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의 논란은 바야흐로 파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의협은 전면적인 폐업
을 결정했고, 이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안이해 보이기만 합니다. 우리는 의사들
이 결국 폐업을 결정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현실에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의사가 환자를 외면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
가 있을 수 없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폐업을 감행하려는 의사들의 비통한 심정을 우리가 이해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의사들의 불만은 단지 의약분업이나 수가인상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의료문제에 대한 안목도, 사회적 인식의 수준도 높지 않았던 의사들은 이제 과
거의 의사들이 아닙니다. 약가의 마진이 왜 그리 많았는지, 왜 편법이 보편화되
었던 것인지, 왜 열심히 일하면서도 자신들과 국민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졌
던 것인지, 의사들이 문제의 본질에 대해 직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의사, 국민,
정부, 아무도 만족하지 않는 우리의 의료현실, 더 이상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
이 모든 병폐가 다 드러난 오늘, 이제 이 모순을 없었던 것인 양 안고 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위기는 의료의 질과 국민건강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의사들이 양심적으로 진료하며 국민들과 함께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의료환경을
마련하는 계기로 반전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많은 의사들이 진료실을 뛰쳐나온
가장 큰 이유라고 우리는 판단합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의사들의 투쟁이 오직 수가 인상을 위한 것인 양 호도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세 차례에 걸친 대규모 집회와 단식, 삭발투쟁 등 전례 없
는 강한 반발에 나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의 진정한 요구가 무엇인지
성찰하고 반영하려는 정부의 책임 있는 태도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의
약일치의 오래된 관행을 뒤흔들어 놓을 의약분업을 시행함에 있어, 의료의 핵심
적인 축인 의사들을 무시하고 개혁의 대상으로 치부해버리는 사회적 분위기 역
시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의사들이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단지 밥
그릇 챙기기로, 수가를 인상하기 위한 투쟁으로만 인식되는 이런 상황에서 의사
들은 막다른 길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의사들이 반성할 바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어찌되었건 진료실 안에선 의사들
이 환자들에게 강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것도 사실입니다. 진작에 나서서 잘못
된 의료제도를 정면돌파하는 그런 용기있는 실천을 보여주지 못한 채 편법과
관행에 의존하였습니다. 분업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도 일관되지 못하고 혼선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주된 초점은 정부에게
맞추어져야 한다는 게 우리의 판단입니다. 무엇보다도 잘못된 의료제도를 운영
해온 당사자가 정부이며, 현 사태에 있어서도 도대체 분업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자신 있는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정부에 더욱 책임이 있겠기 때문
입니다.
밝누모는 의협의 폐업 결정과 의약분업을 둘러싼 파국적 상황을 바라보며, 고
민 속에 다음과 같이 입장을 표명합니다.
1. 의약분업은 성공적으로 정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사들의 합리적인 요청들이 충족되어 이미 법으로 정해진 7월 1일에
예정대로 분업이 시행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날짜가
정해졌다는 이유로 아무런 보완도, 분업이후 상황에 대한 책임있는 대책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7월 1일에 시행되는 것 또한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시행된
분업은 실패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최근 일부
의사들 가운데 의약분업은 우리 나라에는 맞지 않는 제도라며 '분업 반대'를 분
명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표출되는 것에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의약분
업은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점과 이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 앞장설 것임을
다시 한번 밝히는 바입니다.
우리는 의약분업의 성공적 정착에 대한 키는 이제 정부가 쥐고 있다고 판단합
니다. 정부가 의사들을 설득하고 협조자로 세울 수 있는가 여부가 이를 가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의약분업이 정권 후반부
의 가장 큰 실정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도입한 제
도가 소기의 성과도 거두지 못하면서 불편만 가중시키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
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보건당국을 포함한 정부의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에 정부에 간곡히 요청합니다. 정부가 진정 의약분업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생각이 있다면, 제대로 된 의료개혁을 위한 의사들의 합리적인 주장을 수용하고
지금이라도 철저히 준비하고 분업 이후의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총체적 의료
개혁의 플랜제시와 이를 위한 재정의 확충, 임의조제의 근절, 수가정상화 및 건
강보험제도의 개혁, 의료전달체계의 정상화 등 분업의 성공적 정착을 위한 의사
들의 요구에 비상한 결단을 내리길 다시 한번 요청합니다.
한편, 의협도 정부와의 협상에 적극 나서기를 촉구합니다. 그리고 모든 회원을
만족시킬 수준의 협상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정부의 대책이 어느 정도 합리적
인 수준이라면 일단 받아들이고 회원들을 설득할 수 있기를 요청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올바른 의약분업을 향한 의사들의 충정이 의약분업 자체의 폐기를 불
러오는 교각살우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업이 된 이후라도 이의 성공적 정착을 위한 법적 제도적 정비, 건강
보험의 개혁 등에 대한 우리의 외침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의약분업의 실패
나 왜곡을 막기 위한 노력도 지속할 것입니다. 또한 약사들과의 건설적인 협력
에 앞장서 협동을 전제로 한 분업의 진면목이 살아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2. 우리는 전면적인 폐업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의사들이 폐업결정에 이르게 된 일련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전면적인
폐업에는 반대합니다. 이는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뒤흔
드는 일일 뿐 아니라, 아무리 투쟁의 내용이 정당하다 하더라도 국민들을 설득
할 수 없는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설혹 폐업의 결과 정부의 굴복을 얻
어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민과의 신뢰악화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승리일
것이기에 그렇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전면 폐업의 과정에서 단순한 불
편함을 넘어 무고한 환자의 생명과 건강에 위해가 초래될 가능성도 있기에 우
리는 하나님과 국민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에 의협에 간곡히 요청합니다. 시민사회와 여론 속에서 동의를 얻을 수 없는
투쟁의 내용과 방법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 투쟁의 과정은 의
사-국민 사이의 불신의 벽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물어버리고, 국민
속의 의사로 뚜렷이 자리매김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에 폐업의 재고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그리고 전국동시다발적인 천막농성이나 무료진료 등 국민들
과 함께 할 수 있으면서도 무책임한 정부에겐 위력적인 투쟁이 될 수 있는 방
법을 고민하고 제시하길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천여 의사누가들과 그외 모든 기독의사들에게 권면합니다. 오늘의 참
담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표준이신 예수님이라면 어
떻게 하셨을까에 대한 정직한 질문과 답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상황
에서 그리스도라면 환자를 포기하는 전면 폐업과 같은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으
리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입니다. 우리는 누가들과 모든 기독의사들이 신앙적 양
심에 기초해 오늘의 사태를 반추해보고, 그리스도인다운 결단을 내리기를 간곡
히 권면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의 사태가 파국이 아니
라 올바른 의료제도의 산출로 귀결되도록 우리부터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우
리의 바램과는 달리 전면 폐업이 결행되는 비극적인 사태가 초래되더라도, 이로
인해 무고한 환자의 생명에 위해가 가해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맡은 바 자리
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국민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이번 폐업 사태로 인해 국민 여러분
께 심려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비난받아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비난만으
로 그칠 것이 아니라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왜 시작되었는지 관심가져 주시고,
무엇보다도 국민의 건강을 기준으로 움직이도록 질책해 주십시오. 우리 역시 가
슴깊이 반성하며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