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과 묵상>
시리즈 주제: 십자가, 새 시대로 안내하는 하나님의 표지판
설교2.
십자가, 죄 사함과 회개의 복음
누가복음 24:46~48
이 설교의 제목은 변경될 필요가 있다. 십자가, 회개와 죄 사함의 복음으로. 회개와 죄 사함에는 순서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 반대도 맞을 수 있다. 죄 사함을 선포할 때 회개하고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회개한 사람에게 죄 사함이 선포된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고 죄 사함을 받을 수는 없다.
오순절 사건은 단회적인가 아니면 계속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사도행전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방언 현상과 사도 바울의 서신에 언급되는 방언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반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방언과 그 이후의 방언들은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출애굽 사건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여긴다. 그런 개입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위 두 의견 중에 후자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자가의 죽음이 예언의 성취로서 단회적인 사건이듯이, 예수님의 승천과 하늘의 보좌에 앉으심도 단회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이 부분을 강조한다. 마치 하나님이 그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홍해를 가르신 사건은 그 구원을 확증한 사건이었던 것과 같다. 성령강림을 경험한 사도들은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확신했다.
성경의 단회적인 사건은 그 후로 얼마든지 영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거룩한 제사로서 단회적이고 유일한 사건이다. 그런데 신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죄를 속량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드리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도 예수님의 승귀(昇貴)를 확증한 사건이지만, 사도들은 그 이후로 계속 성령충만을 사모하고 구했다. 그 이유는 또 다른 확증이 삶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시며, 그들 속에서 일하신다는 확증이다. 이런 확증이 신자들에게 용기와 담력을 준다. 그런 담력을 가진 사람들이라야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재연하려고 직접 나무를 지지 않는 것처럼, 오순절 성령강림이 재연되기를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도리어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절박한 것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절박한 문제가 있다.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노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확증을 주실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주일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초대교회의 성령강림 사건에서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과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왜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회개와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분부이기도 하다. 그리고 죄 사함의 확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인데 왜 그런지를 밝히는 것이 이번 설교에서 중요하다.
그러면 이번 설교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초대교회의 복음에서 핵심이 된 이유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결국 무엇을 성취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인류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핵심이 아닐까? 그리고 그 복음 전파가 최초로 일어난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말씀이 전파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톰 라이트다. 그는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죄 사함의 목적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오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죄 사함의 목적이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예언자들의 메시지도 무시하는 헬라의 플라톤식 이원론이라고 톰 라이트는 주장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이다. 그 죄 사함은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자유와 해방이 필요한 이유는 그 백성이 죄로 말미암아 포로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죄 사함이 선포되면 포로생활은 종료된다. 그것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며 자유 선언이다.
여기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 백성을 통하여 다시 이루신다는 말이며, 자유선언이란 그 일에 동참할 수 있는 자유민이 된다는 말이다. 종이나 노예의 신분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선언이며, 그 경륜에 동참하라는 초청이다. 그것은 비로소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람답게 산다는 말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바로 그 삶을 산다는 말이다. 그 창조의 아침에 계획하시고 선포하신 바로 그 삶을 말이다.
이런 기대와 소망을 잊지 않기 위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살에 새겼으며,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려고 예루살렘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 예루살렘은 다윗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그 두 위대한 약속을 이루시는 날, 세상은 다시 새롭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 이 땅에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의 통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생육, 번성, 충만이 될 것이다.
이런 희망과 기대를 가진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맥락도 배경도 없는 뜬금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안다면, 그리고 그 약속이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가 시급하게 회복해야 하는 것은 언약신앙이다. 그리고 그 언약이 무슨 내용을 포함하는지를 명확하게 하는 일이다.
<끝>.
설교안 전문:
https://cafe.daum.net/Wellspring/W8ej/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