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누구도 깨지 못한 지역주의의 높고 두려운 벽에 감히 도전합니다. ‘사즉생’의 결의와 각오로 총선에 출전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용기를 주십시오.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19일 대구 출마를 선언했다. 승부수라고 보기엔 엄청난 도박이다. 안팎으로 위기에 몰린 야당 대표의 폭탄선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국구 후순위에 배수진을 쳤던 사례는 있다. 하지만 당대표가 지역구를 포기하고 다른 당의 아성에 도전한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당내는 물론 정치권 전체에 미치는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불출마 러시로 촉발된 기득권 포기 흐름은 조대표의 대구행에 힘입어 4·15 총선의 핵심 이슈로 부상하게 됐다.
충남 천안 출신, 무소속·신민당·국민회의·민주당을 거치며 5선. 한나라당의 철벽을 깨기엔 어울리지 않는 경력이다. 그러나 조대표는 오래전부터 대구 출마를 두고 고민해왔다고 한다. “그동안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지역주의를 뚫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게 그의 변이다. 1987년 대선 당시 야권후보 단일화가 실패하자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했던 ‘뚝심’이 되살아난 셈이다.
대구는 선친인 고 유석 조병옥 박사의 정치적 고향이다. 조박사는 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 대구 을구에서 당선됐다. 6·25전란 중에는 내무부장관으로 대구 사수에 앞장섰다. 부자(父子) 당대표의 기록을 세운 조대표가 다시 아버지의 고토(故土) 수복에 나선 것이다.
조대표가 대구 출마를 선언하자 당 전체는 비장감에 휩싸였다. 당의 지지율 하락 등 총체적 위기국면이 조대표를 결단으로 내몬 탓이다. 추미애 상임중앙위원은 “조대표를 대구까지 보내야 하느냐”며 울음을 터뜨렸다.
김경재 상임중앙위원은 “순천발 서울행 열차를 타겠다”는 말로 호응했다. 장재식 상임중앙위원도 지역구(서울 서대문을) 불출마를 선언했다. 지난해 11월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지도부 5명 중 3명이 현재의 지역구를 포기한 것이다.
“나이 많은 나도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이만섭 전 국회의장), “장내에 2만V의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장전형 부대변인)란 상찬도 터져나왔다.
정작 호남 중진들은 반응이 엇갈렸다. 한화갑 전 대표는 “조대표의 결단에 존경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말해 ‘화답’을 예고했다. 한전대표는 수도권 출마를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옥두 의원은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고만 했다. 전북 고창·부안이 지역구인 정균환 전 총무는 “전국 최다득표율로 당선돼 부안 핵폐기장 문제를 깨끗이 해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상천 전 대표측은 “노 코멘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