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의 꿈
일본은 올림픽 위원회에 도쿄올림픽 각국 선수와 대회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해자들을 기리는 묵념 시간을 갖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로 인해 그해 연말까지 14만 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사람들은 원폭후유증으로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인도적 입장에서는 주최 측인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마땅해 보인다. 그러나 올림픽 위원회는 일본 측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는 어려운 결정을 했다.
문제해결은 법과 원칙, 상식과 도리, 기타 공서양속 등 제반 사정에 입각해서 탄력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국제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국익과 선린우호관계 유지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기본에 입각해서 상대방의 요구에 대한 해결은 첫째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결정, 둘째는 상대방 요구에 응해주는 결정, 셋째로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입장이 있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제문제 해결에 있어 혹 세 번째 입장은 아닌가 싶은 우려를 안겨줄 때가 많다. 그것이 어디 최근에 느닷없이 나타난 행태이겠는가?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요 대신들이 나라 팔아먹는 일에 앞장을 선다. 말하자면 국정 최고 권력자들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소리다. 그 앞잡이들을 역사는 친일매국노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집권당을 거스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친일로 몰아세우는 경우가 많다. 눈에 거슬리는 세력을 친일로 매도하는 그런 재주꾼들이 만약 구한말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들의 영악성 정도라면 세월이 흐른 후 매국노라는 말 자체가 역사에 있지도 않도록 애국행위로 둔갑시켜 놓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작금의 굵직굵직한 사건에서 일부정치지도자들이 최종판결에도 불구하고 무죄라 주장하며 사법체계마저 부인하려는 일들을 자주보아 왔다. 자신의 명리를 위해 위안부를 이용해오다가 여의치 않으니 아예 위안부단체에 대한 비판자체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려 시도한 Y의원의 영악성도 혀가 내둘려진다. 이 개명천지에서도 법의 지배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주장만을 정의로 우기는데 구한말 어두운 세월을 그 영악성으로 휘둘렀다면 아무리 매국을 했다 해도 애국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여반장이었으리라. 그렇게 보면 을사오적에 대해서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 나라를 팔아먹는 그 재주로 조금만 더 간계를 부렸더라면 얼마든지 정의와 진리를 뒤바꿔 놓았을 수 있었겠다 싶은데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순진한(?) 구석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마저 해본다.
박지원 국정원장이 8월 둘째 주로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을 연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1일 “한미 연합훈련을 하면 남북 관계 개선도 없다”는 발언에 보인 반응이다. 여당 의원들은 훈련연기를 위한 연판장에 72명의 서명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국정원이 김여정의 하명기관으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볼멘소리까지 나온다. 그들의 행위가 구한말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선 일본의 앞잡이 을사오적의 행위와 무엇이 다르냐? 다른 것이 있다면 오적은 매국노로 남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불법적 행위를 합법으로 만들어버리고 입을 씻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는 것이다.
서해바다에서 총탄을 맞고 불태워 죽은 공무원을 외면하고 천안함 폭파피해자를 조롱하고 청해함 전사들을 비참하게 하는 정권이 지금 임대차 3법도 더 강화하는 법을 만든단다. 양도세를 수 백 가지의 경우수로 만들어 세무사도 난해하여 손들게 하고 있다. 그들은 언론중재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법제정을 진행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관행이었던 야당의 법사위원장을 거머쥐고 4년 동안 독주를 하다가 하반기에 가서야 야당에게 돌려주기로 한다더니 그마져 없던 것으로 뒤집어 버린 모양이다. 그들은 위안부관련 기관이나 민주화운동에 대한 비난을 처벌하는 법 제정도 시도했다. 이런 정권이 구한말에 나라 팔아먹는 현장에 있었다면 매국노의 멍에를 그대로 뒤집어쓰겠느냐?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무슨 법으로 대못을 박아서라도 그들은 정의로운 얼굴로 남으려 했을 것이다.
종로 어느 서점 담벼락에 ‘줄리의 꿈’ ‘줄리의 남자’라는 벽화를 그려놓아 난리법석이다. 대선주자 윤석열 부인을 빗대어 그린 벽화다. ‘한때 줄리라는 이름으로 호스티스를 했다’ ‘줄리는 숱한 남자와 어떻다’ 이런 소문을 벽화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저질 비방에 정치폭력이며,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인격 살인이다’라는 비판이 있지만 막무가내다. 이런 판국에 “대한민국의 ‘쥴리’들은 절대 영부인이 되서는 안 되는 거냐?”는 옹호인지 공격인지 아리송한 반론도 제기되고 있어 참으로 난장판이다.
이전에 어느 국회의원이 ‘더러운 잠’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을 조롱하는 나체화를 국회에 전시해서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다. ‘줄리의 꿈’ ‘더러운 잠’으로 소동을 일으키는 사람들, 인간들이 저보다 어떻게 더 저급하고 사악해 질 수 있을까? 싶어져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줄리의 꿈’으로 시끄러운 벽 앞에는 ‘대통령의 꿈’으로 부푼 사람들의 행보가 바쁘다. ‘줄리의 꿈’이든 ‘대통령의 꿈’이든 이제 대한민국은 누구의 앞잡이가 뒤흔드는 나라가 되지 말고 아름다운 꿈으로 이어지는 땅이 되어야한다.
봄철에 아름답게 핀 각종 꽃들은 ‘줄리의 꿈’을 안고 여름을 견디며 가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날이 되면 영글어진 알곡으로, 탐스러운 열매로 풍요로운 들판을 노래하게 해줄 것이다.
2021. 8. 4. 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