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제왕절개 수술로 아이를 낳는 산모 비율이 50%를 돌파할 전망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의료보험 청구 분석에 따르면 2017년 아이를 낳은 35만 8285명의 산모들 중 45%인 16만 1325명이 제왕절개 수술로 아기를 낳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많은 아기들이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왕절개(帝王切開). 이 이름이 참 기묘하다. 모체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수술이라는 의미의 제왕절개 수술에 전제 군주를 연상시키는 ‘제왕(帝王)’이 왜 수술의 이름이 되었을까?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물으면, 한결같이 시이저, 케사르, 혹은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로 알려진 로마 황제가 ‘처음으로 이 수술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제왕절개 수술을 뜻하는 영어 ‘c(a)esarean section(시이저리언 섹션)’이 그의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답이다.

시이저의 출생,상상도. ⓒ 위키백과
시이저는 자신이 ‘나는 여성의 다리 아래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공언하고 다녔단다. ‘맥베스’에도 여성의 다리 아래서 태어난 이는 결코 맥베스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들은 특별한 인간 존재를 암시한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태어나야 하는가? 우리 고대사의 개국 시조들은 ‘알(卵)’에서 태어난 것으로 편하게 해결했다. 나중에는 신빙성과 품위를 떨어뜨리는 ‘알’ 이야기보다는 비범한 ‘태몽(胎夢)’ 통해 출생 신화를 만들었다. 꿈이란 것이 누가 확인해 줄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고지식한 서양인들은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태어나는 어려운 방식을 오랫동안 고수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죽은 여인의 몸에서 배를 갈라 아폴론의 아들을 끄집어 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기는 자라서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되었다. 한발 더 나아가 아테나 여신은 제우스의 머리를 가르고 세상에 태어났다. 특별한 존재들은 출생부터 다르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시이저도 이런 이야기를 차용해 자신의 출생력을 날조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모친 아우렐리아는 시이저를 낳고도 50여 년을 더 살았으니 말이다.
이처럼 그리스 로마인들에게 어머니의 배를 갈라 아기를 꺼내는 수술은 낯설지도 않았다. 제왕절개 수술은 아마도 목숨을 잃은 산모의 뱃속에 남은 태아를 꺼내기 위해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인도의 외과의들은 임산부가 죽은 경우, 뱃속에서 어느 정도 자란 태아가 있다면 배를 갈라 아기를 끄집어냈다. 시이저가 태어나기 훨씬 오래전인 기원전 6세기의 로마법에는 임신부가 죽으면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 내게 했다. 그러니 시이저가 처음으로 이 수술로 태어났다는 말은 틀렸다.
죽은 산모만 제왕절개 한 이유는 산 사람에게 그 수술을 하는 것은 너무 위험해서다. 배를 가른 산모들은 목숨을 잃었으니까. 옆구리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낳은 마야 부인은 7일 만에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1537년에 배를 강제로 갈라 헨리 8세의 왕자 에드워드 6세를 낳은 제인 시모어는 12일 후 목숨을 잃었다.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도 제왕절개를 당하면 죽은 목숨이었다.

부처의 탄생. ⓒ 위키백과
이렇게 위험한 줄 알면서도 살아있는 산모의 배를 가른 이유는 무엇일까? 난산(難産) 때문이다. 분만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아 아기가 나오기 어려워지면 결국 산모와 아기 둘 다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 경우에 산모와 아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제왕절개 수술은 산모를 포기하고 아기를 선택하는 방법이었다.
산모도 목숨을 보존한 제왕절개 수술 기록은 1500년경 독일에서 처음 보인다. 난산에 빠진 산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남편이 아내의 배를 갈라 산모와 아기를 살렸다. 이 용감한 남편은 가축을 거세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어서 해부학 지식과 수술 기술이 있었다. 그는 13명의 산파와 의사로부터 도움을 거절당하자 하는 수없이 직접 아내의 배를 갈랐다. 좋은 남편을 두었던 이 산모는 이후로도 아이를 더 낳았다고 전한다.
16세기가 되면 제왕절개 수술 전문가가 등장한다. 그는 칼로 찢은 자궁과 배를 잘 꿰매고 잘 아물게 하는 자세한 처치법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여전히 19세기 중반까지도 제왕절개 수술은 매우 위험했다. 대부분은 죽고 살아남으면 아주 운이 좋았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50년 전인 1869년이 되어서야 제왕절개 수술은 비로소 안전한 수술로 자리를 잡아 오늘에 이른다. 물론 마취법, 소독법, 새로운 약물의 등장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시이저리언 섹션’은 왜 ‘제왕’의 절개수술로 번역했을까? 로마 황제의 대명사가 된 시이저(Gaius-Julius-Caesar)의 이름을 분석해보면 개인명-씨족명-가문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이저는 가문의 이름이었는데 그가 황제가 된 후에는최고 권력자를 뜻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면 우리식으로는 ‘황제수술’이 될텐데, 제왕절개로 부르는 것은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쓴 탓으로 보인다.

이름 자체가 황제가 된 시이저 ⓒ 위키백과
시이저란 이름은 주변 나라들로 퍼져나가 살짝 각색하여 최고 권력자의 이름으로 쓰였다. 프로이센 제국의 카이저(Kaiser), 러시아제국에서는 짜아르(tsar), 그리고 오스만튀르크의 카이저(Kayser)나 카이사(Qaisar)도 모두 시이저에서 유래했다.
한편 시저 샐러드(Caesar salad )에도 시이저가 등장한다. 이것은 시이저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 샐러드를 처음으로 개발한 이탈리아인 셰프 시저 카르디니(Caesar Card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