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선덕여왕
불법으로 여성 한계 극복한 최초의 여왕
공주 때 불린 ‘덕만’ 석가족 공주 이름
분황사-황룡사구층탑 축성, 위엄 과시
여왕 연모 했던 지귀, 슬픈 설화로 남아
그녀가 절에 도착했을 때 기다림에 지친 그는 탑 곁에서 깜빡 잠에 빠져 있었다. 여왕을 먼 발치에서 보고 그리움이 사무쳐 병이 났다는 그 청년은 여왕이 행차한다는 날을 손꼽으며 며칠 밤낮을 지새웠나 보다. 여왕은 그 곤 한 모습이 애처로워 차마 단 잠을 깨울 수가 없었다.
탑 부근에서 잠시 머물던 여왕은 발길을 법당으로 향했다. 여왕이 예불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도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마를 붉게 물들일 정도로 햇볕이 내리쬐고 있건만 이 가여운 사내는 꿈에서 헤어날 줄 몰랐다.
그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여왕은 자신이 끼고 있던 팔찌를 가만히 벗었다. 그리고는 살며시 그의 가슴 위에 놓아두고 절을 빠져나왔다.
궁궐로 돌아온 지 며칠 뒤 그 청년이 죽었다는 소식이 여왕에게도 전해졌다. 그토록 자신을 흠모하던 그가 만남을 이루려는 찰나에, 심연처럼 밀려온 수마에 빠진 것이 너무도 원통해 가슴이 타 들어가 죽어버렸는가? 여왕의 심경은 슬프고 착잡하기 비길 데 없었다. 지귀의 가슴을 태운 불길이 얼마나 거세었는지 탑도 타 들어 가고, 서라벌 저자 거리까지 그 불길이 번져나갔다.
여왕은 그 가여운 사내를 위해 시를 지었다.
지귀는 마음에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신라 선덕여왕을 사모한 ‘지귀’라는 사내의 이야기는 조선시대 권문해가 쓴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실려 있다. 신라 저자거리에 떠돌던 이야기가 천년의 세월을 지나 조선시대 한 문인의 붓에 의해 기록되었으니, 이 설화는 그동안 수천 수만의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옛 사람들에게 가슴 절절한 사연이었던 것이다.
당시 선덕여왕의 나이는 오십대 초반이었다. 후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 해도 이미 오십을 넘긴 여왕이 여자로서의 큰 매력은 그리 없었을 것이며, 단지 역졸이라는 보잘것없는 신분의 청년이 여왕의 고귀한 신분에, 또 멀찍이서 바라본 위엄 있는 모습에 반했을 것이라는 풀이를 내놓고 있다. 참으로 멋없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너무 연모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여왕을 먼 발치서 바라보는 일밖에 할 수 없어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신분이 한탄 스러워서 가슴이 새까맣게 타버린 청년의 열정은 관점에 따라서는 조건을 사랑한 것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바보 같은 사랑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가 ‘여왕’이라는 그녀의 신분을 사랑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알아챈 선덕여왕의 마음까지 그러했겠는가.
여왕은 그의 순정을 전해 듣는 순간 “참 고마운 일이구나”라고 혼잣말로 읊조렸다고 전한다. 만약 여왕이 그를 그저 그런 바보 같은 청년이라 여겼다면 굳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영묘사로 찾아갈 일도 없었을 것이며, 또 그를 위해 팔찌를 벗어놓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에 대한 시를 지을 필요도, 또 먼 바다로 쫓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라는 ‘강한 부정’을 표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마음속에서 죽어버린 것이라 여겼던 마지막 열정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확인시킨 불꽃이 바로 청년 지귀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이기에 앞서 일국의 왕이었다. 그것도 삼국의 패권이 더욱더 거세지는 시대에, 여자가 다스리는 ‘만만한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내부와 외부의 적에 맞서 싸워야만 했던 국왕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왕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여자로서의 사사로운 마음은 버려야 했다. 지귀의 죽음을 듣고 안타까워하는 나약한 모습을 결코 보여서는 안 되는, 사랑에 웃고 우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국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 설렘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을 터. 그 보랏빛 그림자가 흐르고 흘러 오늘날까지 지귀설화로 전해진 것이리라.
선덕여왕의 어렸을 적 이름은 덕만이었다. 덕만이라는 이름은 부처님 당시 불교를 열심히 믿었던 석가족 공주의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석가모니의 아버지)이었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이었다. 스스로를 성스러운 골품(성골)이라 자칭한 신라의 왕실은 자신들의 혈통을 석가족의 후예로 연결 시키는 찰리종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석가모니의 아버지 백정과 어머니 마야부인이 결합했으니 이제 귀한 아들만 나면 되는 것이었다. 예정대로 아들만 태어나면 그는 신라에 환생한 붓다이자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왕실이 만들어낸 신화를 비웃기라도 하듯 진평왕 슬하에는 연달아 딸만 태어났다. 결국 성골 출신의 남자가 단손(斷孫)되자 신라 귀족들은 화백회의를 열고 진평왕의 맏딸인 덕만공주를 왕으로 추대한 후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바쳤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의 등극이다.
하지만 여왕이 왕위에 오르기도 전부터 진평왕의 후사로 여왕의 등극 결정에 반발하는 칠숙과 석품의 반란이 진평왕 53년(631)에 일어났다. 또 당 태종은 노골적으로 ‘너희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이웃나라가 업신여기고 있으니 당나라 황실의 남자를 왕으로 보내주겠다’는 조롱 섞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백제는 해마다 서쪽 영토를 공격해왔고, 진골 귀족들은 호시탐탐 그녀를 퇴위시킬 명분을 찾고 있었다.
이와 관련,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상징하는 세 가지 설화(삼국유사 선덕왕 지기 삼사조)가 등장한다. 그 중에 하나가 당 태종이 보낸 모란의 씨앗과 그림을 보고 그 모란에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알아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영묘사 옥문지에서 많은 개구리가 모여 심하게 울어대는 것을 듣고 백제군이 서라벌 근교에 위치한 여근곡이라 계곡에 잠입했음을 알아내 이들을 몰살시켰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여왕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아 자신을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다는 설화다.
이 이야기들을 뒤집어보면, 신라의 수도 바로 앞까지 백제군이 침입할 정도로 외부 침략이 빈번했으며, 당나라가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무시하고 있다는 의식이 신라사회에 팽배해 있었고, 또한 여왕이 항상 자신의 죽음을 가까이에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을 여자라고 업신여기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기로 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뒤 분황사가 낙성되었고, 9층의 모전석탑을 세웠다. 분황사(芬皇寺)라는 절 이름에는 ‘향기로운 성고황조의 절’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최근에는 선덕여왕 16년(647년)에 만들어진 첨성대 또한 천문관측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었다는 학설이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다. 31단으로 이루어진 몸통은 땅과 하늘과 합쳐 33천(도리천)의 상징으로 만들어졌으며, 원통형 몸통부위의 27단은 신라 27대왕인 선덕여왕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불법(佛法)으로 국가의 기강을 세우려 했던 작업 중에 하나가 바로 80미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황룡사 9층 목탑이다. 이는 그녀의 적극적인 지지자 자장 스님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은 여왕을 친견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중국 태화 못가를 거닐고 있을 때 갑자기 신인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어서 이웃나라에서 침략해오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 그 나라의 황룡사 호법룡은 내 장자인데, 범왕의 명령을 받아 그 절에서 나라를 보호하고 있다. 돌아가거든 그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라. 그러면 이웃 나라가 항복할 것이고, 아홉 나라가 조공하여 왕업의 길이 편안할 것이니라.’ 이 말을 마치고 사라졌습니다.”
이 탑을 세우기 위해 동원된 인력이 장인 200여명, 14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탑이 완공되었다. 이 탑에는 자장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사리가 안치됐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탑이 완성된 다음 해 상대등 비담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왕은 몸져누웠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선덕여왕을 이야기할 때 후대인들은 그녀의 지혜로움과 풍부한 감성, 그리고 후덕한 성품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료에 등장하는 그녀의 삶의 이면은 여왕의 ‘성스러움’을 지키기 위해 절대고독을 감내해야 했던 투쟁의 연속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가 몸과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은 부처님밖에 없었다. 불법에 귀의하고, 부처님의 위신력에 자신을 조아리며, 나라를 지켜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탑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보살계를 내리며, 자신이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전륜성왕임을 만천하에 천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는 이 풍진 세상을 벗어나 수미산 정상에 서 있다는 도리천에 태어나기를 발원했다.
인간이 걸어서 갈 수 있는 마지막 하늘나라인 도리천은 부처님 나라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인 욕계의 마지막 지점이다. 여왕은 그곳에서 차마 부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지귀를 만났을 지도 모른다. 신분도, 권위도 벗어버리고 뭇사내 뭇여인이 되어 마음껏 사랑을 나눴을 지도 모르고.
[출처] 신라 선덕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