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알아차림과 사띠는 같은가 다른가?'(665, 654)라는 글 두편을 읽으면서 어느 번역가가 말한 ‘번역은 살인이다’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그만큼 원문의 의미와 느낌을 완벽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힘들다는 뜻인 듯 합니다. 마침 제가 미얀마 국제불교대학 총장이신 우 난다말라 사야도 [대념처경] 강의를 듣고 있는 중이고, 떼자니야 사야도로부터 배운 가르침을 토대로 몇 자 적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에까사라 거사님께서 인용하신 대념처경의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사띠를 확립하여’라는 부분을 각묵스님은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로 번역했고, 전재성씨는 ‘올바로 알고 깊이 마음챙겨’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세 번역자가 번역하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올바로 알고’의 원어는 ‘삼빠쟈냐’입니다. 그리고, ‘사띠를 확립하여’ ‘마음챙기는 자 되어’ ‘깊이 마음챙겨’의 원어는 ‘사띠’입니다. 물론 문장내에서 어미변화는 있습니다.
먼저, 삼빠쟈냐와 사띠의 의미 혹은 기능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 난다말라 사야도께서는 위 대념처경 문장속에서의 삼빠쟈냐가 바로 팔정도의 바른 견해(정견)이고 사띠는 팔정도의 바른 사띠(바른 알아차림)를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삼빠쟈냐의 기능에 대해서는 [사야도 법문모음]에 올려진 ‘사야도의 삶, 수행, 그리고 수행지도’에 잘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네가지 삼빠잔냐 중 첫 번째는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해이고, 두 번째는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은가에 대한 이해입니다. 세 번째는 물질과 정신에 대한 이해이고, 네 번째는 무상·고·무아에 대한 이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로 지혜를 의미합니다.
사띠에 대해서 사야도께서는 늘 바른 대상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하시고 실제 설명속에서는 알아차린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하십니다. 아비담마에서도 ‘잊지 않는 것’을 사띠의 역할이라고 정의합니다. 대부분의 수행처에서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사용하고, 마음챙김이라는 단어로 정착시킨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초기경에서 사띠는 마음(마노)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활성스님께서 처음 사용한 마음챙김으로 사띠를 옮긴다’라고 설명합니다. 청정도론에서는 ‘기억하기 때문에 사띠라고 한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잊지 않는 것을 그 역할로 한다. 몸 등에 대한 사띠를 확립하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사띠의 의미 속에는 바른 대상을 잊지 않고, 마음을 챙기고, 알아차리는 이런 의미들이 다 포함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 마음챙김, 마음새김 등의 단어들이 사띠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그 어떤 단어도 완벽하게 사띠의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와 닿고 주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하되 실제 수행체험 속에서 사띠의 기능을 스스로 이해하면 된다고 봅니다.
다시 위의 대념처경 문장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각묵스님 번역)는 결국 사띠와 함께 삼빠쟈냐 지혜가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야도께서 알아차림(사띠)만을 강조하지 않고 늘 지혜를 강조하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야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사띠가 앞장을 서서 수행을 이끌어 가게 되고 지혜의 힘이 약해 나중에 작용을 한다. 조금 더 수행을 하게 되면 사띠와 지혜가 어느 정도 같은 비중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지혜의 힘이 더 좋아지게 되면 지혜가 앞장을 서게 되고 더 이상 사띠를 챙기는 것은 무의미해진다.”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혜가 앞장을 서게 되고 사띠를 챙기는 것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은 사띠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수준에서는 사띠가 이미 기본적으로 늘 작용하기 때문에 따로 챙길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띠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가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다면 사띠는 반드시 그 속에 함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띠를 단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삼뺘쟈냐를 대상에 대한 이해, 즉 지혜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면 사띠와 삼빠쟈냐는 근본적으로 그 성질과 역할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사띠와 삼빠쟈냐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옮기고 보면 헷갈릴 수 있습니다. 에까사라 거사님은 ‘알아차림과 사띠는 같은가 다른가?’라고 하셨는데 앞의 알아차림은 아마 삼빠쟈냐를 옮긴 단어라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알아차림이라는 의미는 사띠의 기능에 포함되고, 실제로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알아차림과 사띠는 같은가 다른가?’는 질문 자체가 혼란을 가져 올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삼빠쟈냐를 ‘분명한 앎’으로 표현하신다면 의미가 더 분명할 것 같습니다.
‘분명한 앎(삼뺘쟈냐)과 알아차림(사띠)은 어떻게 다른가?’
첫댓글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