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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9일 목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제1독서 : 예레 1,17-19
복 음 : 마르 6,17-29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요한의 죽음 자체는 아주 간략하게 서술됩니다.
그가 죽을 때 무슨 말을 하였는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였는지도 일러 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는 죽음입니다.
요한의 입장에서 생각하였을 때,
차라리 헤로데가 처음부터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면 죽는 이유가 더 명백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오히려 요한의 주장이 더 두드러지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고 싶어 하였을 때까지도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헤로디아가 헤로데를 설득해서 요한을 죽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약속한 선물을 주려고 요한의 목을 가져오게 합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나서 반지 하나를 달라고 하였든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였든 헤로데는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을 죽일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헤로디아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주려고 죽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경비병은 감옥에 가서, 마치 반지 하나를 가져오듯이
담담하게 요한의 목을 베어 들고 옵니다.
그러나 경비병이 감옥으로 요한을 찾아간 날,
요한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가 맞게 될 예언자의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명분으로는 요한을 죽일 수 없었기에,
불의는 어떻게든 진리의 목소리를 죽이는 길을 찾습니다.
요한은 그에게 걸맞지 않은 이유로 소리 없이 죽임을 당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예레 1,19).
요한은 헤로데에게 꺾이지 않았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연인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무엇일까요?
분명히 “I Love You”(사랑해)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곳은 아름답고 보기에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가 축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해’라는 말 뒤에 ‘그런데, 하지만’ 등의 단어가 붙을 때입니다.
이런 단어가 따라오자마자, ‘사랑해’라는 멋진 말의 아름다움이
축소되고 의미도 대폭 줄어듭니다.
순수한 단어가 교묘하고 이기적인 말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변한다면 더 사랑할 거야.”
“당신을 사랑해. 그런데 너는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아.”
이 사랑에 조건이 덧붙여지면서 그 가치가 축소되고 원 의미도 줄어듭니다.
실제로 이런 조건적 사랑을 외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주님께도 이렇게 조건적 사랑을 말해서 의미가 없게 만듭니다.
사랑이란 조건이 붙지 않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나에게 잘해야, 나에게 도움을 줘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더 나눌 수 있는 사랑,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에 가까운 진짜 사랑에 집중해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복음에서 헤로데 임금은 세례자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했다고 전해줍니다.
실제로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를 보호해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례자 요한의 목을 건네줍니다.
바로 사람들에서 했던 맹세에 대한 행동이었지요.
맹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기 체면이 손상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존중하는데 조건이 붙자, 그 존중의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에 대한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계속 외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붙게 되면, 사랑이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의 의미는 사라지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 그 자리에 남게 될 것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자기 행동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나중에 예수님 소문에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면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역시 사랑에 조건이 붙게 되면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조건 없는 진짜 사랑에 집중하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오히려 고난을 받았습니다.
만약 그가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고난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로운 이의 무고한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을 미리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필리 1,29 참조).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그의 목숨은
마치 은전 30냥에 팔리게 될 예수님의 목숨처럼, 억울하고 무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가 외치는 진리의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예언자의 소리는 가로막는다고 가로막히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한편에는 눈치와 체면에 눈이 가려진 부패하고 부도덕한 권세가인 헤로데와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와 허영심에 찬 그의 딸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의로운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불경스러운 네 가지 죄악을 봅니다.
권세가의 파렴치한 생일잔치, 소녀의 음탕한 춤과
그 어머니의 악의에 찬 음모, 임금의 무모한 맹세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결국 무고한 의인의 죽음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고난을 떠올리면,
금세기의 의인으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떠오릅니다.
그는 히틀러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당시의 국가 교회를 탈퇴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고,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나치에 의해 사형당했습니다.
그는 '고난에 관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까닭이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바람에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그가 <옥중서간>에서 썼던 이런 말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말씀을 위하여 바쳤으며,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 말씀을 가르쳤다.”
그는 참으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되, 예수님처럼 죽음을 통해 가르쳤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비록 혀가 잘려도, 온몸이 혀가 되어 외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예언자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소리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울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 6,25)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 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제 혀가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고,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침묵에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아멘.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청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매일 정답만 얘기하지 마시고 다른 얘기할 수 없나요?
참 답답합니다. 정답은 저도 알고 있는데 실천하려고 하니까
왜 나만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 아직도 저 모양이니 어쩌면 좋습니까?
정답을 알고 있는데 다른 것을 요구하면 어찌합니까?
물론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그리로 가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말이죠.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은 흔들릴 수 있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에서 해답을 얻어야 명확합니다.
그리고 해답을 얻었으면 그리 사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고, 가슴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억울해도 인내하면서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천상에 보화를 쌓고 위로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하늘나리이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요한은 결국 목이 베어지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요한은 바른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육으로는 죽었지만, 그의 의로움은 끊임없이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을 동시에 마주하게 됩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몹시 괴로운 마음으로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생일 잔치에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지 청하는 것을 주겠다.’고 맹세까지 하였고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요한의 머리를 갖다 달라’는 그의 청을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생일 파티에서 한마디 약속한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취중에 한마디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정말 얼마나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무모한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참된 권위를 회복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약속이 잘못되었으면 거두어들여야지, 위신 체면 때문에 덮어버리면
결국은 파멸을 만나게 됩니다.
의인의 삶은 영광스럽게 기억되고, 자기의 영달과 안전을 지키려 급급해하는 사람은
결국 패배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오늘 우리 정치의 현실을 보면 걱정됩니다. 미래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대면하며
밑지고 손해를 보는,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고 기다리며 주님의 뜻을 찾는 이를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승리자로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헛된 장담을 하거나 앙심을 품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좋지 못한 감정들을 몰아내고 나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처럼 어떤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제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당신께는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입술보다는 발걸음이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토마스 머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병자성사를 다니면서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습니다.
한분은 아들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수술도 하고, 여러 고비를 넘겼지만 6개월 정도 재활 운동하면 어느 정도 좋아질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자신의 불행을 원망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습니다. 몸도 아프지만, 마음까지 아파했습니다.
재활 운동하면 걸을 수 있고, 좋아질 거라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행은 원망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하는데
형제님은 몸도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니 안타까웠습니다.
형제님을 간호하는 가족들도 안타까워했습니다.
다른 한 분은 7년 전에 근 무력증이 찾아왔습니다.
스티븐 호킹이 걸렸던 병(루게릭병)입니다.
천천히 근육이 마비가 되면서 지금은 손가락만 겨우 움직일 정도였습니다.
병원에서도 호전될 가능성은 없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고통을 형제님은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아직은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딸들이 잘 자라주는 것도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눈으로 움직이는 마우스가 있어서 텔레비전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딸들이 자라는 걸 보는 것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비록 몸은 마비가 찾아왔지만, 형제님의 마음은 순수했고, 열정이 넘쳤습니다.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마치 욥과 같았습니다. 욥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나쁜 것을 주셨을지라도 감사드립니다.”
동료 사제들 중에도 불평과 원망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재능을 아깝게 소진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본당 신부 때문에 힘들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교우들 때문에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새로 성전을 신축하는 곳에 가서는 성전신축 기금 마련이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기존의 성당으로 가서는 조직과 시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보좌 신부님의 행동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뜻하지 않았는데 병이 찾아왔고, 오랜 시간 휴양 중에 있는데,
그것도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 때문이라고 원망했습니다.
몸이 불편하니 운동도 하지 못하고, 운동을 하지 못하니
몸은 더욱 불편해지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우리도 이제 모두 익어가는 때입니다.
아름다웠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동료 사제도 있습니다.
성전 신축하는 성당으로 3번이나 갔는데도 항상 싱글벙글 이었습니다.
일이 적으면 책 읽을 시간이 많아서 좋다고 합니다.
일이 많으면 결과를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간 수치가 높아서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매일 꾸준히 운동했고,
지금은 누구보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행복 바이러스가 있는 것처럼 그 신부님이 있는 곳에는 늘 웃음과 평화가 넘쳐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휠체어에 앉아서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형제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모든 것,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
제자들도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겁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인공이 되는 것을 기꺼이 포기했고,
조연의 자리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축일을 세상을 떠난 날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날로 정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역시 성령의 이끄심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일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요한 세례자의 죽음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이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모두 그리스도께 대한 증거였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가실 길을 닦아드린 다음, 그 길을 예수님께 내어 드리고
자기의 제자들을 그분께 인도하고 순교하신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리기까지 견디어낸 사람들과 수도자들의 아버지이다.
요한 세례자는 고행과 순교의 두 면을 보여 준 분이다.
그는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말하였고,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순교하였다.
그분은 당신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피로써 주님을 증거하신 분이다.
헤로데 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잡힌 몸이 되었는데,
이제는 헤로데의 만용이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를 볼 수 있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그 예언자적 정신은 항상 계속됐다.
예언자의 삶은 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권력은 진리를 외치는 입을 막아 침묵하게 하고, 또한 침묵을 강요하곤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들은 그 권력에 맞서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진리를 외쳐왔고 지금도 외치고 있다.
그 예언자적 삶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계승해야 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들이 바라고 기다리고 있던
엘리야라고 알기도 하였고,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고 세계를 지배할 승리를 가져다줄
정복자로서 엘리야를 생각할 수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서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분은 엘리야를 무한히 능가하시고 예언자들을 초월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기도와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분이 누구시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만에 빠져 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헤로데와 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요한 세례자의 자세를 본받고, 예언자적 삶을 살아가며
주님을 우리의 참 구세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대하고 모시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겠다.
세례자 요한의 허무한 죽음,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죽음에는 참으로 다양한 유형의 죽음이 있습니다.
살아생전 국가와 이웃을 위해 큰 족적을 남겼기에
수 많은 사람들의 애도와 눈물 속에 떠나는 황홀한 죽음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백수를 누리면서 평생 잘 지내다가
후손들의 환송을 받으며 떠나는 편안한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죽었다 깨어나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한 한 청춘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습니다.
난폭하고 오만한 지도자의 그릇된 정책, 게으름과 무성의, 안일무사함으로 인해 벌어진 대참사,
그로 인한 희생자들의 죽음도 정말 이해가 안됩니다.
오늘 수난 기념일을 맞이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구약 시대 마지막 대 예언자, 자기 뒤에 오시는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잘 닦은 선구자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한때 타오르는 횃불같이 찬란했던 그의 삶이었습니다.
죽는 모습도 그에 못지않게 장엄하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악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헤로디나의 간계와
허당 기질이 다분한 헤로데의 허언 한 마디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어이없는 참수형을 당하고 맙니다.
요한의 머리는 댕강 잘려져 쟁반에 담깁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담긴 쟁반을 받아 든 헤로디아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 수치스런 죽음인지요.
대예언자의 결말이 너무나 초라하게 끝이 나는 것 같아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힘든 분위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허무한 죽음,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예언자로서의 삶과 죽음의 본모습인 듯합니다.
쓸쓸하고 아쉽고 드러나지 않는 삶과 죽음,
자신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주인공이신 주님을
빛내게 해주는 존재로서의 삶과 죽음이 곧 예언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무척이나 신산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그것이 참 예언자로서의 삶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이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울 때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항상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또 다른 예언자들인 사제들과 수도자들, 선구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보다 가난해지도록 그들이 좀 더 고독해지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그들이 갖출 것 안 갖출 것 다 갖추고 떵떵거리며 산다면,
그것처럼 예언자로서 부끄럽고 비참한 삶이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예언자로 산다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박해받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일,
사회 정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는 일,
남들이 마다하는 선행과 봉사를 실천하는 일,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
손해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일,
그 일을 하고 계신다면 제대로 된 예언자의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랜 역사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참 신앙인의 길은 세상의 논리와 이치를 뛰어넘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결국 바보처럼 살게 합니다.
손해 보는 삶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언자의 길이요 의인의 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비록 비극적이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구원사업 성취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출생은 물론 생애 전체, 죽음까지도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위해 온전히 봉헌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성경을 안 읽는 이유는 이 습관을 버렸기 때문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세례자 요한이 순교한 날을 기념합니다.
헤로데는 왜 세례자 요한을 존경하면서도 목을 자르게 명령했을까요?
우리도 살다 보면 옳은 일이지만, 알면서도 그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인데,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성경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목을 치지는 않지만,
먼지가 쌓이게 두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이 좋은 걸 알면서도 읽지 않는 것이나
헤로데가 하느님 말씀을 듣기 싫어 목을 치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 신자가 성경을 읽는 시간은
반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독서 시간은 세계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성인 10명 가운데 6명 정도는 1년 동안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이 좋다는 것은 다 압니다. 유명인들 몇 명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모두 책에 있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을 찾아주는 사람이 바로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에이브러햄 링컨)
“당신은 결코 독서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워렌 버핏)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 도서관이었다.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하는 습관이다.”(빌 게이츠)
“남의 책을 많이 읽어라.
남이 고생하여 얻은 지식을 아주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그것으로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다.”(소크라테스)
이렇게 책은 마음의 양식만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돈도 많이 벌게 해주는 길이 됩니다.
그런데도 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책을 읽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이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그런데 오프라 윈프리는 ‘감사 일기’도 강조합니다.
신기한 것은 감사 일기를 쓰는 사람 중에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미라클 모닝’으로 유명한 할 엘로드도 감사를 강조하는데
아침엔 반드시 책을 읽으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왜 감사와 책 읽기가 함께 갈까요?
책은 마치 세례자 요한처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지침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지침은 내가 그 사람에게 감사할 때만 관심이 생깁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을 때인 사춘기 때 부모의 모든 말은 잔소리가 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감사할 때는 부모의 가르침에 귀를 쫑긋 세웁니다.
고마울 때만 듣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그저 이해하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습관이 들여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감사는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닙니다.
부모가 똑같이 사랑해 줘도 어떤 아이는 감사해하고 어떤 아이는 불만스럽습니다.
EBS에서 한 달간 부모를 칭찬하는 숙제를 사춘기 아이들에게 시켰을 때
아이들은 처음엔 힘들었지만, 나중엔 잘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집과 부모가 좋아져서 말을 잘 듣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감사 일기를 억지로라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 성당은 감사 일기를 나누어주고
매일 그날 읽은 성경 구절이나 하.사.시. 한 문장씩을 쓰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말씀을 읽게 하여 헤로데처럼 좋은 걸 알면서도
예언자의 목을 치는 사람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선순환됩니다.
감사하면 성경을 읽게 되고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그 사명 때문에라도 삶이 의리있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실행할 힘을 얻기 위해 성체성사나 고해성사에서 멀어지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 감사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어린이처럼 되려는 태도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감사 일기를 씁시다.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6,25)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입니다.
교회가 세례자 요한 성인의 탄생과 죽음을 기념하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이는 곧 세례자 요한의 삶이 예수님의 구원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에 이렇게 세례자 요한을 증언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먼저 생각났습니다.
이 우화는 아무도 임금님께 진실을 말하지 않았잖아요.
왜냐하면 힘이 있는 사람들은 자주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나쁘게 쓸 수 있다, 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어린아이는 거짓을 모르기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눈과 솔직한 목소리를 가져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권력이나 지위, 계급이 가진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잘못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것은 솔직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확신과 절대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
정의와 진실을 향한 의지의 문제라고 세례자 순교 축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가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대목은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열두 제자의 파견((마르 6,7-13)과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6,30-44) 사이에 삽입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린 요한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굳이 여기에 삽입한 이유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두고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난 것이다.”(6,14)하고 착각하고 있었으며,
이 소문을 들은 헤로데 역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6,16)라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시점에
요한은 헤로데의 군사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고(1,14),
오늘 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공교롭게도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헤로디아의 꾐(6,19-28)에 빠져
세례자 요한을 목 베어 죽임으로서 그의 사망일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도덕적으로 건전하지 못하고 부적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들은 것은 하느님의 꾸짖음이었건만
그는 오히려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고 그의 목을 베어 죽임으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먼저 그는 자기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한 것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네 형제의 아내의 치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형제의 치부이다.” (레18,16)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무력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패륜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충언을 무시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점이 다윗 왕과의 차이점인지 모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취함으로 인해 나단 예언자로부터 질책을 들었을 때,
담요가 젖도록 밤새 회개 하는, 통회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를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헤로데는 사람들 앞에서 경솔한 맹세를 해서
인생 일대 최악의 실수, 대형 사고를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부하신 것처럼 맹세는 함부로 하면 아니 되는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석에서
자기 기분에 들뜨고 살로메의 춤에 매료되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6,22)라는 약속을 맹세한 것입니다.
그 맹세가 올무가 되어 결국 그는 의인인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는
엄청난 역사적 범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을 범하고서도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번민은 했지만 회개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나 활동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는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세례자 요한은 불의한 일을 질책하는 일에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 권력자인 왕을 찾아가 그의 면전에서
그의 부도덕함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질책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예언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미구에 예수님 또한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주님으로 하여금 이제 요한이 준비하고 마련한 그 길을 통해
적극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모두 그리스도가 아니지만,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이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예언자적 삶을 살도록 불림 받았음을 오늘 기념일은 우리를 자극하고 도전합니다.
“악인은 제 악함 때문에 망하지만, 의인은 죽음에서도 피신처를 얻는다.”(잠14,32)라는 말처럼,
헤로데는 자신이 범한 그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그와 반대로 세례자 요한은 한낱 못나고 치사한 임금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요한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결과로 말미암은 순교를 통하여
그가 바라던 하느님의 피난처, 성채이며 보루인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5,10)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