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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주님변모주일)
어둠 속의 등불을 대하듯
출24:12~18; 벧후1:16~21; 마태17:1~9
오늘은 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이자 주님변모주일입니다. 우리는 매년 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을 주님변모주일로 지킵니다. 주님의 변모는 어떤 산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주 무대인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시다가, 이제 십자가를 지실 당신의 운명을 미리 아시고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후, 예루살렘을 향해 내려가는 도중에, 예수님은 세 제자만 데리고 어느 산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이 산은 타보르(다볼)산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타보르산은 갈릴리 호수에서 서남쪽으로 18Km 떨어져 있는데, 그 지역은 이스르엘 평지라고 알려진 유명한 평야지대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런 평지에 해발 600m 가까이 우뚝 솟아 있는 곳이 바로 타보르산이지요. 마치 제주도의 산방산을 떠올리면 상상이 갈 것입니다. 평지에 갑자기 산이 우뚝 솟아 있어 신비롭게 보이는데, 옛날부터 이 산이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변화산이라고 알려져 왔고, 4세기쯤에는 여기에 주님변모기념교회가 세워집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변화산으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모습이 변화되지요.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합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제자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세 분을 각각 모시겠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중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고,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제자들은 몹시 두려워 땅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있는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일어나라, 두려워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본문은 인간 예수의 인격 안에 있는 신적 원천이 물질인 몸을 뚫고 빛이라는 형태로 쏟아져 나온 것을 묘사하는 신비한 본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분의 신성이 드러난 것이지요. 그분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고 그분이 입은 옷까지도 예수의 몸을 뚫고 흘러나오는 내적 광채로 인해 빛이 났습니다. 아마도 이 장면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살아생전 미리 보여주신 장면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놀라운 영적 체험을 갖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빛나고 있는 하나님 현존의 찬란한 빛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은 너무 놀라워, 자신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고, 그냥 거기에만 머물고만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 산 위에서 가졌던 이런 제자들의 경험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도 이런 신비경험으로 초대하는 이야기일까요?
산 위에서는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오늘 본문 다음 구절을 보면, 산 아래에 남겨졌던 제자들이 겪었던 매우 곤혹스런 사건을 이야기해줍니다. 마을에 남아있던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간질병에 걸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이 아들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 아들은 간질병에 걸려, 불 속에 빠지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병에 걸린 자신도 부모도 도무지 제어가 되지 않는 이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건만,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무력했습니다.
여러분, 사실 이것이 산상변화보다는 우리에게 더 익숙한 상황이지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간질병, 아무 때나 몸이 마비되고 뒤틀어지니까 물속이든 불 속이든 넘어져 버리고 마는 통제 불능의 현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마음같이 통제되지 않고 우리의 통제 밖에서 제 마음대로 굴러가는 경험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합니까? 사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우리의 삶의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사는데,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는 겁니다. 제자들도 그것을 어떻게 해 보려고 했지만, 그것에 대해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력하고, 진땀나고, 창피하고, 위축되는 상황이 매일 벌어지지요. 이렇듯, 예수님께서 변화되어 빛과 같이 빛났다는 신비사건은 우리와 너무 멀고, 오히려 남은 제자들이 치렀던 곤욕이 우리의 일상과 가깝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24장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모세가 돌 판에 기록된 율법과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는 장면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랐을 때,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물렀는데, 주님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자 산꼭대기는 주님의 영광으로 타오르는 불처럼 보였습니다. 모세는 이 구름 가운데를 지나 산 위로 올라갔는데, 밤낮 사십 일을 그 산에 머물렀습니다. 여기서도 구름은 인간의 통상적인 감각과 인식으로는 알 수 없는 무지의 세계, 신비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런 구름을 뚫고 모세는 하나님의 신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런데, 산 아래 남아 있던 백성들은 무엇을 하나요? 모세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기다리다 지쳐,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며 뛰노는 광란의 축제를 벌어졌지요.
하나님의 산 위,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인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계명을 받는 거룩한 순간에 벌인 이 광란의 축제는 어쩌면 산 아래의 비극의 또 다른 면입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산 위에 머물고 있자, 모세가 빨리 보여주었으면 하는 하나님의 능력(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더디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현존의 상징을 금송아지로 자신들이 재빨리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신이다.” 외칩니다.(출32:8)
여러분, 이것이 우리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요? 우리도 얼마나 기적 같은 삶을 원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삶을 이끌어줄 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지긋이 앉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우리를 이끌어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눈에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신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요.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머튼의 금언처럼,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든 다 주워오는 것이지요. 그것으로 인해 우리 둥지가 불편해지든 뭐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주님을 믿고 주일이면 예배도 드리고 평소 기도도 하지만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은 분명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경험한 세계, 또 모세가 경험한 세계를 성경은 계속해서 이야기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 세계를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 세계는 무지의 구름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바탕이고,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고 하는 것은 망상이요 착각이라고 하는데, 우리 중심에는 하나님의 언제나 내주하시고, 우리를 그 중심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경험하는 현실은 그와는 너무나 달라서 우리는 오히려 낙심할 때가 더욱 많이 있습니다. 향심기도 수련을 계속 하라고 하는데, 오히려 메마름만 경험하고 그 중심의 달콤한 맛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우리의 지향은 매일 흔들립니다. 그런데 세상이 우리를 끄는 힘은 얼마나 강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게 뭐든지, 우리를 불편하게 할지 행복하게 할지에 상관없이, 반짝이는 것이라면 모두 주어다 쌓아놓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오늘 아주 적절한 안내를 해 주는 책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후서입니다. 베드로후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늦게 나온 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약 2세기 초, 소위 사도시대가 끝나고 교부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주후 90~140년 쯤)에 쓰여졌다고 합니다. 이때는 사도들이 경험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생생했던 체험이 점차 교리적이고 교훈적인 언어로 바뀌는 시대였습니다. 생생한 영적경험 자체보다 그것을 교리화 하거나 도덕적 권면을 하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거기에다 거짓 선생이나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진리를 흐르게 하고 핵심을 왜곡시키는 일이 일어나자, 더욱 기독교 신앙을 교리적으로 변증하려는 일이 일어났겠지요. 변증하다보면 생생했던 체험(가령 예수부활 경험)은 어떤 고정된(나중에는 진부한) 언어 속에 갇혀 버리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오늘 베드로후서 본문에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재림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가 아니라, 제자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이라고 합니다. 재림은 주님의 현존을 온전히 만나는 때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한다”는 소리를 거룩한 산에서 들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했던 이가 말합니다.
우리는 이를 직접 본 경험이 있다. 지금은 매우 불확실한 시대이고 어둠의 시대이지만(왜 그래요? 오신다는 재림은 오지 않고, 주님에 대한 강렬했던 경험들은 점차 사라져 가니 말입니다. 거기다 신앙을 왜곡시키는 거짓 예언자들이 이런 저런 말로 진리를 흐리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을 가리는 모든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들이 다 제거되어 분명히 하나님의 빛/하나님의 현존을 바라볼 때까지, 더 이상 헷갈리지 않는 확실한 구원의 자리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이 부여하신 당신의 온전함을 더 깊이 경험하기까지, 하나님이야말로 우리 생명의 원천이요, 우리의 바탕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경험하기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낫습니다”, 하는 겁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신구약 성경이 말하는 핵심,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일 수 있고, 오늘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으로 요약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벧후1:4)일 수도 있겠지요.
이런 약속들이 아직은 분명하게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습니다. 아직 구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은 알 길이 없습니다. 아직 환한 대낮의 빛은 없습니다. 아직은 캄캄합니다. 아니 어쩌면 샛별이 뜨는 시간, 동이 트기 직전의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등불을 대하듯! 이때 우리가 할 일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요즘은 등불로 밤을 비추는 경우는, 드라마에서 말고는 거의 없습니다. 밤에도 거의 전깃불이 환히 비춥니다. 저는 어릴 때, 시골에 살면서 등불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등잔불이라고 해서 요즘 양초보다 더 약한 불빛으로 밤을 비추었습니다. 아버지가 섬기시던 교회는 저녁 예배가 되면 유리등으로 가려진 작은 등 대여섯 개를 켜 놓고 글자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수요일, 주일 저녁이 되면, 예배를 위해 유리등을 닦곤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땐가 고등학교 때 그 곳에 전기가 들어왔는데, 그때 30촉짜리 전기불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환하게 주님의 현존을 볼 수 있고,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분명히 붙잡고,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분명히 볼 수 있기 전까지, 우리가 할 일은 흐릿한 빛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분명히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나아갔던 아브라함처럼, 우리에게 갈 길이 분명히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길을 걸어가면서 얼마나 길도 여러번 잃고 실수도 많이 합니까? 그런데 그는 그런 중에도 주님의 등불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끝끝내 그 등불을 따라 갔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마음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 이 주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 안에 비치는 하나님께서 켜 놓으신 등불이 있습니다. 희미하지만 그 빛은 여러분을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말씀을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 반복해서 몸과 마음에 새기는 것, 그 빛/말씀에 의지해서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 더듬더듬 나가는 길이겠지만, 그렇게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 등불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반짝인다고 다 주워 모으지 말고 등불을 따라가십시오,
이제 이번 주 수요일에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40일간의 사순시기로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다시 빛으로 조명해 보고 다시 길을 다시 재조정하는 시기입니다. 이때 우리는 성경 말씀으로, 또 믿음의 선배들이 주신 말씀을 따라 우리의 어둔 길에 등불을 삼으려고 합니다. 아직 대낮처럼 환하지 않을 것입니다. 온전히 깨닫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들을 잘 듣는 것, 그것이 어둠 속에서 등불을 대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할 것,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며, 여러분의 삶은 주님이 붙잡고 계시고, 여러분의 생명의 원천은 주님이시라는 사실은 아직 분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상처받은 기억을 잊고 꼭 기억할 그 핵심 기억을 분명하게 하려면, 여러분은 잘 들어야 합니다. 기억하라, 잘 들으라/순종하라! 오는 사순시기는 바로 이것을 행하는 시기이고, 여러분 안에 켜진 등불을 소중하게 다루는 시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대낮처럼 환하게 주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그 안에 살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비추이는 작고 희미한 등불을 따라 주님께서 약속하신 길을 잘 따라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