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여왕도 사랑한 식민지食 경제성·자극적인 맛 英 인기 얻어 영국인이 지은 ‘카레’란 이름 인도→영국→일본→한국으로
혀 끝의 세계 해외여행에서 먹은 한 파스타의 소스가 너무 궁금했지만 ‘몰라서’ 몇 년 동안 그리워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죠. 중식 스타일 면요리에 들어가는 굴소스였다는 걸 말이죠. 열린 신세계는 입맛의 지평을 넓혀줬습니다. 알고 먹으니 한입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눈으로 먼저 혀 끝의 세계를 만난 뒤, 주말이나 일상의 틈새에 새롭지만 즐거운 한입을 권해봅니다.
세덜리세 들리 부인께서 아들(조지프 세 들리)을 위해 근사한 카레를 만드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찰스 디킨스와 함께 19세기 영국 문학의 대표 주자로 손꼽히는 윌리엄 새커리의 1848년작 소설 ‘허영의 시장’의 일부입니다. 이 소설은 당시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부를 축적해 영국으로 돌아온 부자들인 ‘나와브’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베키 샤프는, 세금 징수관인 조지프를 유혹하기 위해 세 들리 가족과의 저녁 자리에서 처음 먹어 본 매운 카레를 ‘맛있는 척’ 먹습니다. 세 들리 가족들이 본국에 돌아와 카레를 먹는 건 일종의 ‘자랑 행위’이기도 했어요. ‘가 보고 경험한 자’만이 누리는, 인도를 기억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죠.
세계 인구 1위를 자랑하는 인도의 대표 음식 카레를 얘기할 때 영국을 빼놓기 어렵습니다.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며 영국인들의 대단한 ‘카레 사랑’이, 메이지 시대 일본에 전해지고 이후 한반도까지 전해졌기 때문이죠.
잠깐, 우선 한국에서 불리는 ‘카레’는 카레(curry)의 일본식 표현입니다. ‘카레’는 영국인이 지은 이름인데요. 여러 설 중에 채소와 고기를 기름에 볶은 매콤한 요리를 의미하는 남부 인도의 단어 ‘카릴(karil)’ 또는 ‘카리(kari)’를 기원으로 보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다면 이 카레는 무엇일까요. 마살라는 쉽게 말해 ‘종합 조미료’입니다. 과거 인도 가정에서는 생강, 강황, 고수 등을 돌절구에 갈아 일종의 양념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재료는 집집마다 달랐다고 해요. 강황(터메릭), 마근(커민), 후추, 겨자(머스터드) , 정향(클로브), 마늘, 생각, 허브 등이 있는데 가족이 좋아하는 재료나 건강 상태에 따라 조합이 제각각이었죠.
이 마살라는 매운맛이 특징인 가람마살라를 비롯해 치킨 마살라 등 다양하죠. 한국인에게 알려진 노란색의 카레는 강황을 주로 사용한 일본식 마살라라고 할 수 있어요.
17세기 초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지배한 영국은 1858년부터 1947년까지 직접 통치합니다. 18세기말 본국으로 돌아온 동인도회사 시절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맛봤던 카레의 맛을 잊지 못합니다.
그린 카레. [게티이미지뱅크]
이들의 향수를 달래준 곳이 1824년 런던의 하노버스퀘어 근처에 문을 연 ‘오리엔탈 클럽’이라는 식당입니다. 오리엔탈 클럽은 1839년부터 카레를 팔기 시작해 옛 동인도회사 직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죠. 9세기 후반에는 도시 중산층들도 이 카레의 맛에 눈뜨게 됐는데요. 인도에 살다 건너온 영국인인 ‘앵글로-인도인’ 문화가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진 것도 한몫했다,
당시 영국인들의 요리책에는 카레가 빠지지 않았죠.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인 요리사를 둘 만큼 카레를 좋아했어요. 손자인 조지 5세 또한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음식의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죠. 피지배자의 전통음식에 강한 애착을 보였던 영국인들의 모습에 대해,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행위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콜린 테일러 센은 ‘카레의 지구사’에서 “어쩌면 영국인들의 애착은 인도 통치 시대와 영국이 해상을 주름잡던 시대에 대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향수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라고 말합니다. 맛 때문이든,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든 지금의 영국에는 8000여 곳이 넘는 인도 식당이 카레를 판매하고 있답니다. 영국으로 이민 간 많은 인도인들도 이 흐름에 기여했죠.
이 카레는 1868년 메이지 시대 초기, 일본에 소개됩니다. 당시 영국 상인들이 카레 가루를 들여와 퍼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탈아입구(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 사상과 함께 서양 문물을 동경하던 일본인들은 카레에 열광했죠. 당시 일본 군부는 젊은이들의 체격을 키우기 위해 고기를 먹으라 강조했는데 일본식 카레는 고기를 곁들이기에 제격이었거든요. 이렇게 일본화된 카레는 1903년 이후 한반도의 개항장에 전해진 일본 제조 카레 가루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옵니다.
한국에서는 카레 가루를 활용한 카레라이스가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서양에서 와 고급 음식이었지만 누런 색깔과 간편한 조리법 때문에 저급하다는 인식도 있었기 때문이죠. 한국산 카레 가루가 생산되기 시작한 건 1963년입니다. 당시 제일식품화성주식 회사라는 곳이 처음 내놓은 가공식품 카레 가루였는데요.
이후 1969년 오뚝이가 최초로 인스턴트 ‘카레’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카레의 한국화’가 본격화됩니다. 한국의 카레는 비빔밥처럼 섞어 먹는 스타일이라 덮밥처럼 먹는 일본식과는 또 다른 차이가 있죠. 마침, 올해 오뚝이가 카레를 출시한 지 5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네요.
인도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일본으로 그리하여 한국까지 도착한 카레죠. 제국주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그 시간의 흔적은 혀 속에 남아있습니다. 달라진 점은 이제 서울 도심에서도 인도, 일본, 한국식 카레 식당을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코끝을 스치는 진한 카레향이 느껴진다면, 이번 주말 카레 한 그릇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