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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게시판 스크랩 남양주의 조말생 묘 / 신도비
송서율창(송규철) 추천 0 조회 301 16.09.07 00: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태종조의 명신(名臣) - 조말생(趙末生)


○ 자는 평중(平仲)이며, 호는 사곡(社谷) 또는 화산(華山)이고,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젊었을 때 문정공(文貞公) 조용(趙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태종 원년 신사에 생원으로서 문과에 장원하였고, 태종 7년 정해에 중시(重試)에 뽑혔다.

    병조 판서를 지냈고,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집현전 대제학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 연려실기술 제2권 태종조 고사본말(太宗朝故事本末)

 

○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ㆍ우의정 조연(趙涓)ㆍ부원군(府院君) 연사종(延嗣宗) 등이

    남의 노비에 대한 소송을 가로맡아서 암암리에 압력을 가하여 판결을 얻었는데,

    사헌부에서 그 실정을 심사하여 말생 등이 모두 중도부처(中道付處)가 되었다.

   《잡기(雜記)》- 해동잡록 1 본조(本朝)

 

 

 

      

 

 

 

 윤종일 교수의 '남양주 역사기행(14)'- 조말생(趙末生) 묘 및 묘비

 말생 묘비 귀부  ⓒ 김준호

                                        - 윤종일(서일대학 민족문화과 교수) 


조말생(趙末生, 1370-1447)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자는 근초(謹初), 평중(平仲). 호는 사곡(社谷), 화산(華山).

본관은 양주(楊州). 서운관정(書雲觀正) 의(誼)의 아들이다.

 

조말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학문을 힘써서,

1401년(태종 1) 중시문과에 장원급제에 뽑혀서 요물고부사(料物庫副使)에 제수되었고, 감찰(監擦),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이조정랑(吏曺正郞)으로 영전하였다.

1403년(태종 3) 등극사(登極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重試)에 둘째로 뽑혀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장령을 거쳐 1411년(태종 11)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가 되었다가

곧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임명되었다가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418년(태종 18) 이조참판을 제수받고 품계를 뛰어서 가정대부(嘉靖大夫)로 가자(加資)되자,

조말생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이 오래 출납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조금도 계옥(棨沃)한 것이 없사온데,

등급을 뛰어 제수하시오니 성은이 너무 지중하와 진실로 마음에 부끄럽사옵니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경을 대신 자리에 두고자 하나 아직 천천히 하려 하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이어 8월에는 형조판서를 제수 받았다가 곧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정(軍政)에 관한 시종(侍從)을 맡아 태종의 총애가 더욱 융숭해졌다.

조말생 묘역   ⓒ 김준호


1419년 6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후, 조말생은 병조판서로서

세종의 지시를 받아 ‘대마도는 조선 당이며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속한다’는 서찰을 대마도주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1426년(세종 8) 장죄(臟罪)에 연좌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1432년(세종 14)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고,

1433년(세종 15) 함경도 관찰사 겸 함흥부윤 때 우의거(亏狄哈)침입을 격퇴하였으며, 1435년(세종 17)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1437년(세종 19)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1438년(세종 20) 경상․ 전라․ 충정 도순문사로서 축성을 감독하였다. 1439년(세종 21) 궤장(几杖)을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임술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차 되었다가, 이 해에 세상을 떠나니 이때가 78세이다. 시호는 문강(文剛).

 

특히 묘비는 귀부와 비신, 팔작지붕의 옥개석으로 되어 있는데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말생는 죽어 금곡에 안장되었으나 그곳에 고종황제의 능이 들어서면서

수석동 산2-1번지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조말생 묘비는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고산대로 길(석실서원지) 수석리 입구에 있는 문화재안내 표지에는 ‘조말생 신도비’로 되어 있다.
 

  윤종일 교수는..

- 서일대학 민족문화과 교수

- 경희대, 동 대학원 졸(문학박사)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남양주시)

- 풍양문화연구소 소장 

 

http://남양주타임즈  [2006-09-15]  

 

 

 

 

 

 

 

 조말생 초상(趙末生像)

 

 

  

초상화는 대개 기념이나 향사용(享祠用)으로 제작되므로,

원본이 산일(散逸)된다거나 자연적인 훼손 또는 박락(剝落)이 있을 경우

이모(移摸)나 가채(加彩)의 필요성을 지닌다.

 

《조말생상(趙末生像)》의 경우 필자 미상인데,

모제(帽制)나 복제(服制)가 조말생(1370-1447) 생존시의 그것과 다르다.

명나라 초기의 형식을 따라 사모(紗帽)의 양옆으로 뻗어 있던 뿔이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또 당시에는 아직 흉배 착용이 공식화되지 않았던 시기인데, 흉배가 그려져 있다.

 

한편 도상 형식도 전형적인 공신도상(功臣圖像)의 형식으로서

바닥에 깔린 돗자리를 제외하면, 완전히 17세기 초엽의 양식을 보인다.

 

좌안(左顔) 7분면에다 모란 침 쌍학 문양이 수놓인 흉배,

옅은 살색을 기조로 하여 음영을 별로 나타내지 않고

단지 오악(五嶽) 부위에 약간의 붉은 색을 삽입한 점,

굵은 묵선에 의거한 상징적 의습 처리,

그리고 좌측 단령(團領)의 트임새로 내비치는 내공(內供)과 첩리(帖裏),

의자 뒤로 뻗친 세모꼴 등이 조선 중기의 공신상 형식과 동일하다.

 

더욱이 바닥에 돗자리가 깔리는 것은 시대가 더 내려오므로

이는 조말생이 살아있을 때의 초상화로 보기 어렵다.

 

 

 

 

 

 

 

 

 

 

 

 

 

40년 전에 보물지정에서 퇴짜 맞은

조말생신도비(趙末生神道碑)

 

 

원래 금곡 홍릉 자리에 있다가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된

조말생 묘역과 신도비 내력에 대해서도 대충 살펴본 바가 있다.

 

특히 조말생 묘역 근처에 남아 있는 '용가리급' 신도비(神道碑)가

지방유형문화재나 문화재자료도 아닌 고작 '향토유적'이라는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매우 아쉬운 대목이라는 점은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서둘러 '최소한' 지방문화재로 지정 관리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예전의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을 훑어보다 보니까,

이 조말생 신도비가 '보물'로 지정될 뻔했던 기록이 눈에 띈다.

 

<고고미술> 1965년 10월호에는

그해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 제14차회의(1965.9.13~14일)의 회의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조말생묘비(양주) ...... 부결(否決)'이라는 구절이 남아 있다.

 

비록 보물지정에서는 퇴짜를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향토유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것은

영 경우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말생신도비는 그 유물의 가치에 걸맞은 문화재로 지정 관리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 <고고미술> 196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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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시 수석동 - 조말생(趙末生) 묘역과 신도비

 

▲ 서울 강변북로를 타고 구리방면으로 죽 따라 나가다가 외곽순환고속도로 토평IC를 지나

와부(덕소)와 팔당 방면으로 이어지는 6번국도로 접속되는 도로의 중간쯤에서

'강북정수장' 약간 못미쳐 이 '조말생신도비' 안내입간판이 눈에 띈다.

버스정류장 간판을 보니 정류장 이름은 '석실입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남양주시 수석동인데

이곳에 이르기 조금 전에 '수석동 토성'이라는 또 다른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부근에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말생 묘소와 신도비는 안내판에 써 있듯이 200여m 남짓한 곳에 있으므로

도로변에서 멀지 않고, 찾는 것도 쉬운 편이다.


▲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영모재'라는 재실 뒤편을 통해 묘역에 오르면

사진에서 보듯이 '석실서원지' 표석(1987.9.17일 경기도에서 세움)이 있다.

이곳은 서원철폐령 때 없어진 석실서원 터였는데,

'조말생'을 비롯한 양주조씨 일가의 묘소들이 원래의 자리를 금곡 홍릉으로 내어준 뒤에

이곳으로 한꺼번에 이장해왔다는 것이다. 


▲ 제일 높은 자리에 '조말생'의 묘소가 자리하고,

그 아래쪽으로 후손들의 묘소들이 층을 지어 함께 자리하고 있다.


▲ 조말생 묘역에서 한강쪽으로 내려다보는 풍경이 시원하다.

날씨가 흐려 흐릿하지만 강 중간쯤에 교각공사가 한창인 곳은 서울-춘천간 고속도로 공사현장이다.

바로 그 부근에 와부(덕소)도 코 앞에 보인다. 


▲ 묘역에서 물러나와 다시 조말생 묘소 쪽을 바라다 본 풍경이다.


▲ 묘역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조말생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신도비는 '영모재' 재실 쪽으로 내려가지 말고

언덕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금세 찾아낼 수 있다.

이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안을 살펴보면, 이 신도비는 '남양주시 향토유적 제8호'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도 아니고, 문화재자료도 아니고

그야말로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지정문화재도 아닌 '고작' 향토유적이란다.

'향토유적'은 문화재보호법의 테두리에도 속하지 못한 '비지정문화재'를 대상으로

'지방자치법 시행령'에 따라 시군자치구에서 제정한 조례를 근거로 하는

아주 낮은 단계의 관리형태를 말한다.

누가봐도 이 신도비는 '향토유적'이 아니라 마땅히 '도유형문화재' 혹은 최소한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관리하여야 할 것이다. 

남양주시 문화재관계자 혹은 양주조씨 문중의 누군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이건 '향토유적'으로 눈밖에 나는 것이 아니라 진작에 '지정문화재'의 범주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관계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 이 비석이 세워진 것은 "숭정후 80년(정해)" 즉 "숙종 33년 (1707년)"인데,

원래 양주 금곡동 묘적산 자락에 있던 것을 1900년 9월에 묘지가 먼저 옮겨오고 나서

다시 한참이 지난 1938년 5월에야 이것을 마저 옮겨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비석의 귀부를 보면, 그 모양과 크기가 그야말로 '용가리'급이다.

여느 것과는 달리 꽤나 크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것을 옮겨오는데만 10킬로미터의 거리를 4개월이 걸렸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하여 비신(碑身)의 옆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각(追刻)되어 있다.

"光武四年庚子九月因洪陵封標遷奉于同郡水石里乾坐原距故山南十里後三十九年戊寅五月徙舊碑立新崗記事之終始焉"



▲ 주변 일대가 음식점과 가건물 등이 드문드문 둘러싸고 있어 보존환경이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곳 역시 한강을 내려다 보는 풍치가 그럴싸 하다.

다시 강조하건대, 이 비석은 '향토유적'이 아니라 '경기도 유형문화재' 혹은 '경기도 문화재자료'와 같은 문화재보호법 상의 정식 문화재로 지정관리되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랄 따름이다.

 

(정리 : 2006.6.12.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추가 : 2006.7.25.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 출처 :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

 

 

 

 

 

 

 

 

 

- Era / Am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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