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경선 (1881-1955)】 "생명풀무꾼 원경선"
생명풀무꾼 원경선
인간을 풀무질해서 쓸만한 인간으로 만든다
20대 초반에 서울로 올라온 뒤 내가 줄곧 다닌 교회는 통상 '동신교회'로 불렸지만 정식 명칭은 '기독동신회 중앙교회'다. 목사나 장로 등의 교직제도가 없고 평신도들이 교회의 직제(職制)를 담당하는 수평적인 형태의 교회로 모두가 형제라는 뜻에서 '형제단(브레드린·brethren) 교회'로도 불린다. 지금도 전국에 20여개 교회가 산재해 있고 중앙교회는 제기동으로 옮겼다.특별한 사상적 지향이 없던 내가 동신교회를 선택한 것은 청년시절 나에게도 권위를 부정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었던 듯하다. 한때 교리를 둘러싸고 선교사들과 충돌해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도 이 같은 성향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자유롭게 살다간 '씨알 사상가' 함석헌(咸錫憲·89년 작고)선생을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이 아닌가 싶다.
나보다 10살 정도 위인 함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교회에서였다. 무교회운동을 벌이던 선생의 주장에 나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아 YMCA에서 있었던 선생의 목요강좌에도 자주 들렀다. 선생은 나중에 무교회주의도 버리고 보다 더 자유로운 '퀘이커교도'를 선택했다. 나는 공동체를 출범시킨 뒤 땅에서 바른 생활을 일구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선생의 사상을 그대로 따라갈 처지는 아니었지만 자유로운 신앙생활에는 크게 공감했다.
또 선생과 나는 농사라는 공통점이 있어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선생은 1957년 천안에 '씨알 농장'을 세우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그런 선생은 농사이야기를 하기위해 내가 운영하던 공동체를 찾아 부천과 양주를 자주 들렀고 나도 천안으로 선생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이 현대사에 끼친 사상·실천적 영향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농사에 관해서는 선생은 나보다 한참 아래였던 것 같다. 농사는 도리어 나한테 배워여 할 형편이었다.
여름이 한창이던 8월초 정도로 기억된다. 천안으로 선생을 찾아갔는데 선생은 포도밭에서 알이 영 부실한 포도를 들고는 고민스런 표정을 짓고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선생님?"하고 내가 다가가자 선생은 "포도가 하나같이 알이 차질 않네"라고 말을 받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포도송이가 나올 무렵 곁에 있는 포도순을 따줘야 하는데 시기를 놓쳐 포도가 제대로 영글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올해 농사는 포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며 농 섞인 말을 던지자 선생의 얼굴이 굳어지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또 한번은 늦가을에 천안농장을 찾은 적이 있는데 마침 호박죽을 끓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농장에는 항상 선생을 따르는 후학들이 있었는데 그날도 농장에서 생활하는 대학생 3명이 함께 였다. 선생은 밥상머리에서 "나는 원고료를 받으면 겨울날 걱정이야 없겠지만 너희들은 어떻게 겨울을 날 거냐"며 다소 걱정 섞인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물었다. 학생들은 묵묵부답이었다. 한해 농사를 지어 겨울날 걱정을 할 정도였으니 농사 실력은 알만했다.
함 선생은 나에게 사소한 문제나 고민도 많이 털어놓았다. 한번은 선생이 미국을 갈 일이 있어 공항에 배웅을 나갔는데 젊은이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선생이 교회운동과 관련해 노선을 달리할 때라 일시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줄어든 것인데 선생은 나에게 "원형, 나의 죄와 국가의 죄를 모두 지고 비행기에서 태평양으로 떨어져 죽었으며 좋겠네"라고 고뇌에 찬 말을 던졌다.
선생은 농사와 자유로운 신앙을 병행했다는 점에서 나와 통하는 면이 많았다. 그러나 선은 농사를 통해 바른 일꾼을 길러내겠다는 나의 의지를 여러모로 다져준 스승이었다.
학교 설립 후 거창고의 시련은 끝이 없었다. 대부분의 시련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바른 교육을 시키겠다는 전영창 교장과 우리 이사진의 의지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다가온 시련은 거창고를 더욱 굳건하게 단련시켰다.학교를 설립한 지 약 10년이 흐른 1969년에 3선개헌파동이 있었는데 거창고 학생들도 시대적 흐름을 좇아 반대데모 행렬에 참여하게 됐다. 이를 두고 교육위원회나 각 기관에서 주모자를 처벌하라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 교장은 학생들이 틀린 주장을 한 게 아니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화당의 지역구 의원까지 가세해 학교를 압박해 들어왔다. 그 의원은 거창까지 내려와 전 교장을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학교 문 닫을 줄 알아"라며 큰 소리 쳤지만 전 교장은 도리어 "거창고 문닫기 전에 공화당이 먼저 문닫을 줄 아시오"라고 맞받아치고 나왔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뒤에 곳곳에서 트집을 잡아오는 바람에 거창고는 더욱 궁지에 빠지게 됐다.
특히 교육위원회와 교육청은 집요하게 거창고를 공격해 왔다. 한번은 감사를 내려와 한나절이면 끝날 일을 4일 동안 샅샅이 뒤지더니 3가지를 위반사항이라고 지적하고 나왔다. 학급당 정원을 초과했고 무자격 교사를 채용했으며 이사장 승인 없이 교장이 200만원을 기채(起債)했다는 것인데 이를 빌미로 교장임명을 취소해 버렸다. 나는 학교재단 이사인 장기려 박사와 함께 부산에 있던 교육청으로 찾아갔지만 교육감도 어쩔 수 없다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소송을 하기로 했다.
소송은 너무나 싱겁게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쟁송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이다. 교육청은 대법원에 상소까지 했지만 최종적으로 기각되는 바람에 우리는 거창고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었다.
전 교장의 뒤를 이어 교장이 된 전성은 선생 시절에도 학교는 여러 차례 문닫을 위기에 처해야 했다. 이 말은 설립자가 운명을 달리한 뒤에도 바른 교육의 이념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이 계속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성은 선생이 교장을 맡은 지 얼마되지 않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그런데 군사정권은 사회정화를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무자비하게 인권을 유린했는데 탄압의 손길은 일반 고등학교에까지 미쳤다. 재교육시킬 문제학생을 군 당국에 넘기라는 지시가 각 학교에 내려온 것이다. 학교에서 군 당국에 문제학생을 찍어서 보고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학생을 끌고 가서 초죽음을 만들어 내보내는 비교육적인 행태가 곳곳에서 빚어졌다.
거창고에도 이런 지시가 내려왔지만 교장은 들은 체도 안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교감에게도 같은 압력이 내려왔다. 당시 교감이 지금 거창고의 교장인 도재원 선생인데 그 역시 만만찮은 사람이었다. 도 교감은 그 지시를 받고는 교육청으로 찾아가 "우리는 절대 이런 비교육적인 일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라고 담당국장을 몰아부쳤다고 한다. "국장님도 교육학을 전공한 것으로 아는데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지 못할 경우에 군대로 보낼 수 있다는 구절이 교육학 어디에 나옵니까. 또 학생을 교육시키지 못하는 학교라면 교사들이 학교를 그만두든가 학교가 문을 닫아야지 군대로 학생을 보내 재교육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라고 퍼붓자 국장도 그제서야 "도 교감, 내가 하고싶어 하겠어, 위에서 시키니 하는 수 없이 하는 일이지"라며 꼬리를 내리더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은 뒤로 학교에는 부당한 요구가 없었고 거창고에서는 한명의 학생도 군대에 넘기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한국 유기 농업의 개척자 원경선 풀무원농장 원장이 지난 1월 8일 향년 1백세로 별세했다.
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 간 1백세의 촌로(村老)의 삶과 죽음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기에 매스컴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그의 삶과 죽음은 한국교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원경선 선생은 농사꾼이자 복음전도자였다. 스스로도 "내 평생의 직업은 오로지 전도하는 농부"라고 밝힐 정도였다. 1914년 평남 중화군 상원면에서 태어난 원경선 선생은 11살 때 황해도 수안으로 이사한 후 교회에 출석하게 된 후 성경과 신학문에 몰두하게 됐다. 누구보다도 학문적 호기심이 많았지만 가난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초등학교마저 다닐 여유가 없어 장학금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학업을 이어가다가 결국 아버지의 죽음과 빚 때문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정정합니다- 장학금을 받아 보통학교 겨우 졸업했다고 들었습니다. 장학금도 아껴쓰고 후배에게 주라고 반환해 일본교장을 감동시켰답니다.)
어린 나이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을 결심한 그는 18세부터 전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농사는 단지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 시작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신앙 원칙을 지키기 위해 주변의 부러움을 사던 농장을 두고 서울로 올라와 농장 허드렛일, 우유배달, 우유장사, 사진사 등을 하기도 했으며,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인서사(타이핑을 대신 쳐주는 곳)를 차리기도 했다.
해방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원경선은 사업가로 변신해 토목건축 청부업으로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흙으로, 복음 전하는 일로 돌아왔다.
부천에서 농사와 함께 복음전도를 시작한 원경선 선생은 농업과 함께 청소년 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 원 선생의 사역은 인근의 미군 부대에까지 소문이 나 군목들이 그를 방문해 여러 부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날 미군들은 당시 그곳에서 일하던 고아 청소년들을 맡아 교육시켜 달라고 부탁해왔고, 원 선생은 고아들을 자신의 거처로 불렀다. 낮에는 이들이 자립할 수 있는 농사기술을 가르치고 밤에는 성경공부를 가르쳤다.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이 그와 함께 했다.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규모의 공동체가 형성됐는데 원 선생은 이 공동체를 인간을 풀무질해서 쓸만한 인간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풀무원 공동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렇게 공동체 생활을 하며 복음전파 및 농사를 지으며 살던 원 선생은 1974년 일본의 대표적인 유기농 신앙공동체인 애농회 창시자인 고다니 준이치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의 또 한번의 전환기를 맞게 됐다.
일본을 방문해 고다니 준이치 선생의 신앙과 사역에 감동을 받은 원 선생은 이듬해 그를 자신의 농장으로 초청, 친구 30여 명과 함께 강의를 들으면서 유기농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고다니 선생은 그곳에서 "생산력 증대를 위해 생명을 죽이는 농업을 하는 일본의 현대농업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생명을 보존하는 농업을 하라"고 충고했다.
1976년 1월 또다시 고다니 선생을 초청해 강연을 들은 원 선생, 오재길 선생(정농회 초대회장) 등은 "우리도 일본 애농회 같은 단체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해 그 이름을 '정농회(正農會)'라 이름 짓고 유기농 농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원 선생의 실험이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첫해 당시 돈으로 5백만 원, 둘째 해에는 3백만 원을 손해를 봤다. 또한 당시는 군사정권에 의해 오로지 증산만이 미덕인 시기로 오히려 감산을 초래하는 이 운동을 국가 정책에 역행하는 반동적인 것으로 간주했고 심지어는 '빨갱이' 아니냐며 이념적인 공세를 가하기도 했다. 원 선생은 극심한 자금난과 한밤 중에 몇번이나 벌떡 벌떡 일어날 정도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굶어 죽는 일은 없다'는 신념으로 3년째 다시 유기농을 시도했다.
유기농을 시도한 지 3년만에 땅은 힘을 얻었고, 당시 건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던 때라 유기농산물은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여기에 각종 일간지 등 매스컴에서는 유기농산물과 그의 성공에 대해 앞다퉈 보도해 국민적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원 선생 본인도 유기농산물로 건강을 되찾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15세부터 간디스토마에 걸려 자주 피를 토하고 항상 어지러웠는데 유기농을 하면서 자신이 직접 재배한 현미를 먹은 후부터는 그 증상이 말끔히 없어졌다고.
원 선생은 그 이후 유기농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며 1991~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UN환경회의에 아시아 농민으로는 최초로 '한국의 유기농 현상'을 주제로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복음전도, 유기농 이외에도 교육과 국제구호활동에도 큰 획을 그었다. 그는 1961년부터 2006년까지 경남 거창고의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거창고는 군사정권 시절 세 번이나 폐교 위기에 몰렸으나, 그때마다 그는 "타협하느니 차라리 학교 문을 닫겠다"며 굴복하지 않았다.
1988년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서 국제기아대책기구 행사를 보고 곧바로 국제 본부에 가입의사를 전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해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설립의 초석을 놓기도 했다.
아래글은 성경환목사의 증언이다.
전도인 원경선과 서울 북한산
왜 나를 살리셨을까...전도하는 농부되다
전도인 원경선(1914∼2013).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 자연의 힘만으로 농작물 키워 시장에 내놓은 사람. 한국 유기농법의 선구자이자 식품그룹 ‘풀무원’의 오늘이 있게 한 그리스도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호미로 땅을 고르던 농부 어른으로 기억한다.
환경과 생명을 존중하는 삶을 살았던 원경선은 ‘인간상록수상’(1988) ‘인촌상’(1988) ‘녹색인상’(1992) ‘UNEP 글로벌500상’(1995) ‘국민훈장 동백장’(1997) 등을 수상했다.
그는 보통학교 졸업하던 해 아버지를 잃고 지독한 가난과 상실감에 휩싸였던 가난한 소년이었다.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이라곤 소 두 마리 값에 해당하는 40원의 빚뿐이었다. 배움이 모자랐던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농사였다. 그러나 그 농사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다.
원경선은 세상이 요구하는 역경 극복의 영웅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산 신앙인일 뿐이다. 그는 열대여섯 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말씀을 따라 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세상의 유혹과 핍박 가운데서도 오직 말씀을 붙잡고 버텼다. 넘어지고 깨어지고, 예수를 멀리하고 회개하면서도 바른길을 걷고자 했다. 이러한 원경선 삶의 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정직’이다. 정직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보통학교 졸업한 가난한 농군 아들
원경선이 태어난 평남 중화군 상원군 번동리는 갈 수 없는 땅이다. 그가 가난을 피해 새로 정착했던 황해도 수안군 읍내면 옥현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수안에서 ‘교회’라는 신문명을 접하고 “그곳에 가면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접할 수 있는 호기심과 충족감 있었다”(생전 구술·이하)며 예배에 참석했다.
“그저 무언가 읽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성경을 읽고 고단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기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앙의 길로 접어들었다.”
해방 전 상경한 그는 고단한 서울살이를 했고 ‘충격적 사건’을 겪은 후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외국인노동자가 되기도 했다. 6·25전쟁 후에는 농사를 통한 공동체 생활을 위해 경기도 부천과 양주 등에서 살았다.
원경선 삶을 이해하는 지점은 북한산이다. 서울 돈암동-아리랑고개-정릉-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그의 북한산길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과 같은 하나님과의 대면 공간이다.
지난 추석 직후. 정릉 청수장을 지나 버스 종점에서 내려 북한산 산행을 시작했다. 정릉 계곡은 1970∼80년대 서울 시민이 즐겨 찾던 피서지였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기도 했다. 당시 계곡을 차지했던 상가는 말끔히 정리돼 맑은 계곡이 자연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지금은 북한산국립공원 정릉지구다.
“하나님, 이 사람이 제 대신 죽었습니다. 만약 그날 제가 죽었다면 이 사람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몸은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이 몸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저를 당신의 뜻하신 바대로 쓰시고 거두어 주십시오.”
1938년 여름. 원경선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했다. 북한산 계곡, 즉 ‘골고다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나고서였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
원경선은 먹고살기 위해 북한산에 올랐다가 강도를 만났다. 그리고 자신 대신 그 강도들로부터 죽임을 당해 백골 시신이 된 소년이 있었다. 그해 여름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릉리 백골 사건’ 중심에 원경선이 있었다.
원경선은 1936년 황해도 수안을 떠나 상경해 우유배달을 하며 교회생활을 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종로YMCA 야간 영어학교를 다니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이듬해 그는 서울 돈의동 플리머스 형제단 계열 교회에서 참한 지명희 자매를 만나 가정도 이뤘다. 부부는 전도자의 삶을 살겠다고 서약했다.
그는 결혼 전 교회 최병록 형제로부터 사진 기술을 배워 사진사가 됐다. 사진관 운영은 꿈도 꾸지 못하고, 사진기조차 빌려 잔칫집 등 기념사진을 찍는 출사로 돈을 벌어야 했다.
1938년 그 여름. 파고다공원(현 서울탑골공원)에서 무작정 고객을 기다리다 ‘동경 유학생’이라는 청년 2명을 만났다. 그들은 친구들과 북한산 소풍을 가겠다며 출사를 요구했다. 이튿날 원경선은 어머니 배웅을 받고 돈암동 전차 종점에 내려 그들을 만났다. 둘뿐이었다. 찜찜했으나 돈 벌 요량으로 아리랑고개를 지나 정릉골짜기로 접어들었다. 구슬비가 내렸고 안개가 자욱했다. 그들은 산행 끝에 북한산성 성문 어귀에 이르렀다. 지금의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깊은 숲으로 그를 유도했다.
“오늘은 숲의 안개 때문에 사진이 잘 안 나옵니다. 내일 다시 만나 찍어 드릴게요.”
간신히 그들과 헤어졌다. 이튿날 돈암동 전차역에 나갔을 때 그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석 달 후 ‘정릉리 백골 사건’이 터졌다. 서울 도렴동 문화사진관 17세 소년 사진사가 전신에 돌을 맞아 백골이 되다시피 발견된 것이다. ‘유학생 사칭’ 두 사람이 범인이었고 그들은 형제였다. 당시 신문은 ‘당초 강도들은 원모(원경선) 사진사를 죽이려 하였으나 말끝에 원모가 외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인면수심의 그들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 살해를 단념하였다’고 보도했다. 그 시절 렌즈값은 소 두 마리 값이었다. 백골 시신 발견 후 범인들은 절도죄로 형무소에 있어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원경선이 사건 보도 신문을 보고 경찰서를 찾아가 탐문 끝에 범인들을 잡을 수 있었다. 원경선 대신 강도 만난 사람은 ‘이웃’의 어린 소년이었다.
“그 순간 나를 지켜준 존재는 누구인가. 그분이 나에게 맡기신 일은 무엇인가 몇 번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살면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 되는 사마리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정릉리 백골사건’과 강도 만난 자의 이웃
어린 시절, 원경선은 보통학교 교사가 학비를 대신 내줘 그나마 졸업할 수 있었다. 훗날 “세상에, 그렇게 좋아보기는 처음이었어”라고 회상했다. 그는 졸업 후 모교를 찾아 농사지어 번 돈으로 학비를 반환했다. 교사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일본인 교장은 그의 정직함을 학생들에게 훈화했다.
그렇게 정직하고 성실했던 원경선은 졸업 후 교장 추천으로 영농자금 혜택을 군청으로부터 받았다. 어느 날 주일에 군청에서 모범 영농 시찰을 나온다고 했다. “주일은 교회에 가야 해서 안 됩니다.” 그가 거절했지만 돼지 잡고 술 받아 놓으라는 압력이 계속됐다. 주일 예배를 보는 중 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노발대발했고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군청 주사는 “조센징들은 근본 정신상태가 틀려먹었어. 천황폐하의 하늘과 같은 은혜를 도대체 뭐로 생각하는 거야”라고 몰아붙였다.
그는 짧게 답했다. “신앙에 위배되는 일로 나를 간섭하려 한다면 모든 것을 반환하고 내 길을 가겠습니다.” 황해도 수안 집을 떠난 이유였다.
서울 ‘강도 사건’ 후 원경선은 베이징으로 가 인서사(인쇄소)를 운영했다. 베이징행은 강도 사건의 충격을 잊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아내가 타이피스트 출신이었기에 사업이 가능했다.
베이징에서 해방 소식을 들은 그는 7년 만에 귀국했고 곧바로 토목건축 청부업에 뛰어들게 됐다. 영어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격히 신앙심이 흐트러졌다. 군정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공사를 딸 수 있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리스도인이란 건 말 그대로 명목뿐이었어. 정신없이 타락했지. 양심의 가책도 나중에는 모르겠더라고. 그러다 결국….”
어느 날 미군 트럭 짐칸에 앉아 인천 부평 공사현장에 가는 길이었다. 오류동에 이르렀을 때 과속하던 차가 미끄러져 전복됐다. 또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그는 양심을 찌르는 격심한 영혼의 통증을 느꼈다. “하나님 나 자신도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초자연 하나님만이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1949년 그는 타락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경기도 부천군 도당리(현 부천시 도당동)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고아를 돌보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 서울 경인로 고척스카이돔 앞 국도. 그가 교통사고로 두 번째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다메섹 도상이다. “북한산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얻었던 깨달음과 약속, 그리고 이를 망각하고 저버렸던 죄 많고 보잘것없는 인간을 살려 주신 하나님….”
그의 간증과 기도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의 제자 유재현(전 경실련 사무총장)이 생전 원경선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직업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주저 없이 답했다. “전도자입니다. 내 평생의 직업은 오로지 전도하는 농부올시다.”
풀무원과 원경선家
설립자일 뿐 경영에서 손 떼
최근 풀무원 계열사 풀무원푸드머스가 급식한 초콜릿케이크를 먹고 식중독 증상을 호소하는 사건이 있었다. 10여개 계열사를 둔 풀무원은 2조3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이다. 이 회사는 1981년 서울 강남에서 ‘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 이름으로 시작됐다. 원경선의 아들 원혜영(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직판장 대표였다. 그는 아버지의 풀무원농장과 정농회 농부들이 기른 유기농산물을 팔았다. 이 직판장은 1984년 풀무원식품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풀무원그룹이 시작됐다. 이때 합류한 사람이 원 의원의 고교동창 남승우씨다. 그는 1993년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현재 풀무원은 원 의원 또는 원씨가의 회사가 아니다. 원 의원이 경영권에서 손을 떼면서 지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풀무원그룹은 남 전 대표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