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0.12.13.) 말씀/ 요한복음 3:16
하나님의 주는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Merry Christmas! 벌써 12월 둘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면 곧 성탄입니다. 해마다 성탄이며 캐롤이 울리고 시내 상가들은 불을 밝히고 캐롤를 틀고, 교회들은 성탄 축하 행사를 하며 분위기를 돗구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더욱 비대면하는데도 많고 조용한 성탄이 될둣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마음에 새기며 은혜의 성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성탄은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날입니다. 요한은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한 말씀이 신약 성서에서 최고의 복음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안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동기와 목적 그리고 이 땅에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준명하고 명확하게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이미 벌써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은 자들이고 살다가 죽으면 자동적으로 지옥에 갈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2:11-12절을 보면 우리가 어떤 자인가 이렇게 말 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생각해보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자들입니다. 이방인이고, 무할레당이고,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요 소망도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한 말씀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5-6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에 부은바 되셨다고 합니다. 왜 이런 사랑을 부어주셨나요? 어떤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사랑하니까입니다. 요한은 이 사랑이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어떤 자격에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문삼석의 그냥이라는 아주 짧은 시가 있습니다. 아기가 엄마 드에 엎혀 묻습니다. “엄만 내가 왜 좋아? 그냥. 너는 엄가가 왜 좋아? 그냥” 이게 시입니다. 사랑하니까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다 주고 싶은 것이 심리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계산도 하지 않고 아깝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내가 노력하고 수고한 모든 것은 사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왜 믿음이 제일이 아니고 사랑 입니까? 믿음이 먼저 이면 조건이 됩니다. 내가 믿으니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도 고귀한 선물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그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 역사의 출발점이 바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 때로 살아가려면 이 주는 사랑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주심으로써 조건 없는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누구나 받는 것을 더 좋아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주는 사랑이 없었더라면 받을 수도 없습니다. 주는 사랑이 받는 사랑보다 먼저이고 더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주는 사랑 때문에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물고기 중 가시고기라는 고기가 있습니다. 암컷 가시고기는 알을 낳은 뒤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수컷 혼자서 알들을 돌봅니다. 알들을 통째로 먹으려고 달려드는 다른 물고기가 많기에 수컷 가시고기는 사생결단으로 싸웁니다. 자기의 알들을 지키려고 수컷 가시고기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합니다. 그 알들이 부화해서 작은 가시고기가 될 때까지 열심히 자기의 알들을 뒷바라지할 뿐입니다. 그런데 가시고기들이 부화하여 어느 정도 크면 아빠 가시고기를 남겨두고 뿔뿔이 흩어집니다. 새끼들이 떠나가고 난 뒤에 늙은 아빠 가시고기는 지치고 힘이 빠져 돌 틈에 머리를 처박고 일생을 마칩니다. 이런 가시고기의 삶을 소재로 쓴 조창인 소설가의"가시고기"라는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소년 시절에 탄광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어머니는 가출하고 아버지마저 어린 주인공을 남겨두고 종적을 감춰버립니다. 부모 없이 천애고아로 온갖 고생을 하며 대학을 마친 주인공은 작품 활동을 하게 되고, 미술을 전공한 부잣집 딸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소아 백혈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게 됩니다. 가난한 남편과 투병 생활을 하는 아들을 견디지 못한 아내는 이혼한 뒤 어느 교수를 따라 프랑스로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을 떠나버립니다. 주인공은 엄청난 아들의 치료비를 마련하고자 간을 떼어 팔려고 하다가 간암 말기로 판정되어 간을 팔 수 없게 됩니다. 그러자 마지막 수단으로 한쪽 각막을 팔아 아들의 병을 치료합니다. 아들을 살려낸 주인공은 그 아들을 프랑스에 있는 엄마에게 보내고, 자기는 강원도 어느 산골에 들어가 생을 마칩니다. 이야기가 너무 슬픕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가시고기 아빠의 주는 사랑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탈 없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 노력인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고귀한 희생적인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아기, 어린 시절, 소년 청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부보의 희생적 돌봄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20-30대 커서도 자립 못하고 청년들은 여전히 부모의 도움을 받고 지냅니다. 부모뿐 아니라 알게 모르게 많은 주변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더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4절에서는 이렇게 말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가시고기처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본래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이셨고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예수님은 비천한 마구간에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나사렛이라는 시골동네에서 자라셨습니다. 빈민과 병자와 죄인들을 섬기고 치료하시며 사시다가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도 다 주셨고, 예수님도 다 주셨습니다.
저는 처음 이 주는 사랑을 잘 몰랐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주시옵소서를 잘 합니다. 주시옵소사! 저도 많이 달라고 기도하고 많이 받은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주는 사랑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알고보니 그 사랑을 어머니를 통해서 처음 배웠습니다. 살아오면서 언제나 어머니는 무엇인가를 주셨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더 많이 갖고 받으려하였지만 어머나는 자식들을 위해 무엇이던지 주시고 빼앗기셨습니다. 밥을 퍼도 먼저 다 주시고 마지막 꽁보리밥을 드셨습니다. 생선국도 토막, 토막 식구들 수대로 나눠주시다 보면 자신은 머리를 차지하셨습니다. 그러나 때론 그것마져 어린 자식들에게 빼앗기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전혀 불평이 없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아파도 억지로 일어나서 무엇인가 챙겨주시려 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는 당연히 주시고 나는 당연히 받는 줄로 알았습니다. 커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울 때도 아는 여전히 부족하여 부모의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조금 성장 한 후에 나도 이제는 부모를 섬겨야겠다고 생각하였는데 너무 늦었습니다. 더 이상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누군가에게 작은 것이라도 주는 것을 조금씩 실천하며 행복을 맞볼 수 있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이 진리로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무엇인가를 주는 것은 곧 사랑의 본질이며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고 사랑에 대해서 알아도 주지 않으면 아직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사랑은 단지 감각적이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살아있는 것을 주는 것이다.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즉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풍요롭게 만들고,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행동감을 고양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받으려주는 것이 아니지만 남에게 주는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 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기 안에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어떤 모양이던 그에게 다시 돌아온다. 참으로 줄 때,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는 것은 생산적인 생명의 활동 이다. 준다는 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게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아는 사람은 계속 주고 나누게 되는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계속 움켜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던지 가만히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썩고 흩어집니다. 그런데 작은 것이라도 주는 것은 신기하게 무엇인가를 탄생케 합니다. 주는 자 받는 다 모두에게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심으로(요한 3: 16) 믿고 모든 사람들이 생명과 행복을 누리게 되었고,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은 또 사랑을 나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무엇인가 주는 능동적 활동입니다. 주고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기도하지만 너와 나 사이에 생명의 강이 흐른다는 뜻입니다. 강이 있는 그곳에는 생명이 자라고 기쁨이 넘칩니다. 바베트의 만찬에서 한 여인이 복권 당첨된 1만프랑으로 최고급 요리를 섬겼을 때 신앙을 잃고 반목질시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활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누군가 무엇인가 줄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응암동 등갈비 사장인 동생도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맛집 식당운영에 숨 돌릴 틈도 없을텐데 주변 양로당도 돌아보면 떡이랑 과일을 섬깁니다. 일하시는 분들도 가족처럼 베풀고 섬깁니다. 제가 무엇을 보내면 모두 식구처럼 나누어 먹습니다. 심지어는 손님들에게도 나눕니다. 그렇게 바쁜 맛집을 운영하면서도 한번 씩 또 반찬들을 만들어 오빠인 저에게 택배로 보내줍니다. 다양한 반찬들을 받고 저는 보물상 자처럼 열어봅니다. 그 중에 등갈비, 주물럭, 백김치는 세계적 수준입니다. 나도 주변 분들과 나눠먹을 때가 있는데 맛을 본 사람들은 엄지 척이다. 로마의 권순만 선교사님도 카스 글을 읽고 이곳에 왔을 때 백김치 맛을 잊을 수 없다고 부럽다고 답글을 보냈습니다. 명남 집사님 아들 주안이도 주물럭을 맛보고는 내가 이제까지 먹어본 것 중 최고라고 합니다. 엄마보고 이렇게해주라고 한단다. 그러면 정미 집사님은 이렇게 말 한다고 한다. "엄마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ㅋㅋ 이렇게 줌으로써 기쁨이 세상으로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지난 주에 독서 보임이 시작되었는데 천 권사님이 전복이랑 찰밥이랑 조기를 많이 가져오셨습니다. 행복하였습니다. 홀로 사는 상국 목사님께 조기 반을 덜어드렸습니다. 저는 권사님께 냉동실에 바다표 간장 게장 몇 마리를 드렸습니다. 저녁에 너무나 맛있게 드셨다고 카톡이 왔습니다. 누군가 작은 것을 인해 행복하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얼마 전에는 이두인 형제가 장로 취임을 한다는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어떻게 할까하다 “그래 코로나 시국에 누가 축하해주기도 어렵겠구나” 해서 큰 맘 먹고 꽃다발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제주 특산 꿩 꿀을 보냈습니다. 생전 처음이라 집사님들도 한 수저씩 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김효주 선교사님이 신안 곱창 김을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지난 번에 주신 김은 임근호 형제님 심방가면서 선물로 드려서 마침 떨어진참이라 반가웠습니다. 소소한 관심과 배려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후 군대 송생호 집사님이 선교후원금 부낸다고 계좌 번호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제가 카톡을 계속 부내드리면 글을 잘 읽고 기도제목도 보내시는 분입니다. 기도만도 감사한데 고맙다고 알려주렸더니 50만원을 보냈습니다. 마침 김효주 선교사님 블라딕보스톡 비자가 나와서 떠나시는 참에 비행기표 일부 지원해드릴 수 있어서 감사가 되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분은 아들로 인해 마음 고생을 하즌 분인데 최근 딸이 코로나 걸려서 치료받고 있다했습니다. 냄새도 못 맡고 맛도 못 느낀다고 합니다. 기도 부탁했습니다. 어제 뜻밖에 잠깐 목포에 오는 김에 들린다고 열락이 왔습니다. 맛있는 기정떡을 사오셨습니다. 딸도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돌아갈 때 저는 미리 준비한 무안 곱창김 두 박스를 전해드렸습니다. 목요일에는 광주 임 아브라함 목사님 카톡이 왔습니다. 최근 아들 소천 후 못 봤습니다. 목포 집에 가는 길에 잠깐 김치를 조금 가져왔습니다. 요즘 김장철 맛있는 사모님 김치가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날 저녁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돌아가는 길 마침 제주에서 큰 형님이 귤 한 상자를 보내셨기에 귤을 좀 싸드렸습니다. 제가 이러한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떡이던, 반찬이던 ,선물이던, 좋은 글이던 책이던 무엇이던지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단지 사라지 고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강같이 흘러 메마른 심령에 기쁨을 주고 생명을 일으키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또한 생명의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모두가 기쁘고 행복하게 됩니다. 로마의 포리갑 선교사님이 글을 읽고 지난해 코로나로 섬겨주심에 대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왔습니다. 덕분에 9개월을 잘 이기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답글을 읽으면서 아직도 코로나가 안 끝났고 이태리는 아주 심각하데 앞으로는 어떻게 살지? 올해 성탄에 다시 한 번 더 헌금얼마를 보낼테니 계좌 번호를 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밤에는 블라디보스톡 황제임스 사모 정경선 선교사님이 카톡이 왔습니다. 황제임스 선교사님이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고 합니다. 혼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기도 부탁을 하였습니다.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코로나로 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성탄 험금을 보내들여야겠다 싶어 아침에 일어나 교회명 100만원을 보내드렸습니다. 정말 감사드린다고 카톡이 았습니다. 러시아 개척에 모든 것을 쏟아 헌신한 이분들이 코로나 잘 이기고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 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강처럼 흘러갑니다. 무엇인가를 줄 때 기쁨도 행복도, 생명도 흐르게 됩니다. 성탄시즌 우리는 외적 행사를 하지 않습니다. 한 주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주는 사랑을 묵상하는 시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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