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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원문보기 글쓴이: Gijuzzang Dream
젊었을 때 문정공(文貞公) 조용(趙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태종 원년 신사에 생원으로서 문과에 장원하였고, 태종 7년 정해에 중시(重試)에 뽑혔다. 병조 판서를 지냈고,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집현전 대제학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 연려실기술 제2권 태종조 고사본말(太宗朝故事本末)
○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ㆍ우의정 조연(趙涓)ㆍ부원군(府院君) 연사종(延嗣宗) 등이 남의 노비에 대한 소송을 가로맡아서 암암리에 압력을 가하여 판결을 얻었는데, 사헌부에서 그 실정을 심사하여 말생 등이 모두 중도부처(中道付處)가 되었다. 《잡기(雜記)》- 해동잡록 1 본조(本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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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종일(서일대학 민족문화과 교수) 자는 근초(謹初), 평중(平仲). 호는 사곡(社谷), 화산(華山). 본관은 양주(楊州). 서운관정(書雲觀正) 의(誼)의 아들이다.
조말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학문을 힘써서, 1401년(태종 1) 중시문과에 장원급제에 뽑혀서 요물고부사(料物庫副使)에 제수되었고, 감찰(監擦),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이조정랑(吏曺正郞)으로 영전하였다. 1403년(태종 3) 등극사(登極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重試)에 둘째로 뽑혀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장령을 거쳐 1411년(태종 11)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가 되었다가 곧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임명되었다가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418년(태종 18) 이조참판을 제수받고 품계를 뛰어서 가정대부(嘉靖大夫)로 가자(加資)되자, 조말생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이 오래 출납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조금도 계옥(棨沃)한 것이 없사온데, 등급을 뛰어 제수하시오니 성은이 너무 지중하와 진실로 마음에 부끄럽사옵니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경을 대신 자리에 두고자 하나 아직 천천히 하려 하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이어 8월에는 형조판서를 제수 받았다가 곧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정(軍政)에 관한 시종(侍從)을 맡아 태종의 총애가 더욱 융숭해졌다.
세종의 지시를 받아 ‘대마도는 조선 당이며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속한다’는 서찰을 대마도주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1426년(세종 8) 장죄(臟罪)에 연좌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1432년(세종 14)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고, 1433년(세종 15) 함경도 관찰사 겸 함흥부윤 때 우의거(亏狄哈)침입을 격퇴하였으며, 1435년(세종 17)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1437년(세종 19)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1438년(세종 20) 경상․ 전라․ 충정 도순문사로서 축성을 감독하였다. 1439년(세종 21) 궤장(几杖)을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임술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차 되었다가, 이 해에 세상을 떠나니 이때가 78세이다. 시호는 문강(文剛).
특히 묘비는 귀부와 비신, 팔작지붕의 옥개석으로 되어 있는데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말생는 죽어 금곡에 안장되었으나 그곳에 고종황제의 능이 들어서면서 수석동 산2-1번지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조말생 묘비는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고산대로 길(석실서원지) 수석리 입구에 있는 문화재안내 표지에는 ‘조말생 신도비’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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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남양주타임즈 [2006-09-15] | ||||||||||
조말생 초상(趙末生像)
초상화는 대개 기념이나 향사용(享祠用)으로 제작되므로, 원본이 산일(散逸)된다거나 자연적인 훼손 또는 박락(剝落)이 있을 경우 이모(移摸)나 가채(加彩)의 필요성을 지닌다.
《조말생상(趙末生像)》의 경우 필자 미상인데, 모제(帽制)나 복제(服制)가 조말생(1370-1447) 생존시의 그것과 다르다. 명나라 초기의 형식을 따라 사모(紗帽)의 양옆으로 뻗어 있던 뿔이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또 당시에는 아직 흉배 착용이 공식화되지 않았던 시기인데, 흉배가 그려져 있다.
한편 도상 형식도 전형적인 공신도상(功臣圖像)의 형식으로서 바닥에 깔린 돗자리를 제외하면, 완전히 17세기 초엽의 양식을 보인다.
좌안(左顔) 7분면에다 모란 침 쌍학 문양이 수놓인 흉배, 옅은 살색을 기조로 하여 음영을 별로 나타내지 않고 단지 오악(五嶽) 부위에 약간의 붉은 색을 삽입한 점, 굵은 묵선에 의거한 상징적 의습 처리, 그리고 좌측 단령(團領)의 트임새로 내비치는 내공(內供)과 첩리(帖裏), 의자 뒤로 뻗친 세모꼴 등이 조선 중기의 공신상 형식과 동일하다.
더욱이 바닥에 돗자리가 깔리는 것은 시대가 더 내려오므로 이는 조말생이 살아있을 때의 초상화로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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