자에게 잘 보여야
떡고물이라도 떨어진다는 건 고금의 진리다.
“영양 많고 맛 좋은 탕을 시키시려 합니까? 역시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지만 저희 동만객잔의 음식은...”
이런 내륙지방, 그것도 산촌마을의 요리가 뭐 그리 괜찮겠는가? 그럭저럭
먹을 만해도 다행이지. 그래도 탕처럼 사람의 구미를 당기는 음식은 별로
없고, 유한초자역시 탕 종류를 매우 좋아하는 터라 잠자코 그렇다고 해주었
다.
연식 고개를 조아리며 주방으로 가려는 점소이의 발길을 사내가 또 잡아챘
다. 이번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싸주게. 넉넉하게 해서 싸줘.”
“예?”
“싸달라고. 여기서 먹을 게 아니란 말이야!”
언뜻 이해를 하지 못한 그가 노인을 돌아보았지만 신선처럼 고고한 주머니
도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전복? 있는 사람들에게야 전복탕 한 그릇이 별거 아닐지 몰라도 없는 집에
서 전복탕은 그림의 떡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몇 개 준비한 놈들을 넣고 돈
이라도 못 받을라치면 그야말로 큰 낭패다.
“저기...”
“저기, 뭐? 젊은 나이에 가는귀가 먹은 건가?”
다그치는 눈매가 심상치 않다. 하지만 이런데서 죽고 들어갈 점소이, 왕두
팔(王頭八)이 아니다. 지금이야 은퇴했지만 한때 이 고을에서 왕두팔이라는
석자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뚝심과 의리 그 자체였으니까.
“거, 곱게 말을...”
“나는 음식을 시켰고 자네는 주문을 받았어. 뭐가 잘못 됐나?”
맞는 말이다. 객잔에서 손님이 음식을 시킴은 당연한 일이고 그곳 점소이가
주문을 받아서 주방에 전달하는 것 또한 아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왠지
기분이 나쁘다, 매우 나쁘다.
“잘못된 건 없지만...”
“오늘만큼은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 어서 가라...”
무게 잡지도 않았다. 목소리를 깊게 깔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
분했다. 왕두팔의 본능은 어서 상황을 정리하라고 강력하게 충고하고 있었
으니까. 진짜 없어 보이는 놈이었는데 잘못 건드렸다간 경을 쳐도 크게 칠
판이다.
“사, 사실 말씀드리지 않은 사항이 있는댑쇼. 저희 가게는 선불을 원칙으
로...”
비록 살 떨리게 무서운 놈이지만 돈은 받아야겠다! 이런 흉폭한 치들은 종
종 무전취식을 하곤 한다. 아무리 한물간 이름이지만 무전취식만은 막아야
겠다!
“선불?”
세상에 선불 받는 객잔이 어디 있는가? 장기투숙이라면 몰라도 음식을 선불
받고 파는 객잔은 중원천지에 없다. 점소이의 속내가 더없이 가소로웠지만
나름대로의 소명의식을 인정한 장추삼이 유한초자에게 눈짓을 했다.
성질대로라면 사람 잘못 본 대가를 톡톡히 치러줬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만큼은!’
어리둥절하던 유한초자가 한 번 더 재촉하는 그의 고갯짓에 주머니를 열었
다. 돈을 내 주는 건 문제가 아니다. 도무지 오늘의 그는 적응이 되지 않았
고 그렇다고 딱 꼬집어서 무어라고도 하지 못하겠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돈을 보고서야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점소이. 그의 행동은 비록 사리에
어긋남은 있었지만 누구도 비난하기 어려웠다. 나름대로의 소신이고 몸으로
채득한 처세이기에 당당한 거다.
“이보게, 점소이.”
음식값만큼의 돈을 챙기고 나머지는 유한초지에게 건넨 왕두팔을 장추삼이
또 다시 불러 세웠다. 하지만 이번의 부름은 앞서의 두 번과 또 달랐다. 음
성에 담긴 정감은 숨기려 해도 드러나는 법이다.
“특별히 맛있게 부탁해도 되겠나?”
“특별히는 몰라도 맛은 있을 겁니다.”
무뚝뚝한 대답. 비록 풀이 죽었지만 점소이는 할 말을 하고 사는 사람인가
보다.
장추삼이 씨익 웃었다. 사내는 이래야 한다. 비록 힘이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더라도 제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고 늘 믿어왔던 그다. 그런 점에서
왕두팔은 사내였고 그가 점소이건 뭐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먹을 게 아니거든.”
“ ? ”
왕두팔이 문득 장추삼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고압적인 모습이 아닌
투명한 부탁. 만약 협박이나 구타로 이런 말을 했다면 맞아죽는 한이 있더
라도 응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정중한 청으로 객잔에서 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힘으로
상대를 누르려 하지 않는 자.
‘그저 무게 잡는 심술보인줄 알았더니...’
사내는 사내를 만나면 통한다. 긴말은 필요 없다.
“여기 하남, 아니 중원에서 가장 맛있고 영양 많은 전복탕 주문 들어갑니
다!”
객잔이 떠내려갈 정도로 기운차게 주문을 넣는 왕두팔의 목소리도 처음과는
다르게 온화한 미소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다다른 곳은 무슨 명문세가나 커다란 문파 같은 데가 아니었다. 어
떤 움직임을 보이고자 할 때 꼭 그런 식의 대단한, 권세 있고 살벌한 장소
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법은 없다.
그래도 여긴 좀 심하다.
‘이런 움막집에서 뭘 어쩌자는 거야?’
성도의 외곽에서 한참을 벗어난 산골마을까지 이동한건 좋은데 장추삼이 발
길을 멈춘 곳은 장정 두엇이 소리라도 칠 라면 그대로 풀썩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초가집이어서 유한초자의 어떤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걸 집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그래서 슬쩍 쳐다본 장추삼의 옆얼굴은 더 없이 진지했다. 그의 손에 들려
구수한 내음을 솔솔 풍기는 탕사발 까지도 무게감이 있어 보일 정도였다.
‘역시 저녁식사용은 아니었군. 그런데 이곳에 누가 살기에...’
“다녀올게요.”
“어?”
툭 한마디 던지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장추삼의 행동은 어찌
보면 막무가내였지만 그런대로 담백한 맛이 있었기에 유한초자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뭐라고 하건 장추삼의 입장으로는 대수
롭지 않았겠지만.
“계십니까!”
꽤 우렁우렁한 부름이었는데 화답이 없었다. 몇 번을 불러도 결과는 마찬가
지라 멀찍이서 지켜보던 유한초자가 빈집이 아니냐는 시늉을 했지만 장추삼
은 그의 손 모양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열 번 정도의 부름이 있었을까?
끼이익.
귀에 거슬리는 음향이 들리며 문이 열렸다. 거의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
로 작게 연 문틈 사이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음성이 새어나
왔다. 어지간히 청력이 좋지 않으면 듣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음성.
“누구세요?”
다소의 놀람과 꺼림.
전자는 집의 형태나 집주인의 목소리로 보아 지난 몇 년간 집을 찾은 사람
이 없었기에 의외의 방문자에게 보내는 순수한 감정이겠고, 후자는 그가 사
람이나 기타의 뭔가를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눈빛을 바라보던 장추삼이 땅이 꺼져라하고 긴 탄
식을 흘리고는 조심스레 문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흡사 깨지기
쉬운 항아리를 이고 돌다리를 건너는 듯하여 유한초자의 의문은 더욱 커졌
다.
‘저런 조심스러움이라니? 물론 집에 있는 여인네가 무림인이 아니라는 사
실은 음성으로도 확연히 알 수 있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이건 지나친 예의다.’
장추삼이라는 사내의 본성이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한 없이 유
하다는 정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악했지만 그렇다고 저런 저자세로 머리
를 조아리는 경우를 본 적은 없다.
일반인이 보기에 다소 예의범절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여서 오해를 사기 쉬
운 그였기에 가끔은 충고도 해주고 싶었지만 마음속에 담긴 잔정을 헤아리
고 있어서 그냥 내버려두던 터였는데.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긴히 뵐 일이 있어서요.”
“저를요?”
여인은 장추삼의 말에 매우 놀라 부지불식간에 힘이 실린 목소리로 반문을
했다. 그녀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뿐더러 찾아올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누군가가 그녀의 집을 방문한 적은 한번도 없다.
“누구신지...”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폐를 끼치려 찾아온 건 아닙니다.”
아연한 그녀의 표정은 장추삼의 간절한 무엇을 보고 곧 누그러졌다. 반평생
을 시장에서 사람을 상대하며 살아왔던 여인의 직감으로 들어오기를 청하는
남자의 심성이야 어떻든 악의는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들어오시지요. 워낙 누추한 집이라 부끄럽습니다.”
“그럼...”
무겁게 고개를 한번 조아리고 들어선 방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누더기 진 이불 몇 채와 장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나무상자 하나. 겁먹은
얼굴로 낯선 이를 빤히 바라보는 예닐곱 살 난 아이는 그래서 장추삼의 마
음을 더욱 저미게 했다.
‘아아...’
삼단같이 까만 머리는 숱이 많았고, 주눅이 들어 피하는 눈망울에는 숨길
수 없는 총명함이 일렁였다. 만약 함박웃음이라도 짓는다면 누구나 안아주
고 싶을 만큼 귀여운 소동(小童)의 얼굴은 경계와 호기심이 교차하고 있었
다.
경계심이라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두 주먹을 꽉 움켜쥐어 슬픔을 대신하면
서 그의 눈은 방문을 닫는 여인의 초상을 가만히 쫓았다.
헝클어진 머리는 이제 익숙해져버린 힘겨운 일상과의 타협이었고, 핼쑥하니
들어간 볼은 탈출구 모르는 다람쥐마냥 가난이란 쳇바퀴에 끌려 다닌 징표
이리라.
그렇지만 두 눈에 담긴 빛깔은 결코 절망 같이 칙칙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서 장추삼은 기뻤고, 또한 슬펐다.
초면의 사내가 보이는 격동에 진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섣불리 질문을 던지
지 않고 여인은 그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아이의 옆에 앉았다. 무의식
적으로 발동되는 모성애가 바로 이런 걸까.
“차라도 한잔 드리고 싶지만 제가 즐기지 않아서 준비하지 못했어요. 냉수
라도 드릴까요?”
“아니오, 아닙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던 아이가 코를 실룩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은
은히 퍼져 나오는 맛난 냄새의 근원을 쫓아 주위를 둘러보던 사내아이는 곧
낯선 방문객의 보따리를 보았고 입가에 흐르는 침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런 경우 못 배우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염치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덥석
물어오기 일수지만 사내아이는 검지 손가락을 빠는 것으로 허기와 식욕에
서 오는 욕구를 버텨내고 있었다.
“초면에 실례지만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여인은 그윽한 눈으로 징추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시냇가에서 빨래
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연모지정이 일어 체면불구하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면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낯선 이의 방문이라 긴장된 마음에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마주
앉으니 사내의 긴장도가 그대로 전해졌다. 보잘것없는 산골아낙과의 만남에
이리도 마음을 다잡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일단 한 가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부인의 함자가 이(李)자, 매(梅)자,
환(環)자가 맞습니까?”
“제가 이매환인 건 틀림없습니다만 공자께서 어찌 천한 이름을 알고 계시
는지 감히 여쭙고 싶습니다.”
“틀림... 없다고요...”
질문에 답할 생각도 못하고 장추삼은 고개를 푹 숙였다.
드디어 찾았다.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실체적으로 그녀는 그의 앞에서 숨
을 쉬고 있다. 또랑또랑한 자식까지 데리고 말이다.
힘들게 살았지만 자존심과 의지로 힘든 삶을 버텨온 꿋꿋한 여인과 아직 다
듬어지지 않았지만 깎아 놓으면 어떤 구슬보다도 빛날 아이가 그의 앞에 있
다. 그래서 장추삼은 한 사람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젠장, 젠장, 젠장!’
바닥을 주먹으로 후려쳐서 살가죽이 벗겨진대도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이 조
금이라도 덜어진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추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 그게 떠나보낸 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일 거다.
여인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아이를 끌어다 얼굴을 돌리게 하고 꼭 끌어
안았다. 양미간에 잡힌 주름은 어떤 일이라도 감내하겠다는 의지의 소산이
지만 가늘게 떨리는 어깨만은 진정시키지 못했다.
배가 불룩해졌다가 꺼질 정도로 큰 쉼호흡을 몇 번 하고는 몸을 일으킨 장
추삼이 놀라서 아이를 안은 손에 힘을 주는 여인에게 큰 절을 했다. 워낙
돌발적인 상황이라 손을 내저으며 뭐라고 하려는 아낙의 말은 그의 한마디
에 의해 가로 막혔다.
“장추삼이... 이제야 형수님을 뵈오.”
쿵!
“뭐, 뭐라고요?”
여인, 이매환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떠졌다.
잊고자했다. 잊혀질 거라 믿었다. 크게 성공해서 돌아오리라는 말 한마디와
언제나처럼 맑고 부드러운 미소로 집을 나선 남편은 칠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고 그가 떠날 때 아직 뱃속에서 꼼틀거리던 아이는 무심하게 자라서
어느새 여섯 살이 되었다.
한해, 두해의 기다림은 오년이 지나면서 두 모자를 지치게 했고, 기다림으
로 버티던 시장근처의 집도 늘어나는 빚에 넘긴지 오래. 이런 벽촌으로 도
망치듯 이사하면서 모질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잊겠노라고, 기억 속에서 완전히 들어내겠노라고.
그래서 아이에게도 아버지는 죽었다고 했다. 바램의 끝자락이 허무라면 애
초부터 바라지 않는 편이 낫다. 처음에 징징거리던 아이도 세월과 섞이며
서서히 깎여 어느새 체념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그런 감정을 배우기에 너무 어린 나이란 건 잘 알았지만 아이의 앞길을 위
해서 옳은 결정이었다고 믿었다. 천지에 믿고 의지할 대상은 오로지 어미와
그 자신이라고 가르쳤고 그녀 역시 아이에게 기대었다.
처음부터 세상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호북 어디에 있다는 남편의 집에 관한 얘기도 안 들은 걸로 쳤다. 더 이상
의 배신은 감당하기 어려웠고 더 이상의 실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견
뎌낼 자신이 없었기에 세상 모든 걸로부터 자신과 아이를 유리(遊離)하려했
다.
먹고 살기에 버거웠지만 마음을 정리하자 나름대로의 행복이 찾아들었다.
조금씩이나마 넓어지는 논밭의 크기와 비례해서 자리는 아이의 키는 그녀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게 모든 걸 잊고자 했는데... 이제 남편의 동생이 찾아왔다.
그래, 장추삼이라고 했다. 그가 늘 자랑스레 입에 올리던 동생은 분명 가을
추(秋)자에 석 삼(三)자의 이름을 쓴다고 했다. 그래서 낯선 사내에게서
이상하리만치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과도하리만큼 굳은 얼굴과 몸짓, 아이를 대할 때의 푸근한 미소가 모두 하
나였다.
‘그랬었어, 그랬었어...’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참아내던 이매환이 아이를 떼어놓고 일어나서
아직까지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장추삼을 지그시 바라보다 굵은 한숨을 토하
고 천천히 맞절을 했다.
“힘든 걸음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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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니, 당치 않습니다. 너무 늦게 찾아뵈어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
다.”
원래 장추삼은 이런 접대용 대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황이 되니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용어들이 팍팍 튀어 나왔다.
그렇게 서로의 예의를 차리고 잠시 동안 둘의 시선은 허공에 얽혔다. 잠깐
이라 치면 무척 짧은 시간이었고, 길다고 생각한다면 조금 지루한 시간. 둘
은 언어의 영역을 떠나서 묻고 답했다.
장추삼의 눈길에서 뭘 읽었는지 이매환이 아이를 번쩍 들어올려 무릎 위에
앉혔다. 둘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했는지 아이는 숨조차도 내쉬지 않
고 그녀의 행동에 따라 몸을 맡겼다.
“인사 드리거라. 이분이 네 친 숙부님이시란다.”
“친... 숙부님?”
아이는 멀뚱멀뚱 장추삼을 바라보다 일어서서 의젓하게 절을 올렸다. 배움
이 많지 않다고 해서 예의범절까지 없으란 법은 없다. 비록 서투른 절이었
지만 아이의 마음가짐은 여느 대갓집 자식보다 나았으니까.
“성룡이가 숙부님을 뵈어요.”
“아... 이름이 성룡이로구나.”
아이를 향해 손을 뻗다가 곧 그만두고 장추삼이 환하게 웃었다. 울고 싶었
지만 울 수가 없다. 그래서 웃었다.
“예, 별 성(星)자에 과감할 용(勇)자에요. 날래고 용감한 별처럼 살라고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놓은 이름이었다고 해요.”
아이는 아버지를 입에 올리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겨우 예닐곱 살의
아이인데 아버지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
다는 반증이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을 텐데, 그래서 그리울 텐데...
“그래, 그랬구나...”
“성룡아, 잠시 나가서 놀거라. 숙부님하고 긴히 할 말이 있구나.”
장추삼의 말을 자르고 이매환이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처음 본 숙부이기에
호기심 반, 알 수 없는 기대감 반으로 아이는 방에서 쉽게 나가지 못했다.
이매환의 제촉을 받으며 방문을 열고 나가려던 아이가 슬쩍 장추삼을 훔
쳐보았다.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한다지...’
“어서!”
장추삼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이매환이 아이를 밀 듯 내보내고 문을 닫았
다. 그리고 막아서듯 몸을 돌려 문을 등진 그녀가 한동안 어떤 행동도 취하
지 않았기에 장추삼도 방바닥만 바라보았다.
이런 시간은 정말이지, 고역이다.
“그분을 탓하는 건 아니에요...”
갑자기 말문을 연 이매환이었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장추삼이 깜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사람인데 원망은 있겠지만 미움은 없죠...”
“......”
그녀의 말은 아련한 추억이 되어 흘러간 옛 이야기처럼 방안을 데웠지만 종
착지를 알고 있기에 장추삼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리고 자신이 해
야 할 말을 이미 알고도 나지막이 미소 짓는 형수의 의연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땠나요, 그분의 마지막은...”
“아아...”
탄식과도 같은 한숨은 결코 회피가 아니었다. 수없이 염두 해 두었던 상황
이다. 할 말도 나름대로 정리해 두었고 결의도 다졌었다. 그런데 막상 형수
를 마주 대하자 그런 준비는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임종은... 지켰습니다.”
“그래요... 마지막 가는 길은 외롭지 않았겠군요...”
무뚝뚝하게 말을 받던 이매환의 눈동자에서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현실로 다가오자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이 그
녀를 휩쓸었다.
“구하지 못했습니다...”
고개를 푹 떨구는 장추삼의 앞에 이매환이 조용히 앉았다. 남편이 그리 자
랑했던 동생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감성이 풍부했으며 남을 배려
할 줄도 알았다.
“조금만, 조금만 빨리 도착했더라면...”
“거기까지가 그분의 운명이겠지요. 자책하지 말아요.”
“죄송합니...”
낮게 흐느끼는 장추삼의 어깨를 다독이며 이매환이 손바닥에 힘을 가중시켰
다.
짝!
“사내가 그리 쉽게 눈물을 보이면 어쩌려고 해요? 어린아이처럼 질질 짤거
라면 썩 우리 집에서 나가세요!”
“아...”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겨우 고개를 들고 장추삼이 뿌연 영상 속에서 엄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의 형수를 바라보았다. 진정한 강함은
육체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분을 두고 먼저 갔으니 꽤나 억울했겠네...’
장추삼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걸리자 이매환이 한걸음 떨어져 앉았다. 어
느 정도 과열된 감정의 바다는 건넌 셈이다. 그녀와 장추삼은 때론 장하이
를 추억하며, 때론 흉을 보며 옛 추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장추삼이 모르는 장하이의 세월들이 이매환의 입에서 생생히 되살아나고 그
녀가 모르는 세월은 장추삼이 보충해 주었다. 사람은 가도 그가 걸어온 길
은 어느 누군가에 의해 되살아나 남은 이의 마음에서 살아가나 보다.
예상했던 대로 장하이가 하남에서 한 일은 장사였다. 그는 돈이 되는 일이
라면 뭐든 닥치는 대로 했던 모양이었고 눈썰미와 배짱이 남달랐는지 점원
으로 들어갔던 포목점을 인수하여 그 동네에서는 알부자 소리까지 들었던
모양이었다.
같은 시장에서 장신구를 팔던 이매환과 혼례를 올린 것도 그 무렵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왜 형은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았지요?”
“고향으로 가려면 조금 더 돈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장사는 잘 됐
고 평판도 좋았기에 목표는 금새 이루어질 것 같았지요.”
“아...”
늘 장하이는 큰 돈을 벌어오겠다고 말했었다. 가난한 표사의 아들로 태어나
누리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어린 가슴에 절절히 박혔고 그 굴레에서 벗
어나고자 가출까지 했던 그다.
유달리 책임감이 강했던 그였기에 어린 동생과 늙고 힘없는 아버지의 부양
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은 그를 움직인 원동력이었다. 맏형의 부재중에
감행한 가출이었기에 당연히 금의환향을 꿈꿨을 터였다.
모든 일은 순조로웠다. 그때까지는.
“문제는 자릿세였어요. 흑월회의 위세를 등에 업고 날뛰던 시장흑도무리들
이 어느 날인가부터 매달 거두어가던 자릿세를 두 배로 올렸거든요. 아시겠
지만 남편은 평소에 온화한 반면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지요.”
“예...”
지난날의 형을 기억하고 장추삼이 수긍을 했다. 장하이는 틀렸다고 싶으면
그가 황제라고해도 따질 성격이었으니까.
“대항의 결과는 비참했지요...”
상점의 길목을 막아서서 손님의 출입을 통제한 것은 기본이라고 했다. 물건
을 대주는 재료상인을 협박한 것도 별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런 건 어떻
게든 타개책이 있으니까 말이다.
“어느 날 상점에 불이 났어요. 바람이 심하게 부는 새벽녘이었는지 몰라도
불은 순식간에 점포를 집어삼켰습니다. 우스운 건 불길을 잡으려 이리 뛰
고 저리 뛰는 우리 부부에게 보낸 동료상인들의 냉대였어요. 가만히 그들의
요구를 들어줬더라면 이런 번거로운 일 따윈 없었을 거라는 시선이었죠.
그들은 굴종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불이 나기 전에 흑도의 패
거리 몇몇이 상점의 주위를 배회했다는 걸 알고 그들에 대해 물어봤지만 돌
아오는 대답은 차가운 외면이 전부였어요. 말려들기 싫다는 거죠.”
부르르...
장추삼의 주먹이 심하게 떨렸다. 악은 땅에서 불쑥 솟아나지 않는다. 사람
들의 약한 마음에서 태어나 그것을 숙주로 하여 세력을 넓혀 나간다.
“나중에 관아에서 내린 판결은 저희 부부에게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지요
. 방화라고 아무리 강변해도 그들은 우리의 부주의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라
며 벌금까지 물리더군요. 어떤 식으로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어요. 사안이
방화로 되면 여러모로 귀찮아지니 과실로 돌려버리면 그들로서는 손안대고
코 푸는 격이라서 그랬겠지요. 흑월회가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발을 뺀
걸지도 모르고요. 어쨌든 항의하는 남편에게 돌아간 건 태형이 전부였어요.”
본시 무림의 일에 관이 참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이건 무
공을 모르는 민간인에게 가해진 만행이니 당연히 관아에서 처리해 주어야할
사안이다. 무림의 일이 아니란 말이다.
몇 번의 탄원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원래 관료들처럼 자기완결형의 인물
군들도 없고, 그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시인한다는 건 꿈에서조차 불가능한
일이니까.
‘제기랄...’
그렇지만 장하이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관아에서 나서지 않는다
면 무림의 힘이라도 빌겠다며 무림맹 하남지부를 무던히도 찾아갔단다.
“무림맹 하남지부라고요?”
“예, 방에 처박혀서 끙끙 앓는 성격이 아니었고, 또 무림맹에서 어떤 언질
을 받은 모양인지 열심히 하남지부를 들락거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비감한
표정으로 들어와서 짐을 꾸려 달라는 요구를 하더군요. 큰일을 맡게 되었
다면서요. 소정의 훈련을 거쳐야 한다고 했어요. 너무 급해서 제대로 된 인
사조차 나누지 못했지요. 그게 마지막일 줄은 그이나 나나 몰랐던 거지요.”
“무림맹...”
그래서 약간의 공력을 가졌었나보다. 한데 무림과는 상관없는 상인의 길을
걷던 그가 무림맹의 힘을 빌어서까지 집착했던 것은 과연 복수였을까?
장추삼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이매환이 낮은 탄식을 흘렸다. 그의 동생은 어
릴 적의 형만을 추억하기에 성년의 장하이를 잘 알지 못할 거다. 그가 얼마
나 굴강했는지, 쓸데없다면 쓸데없는 의협심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속을 썩
었는지.
“그분은 동료상인들을 탓하지 않았어요. 그들을 나약하게 만든 흑도를 뿌
리 뽑겠다고 늘 다짐했지요. 그러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고, 또 재기를 위해
서라도...”
“무림맹에서 맡긴 큰일이라면 어떤...”
“그건 저도 모른답니다. 어떤 일인지는 일체 말을 해주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 수 있었어요. 같이 점포를 꾸렸었기에 밖
에서의 얘기는 거의 해주는 편이었는데 그 일이라면 철저히 함구로 일관하
더군요. 제가 자꾸 캐묻자 그저 지나가는 말로 금은보다 값비싼 물건을 만
진다고 했어요.”
“금은보다 값비싼 물건이라고 하셨나요?”
장추삼의 눈에 섬광과도 같은 광채가 일렁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곧 뭔가를 결심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그가 품에서 봉서를 꺼내 이매환에게 내밀었다.
“그게 뭔가요?”
“저도 모르지요. 형님의 품에서 발견되었는데 아무래도 이것의 주인은 형
수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거짓말이다. 봉서는 이효가 노잣돈이자 미래의 투자라며 추삼에게 쥐어준
전표와 편지가 들어있는 것이었으니까. 슬쩍 확인하고 그냥 모셔놓은 전표.
‘이렇게 쓰이는구나...’
잠시 망설이던 이매환이 곧 손을 내밀어 봉서를 받았다.
“어머! 이렇게 많은 액수의 돈은 받을 수 없어요! 그냥 가져가세요!”
“돈이었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얇았던 거였군요! 잘 됐네요. 양양으로 오
실지 안 오실지는 몰라도 만약 오신다면 이사비용 정도는 충분하겠군요!”
이런 능청이라니...
‘두 모자가 아껴 생활한다면 석 달은 능히 버틸 정도는 될 거야. 당장 형
수님을 양양으로 모시고 갈 형편이 아니고, 그렇다고 동행 없이 일면식도
없는 시가로 가시라고 하기도 뭐하니 일단은 여기 계시는 편이 나을 거 같
다.’
그녀는 장추삼의 연기에 꼴딱 넘어가서 그저 남편이 저승길에 주고 간 마지
막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매환의 입장에서 장추삼이 건넨 전표는 그
야말로 한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의지와 신념만으로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 야박하다.
예전에야 이 정도의 액수로 이만큼의 놀람을 표시하지는 않겠지만 지난 몇
년 동안의 궁핍한 삶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배포는 거의 없어진 상태나 다름
없었다.
뚝, 뚝.
문득 흐르는 눈물. 남편의 마지막 선물이라는 상징성과 여태까지의 험난한
생활이 겸쳐지자 꼭꼭 숨겨두었던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한번도 울어보
지 못했다, 아니 한번이라도 울음을 터트리면 무너질 것만 같아서 절대로
울지 않았다.
기댈 곳이 없는 사람에게 감정 따위는 사치라고 생각하며 눈물이 흐를라치
면 양미간을 꽉 누르고 크게 숨을 쉬었다. 그렇게 버텨낸 칠년.
“장가가...”
낮은 흐느낌. 가가라고 했다. 그녀는 여지껏 장하이를 언급하면서 단 한번
도 가가라고 칭하지 않았었다. 여인이 남자를 부를 때 가장 정겨운 칭호를
의도적으로 외면했었던 거다.
서운함, 그리고 원망...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녹아내리고 그녀의 마음도 훈훈한 봄날의 냇가처럼
해빙되었다. 막힌 것은 뚫고, 멈춘 것은 흘러가야함이 사람 사는 이치. 한
방울의 루주(淚珠)에 그녀의 설움은 찌꺼기까지 씻겨 내렸다.
눈물방울은 무늬도 선명하게 손등을 수놓았고 마치 장하이의 손인 양 움켜
쥔 오른손의 전표와 대조적으로 힘없이 떨어지는 빈 봉투.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딛던 장추삼이 무심결에 떨어지는 봉투를 봤다.
‘어?’
오랫동안 품에 넣고 다녀서 약간 벌어진 봉투의 안쪽에 어떤 문양 같은 것
이 새겨져있었다. 사실 편지를 볼 때 봉투의 안쪽 면까지 살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뭐야, 재활용이라는 거야? 아무튼 이숙은 쫀쫀한 구석이 있다니까!’
속으로 투덜거리며 봉투를 집어든 그가 한쪽 눈을 감고 안쪽을 들여다보았
다.
몇 개의 글자와 하나의 문양...
고개를 한번 갸우뚱 옆으로 누이고 전체적인 내용을 보기위해 조심스레 봉
투를 찢는 장추삼의 표정은 왠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무리 무림을 잘
모른다고 해도 저렇게 유명한 문양 정도는 그도 한눈에 알 수 있단 말이다.
‘이, 이건?!’
누가 볼까 주위를 경계하고 - 다행이 이매환은 아직도 울고 있었기에 장추
삼 쪽으로 신경을 돌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 봉투를 품에 갈무리하는 그
의 손이 작게 떨렸다. 어지간한 일에 콧방귀도 안 뀌는 그였기에 손끝을 타
고 흐르는 진동의 울림이 무척이나 생소했지만 결코 제어하지 못했다.
“또 어딜 가는 건가? 하루 종일 걷기만 하자는 거야?”
“잠자코 따라 오던가 숙소로 돌아가요. 남은 지금 몇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느라 머리가 깨질 판인데 뭘 그리 궁시렁 거려요!”
“허, 참...”
유한초자는 터질 듯 벌게진 얼굴로 시근덕거리며 길을 걷는 장추삼의 뒷등
을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중요한 생각들이기에 한번에 몇 개씩이나 떠올린다는 거야?”
“말해줘요?”
“그럼 좋지!”
질문보다 빠른 대답. 역시 호기심 빼면 시체인 노인이다.
“세 개의 단체와 한 가지 사건, 그리고...”
“그리고?”
“노인장.”
“나?”
불시에 기습을 당한 유한초자가 깜짝 놀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
에 똑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장추삼의 손끝이 더없이 매섭게 느껴졌다.
“노, 노부가 뭘...”
은근히 그를 쳐다보던 장추삼이 곧 손을 거두고 두 팔을 깍지 껴서 머리 뒤
에 가져다 붙이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구름 한점 없는 가을하늘은 닿지 못
할 만큼 높았고 푸르렀지만 그의 마음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냥 나 같은 삼류무사 나부랭이에게 의지하고 있는 게 웃겨서 그래요.
별 말 아니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말아요.”
“무슨 말인가! 자네는 강호삼성의 일원이란 말이야! 귀신같은 권각술을 가
진 고수중의 고수란 말일세! 그런 소리는 먼저 간 사부에게 큰 결례라는 걸
모르는 건가! 앞으로 다시는...”
“웃기네... 노인장이 우리 사부를 언제 봤다고 그리 챙기는 거요? 정말 희
한한 노인이라니까? 그리고... 단지 내가 강호삼성의 일원이라서 이러는 거
요?”
의미심장한 눈으로 유한초자를 쓸어보는 장추삼의 눈에 반짝 빛이 일었으나
그건 나타날 때 보다 빠르게 사라졌기에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만 같
은 착각을 일으켰다.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고 쿡쿡 웃던 그가 유한초자의 등등 툭툭 치며 걸
음을 재촉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있던 노인도 별달리 할 말이 없었는지
장추삼의 뒤를 털레털레 따랐다.
갑자기 서먹서먹해진 분위기.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장추삼에게 그건 별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유한초자의 입장에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뭐든 말꼬를 터야한다!
“형수 되는 사람이 하남에 살고 있었는지 몰랐네.”
그의 독백에 생각에 잠겨있던 장추삼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이 질문은
거의 최선의 한수였다.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정말 한심한 놈이죠. 그 나이의 남자라면 의당
혼례를 치렀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했어야 했는데...”
“음...”
장추삼이 형수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실로 우연이었다. 요 며칠간 장하이의
옛날을 추적해 들어가던 중에 그를 잘 안다는 상인 하나가 조심스레 일러준
사실이었다. 장하이가 장사를 했다는 시전에서도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
었던 것도 이젠 이해가 되었다.
그들은 장하이와 이매환이라는 사람들을, 그날의 방화를, 아니 나약한 스스
로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 좋은데... 무림맹에서 맡긴 일이 걸린다. 그 일로 말미암아 무룡숙과도
얽히게 됐을 터였다.
“금이나 은보다 값진 것이 뭐가 있을까요?”
“엥?”
뜬금없는 장추삼의 질문에 맥 빠진 얼굴로 뒤따르던 유한초자의 눈이 휘둥
그레 커졌다. 금이나 은이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고 해도 그보다 귀하고 값
나가는 물건은 천지에 널려있다.
“너무 많지 않은가? 사람 사는 세상에 금, 은보다 귀한 귀진이보는 지천이
라네. 지금 대보라고 한다면 하루 꼬박을 새도 모자랄 판이야.”
“그런 말이 아니고... 금이나 은처럼 시중에도 유통되면서 그보다 값비싼
물건 말이오. 무림맹에서 귀진이보같은 걸 무공도 약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맡겼겠어요? 바보라도 그런 짓은 안하지.”
“그야 그렇겠... 지금 무림맹이라고 했나?”
수긍하던 유한초자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제 보니 지금 가는 곳은 아마
도 무림맹 하남지부인가보다.
“이보게, 무림맹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돼. 나도 무림맹 녀석들의 짓거리
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네만 말 그대로 무림맹이라는 이름은 전 무림의
결집세력과도 같다네. 자칫 그들과 등을 진다면 전 무림의 절반 이상과 적
대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걸 알아야해.”
“절반이든 전부든...”
장추삼이 낮게 으르릉거렸다.
“대가를 치를 행동을 했다면 대가를 치러야지. 딴 소리 말고 아까의 질문
에 대답이나 해봐요. 은근슬쩍 넘기려 하지 말고.”
“금은보다 값진 물건이라... 글쎄... 언뜻 떠오르지 않는데?”
장추삼이 묘하다는 표정으로 유한초자의 위아래를 쓸어보았다. 어린놈이 나
이든 사람을 그런 식으로 보는 건 큰 결례라고 하겠지만 장추삼에게 그딴
관습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른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장추삼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물음이라기보다 빈정거림에 가까운 질문을.
“정보통이라면서요?”
“그런데?”
“정보통이 그런 것도 몰라요? 어떻게 정보통이라는 사람이 일반인보다도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잘 몰라요? 요즘 정보통은 정보를 남에게 파는 게 아
니라 주워듣는 쪽인가 보군? 대단한 정보통이야!”
그 말이 걸렸을까. 유한초자가 버럭 화를 냈다.
“아무리 정보통이라고 해도 몇 가지 모를 수는 있는 법이지! 그런 소소한
걸 가지고 사람을 멋대로 재단하려 드는가! 입장을 바꿔 자네더러 남들이
그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아서 걸고 들어간다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나!”
느닷없는 노화에 뜨악한 표정이 되어버린 장추삼이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손을 휘휘 저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아... 됐어요, 됐어! 그냥 없던 말로 칩시다! 별 일도 아닌데 그리 언
성을 높일 것까진 없잖아요?”
여전히 노기를 거두지 않고 있는 유한초자의 귀에 입을 가져간 장추삼이 빠
르게 한마디를 던졌다.
“소금.”
“소금... 아!”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유한초자가 손뼉을 딱 쳤다. 그가 뭐라고
대꾸를 하려는데 장추삼의 말이 앞질렀다. 두 눈을 모아서 한곳을 응시하며
내뱉은 말에는 간단치 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사백명이 넘는 식솔을 먹여 살리면서 특별한 수입도 없었던 무룡숙.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대지와 건물들. 그래, 그 정도를 유지하려면 뭔가 대
단한 수입원이 있어야겠지. 단지 시전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나눈다고 될 성
질이 아니거든. 이제야 뭔가 맞아떨어지는군.”
유한초자의 응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장추삼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는 유한초자에게 말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들어주기 바라는 누군가
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들어줄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건 무림맹의 각 지부들도 마찬가지거든요. 아무리 각파의 지원을 받는
다고 해도 이렇게 커다란 지부를 각 성마다 운영하기란 난망한 노릇이란 말
이죠. 그런데도 무림맹의 지부로 몰려드는 무인들의 수는 해가 갈수록 늘어
만 가는 게 현실이라 이거에요. 단지 명예 때문에 그럴까요? 소가 웃을 일
이지. 정파무인은 이슬만 먹고 사나? 만약 그렇다고 친다면 딸린 식구들은?”
숨 한번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낸 장추삼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던 그가 크게 콧김을 뿜고 다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만
약 정파의 명숙들이 듣는다면 분기탱천할 만한 내용이었지만 여긴 그런 사
람이 없었다.
“무룡숙은 어디까지나 껍데기였거든. 그들은 흑월회의 하부단체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지. 흑월회와 하남지부의 불가침협정... 재미있는 이면(裏面)이
있었던 거야. 뭐, 재미있다고 말하기엔 좀 지저분하지만 말이야.”
... 수험생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니 긴
장했던 순간은 잠시 잊고 한번쯤은 편안한 밤을 보내시길. 제가 드릴 수 있
는 건 그저 글 하나 올리는 게 전부로군요. 모두 행복하세요.
199
시근덕거리는 기세로 보아 하남지부의 전문이라도 산산조각 내며 들이닥칠
줄 알았는데 장추삼은 유한초자의 기대를 여지없이 배신했다. 그는 정문의
경비에게 한 장의 봉서만 전달하고 근처 숙소로 향했다.
뭔가 박진감 넘치는 사건을 기대한 유한초자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지만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뭐하고 해서 입맛을 다시며 장추삼을 따라 객
잔에 앉았다.
노인네의 노골적인 시선을 무시하고 차를 홀짝이던 장추삼이 점점 가중되는
압박에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알고 보니 이 노인은 호기심이 많을
뿐더러 싸움구경 또한 어지간히 좋아하나보다.
“뭐예요, 그 눈길은?”
“뭐긴, 보는 거지.”
“뭘 그리 뚫어지게 봐요! 내가 어여쁜 여인네도 아니고, 그렇다고 척 보면
삼천리쯤 되는 관상쟁이도 아닌데. 무지 부담스러우니까 딴 데 좀 봐요!”
투덜거리는 장추삼의 표정에서 뭔가 재미를 느꼈는지 눈가에 몇 개의 주름
을 만들어내며 여전한 표정으로 유한초자가 싱글거렸다.
‘내 참, 처음의 고고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는 어디로 도망가고 저렇게 철없
는 표정이람? 액면만 신선이었지 하는 건 영판 시골 노인네 같잖아! 에휴...’
속으로 한숨짓던 장추삼이 문득 측은한 표정으로 노인을 마주 보았다. 누구
나 상대가 자기를 불쌍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면 대단히 기분 나쁘다. 특히나
어린놈이 그런다면 거의 미칠 거다.
“뭔가, 그 얼굴은?”
“뭐긴, 보는 거요.”
“뭘 그리 불쌍하게 보는가! 노부가 망령든 노인네도 아니고, 그렇다고 언
제 죽을지 몰라 골골거리는 병자도 아닌데. 매우 기분 나쁘니 그런 표정 짓
지 말게!”
“뭐... 망령이나 죽을 때나 같은 건 상관없어요.”
두 팔을 벌리고 과장된 몸짓으로 해명하는 장추삼이 얄미웠는지 지그시 노
려보는 유한초자의 눈초리가 매서웠지만 애당초 남의 눈치 같은 거랑은 별
로 친하지 않은 존재에게 그런 공세는 유효하지 못했다.
‘대체 이 녀석은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언짢았지만 빌미를 주지 않으니 화도 내지 못하겠다. 처음에는 단순무식과
격형에 인정 많은 동네건달이라고 - 물론 건달치고는 대단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 생각했는데 요사이 장추삼을 보면 당최 속내를 모르겠다.
“노인장!”
장추삼의 고개를 모로 꼬고 궁리하던 유한초자가 머리를 들었다.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할지 몰라도 일단 부르니 응하는 수밖에.
“왜 그러나...”
쉰 옥수수 같은 대답에 입을 삐죽 내민 장추삼이 유한초자의 얼굴을 한참동
안 바라보다가 반쯤 빈 찻잔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왠지
이런 말을 하면서 얼굴을 마주하기란 곤란하니까.
“되게 심심했나 봐요?”
“뭐?”
“심심했던 모양이라고요. 아니, 적적했다고 해야 옳겠구나.”
“그야... 요 며칠간 자네 혼자만 나다니지 않았...”
“요 며칠의 문제가 아니라!”
유한초자의 말을 막고 찻잔에서 눈을 뗀 장추삼이 유한초자를 거쳐 뉘엿뉘
엿 떨어지는 태양과 산하를 천천히 잠식해 들어오는 노을을 바라봤다. 낙조
(落照)의 쓸쓸함을 대변하기엔 너무도 화려해서 이질적인 붉은색의 집념.
“저건 몸부림이야...”
“에?”
망연히 노을에 마음을 뺏겼던 장추삼이 툭 던져진 유한초자의 독백에 어리
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노을 말일세... 아침과 낮이라는 시간을 군림했던 태양이 달에게 권좌를
내주기 아쉬워 짓는 탄식이란 말일세. 그래봐야 시간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인데. 아무리 찬란한 붉음의 광휘도 불과 한 식경을 채 머물지 못하거늘.”
“그거 말 되네?”
이럴 땐 좀 있어 보인다. 평범해 보이는, 누구 알고 있는 이치를 자연현상
에 빗대어 풀어보니 꽤나 그럴듯해진다.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유한초자를
슬쩍 쳐다본 장추삼이 눈을 껌뻑였다.
‘얼레? 이 영감...’
노을을 받아 금방이라도 우화등선을 감행할 신비로움에 휩싸인 유한초자.
그러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지극히 인간적이지 않은가?
‘분노? 서글픔? 안타까움? 저런 걸 뭐라고 해야 하지?’
오욕칠정(五慾七情)을 한번에 표출한다면 인간의 근육은 어떤 움직임을 보
일까. 그런 광경을 한번도 본 적 없는 그였지만 대충 눈앞의 얼굴이 그것과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왜 그리 생각했냐면 할 말은 없다.
그저 느낌이니까.
“만약 태양이 이러한 법칙을 무시한다면 큰 일이 벌어지겠지.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난 적도 없고. 하지만 우매한 인간들은 종종 실수를 범한단 말이
야, 어리석게도.”
압도적인 분위기. 무슨 기세를 끌어 올린 것도 아니고, 목소리를 깔아 무게
를 싣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장추삼은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에 크게 쉼 호
흡을 했다.
“집착처럼 무서운 것도 없지. 비참한 파국으로 치닫는 걸 알면서도 결코
멈출 수 없으니까.”
판관과도 같은 결론. 촌각이지만 유한초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으로
세상을 굽어보았다. 물론 장추삼만의 느낌이지만.
‘으음...’
완전히 눌려있던 그가 목젖을 크게 울릴 정도로 침을 삼키고 가까스로 자리
에서 일어섰다. 간을 놓고 다닌다는 소리까지 듣는 장추삼이다. 그런 그에
게 이만큼의 정신적인 타격을 줄 사람은 많지 않다.
절대오존이라도 말이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꼈는지 혼자의 생각에 풀 빠져있던 유한초자
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음식 맛이 얼마나 형
편없는지 몰라도 하남지부와 가장 가까운 객잔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뭐야, 이래서야 종업원들 월봉이나 줄 수 있겠나?”
“그러게 말이에요. 완전 파리 날리는구만. 이렇게 몫 좋은 곳에서 손님수
가 이게 뭐래? 자리가 아깝다!”
괜시리 겸연쩍어진 둘은 점포의 지정학적 위치가 손님수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진지한 고찰을 시작했다. 전혀 쓸데없는 논의였지만 두 사람은 자못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했기에 누가 보았다면 땅 장사하는 한량들 쯤으로
비쳐졌을 터였다.
문제는 둘의 생각이었는데 입으로는 열심히 장광설을 쏟아냈지만 본심은 다
른 곳을 보고 있었다.
‘꽤나 머리 아프네. 그냥 떼어 놓고 혼자 다닐까...’
라고 장추삼이 안돌아가는 머리를 굴리는 동안,
‘만만히 볼 녀석은 아니야. 조심해야겠어...’
라고 유한초자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결론적으로!”
갑자기 장추삼이 목청을 돋워 얘기를 중지시켰다. 열심히 주절거렸지만 사
실 재미가 없었다. 그건 유한초자도 마찬가지라 그의 말이 무척 반가웠다.
뭔가 서먹해져서는 꿀꿀한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되지도 않는 일로 토론하고
웃고 떠들지만 실은 상대방이 멈춰주길 바라면서 꾸역꾸역 얘기를 이어가
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노인장은 무척이나 심심했었던 거요.”
“어?”
황당한 맺음에 뭐라고 하려던 유한초자가 입을 다물었다. 심통 맞고 단순하
다고 생각했던 놈이었는데 지내고보니 여간 얍삽한 게 아니다. 천연덕스러
운 표정 뒤에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있다.
‘유도심문에 넘어가지 말자. 암, 그래야지!’
“어허험, 뭐 그렇다고 쳐두세. 노부는 심심했었어, 됐나?”
‘어...’
순순히 인정을 하자 맥이 빠져 버렸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한손으로 아무리 휘저어봐야 팔만 아프다. 마구 말이 엉키기를 바랐는데.
역시 만만하게 볼 노인은 아니다.
“그건 그렇고... 그 졸개 놈에게 준 봉서의 수취인이 누군가?”
“감귀수요.”
“뭐?”
태연하게 대답하는 장추삼이었지만 그가 뱉어낸 이름은 쉽게 언급되어질 만
큼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
감귀수. 현 무림맹에서 대외적으로 각파의 장문을 제외한다면 최고의 고수
로 알려진 인물이다. 검정오존이라는 이름은 둘째치고라도 그가 베어 넘긴
무인들의 명호를 듣게 되면 과연 감귀수라는 말이 절로 나올 터였다.
정파의 인물치고는 잔인할 정도로 매서운 성품과 손속으로 빙심혈세(氷心血
世)라는 으스스한 외호를 얻게 되었지만 본인은 오히려 그걸 즐긴다는 특이
한 인물.
유한초자의 놀람을 다르게 해석한 장추삼이 묻지도 않은 대답을 시작했다.
“왜 하남지부장이 아니냐고 묻고 싶어요? 당연하잖아요. 무림맹의 양 당주
가운데 하나라는 그자가 하남에 눌러앉아 있은 지가 벌써 십년이 넘어요.
생각해봐요. 이건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렇다면 하남지부
에 그만큼 중요한 뭔가가 있다 이말 입니다. 한마디로 대외적으로야 하남지
부장이 무림맹 하남지부의 대표라지만 실세는 빙심인가 뭔가 하는 자라 이
거죠. 노인은 잘 모르겠지만 이래 뵈도 난 대가리 아니면 말을 섞지 않거든.”
“이보게... 그렇다고 빙심혈세쯤 되는 인물이 편지 한 장에 움직일 것 같
나? 자고로 정파라는 간판을 단 치들은, 그것도 높은 직책을 가진 이라면
꽤나 비싸게 군다는 걸 알아야해.”
“잘 알아요. 그걸 나만큼 잘 아는 이도 별로 없을 거예요.”
왜 모르겠는가. 문전박대에, 손가락질에, 비웃음까지... 별의별 멸시는 다
당해본 장추삼이다.
“그래서... 절대로 나올 수밖에 없게끔 해 놨지요.”
“밖으로 불러냈다고?”
“그렇다니까요. 조만간에 연락이... 어, 오네?”
실실거리던 장추삼이 객잔의 출입구를 가리켰다. 휘장을 걷으며 두리번거리
는 인물은 분명 하남지부에서 나른한 눈으로 보초를 서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사복이지? 공무가 아니라서 그런가?”
“켕기는 게 있으니 무림맹의 간판을 걸기 싫었겠지요. 자아... 무슨 대답
을 가져왔을까?”
사내는 조심스레 주위를 경계하다 장추삼들을 보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감귀수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무척이나 신중한 거동이었다. 이
를 보아 빙심혈세가 지부 내에서 어떤 존재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장추삼의 옆에 앉아있는 유한초자가 꺼림직 했는지 다가와서도 말을
꺼내기 주저했다. 이를 눈치 첸 그가 일어서서 사내를 끌고 구석진 탁자로
갔다. 입가에 싸늘한 조소를 달고.
“감대인의 서신이요. 지금 보고 바로 태우시오!”
최대한 소리 죽여 말을 하면서 사내가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자네가 하는 말은 노부를 경악케 하기에 충분하네.
하지만 물증도 없는 제보만으로 맹의 사람들을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이대로 덮어둘 사안도 아닐 성 싶으니 자세한 내용은 마을을 벗어
난 관제묘에서 나누도록 하지.
만약 그 제보가 사실이라면 실로 중차대한 문제라 하겠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게지.
만약 제보가 사실이라면 큰 상을 내릴 터이니 오늘밤 자시(子時)말에 보세나.
잊지 말게. 오늘밤 자시 말일세.
감귀수.
‘두 번 씩이나 강조를 할 정도로 애가 탄다 이거지?’
턱을 문지르는 장추삼의 손에서 편지를 뺏어 들고는 재빨리 태워버리고 사
내가 자리를 떴다. 그렇게 멍하니 서있던 장추삼이 유한초자가 앉아있는 탁
자로 돌아간 건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스름 달빛이 내린 후였다.
“뭘 그리 생각한거야?”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별거 아니라니까!”
“별거 같은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유한초자를 무시하고 점소이에게 간단한 음식을 시
킨 장추삼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꼬닥꼬닥 졸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을
걸어 다녔으니 피곤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도 여전히 목을 까딱이는 그가 측은해서 유한초자가
깨웠지만 장추삼은 아예 탁자에 엎어져서 잠을 청했다.
“차라리 객방을 하나 잡는 게 나을 것 같군.”
“필요 없어요. 잠시만 눈을 붙일 거니까...”
귀신같은 놈이다! 자고 있으면서도 남의 독백을 알아듣고 대답까지 하다니!
“자네, 자는 거 맞나?”
“쿨쿨...”
도피하듯 코를 고는 장추삼을 멀거니 보던 유한초자가 일단 시킨 음식이기
에 별로 맛없어 보이는 돼지고기볶음에 젓가락을 가져갔으나 이내 손을 놓
았다. 가까운 거리임에도 하남지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맛이었다.
그렇게 보니 같이 시켜놓은 탕에도 언뜻 손이 가지 않았다. 다른 요리에서
일단 선입견이 생기자 먹어보지도 않은 국물의 빛깔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
고 풍겨오는 냄새조차도 맡기 싫어졌다.
‘이거 심심한걸...’
입맛까지 다시며 곤히 잠든 이를 깨우기도 그렇고, 앉아있자니 그 또한 고
역이고 해서 살며시 일어선 유한초자가 저잣거리로 나섰다. 점소이에게 퍼
져 자는 이를 깨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서.
그가 나가자 객잔은 장소를 잘못 찾은 사내의 코고는 소리만이 남았다. 내
용을 알 수 없는 잠꼬대까지.
“... 그러니까 찾지 못했지. 따로따로 떼어놨으니 말이야...”
200
관제묘는 말 그대로 전쟁의 신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삼국시대의 명장 관우
를 모시는 사당이다. 호방한 성품과, 주군에의 절개, 그리고 후대로 내려오
면서 약간의 우상화까지 덧입혀지자 일개 장수가 어느새 신이 되어버린 것
이다.
재미있는 것은 무장인 그의 역할이 무운뿐만 아니라 재운까지 관장하는 신
으로 격상된 일인데 그가 위나라에 잡혔을 때, 군주인 조조가 상마금(上馬
金)과 하마은(下馬銀)등의 어마어마한 재물로 회유하려 하였으나 이를 물리
치고 유비에게 돌아갔다는 고사에 따른다고 했다.
그래서 관우는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는 무의 이름과 관보살(關菩薩)이란
재신의 칭호가 따르니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그 어떤 신들보다도 광범위한
지배력을 가졌다고 하겠다.
다 좋은데...
왜 이리 머냔 말이다!
마을에서 벗어난... 이라고 간단하게 적혀있었지만 관제묘는 인적이 완전히
끊긴, 그야말로 성도의 오지라고 불릴 만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과연
이런 곳까지 치성을 드리러 올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흐음...”
놀랍게도 장추삼은 투덜거리지 않았다. 물론 천성은 버리지 못하는지라 오
는 내내 주둥이를 쭉 빼물고 궁시렁 거리기는 했지만 막상 관제묘에 도달해
서는 주위의 경물과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가늘게 실눈을 뜨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따라오겠다는 유한초자를 만류했지만 노인네의 궁금증은 저 하늘의 별빛보
다 찬란한지라 어물쩍거리며 먼발치에서 뒤따르는 것도 알았다.
위험하다고 강변해봐야 뭐하는가? 제 한 몸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는데.
‘하긴... 책임만 지시겠어?’
약속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기에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 따윈 없었다. 간간
히 부엉이나 들개들의 우짖는 소리가 이리저리 메아리치고 있었을 뿐.
“에라~”
털썩 주저앉은 장추삼이 나무기둥에 몸을 기대고 목을 두어 번 꺾었다. 조
바심내서 뭐하겠는가. 올 때 되면 오겠지.
문득 둥그런 달을 보니 표국 생각이 났다. 비록 중양절이 지났다고는 해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갈 터였다. 중양절은 누가 뭐라고 해도 최고
의 명절이다. 한꺼번에 처리하지 못할 만큼 표물이 몰리는 시기다.
‘이숙도 이제 연세가 있는데...’
이런 성수기가 오면 이효는 거의 잠을 자지 않는다. 회계처리부터 표물 확
인과 표사구성 같은 업무적인 면을 지휘함은 기본이고 각 표사들의 건강과
정신적인 면까지 고려하는 성격이다 보니 하루 열두시진이 그에게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거다.
대책 없이 헬렐레한 것도 문제지만 너무 꼬장꼬장한 성품도 피곤하다. 본인
이나 타인에게 모두.
‘이숙,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곧...’
삐그덕.
그의 생각은 낡은 판자로 만든 문이 열리며 중단되었다.
휘잉~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찬바람과 함께 그만큼의 서늘한 인상을 풍기는 노인
이 관제묘로 들어섰다. 잠시 닫혀있었기에 훈훈해졌던 공기가 급작스레 얼
어붙은 건 밤바람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네가... 서신을 보냈느냐?”
육척이 넘는 장신의 노인은 거의 뼈만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마른 몸집이었다. 움푹 들어간 양 볼에도 살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 축 늘어트린 손가락은 해골의 그것과도 같았기에 장추삼은 반사적으로 한
사람을 떠올려야했다.
“이건 사심 없이 묻는 건데... 혹시 잃어버린 손주나 뭐 그런 친척 없소?”
“뭐?”
황당한 질문에 감귀수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장추삼의 질문이 이
어졌다.
“아니다, 그게 아니라 혹시 노인장의 본래 성이 적씨 아니오?”
“지금 노부더러 성씨를 바꿨다고 했느냐!”
쿠쿠쿠.
엄청난 기세. 담금 강호에서 이만한 살기를 받아낼 고수가 어디 있을까. 빙
심혈세의 전설은 허명이 아님을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러오? 그나저나 아깝네. 만약 적괴와
혈연관계였다면 기막힌 광경을 볼 기회였는데!”
엄지와 중지손가락을 마찰시키며 아쉬워하는 장추삼의 눈앞에는 냉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적괴와, 마찬가지로 얼음을 온몸에 두르고 다니는 노
인네의 눈물어린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연출되었다가 신기루처럼 꺼져버렸다.
‘뭐, 뭐야. 이 녀석!’
장추삼에 대해 코털만큼도 아는 바가 없는 -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니 누군
지 모를 수밖에, 그나마 아는 거라곤 인상착의가 다였다 - 감귀수로서 눈앞
의 청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다가왔다.
“에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천천히 일어서는 장추삼을 멀거니 보던 그가 순간 엄청
난 사실을 생각해내곤 분기탱천했다. 어이없는 질문에 잊고 있었는데 녀석
은 그가 들어오며 질문을 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아니, 종알종알 말도 안 되는 질문까지 던졌다.
‘감히...’
언제 감귀수가 이런 대접을 받아보았는가? 비록 정파의 테두리 안에 묶여있
다고는 하나 빙심혈세라는 명호가 거론될 때면 누구나 뒷덜미에서 오한이
느껴지는, 피와 죽음의 대명사로 통하는 인물이 바로 감귀수란 말이다.
아무리 철모르는 하룻강아지라도 그를 직접 대면하게 되면 오금이 저려 말
조차도 붙이지 못하는 게 상례이거늘.
‘살짝 간 놈이 아닐까?’
그건 아닐 터였다. 바보라도 기세는 느끼니까.
“너... 뭐하는 놈이냐?”
“나요?”
자신을 가리키고 멀뚱히 서있던 장추삼이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매우 나
른해 보이는 모양새라 마치 오후의 따사로운 양광에 몸을 맡기고 골골거리
는 고양이가 따로 없었기에 감귀수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에, 또, 뭐시냐... 뭐, 그냥 삼류무사요.”
“그냥 삼류무사 따위가 밀염(密鹽)을 어떻게 알고 고변을 한 것이냐?”
차가운 물음. 그러나 대답은 차분했다.
“삼류무사는 그런 거 알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소?”
“어디서 들었느냐?”
감귀수의 눈동자에서 광채가 일었다. 고변을 받는다기보다 범인을 취조하는
듯한 질문이었지만 장추삼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중요하오? 이상하네? 지금 노인장이 신경을 써야하는 건 누가, 어떻
게, 얼마만큼의 밀염이 이루어졌느냐는 사실 아니오? 제보자가 뭐 그리 중
요하다고 눈에 쌍심지까지 켜고 난리요?”
“그래. 지금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다른 것을 묻겠다. 편지에
써있는 대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정녕 너밖에 없으렷다?”
“아따, 그 노인 의심도 많네! 그렇다고 하지 않았소!”
부르르.
감귀수의 어깨가 떨렸다. 저 조잘거리는 주둥이를 짓이기고 싶었지만 크게
심호흡을 해서 가까스로 참아냈다. 물정 모르는 놈이 아직은 발설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일단은 안심이다.
“좋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네게 그런 말을 해준 이가 누구냐?”
“상준다고 했잖소? 상이나 주시구려?”
“말을 하면 주마. 아주 특별한 상을 말이야...”
감귀수가 자애롭게 웃었다. 하지만 장추삼의 눈엔 그저 구렁이 한 마리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상을 내가 맞춰볼까요?”
“음?”
씨익 한번 웃고는 슬쩍 몸을 옆으로 튼 장추삼이 빙심혈세의 차가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게의 인간들은 뭔가 찔리는 것이 있으면 상대방의 눈
을 피한다. 그건 감귀수도 마찬가지였는지 자신을 직시하는 장추삼의 시선
을 외면했다.
“후후...”
기분 나쁜 웃음. 감귀수의 얼굴이 똥색으로 변해갔지만 알 수 없는 기운에
의해 그의 행동은 제약되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대상없는 공간에 대고 조소를 날리던 장추삼의 표정이 흡사 물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한마디.
“살인멸구(殺人滅口)!”
순간 사당 안은 완벽한 침묵 속에 빠졌다. 절대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정적
의 바다. 장추삼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쫓았고 뭘 생각하는지
감귀수는 바닥으로 보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정적을 깨고 감귀수가 물었다. 부정을 하지 않음은 긍정과 같은 의미.
“만약 내 증언을 듣고자 했다면 이렇게 인적 끊긴 곳까지 올 필요는 없겠
지. 노인장의 위치로 볼 때나 기타의 상황으로 봐도 이건 앞뒤가 맞지 않거
든. 차라리 이런 곳은 사람 하나 몰래 묻기 딱 좋은 장소니까.”
“그다지 멍청하진 않군.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누가 알려줬느냐?”
“왜? 그 사람까지 손 데려고 그러오? 이거 큰일이로군. 귀신이 알려줬다고
한다면 명부까지 따라갈 기세야!”
장추삼의 빈정거림을 묵묵히 감내하던 빙심혈세가 손뼉을 두 번 쳤다. 작은
소리였지만 사당안의 침묵 탓인지 청명한 마찰음은 매우 크게 들렸고, 벽
면에 붙어있던 흙먼지마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면 말 좀 시켜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놈...”
스르륵.
꺼지듯 다섯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전신에서 발산하는 기로 보아 만만치
않은 수련을 거쳤음을 몸으로 보여주는 고수급의 인물들.
그들의 눈은 죽어있었다.
“이들에게서 자비심 같은 것은 없다. 직접 키운 아이들이지만 가끔 노부조
차도 소름이 돋는 녀석들이지. 만약 발설자만 말해준다면 고통 없이 죽게
해주마.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말을 해도 죽고, 말을 하지 않아도 죽는다고 했소?”
장추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황한 얼굴을 본 감귀수가 넉넉한 미소를 흘
렸다. 바로 이거다. 이래야만 한다.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수순이다.
“같은 죽음이 아니다. 하나는 편안하게 이승을 떠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
는 고문이란 고문은 다 당하고 걸레쪽이 된 몸으로 옥황상제를 배알하는 거
다. 자아~ 어느 편을 택하겠느냐?”
“둘 다 싫소.”
“뭐?”
간단히 도리질치는 장추삼의 모습을 보고 감귀수가 실소를 흘렸다. 아직까
지 이 녀석은 상황판단을 재대로 못하고 있다. 꼭 그런 부류가 있다. 힘을
보여줘야만 무릎을 꿇는 무리들.
“한심한 녀석. 네게 주어진 선택은 오로지 단 둘이다. 그건...”
“당신이 총책인가?”
감귀수의 말허리를 싹둑 자린 장추삼이 왼손바닥으로 주먹 쥔 오른손을 쓰
다듬었다. 저자거리 깡패들이나 보이는 행동이지만 그 속에서 뭔가 섬찟함
을 느낀 빙심혈세의 눈썹이 역 팔자를 그렸다.
그저 바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하다...
“무슨 말이냐?”
대답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 나가 버렸다.
“당신이 밀염의 총책이었냐고 묻잖아.”
호칭도 말투도 변했다. 아니, 아까의 나른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기 어려
웠다. 그렇지만 그뿐이다. 이정도의 투기로 물러서기엔 감귀수의 명성이 너
무 컸다. 그리고 다섯 명의 사내...
“말이 필요 없는 놈이로군. 오정사사(五鼎死史)!”
그의 부름에 따라 다섯의 사내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전신을 어둠과도 같
은 흑의로 감싼 다섯 사내의 감겨있던 눈이 일순간 만개했다.
쿠쿠쿠...
엄청난 기의 압박. 사당에 놓여있던 제기들이 허공의 치솟아 오르고 벽면의
흙 찌끼들이 마구 비산하여 장내는 폭풍우에 휩쓸린 난파선처럼 뒤흔들렸다.
꽝!
기세를 버텨내지 못하고 사당 문이 터지듯 떨어져나갔다. 그 사이로 귀화처
럼 빛을 발하는 열개의 안광이 장추삼을 에워 쌓았다. 철석간담의 사내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두려움을 느낄 터.
그래서...
“무섭군...”
이라고 장추삼이 대답해 주었다, 눈을 반쯤 감고.
‘가소로운 놈. 담량 하나는 인정해 주겠지만 오정사사는 그런 걸로 상대할
수 없는 아이들이다. 이들 다섯의 합격은 천하의 고수라는 이들도 치를 떤
단 말이다.’
감귀수가 자신을 보일만도 한 것이 오정사사라 명명된 다섯 명의 사내는 일
반적인 무예와 차원이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구파에서
전승되어온 살인술 가운데 가장 무섭다는 무당의 절정인(切情刃)을 극성까
지 깨우쳤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 사람을 벨 줄 안다는데 있다.
살인에 익숙한 무인처럼 무서운 상대는 없으니까. 그들에게 인간적인 감정
은 죽어버린 지 오래니까.
뒤에 쳐져서 야릇한 웃음을 흘리는 감귀수를 우두커니 보던 장추삼이 낮게
탄식을 토했다.
정파? 정의? 무림맹?
‘썩을...’
허탈했다. 그래도 무림맹이라고 하면 뭔가 다를 것 같았는데...
문득 목석처럼 명령만 기다리는 사내들이 불쌍했다. 이들은 그저 하수인이
다. 판단도, 목적도, 희망도 없이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살아간다고 하기보
다 그저 시간 속에 내동댕이쳐진 미아들.
자신의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움직이는 나무인형들.
이젠...
“쉬어라...”
첫댓글 즐독~~
늘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