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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현재 대전교도소에서 의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대전대흥침례교회를 섬기고있는 예운해집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있을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간섭하시고 감당할 시험만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1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4남2녀의 4남인 아버님께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읍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성격이 극과 극이시라서 어릴 때부터 다툼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소위 대표적인 역기능가정이라고나 할까요. 학창시절 공부는 곧잘 했지만 이기적이고 내성적인탓때문에 대인관계가 그리 원만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입연합고사후 유성고등학교로 배정이되었습니다. 참 운도 지지리 없지! 왜 가장 먼 곳으로 배정이 되었단 말인가! 약1시간40분정도의 통학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도보로 3km→흑석 역에서 서대전역까지 기차로 이동→서대전4거리까지 도보→1번 버스로 리베라호텔 앞에 도착→유성고까지 도보). 8시가 넘어 도착을 하면 운동장에서 기다리시던 교련선생님에게 얼차레를 받기 일쑤였습니다. 당시고등학교1학년 담임선생님이셨던 양희태선생님의 배려로 당시 마패로 불렸던 장거리통학증을 발급받아 얼차레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장거리통학으로 너무 힘들다고 판단하신 부모님의 배려로 12월부터는 하숙을 하게 되었고 좀 더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시절 수학을 좋아하고 부모님의 부담을 줄여 드리고자 포항공대로의 진학을 생각했으나 입시한달 전 미국에서 공부하고오신 큰외삼촌의 권유로 갑자기 의대를 지원하게 되었고 충남대학교의대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후 성격을 좀바꿔봐야겠다 결심하고 과대표를 출마했으나 차점자가 되어 반대표를 하게 되었고 학술써클에 들어가 그야말로 술을 배웠습니다.그러던중 체육시험에서 부정이 발각되어 F학점을 맞게 되었고 내인생은 왜이리 꼬이냐고 자조하며 술을 들이키며 달랬습니다. 2학기개강첫날 같은학년 형님에게 전도를 받았고 인기가 좋았던 그형님과 어울리고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아리와 인도하는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겨울수련회때 방언을 받는 성령체험을 경험했습니다. 방언통변도 받았는데 두려워말라 내가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말라 나는 네하나님이 됨이니라는 이사야말씀을 들을수있었습니다. 본과1학년이 되어서는 공부와 여러 가지스트레스로 우울증이 찾아와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고 항우울제를 복용했습니다. 점심먹으러 같이 갈사람이 없을 정도로 스스로 왕따였습니다. 그당시 참석하던 모임은 CBA라는 모임이었는데 그당시 이단시비로 시끌어웠던 모임이었고 본과1학년때부터 대흥침례교회와 대학부모임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도 했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부족한터라 기복적이고 감정적이고 굴곡이 많은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본과1학년 미생물실습시간에 B형간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본과4학년이 되었을 때 사회생활과 수련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신앙적으로 좀더 바로서겠다는 마음으로 먼저 군복무를 지원했습니다. 12주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논산노성보건지소에 배치가 되었고 교회에서는 청년부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첫청년부예배가 끝나고나서 대학부때부터 알던 자매님이 한자매를 소개해준다기에 주말에 커피숍에 나갔을 때 놀라지않을수없었습니다. 대화중에 고향이 비슷한 것을 알게되었고 쉽게 가까워지게되었고 3개월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생활이 3개월정도지났을 때 피로감 때문에 동네내과에서 간기능수치가 높아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들었고 충남대병원에서 조직검사상 만성활동성간염판정을 받았습니다. 그시기는 내인생가운데 최고로 힘든시기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결국공중보건의 1년6개월이 지나 의가사제대를 하게되었습니다. 진로를 고민하던 저는 경험도 부족한상태에서 진잠에 의원을 개업하였으나 건강이 다시악화되어 3개월만에 많은손해를 보고 폐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자유롭게 풀어주기위해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원래 아내는 뇌하수체선종으로 배란장애가 있어 나중에 불임치료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첫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부채를 정리하고나니 딱1200만원이 수중에 있어 처갓집2층옥탑방으로 이사하게되었습니다. 3월이었는데 밤에는 너무나 추웠습니다. 가끔씩 의료부를 통해 들어오는 대진아르바이트를 통해서 연명했습니다. 너무나 쪽팔리고 챙피해서 교회예배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문제를 해결해주시지않겠나싶어 도곡기도원,부여기도원,보문산기도원,홍도동기도원등을 전전했습니다. 기도원을 내려올때는 힘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실망과 죄책감만가지고 내려오곤했습니다. 침으로 간염,간경화를 고친다는 월간지기사를 보고 무작정 경기도어딘가를 찾아가 침을 맞기도했습니다. 그러던와중에 주안장로교회나겸일목사님간증테잎을 듣게되었습니다. 목사님도 간암말기판정을 받고 3일밖에 살지못한다는 판정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이 치료받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테잎을 몇백번은 듣고 또들었습니다. 조금씩 회복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대전순복음교회전도지를 보게되었고 상담을 통해서 대전순복음교회에 출석하게되었고 저녁9시에 있는 겟세마네기도회에도 참석하게되었습니다. 그러던와중에 의료부를 통해서 삼성외과봉직의자리가 들어왔습니다. 얼마후 면접을 보았으나 천안에 계신 가정의학과선생님이 출근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났을 때 다시연락이 왔는데 천안에서 대전으로 오던 중 교통사고가나서 제가 대신 출근하라는 연락이왔습니다. 약9개월 정도를 너무나 재미있게 다녔습니다. 출산을 앞둔 상황이라서 집을 구해야하는 상황이었는데 김택규원장님의 배려로 1000만원을 가불해주셔서 태평동주공아파트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외과에서 9개월 정도 근무했을 때 은행동에 좋은세상의원을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피부과 비뇨기과를 진료했는데 제대로 수련을 하지 않은지라 크고작은 의료사고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마치 살얼음위를 걸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병원은 제법 자리를 잡고 잘되는 편이었습니다. 2004년 36세 때 혈액검사에서 AFP(종양표지자검사수치)가 상승되어 동아방사선과에서 CT촬영결과이상소견이나와 동양방사선과에서 MRI촬영을 하였고 다시 을지병원에서 조직검사결과 간암판정을 받게되었습니다. 아산병원에서 수련한 동기의소개로 서울아산병원에서 간암제거수술을 받고 퇴원하게되었다. 당시는 둔산동의 샘머리아파트에 살았는데 샘머리초등학교운동장구석에 앉아 고뇌했습니다. 아이들만 생각하면 불쌍하고 눈물만 났습니다. 도대체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자책감과 하나님과 모든 이들에게 대한 쓴 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내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십일조도하고 봉사도 했는데 고작 내게 돌아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서대전세무서에서 세무조사통보가 왔다. 수입을 8000만 원가량 누락했다는 것이었다. 세금폭탄이 예상되었습니다. 아내가 서대전세무서에 간암진단서를 들고 가서 무릎을 꿇고 빌어서 결국 수천만 원이 예상되었던 세금을 200만원만 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을 때 많은 분들의 관심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 교구목사님이셨던 김정림목사님의 위로와 격려가 있었고 의료선교위원회를 중심으로 1000만 원 이상의 후원금을 받았습니다. 잘참석하지않았던 고등학교동문회에서도 350만원을 송금해주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었다 싶습니다. 특별히 신명집사님부부는 500여만 원이 드는 록원이의 치아교정을 무료로 시술해주셨습니다.두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천사와 같았습니다. 또한 좋은 책과 과일 등을 챙겨주셨습니다. 또한 많은 분들의 중보기도가 있었습니다. 송학록안수집사님부부,이상덕목사님부부,강월영안수집사님부부,여동생의 기도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는하루하루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습니다. 대인기피증과 중증우울증으로 교회예배조차 드릴수없게 되었습니다. 신앙도 인격도 바닥으로 치달았습니다. 희망도보이지않았고 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1년 정도 아산병원경과관찰이후 아산병원으로의 경과관찰도 가지 않았습니다.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나는 3억짜리 종신보험에 가입하고 있었는데 가입 후 2년이 지나면 자살을 해도 보험금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너무나 힘들어 가정법원을 찾아 이혼판결까지받게 되었으나 결국1개월 이내에 구청과 동사무소에 신고를 하지 않아 이혼은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와중에서도 장인어른과 장모님께서는 한 번도 저를 원망하거나 나루라지 않으셨고 오히려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생각하면 두 분의 사랑과 배려는 너무나 크고 놀랍습니다. 당시 대흥교회의료선교위원회총무로 활동하시던 송도외과 유정준원장님으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원장님의 배려로 반나절씩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급여로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운동도 하지않고 출퇴근도 용이하지 않자 버드내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이사했습니다.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자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어서 결국1층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6년3월 어느 날 송도외과수술실에서 전신마취제로 쓰이는 썩시닐콜린을 훔쳐서 안방화장실에서 정맥주사하게 되었습니다.1초도 지나지않아서 제 몸의 모든 호흡근을 비롯한 근육이 마비되어 호흡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게되었습니다. 후회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약20초가지난후 의식을 잃었고 약30분이 지났을 때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부족한 저를 다시 한 번 살려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자 다시 한 번 죽기를 결심하고 철물점에서 밧줄을 구입하러 갔는데 낌새가 이상했는지 용도를 물으시기에 빨랫줄로 쓰려고 한다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당시 차트렁크에 자살용 밧줄을 가지고 다니며 날을 잡으려 했습니다. 당시 처갓집이 배재대 학교 앞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도솔산을 여러 번 오르게 되었기에 목을 맬 나무까지 봐놓았습니다. 3월이면 신학기인데 아이들에게 얼마나 충격이 되겠는가. 조금 더 지나면 아이들이 소풍이라고 알림장이 와서 조금만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5월이 되면 어린이날이 지날때까지만하는 식으로 지옥같은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와중에서서도 하나님 살아계시면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성을 잃고 신앙도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로또복권을 구입하고 야동을 보고 바둑TV로 보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내는 운동과 식이요법을 권유했지만 자포자기 한 저는 운동도 식이요법도 등한시했습니다. 그러던 2007년 3월 새벽3시경 잠이 깨었는데 모든 피로와 우울감이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밤새 하나님께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치료했음을 직감한 저는 곧장 그 시간에 교회로 달려가 약1시간정도를 회개와 감사의기도로 눈물범벅이 되었습니다. 건강이회복된이후 저를 도와주신 송학록집사님의 차남인 호준이가 오랫동안 만성신부전으로 투병중인 것을 알게 되었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새벽에 가서 기도해주게되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6년이지 난 지금도 새벽5시경에 세 명이 모여 경건의 시간을 통해 말씀을 나누고 중보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경제적인이유로 씽크빅교사를 하다가 버드내로 이사하면서 영어과외 및 영어교실을 운영하였습니다. 물질적인 복도 부어주셨습니다. 송도외과에서의 계약기간인 2년이 지났을 때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오랜만에 대학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대화중에 대전교도소에서 의무관을 뽑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내에게 떠밀려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강검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계룡병원에서 건강검진결과 GOT180, GPT200 이 나와 과천에서의 면접에 불참하려했으나 울며 겨자 먹기로 면접을 보게되었습니다. 얼마후 갑자기 연락이 와서 2007년 5월28일부터 대전교도소에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출근했을 때 의욕만 앞서서 좌충우돌이었습니다. 그런나머지 주위사람들을 힘들게 했고 특히 과장님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어 완전냉전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과장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새벽기도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어 지금은 너무나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습니다. 배사랑 내과에서 2007년 8월경 다시 간암이 발견되었습니다.그러나 4개월을 숨기고 기도만 했으나 우연히 같이 근무하시는 의무관선생님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산병원에서 다시 간암절제수술을 받고 회복되었습니다. 토요일에는 QT가 끝나고 나면 충대병원암병동을 찾아 위로하고 전도했습니다. 한번은 신우회예배가 마치고 나서 교도소를 퇴직하신 장로님께서 천안법원장이 충남대병원에 말기간암으로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씀하셔서 곧장 충대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병실앞에는 면회사절이라고 적혀있어 사모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간단하게 간증을 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3일을 방문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주주일날에는 가족들이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예배 중에 판사님여동생이 예수님 품에 안기는 환상을 보게 되었고 곧바로 소천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구원하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학교참석은 가정회복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르고 골라서 제게 주신 아내임을 깨닫자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아내와 대화만하면 싸움이 돼서 오히려 대화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2010년 연말에 우리구역 조선호전도사님에게서 구역교사로 섬기는 것이 어떠냐고 권면을 들었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2011년부터는 구역교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사탄은 저를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역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육신의 정욕을 통하여 역사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저는 많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공사중입니다. 40대에 잘 훈련받고 준비해서 50대에는 영혼구원, 제자양육,가정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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