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필 ]
시인 이정하는 1962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륜중학교, 대건고등학교를
거쳐 원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원광대학교 국문과에 재학중이
던 1987년 <경남신문>,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문단
에 나온 이후 『우리 사랑은 왜 먼 산이 되어 눈물만 글썽이게 하는가』,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등의 시집과 산문집 『우리 사는 동안에』, 『소망은 내 지친 등을 떠미
네』,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아직도 기다림이 남아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등을 펴냈다.
고교시절부터 각종 문예 콩쿠르에 입상하는 등 문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
을 보여왔다고 한다.
[ 시 집 ]
『 우리 사랑은 왜 먼 산이 되어 눈물만 글썽이게 하는가 - 1991 』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 1994 』
『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1997 』
『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 1999 』
『 한 사람을 사랑했네 - 2000 』
[ 산 문 집 ]
『 우리 사는 동안에 - 1992 』
『 소망은 내 지친 등을 떠미네 - 1993 』
『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 1996 』
『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 1997 』
『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1 - 1998 』
『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2 - 1999 』
『 아직도 기다림이 남아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 1999 』
[ 이정하의 시 ]
-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 에필로그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리하여 그와는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랑은 가혹한 형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랑은 왜 이처럼 현명하지 못한가 모르겠다.
1994년 겨울 이정하
[별]
너에게 가지 못하고
나는 서성인다.
내 목소리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이름이여,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다만 보고 싶어진다고만 말하는 그대여,
그대는 정녕 한 발짝도
내게 내려오지 않긴가요.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거임을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더욱 필요한 것임을.
그대를 만나고서부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대여, 지금 어디 있는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도 못 할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슬픈 약속]
우리에겐 약속이 없었다
서로의 눈빛만 응시하다
돌아서고 나면 잊어야 했다.
그러나 하루만 지나도
어김없이 기다려지는 너와의 우연한 해우.
그저 무작정 걸어봐도
묵은 전화수첩을 꺼내 소란스럽게 떠들어 봐도
어인 일인가,
자꾸만 한쪽 가슴이 비어옴은.
수없이 되풀이한 작정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가 닿았음직한 발길을 찾아나선다.
머언 기약도 할 수 없다면
이렇게 길이 되어 나설 수밖에.
내가 약속이 되어 나설 수밖에.
[사랑의 이율배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흔들리며 사랑하며]
이젠 목마른 젊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기로 하자.
찾고 헤매고 또 헤매이고
언제나 빈손인 이 젊음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하자.
누구나 보균하고 있는
사랑이란 병은 밤에 더욱 심하다.
마땅한 치유법이 없는 그 병의 증세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심한 사랑,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그대가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랴
길이 있었다. 늘 혼자서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쓸쓸했다.
길이 있었다. 늘 흔들리며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눈물겨웠다.
[사랑이란 이름의 종이배]
1
때때로 난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 또한 알고 싶었다.
당신은 당신의 아픔을 자꾸 감추지만
난 그 아픔마저 나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2
그러나 언제나 사랑은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가만히 놓아 주지 않았다.
이미 내 손을 벗어난 종이배처럼
그저 물결에 휩쓸릴 뿐이었다.
내 원하는 곳으로 가주지 않는 사랑
잔잔하고 평탄한길이 있는데도
굳이 험하고 물살 센 곳으로 흐르는 종이배
사랑이라는 이름의 종이배.
[떠나는 이유]
떠나는 사람에겐 떠나는 이유가 있다
왜 떠나는가 묻지 말라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말라
괴로움의 몫이다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때]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손을 내밀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다.
그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의 가슴이 데워진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고 싶다
그대여 이제 그만 아파하렴
[그를 만났습니다]
그를 만났습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반갑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방금 만나고 돌아오더라도
며칠을 못 본 것 같이 허전한
그를 만났습니다.
내가 아프고 괴로울 때면
가만히 다가와 내 어깨를 토닥거려주는
그를 만났습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어디 먼 곳에 가더라도
한 통의 엽서를 보내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그를 만났습니다.
[사랑의 우화]
내 사랑은 소나기였으나
당신의 사랑은 가랑비였습니다.
내 사랑은 폭풍우였으나
당신의 사랑은 산들바람이었습니다.
그땐 몰랐지요.
한때의 소나긴 피하면 되나
가랑비는 피할 수 없음을.
한때의 푹풍우야 비켜가면 그뿐
산들바람은 비켜갈 수 없음을.
[떠날 준비]
그냥 떠나십시오
떠나려고 굳이 준비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당신은 끝까지 가혹합니다.
떠남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고
떠나려고 준비하는 그대를 보는 것이
괴로운 것을.
올 때도 그냥 왔듯이
갈 때도 그냥 떠나가십시오.
[우울한 하루]
낙엽이 떨어졌었죠.
내 마음 깊은 곳으로
그대를 만난지 하루만 지나도
내 마음은 우울병을 앓는답니다.
어떤 독한 약을 먹어도 고쳐지지 않는
기다리지 않기로 해놓고
혼자 있을 땐 혼자의 생활에 충실하기로 해놓고
난 또 멍청히 전화기만 내려다 봅니다
지금쯤 연락이 올 때도 됐는데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내 마음 그렇게 우울할 수 가 없어요
슬픈 나뭇잎만 가득 쌓인답니다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예감]
아무리 짧은 순간이더라도
이별이란 정말 못 할 짓입니다.
서로의 가슴에 피멍이 드는 일입니다.
당신은 내가 못믿는게 아닙니다.
떠나는 순간까지 웃음을 보이며
내 두 손을 꼭 잡아준 당신을
내가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게 보이던 당신의 웃음
그 웃음이 마지막이 될 것같은 예감이
자꾸만 드는 것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의 운명,
그 운명이 믿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가까운 거리]
그녀의 머리냄새를 맡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라도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댄 이런 나를 타이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함께 있는게 전부가 아니라고.
여전히 난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왜 우린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해야 하는지.
왜 서로보다 하고 있는 일이 먼저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나중을 위해 지금은 참자는 말,
그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나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그는 떠났습니다]
그는 떠났습니다
떠남이 있어야 돌아옴도 있는 거라며 그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내게 웃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 웃음 뒤에 머금은 눈물을.
그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를 가슴에 담으며
나는 다만 고개를 숙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뛰어가서 막어서고 싶었지만
도저히 난 그럴 수 없었습니다.
먼 훗날을 위해 떠난다는 그를
어떻게 잡을 수 있겠습니까.
입술만 깨물수 밖에.
내가 고개를 숙이는 동안
그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그래서야 내 몸은 슬픔의 무게로
천 길 만 길 가라앉습니다.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아 있습니다만
실상 남아있는 건 내 몸뚱아리 뿐입니다.
내 영혼은 이미 그를 따라나서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보내는 자의 것]
미리 아파하지 마라.
미리 아파한다고 해서
정작 그 순간이 덜 아픈 것은 아니다.
그대 떠난다고 해서
내내 배갯잇에 얼굴을 묻고만 있지 마라.
퍼낼수록 더욱 고여드는 것이 아픔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현관문을 나서 가까운 교회라도 찾자.
그대, 혹은 나를 위해 두 손 모으는 그 순간
사랑은 보내는 자의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미리 아파하지 마라.
그립다고 해서
멍하니 서 있지 마라.
[멀리서만]
찾아나서지 않기로 했다.
가기로 하면 가지 못할 일도 아니나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움만 안고 지내기로 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대가 많이 변했다니
세월따라 변하는 건 탓할 건 못 되지만
예전의 그대가 아닌 그 낭패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멀리서 멀리서만
그대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에필로그
떠날 준비를 하는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못내 슬픈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런 그대에게서 떠날 준비를 못하는지...
1997년 가을 이정하
[길]
길에서 벗어나야
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듯
그대에게서 벗어나
나
그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네.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다시 가지 않을 수 없었네.
가도 가도 막막한 그 길에서
내 영혼은 다 부르텄다.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눈을 뜨면 문득 한숨이 나오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
불도 켜지 않은 구석진 방에서
혼자 상심을 삭이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정작 그런 날 함께 있고 싶은 그대였지만
그대를 지우다 지우다 끝내 고개 떨구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지금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며 내 한 몸 산산이 부서지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할 일은 산같이 쌓여 있는데도
하루종일 그대 생각에 잠겨
단 한 발짝도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를 위해 하루에 담배 한 개비씩
덜 피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 그대를 위해 거창한 것은 해주지 못하나
아름답고 든든한 배경은 되어 주지 못하나
아주 작은 티끌 하나로도
그대의 근심은 되지 않겠습니다.
그대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악보가 되어 주진 못하나
건반이 되어 소리를 내겠습니다.
건반마저 되지 못한다면
그대가 앉아 있는 의자라도 되겠습니다.
그대가 시집을 읽을 때
시는 되어 주지 못하나
안경이 되어 활자를 밝히겠습니다.
그마저 되지 못한다면
책 사이에 끼여 있는 책갈피라도 되겠습니다.
내 그대를 위해 작정한 모든 것이
그대 눈가의 잔주름 하나 지울 수 있다면
세상의 그 무엇이 된들 상관 있겠습니까.
있는 듯 없는 듯 그대 곁에서
가까이만 있겠습니다.
내 그대를 위해 거창한 것은 해주지 못하나
아름답고 든든한 배경은 되어 주지 못하나
행여 티끌 하나라도 근심은 되지 않겠습니다.
[저녁 별]
너를 처음 보았을 때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너를 바라보는 기쁨만으로도
나는 혼자 설레였다.
다음에 또 너를 보았을 때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를 깨닫곤
한숨지었다. 너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 마음엔
자꾸만 욕심이 생겨나고 있었던 거다.
그런다고 뭐 달라질 게 있으랴.
내가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당장 숨을 거둔다 해도
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냉랭하게 나를 내려다볼 밖에.
내 어둔 마음에 뜬 별 하나.
너는 내게 가장 큰 희망이지만
가장 큰 아픔이기도 했다.
[기다리는 이유]
만남을 전제로 했을 때
기다림은 기다림이다.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았을 때
기다림은 더 이상 기다림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엔,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는,
그리하여 밤마다 심장의 피로 불을 켜
어둔 길을 밝혀두는 사람이 있다.
사랑으로 인해
가슴 아파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오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왜 바깥에 나가 서 있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왜 안 되는가를.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더라도
기다리는 그 순간만으로 그는
아아 살아 있구나 절감한다는 것을.
쓰라림뿐일지라도 오직 그 순간만이
가장 삶다운 삶일 수 있다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
기약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쓸쓸하고 허탈한 마음을 아는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막연히 기다리는 일밖에 없을 때
그 누군가가 더 보고 싶어지는 것을 아는가.
한 자리에 있지 못하고 서성거리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라도 들릴라치면
그 자리에 멈추고 귀를 곤두세우는
그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아는가.
끝내 그가 오지 않았을 때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왜 가슴은 속절 없이 무너지는 것인지,
온다는 기별이 없었는데도
다음에는
꼭 올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을 아는가.
그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 마음에 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
그를 위해 마음 한 구석을 비워두는 일.
비워둔 자리만큼 고여드는 슬픔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대여......
[밤새 내린 비]
간밤에 비가 내렸나 봅니다.
내 온몸이 폭삭 젖은 걸 보니
그대여, 멀리서 으르렁대는 구름이 되지 말고
가까이서 나를 적시는 비가 되십시오.
[사랑의 우화]
바다로 흘러 들어가던 강은 곧 실망했습니다.
자신은 전부를 내던졌는데 막상 바다에 닿고 보니
극히 일부분밖에 채울 수가 없는 게 아닙니까.
그래도 강은 따스했습니다. 멀고 험한 길 달려온 뒤
고단한 몸 누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의 전부인데, 왜 나는
너의 일부분밖에 안 되는지 따지는 사람은
바다를 보되 파도밖에 못 보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편히 잠들어 있는 강물은
볼래야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슬픔 안의 기쁨]
떠났으므로 당신이
내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보내야 했으므로 슬픔이 오기 전
기쁨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네.
훗날, 나는 다시 깨닫기를 바라네.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못내 가슴 아팠을지라도
내가 간직한 그 사랑으로 인해
내 삶은 아름다웠고
또 충분히 행복했노라고..........
[이쯤에서 다시 만나게 하소서]
그대에게 가는 길이 멀고 멀어
늘 내 발은 부르터 있기 일쑤였네.
한시라도 내 눈과 귀가
그대 향해 열려 있지 않은 적 없었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사람.
생각지 않으려 애쓰면 더욱 생각나는 사람.
그 흔한 약속 하나 없이 우린 헤어졌지만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슬픔으로 저무는 사람.
내가 그대를 보내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나의 사랑이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찬이슬에 젖은 잎새가 더욱 붉듯
우리 사랑도 그처럼 오랜 고난 후에
마알갛게 우러나오는 고운 빛깔이려니,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길을 가다가]
때로 삶이 힘겹고 지칠 때
잠시 멈춰 서서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걸어온 길을 한번 둘러보라.
편히 쉬고만 있었다면
과연 이만큼 올 수 있었겠는지.
힘겹고 지친 삶은
그 힘겹고 지친 것 때문에
더 풍요로울 수 있다.
가파른 길에서 한숨 쉬는 사람들이여,
눈앞의 언덕만 보지 말고
그 뒤에 펼쳐질 평원을 생각해보라
외려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아닌지.
[알게 될 때쯤]
사랑은 추상형이어서
내 가지고 있는 물감으로는
그릴 수가 없었네.
수년이 지나
사랑에 대해 희미하게 눈뜰 때
그때서야 알 수 있었네.
사랑은, 물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으로 그리는 것.
언제나 늦었네.
인생이란 이렇구나 깨닫게 되었을 때
남은 생은 얼마 되지 않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곁에 없었네.
사랑이라 깨달았을 때 이미 그는
저만치 가고 없네.
- 한 사람을 사랑했네
책머리에
사랑 때문에 밤을 새워 본 기억이 있는지. 그로 인해 설레이고
가슴 떨리며, 그로 인해 세상의 종말까지도 경험해 본 적이 있는지.
몸서리 치도록 사랑하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이 당신에겐
있는지. 가슴이 아팠다. 이 시집을 쓰면서 나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2000년 1월 이정하
[한 사람을 사랑했네]
사랑을 얻고 나는 오래도록 슬펐다.
사랑을 얻는다는 건
너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아니었으므로.
너를 체념하고 보내는 것이었으므로.
너를 얻어도, 혹은 너를 잃어도
사라지지 않는 슬픔 같은 것.
아아 나는 당신이 떠나는 길을 막지 못했네.
미치도록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 슬픔에 빠져 나는 세상 다 살았네.
세상살이 이제 그만 접고 싶었네.
[드러낼 수 없는 사랑]
비록 그 사랑이 아픈 사랑일지라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말도 할 수 없는 사랑, 그래서 혼자의 가슴속에만
묻어 두어야 하는 사랑을 가진 사람에 비해서.
밝힐 수 없는 사랑,
결코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사랑,
그러나 그 사람에겐
오래 간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가슴이 잿더미가 되는 줄 모르고.
[뒤늦게서야]
가까이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떠나고 난 뒤에야 난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같은 꿈을 되풀이해서 꿀 수 없는 것처럼
사라도 되풀이해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대가 멀리 떠난 뒤였습니다.
나는 왜 항상 늦게 느끼는지요.
언제가 지난 뒤에 후회해 보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대가 먼저 길을 떠났고,
뒤늦게 내가 부지런히 따라가 보았지만
이미 그대의 모습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했네 1]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붙잡지 못했기에 보낼 수도 없던 사람.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랑했네.
떠난 이후에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이름.
다 지웠다 하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눈빛.
내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사랑했네.
그 흔한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뜨거운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했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했네.
[가로등]
언제부턴가 내 가슴속에 가로등이 하나 켜져 있었지요.
대낮에도 꺼지지 않았고, 내 삶의 중심에서 골목길까지 훤히 비추는.
어떤 때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내 심장의 피로 불 밝히는 때도
있었지요.
[흔적]
칼국수를 먹다가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유난히 칼국수를 좋아했던 그대
였기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다가도 그대가 떠올라 눈물
글썽입니다. 유난히 그대가 즐겨 듣던 곡이었기에. 나는 이제 그대가
좋아하는 음식, 그대가 좋아하는 음악, 그대가 좋아하는 색깔과 모양들
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이제는 어느덧 그대가 좋아하는 것
만이 아닌 내게도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 되어 있는 온갖 것들. 그것들
이 그대가 떠난 빈자리를 채워 주다가 그대를 더욱 생각나게 하는 추억
이 되어 내게 눈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기원]
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슬픔은 모두 내가 가질테니
당신은 기쁨만 가지십시오.
고통과 힘겨움은 내가 가질 테니
당신은 즐거움만 가지십시오.
줄 것만 있으면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햇살이 맑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비가 내려 또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전철을 타고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습니다만
어김없이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그런 때일수록 그대가 더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숱한 날들이 지났습니다만
그대를 잊을 수 있다 생각한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더 많은 날들이 지나간대도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날 또한 없을 겁니다.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지만
숱하고 숱한 날 속에서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대였기에
감히 내 평생
그대를 잊지 못하리라 추측해 봅니다.
당신이 내게 남겨 준 모든 것들,
그대가 내쉬던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닐는지요.
언젠가 언뜻 지나는 길에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스치는 바람 편에라도 그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께,
내 그리움들을 모조리 쏟아 부어 놓고, 펑펑 울음이라도...,
그리하여 담담히 뒤돌아서기 위해서입니다.
아시나요, 지금 내 앞에 없는 당신이여.
당신이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 남김없이
돌려주어야 나는 비로소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엔 장미꽃이 유난히 붉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했네 3]
오늘 또 그의 집 앞을 서성거리고 말았다.
나는 그를 잊었는데
내 발걸음은..., 그를 잊지 않았나 보다.
[약속]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겠습니다.
낯선 기분이 들지 않도록
모든 것은 제자리에 놓아두겠습니다.
기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대는 그저
돌아오기만 하십시오.
[마음의 감옥]
나로 인해 그대가 아플까 해서
나는 그대를 떠났습니다.
내 사랑이 그대에게 짐이 될까 해서
나는 사랑으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리우면 울었지요.
들개처럼 밤길을 헤매 다니다,
그대 냄새를 좇아 킁킁거리다 길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든 적도 있었지요. 가슴이 아팠고,
목이 메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대는
가만 계세요. 나만 아파하겠습니다.
사랑이란 이처럼 나를 가두는 일인가요.
그대 곁에 가고 싶은 나를
철창 속 차디찬 방에 가두는 일인가요.
아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풀었다 가두는 이 마음 감옥이여.
[미리 아파했으므로]
미리 아파했으므로
정작 그 순간은 덜할 줄 알았습니다.
잊으라 하기에
허허 웃으며 돌아서려 했습니다.
그까짓 그리움이사
얼마든지 견뎌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미리 아파했으나 그 순간은 외려 더했고,
웃으며 돌아섰으나 내 가슴은 온통
눈물 밭이었습니다.
얼마든지 견디리라 했던 그리움도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없어집니다.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인지.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인지.
[마지막이란 말은]
마지막이란 말은 하지 말기를.
설사 지금 떠나서 다시 못 본다고 해도
마지막이란 말은 결코 하지 말기를.
앞으로 우리 살아 갈 날 수 없이 많이 남아 있으니
지금 섣불리 마지막이라고 단정짓지 말기를.
사람도 변할 수 있고
사랑도 변할 수 있는 법.
지금 공연히 마지막이라는 말을 해서
다음에 만날 수 있는
그 가능성마저 지워 버리지 말기를.
숨을 거두기 전까지 우리 절대로
마지막이란 말은 입에 담지 말기를.
[ 이정하의 산문집 ]
에필로그
평소에 친하게 지내고 있던 한 여자가 나에게 물었다.
"그를 더 이상 사랑해서는 안 되겠지요?" '왜라?'라고 나는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표정이 너무
쓸쓸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녀의 다음 말은 곧
이어졌다. "결코 어떤 보답을 바라서 사랑한 것은 아닌데 나
혼자서만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외로운지 모르겠어요."
사랑한다는 것은 그녀의 말처럼 외로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견딜 수 있으나 사랑할 수 없는 상황
이 못내 괴롭다는 사람들. 이 책은 그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대상을 혼자서 외롭게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1998. 7. 이정하
1장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아침 일찍도 오시더군요.
그대인가 했더니, 아침 일찍도 오시는 비.
내 우울함의 시작...
숱한 날들이 지났습니다만
그대를 잊을 수 있다 생각한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1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와는 멀어지도록 노력하라.
좁은 새장으로는 새를 사랑할 수 없다.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당신 안에서 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은 점점 더 넓어지도록 하라.
사랑이 깊어질수록 2
사랑이 깊어질수록 대개의 사람들은 소유와 집착에서 비롯되는
의존의 아픔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아닐 터, 구속하거나 사로잡는 것이 사랑의 전부는 아
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며,
모든 애착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참으로 신비하게도
사랑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아야 스스로 가득 찰 수 있다.
만일 지금 당신이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면 더 이상 바라지
도 더 이상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사랑 하나로만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환희
처음에 어린 새가 날갯짓을 할 때는 그 여린 파닥임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하지만 날갯짓을 할수록 더 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삶이 꾸준히 나아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기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 맨 처음 너를 알았을
때 나는 알지 못할 희열에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 막막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내가 사랑하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은 항상 내 곁을 떠나갔으므로. 그래도 나는 너에게
간다.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너에게 당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그렇다. 내가 환희를 느끼는 것은
너에게 가고 있다는 그 자체다. 마침내 너에게 닿아서가 아니라
너를 생각하며 걸어가는 그 자체가 나에겐 더없는 기쁨인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아침 일찍도 오시던군요.
그대인가 했더니, 아침 일찍도 오시는 비.
내 우울함의 시작.
그립다는 것은 그대가 내 곁에 없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런 그대가 내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내 가슴 한 쪽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립다는 것은 다시는 못할 짓이다.
단풍잎 사랑 - 상처받기가 겁나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외로우냐고 묻지 마라.
...............................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 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그랬다. 내게 있어도 사랑이 모든 것이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구석진 골방에 처박혀 죄없는 담배만 죽이던,
긴 밤 내내 전해주지도 못할 사연들만 끄적이다 날이 뿌옇게 새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그 어둡고 음습한 시절, 세상에는 사랑으로
인해 더없이 행복한 삶도 있겠지만 때로는 슬픔만 안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 때 나는 알았다.
그랬다. 사랑은 우리에게 행복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었다.
멋모르고, 당연히 사랑은 달콤하고 황홀할 것이라고만 상상하던
나에게 사랑은 너무나 혹독한 시련이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두 사람의 감정만으로 사랑이 성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이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이루어지리라 맏은 것은
세상을 너무 쉽게 본 데서 비롯된 오산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두 사람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현실'이라는 높은 장벽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경우,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별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터뜨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별이 눈앞에 와 있는데도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매진하고 있다면 그런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좀더 심하게 말하면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사랑에 빠지고 그런 사랑에 전념한다.
어떤 말을 듣더라도 당사자들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하기야 세상의 논리에 찌든 얄팍한 정신으로 어떻게 사랑을 하겠는
가. 이해득실을 따지고 계산에 치우친다면 그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닌 계약일 뿐일 텐데.
언제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안에 난 내 모든 것을 풀어 놓았다.
가을날, 단풍잎에게 가서 물어 보라.
낙엽이 되어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그 순간까지 자기 몸을 남김없이 태우는지.
서로 사랑하면서도 끝내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안타까움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연인들의 모습은 그래서 진정 아름답다.
기실, 사랑으로 인해 가슴 아파해 본 사람들은 알리라.
사랑은 결국 나 자신의 존재마저도 그대에게 주는 것임을.
한 방울의 물이 시냇물에 자신을 내어 주듯, 또 그 시냇물이 강물과
바다에 자신을 내어 주듯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대에
게 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꺼
이, 나는 눈물겹더라도 너만은 눈부시도록 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 않은가.
결국 나는 살아가면서 유일한 가난함이란 가슴 속에 '사랑'이 없는 것임
을 말하고 싶다. 비록 슬픔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해도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 삶이 넉넉할 수 있었지 아니한가. 비록 그 사람은 곁에 없지만 그
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고 생각하면서.
상처받는 것이 겁나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여, '사랑'을 빠트려
놓고 한번 살펴보라. 당신의 인생에서 도대체 가치로운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주저하지 말 것
애써 외면하지 말 것. 그가 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마음의 문을 열 것. 내 사랑이 그에게 막힘없이,
또 자유롭게 흘러 넘치도록.
그 사랑이 마치 서녘 하늘에 펼쳐 놓은 노을과도 같아 그걸 바라보는
그의 가슴까지 적셔 줄 것. 이젠 더 이상 뒤에 물러서 있지 말 것.
사랑을 보여 주기를 주저하지 말 것. 설혹 그 사랑이 괴롭더라도 과감
히 부딪칠 것. 소심하게 앉아만 있지 말 것.
등잔 밑
어디에서 나를 찾는가, 나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어디쯤서 나를 기다리는가, 나 당신의 마음 안에 있는데.
진작부터 나 당신의 내부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알아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사랑에 대한 확신과 신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다 보면 아주 가련한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 아들의 친구 징클레르에게
에바부인은 사랑에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다음
과 같은 말을 해 준다.
"사람은 누구나 가망없는 일에 열중하면 안 돼요.
당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나는 알고 있어요.
자신과 가능성이 없는 일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충동에 의한 것이
라 하더라도 체념해야 하지요. 만약 도저히 체념할 수가 없을 때는
그것을 철저하게 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지요. 자신의 소망을
틀림없이 실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
면 그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법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무엇인가
를 소망해 놓고도 곧 그것을 후회하고 있어요.
그러면 안 돼요. 한 가지 목표를 세우면 거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해요."
그리고 나서 에바부인은 별을 사랑한 한 청년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주었다. 그 청년은 바닷가에서 두 손을 하늘로 뻗치고 그 별에게
연모의 정을 바쳤다. 그러나 인간이 하늘의 별을 안을 수 없다는
것은 그 청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별을 사랑했다. 그것이 자기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운명에 순종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순화하는 침묵과
체념과 고뇌의 노래를 불렀다. 그의 모든 꿈은 한결같이 별을 향하
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 청년은 바닷가 절벽 끝에 서서 별을 쳐다보며 운명
의 연정으로 몸을 태웠다. 별을 사랑하고 별을 그리워하는 절실한
상념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별을 향해 몸을 던졌다. 순간, '이루
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의 몸은 별이 있는
하늘과는 정반대쪽인 바닷가 암석 위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고 말
았다. 그 청년은 '사랑'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허공에 몸을 날린
순간, 그 별과의 사랑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영혼의 힘
이 그에게 있었다면 그는 하늘 높이 올라가 별과 맺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말하자면 에바부인은, 사랑에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연인이자 아들의 친구인 징클레르에게
별을 사랑한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암시한 것이다. 그러면 의지력만
있다면 과연 모든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
리가 사는 세상인지라 아무리 의지력이 있다 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바부인은 바로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랑'을 확신하고 있다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고를 두려
워하지 마라. 신념만 깊다면 하늘 높이 떠 있는 별과도 맺어질 수 있
다는 것. 그러면서 그녀는 또 다른 이야기를 징클레르에게 해 줬다.
이번에는 짝사랑에 빠진 또 다른 청년의 이야기였다.
그 청년은 완전히 자기의 영혼 속에 틀어박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쓰디쓴 그림자를 핥으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푸른 하늘도 없고 아름다운 숲
도 없었다. 하프의 소리도 시냇물 소리도 없었다.
세계에서 버림받은 그 청년은 가엾고도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
았다. 그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짝사랑으로 말미암아 세계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 연인데 대한 사랑은 깊어가기만 했다.
그럴수록 절망감도 더해갔다. 그는 사랑하는 여성을 자기 품에 안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각오를 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 사랑의 불길이 자기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부터 사랑은 위대한 힘을 발
휘하여 연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 때까지 청년의 사랑을 전혀 외
면하고 있던 그 여성은 비로소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청년을 찾아갔다. 청년은 두 팔을 벌리고 여인을 안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연인이 청년 앞에 섰을 때, 그녀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청년은 자기가 잃었던 세계 전체를 자기 힘으로 끌어당겨 자기 곁에 머
물게 한 데에 전율을 느꼈다. 청년 앞에 서 있는 것은 세계였다.
그가 다시 찾은 세계였다. 그 세계가 그의 의지력에 이끌려 그에게 몸
을 내맡긴 것이다.
하늘과 숲과 냇물이 새롭고도 생기가 넘치는 빛깔로 몸을 가꾸고 그 청
년을 마중 나왔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의 운명
을 이야기했다. 그 청년은 그의 사랑을 실현함으로써 단 한 사람의 여자
를 얻는 동시에 전세계를 자기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신념과 힘이 있으면 연인의 사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연인에게 사랑을 호소할 필요도, 요구할 필요도 없게 되지
요. 상대방에게 마음이 이끌리기만 하는 사랑은 언제나 슬프지요.
징클레르, 당신의 사랑은 내게 이끌려 다니고 있어요. 언제라도 좋습니
다. 당신의 사랑이 내 마음을 끌어당기게 되면 나는 기꺼이 따라가겠어
요. 나는 스스로 나를 바치고 싶지 않아요. 의지적인 행동과 확신의 힘
을 가진 사랑에 의해 정복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사랑이란 애걸만 해서도 안 되고 요구만 해서도 안 된다는 전제하에 에
바부인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사랑이란 과연 아름답지 않은가. 비록 우리를 고독하게 하는 면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만이 우리를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게 한다.
아직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다면, 그래서 괴로운 사람이 있다면 사랑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다. 그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한 언젠가는 영롱한 꽃을 피울 수 있으니.
포기할 수 없는 사랑
서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서로 사랑하지만 살아해선 안 될 경우가 바로 거기에 해당된다.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같은 경우는 훨씬 줄일 수 있겠으나 불행히도 세상은 그렇지 못하
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지켜야 할 규범과 관습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무시한다면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인 채 예로부터 지켜온 질서
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사랑은, 서로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비통해하다못해 끝내 죽음에 이르
고 마는 안타까운 사람들, 그 사람들은 내세에선 더없이 순수한 영혼
으로 태어나리라, 그리하여 못다 한 사랑을 활짝 피우리라.
그리스 신화에 보면 린더라는 청년이 나온다. 그는 어느 날 축제에서
만난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바로 그 여자가 사랑해선 안 될 운명,
비너스 여신의 시녀였던 헤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남들의 눈
을 피해서 더욱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린더는 헤로를 만나기 위해
밤마다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했했다. 헤로를 만나기 위해선 4마일이나
되는 해협을 헤엄쳐 건너야 했으므로.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밤에도 린더는 헤로를 만나기 위해 해협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헤로의 창가에 걸어 둔 등불이 꺼져 버려 방향을 잃어 버린
린더가 바다에 빠져 죽게 되고, 이튿날 싸늘한 그의 시체를 보게 된
헤로 역시 비통에 싸여 바다에 몸을 던져 버린다는 비련의 이야기.
사랑은 우리에게 지고한 행복감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없
는 슬픔과 번민을 안겨 주기도 한다. 사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수많은
문학작품 속에선 사랑의 기쁨보다는 사랑의 슬픔이 주제가 된 것이 많
다. 왜 그럴까? 그것을 난 기쁨보다는 슬픔의 여운이 훨씬 큰 탓이라고
여기고 있다. 쉽사리 잊혀지는 기쁨에 비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앙금으로 남아 있기 십상인 슬픔. 하기야 우리가 살아가는 일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따지고 보면 기쁨보다 슬픔이 많은 우리네 삶.
그렇다고 우리가 삶을 포기할 수 없듯 슬픔이 많다고 해서 우리가 어찌
사랑을 포기할 수 있으랴. 이 세상이 아니면 저 다음 세상에서라도.
불꽃같은 사랑
렘브란트 이후 네덜란드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았던 빈센트
반 고호.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그도 정열적인 사랑을 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어느 여름철, 그는 젊은 미망인인 케이포스를 만나게 되어
이내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외삼촌의 딸이었고,
그러한 상황 때문에 좀처럼 그녀의 마음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가 구혼의 편지를 써 보낼 때마다 모두 개봉되지 않은 채 되돌아왔으
니까. 그러나,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주위의 반대를 아랑곳하
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심혈을 기울렸다. 어느 날, 그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외출했다는 대답이었다.
마침 저녁시가 때였는데 그가 문득 테이블을 보니 반쯤 먹은 요리
그릇이 빈 자리에 남아 있었다. 자기가 온 것을 알고 외삼촌이 그녀를
숨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순간적으로 옆에 있던 촛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불꽃 속에 손을 넣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좋으니 그녀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관심
사랑을 깨닫는 일은 아주 쉬운 일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치 우리가 늘 접하고 있으면서도 있는지 없는지 무감각한 공기처럼.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한 순간도 우리 곁을 벗어난 적이 없
지만 깨닫지 않는 자에겐 존재하지 않는 묘한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처음 사랑을 접했을 때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그 이
상의 희열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관심과 애정
에 대해 더없이 행복해하고 고마워한다. 하지만 왜 갈수록 덤덤해지는
것인지. 처음엔 아주 작은 것에도 감동하지만 나중에 그것보다 더 큰
것에도 왜 시큰둥한 것인지. 그것이 바로 사랑을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지금 바로 한 장의 엽서라도 쓸 일이다.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전과 다름없는 마음을 비춰 주어
야 한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방황하지 않으려면.
내 마음의 톱밥난로
춥다. 옷을 두껍게 입었는데도 춥다면 그것은 마음이 추운 탓이다.
아무리 내의를 입어 본들 사랑의 내의를 갖춰 입지 않았다면 우리는
추울 수밖에 없다. 겨울이 닥치면 사람들은 저마다 부산하다.
하지만 난로를 몇 개 더 들여놓는다고 해서 추위가 가실 것인가.
난방시설이 아무리 좋기로서니 겨울이 혹독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다. 마음이 춥다면 몸은 더욱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법, 그것만이 겨울을 온전하게 날 수 있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작정 이불 속으로만 파고든다.
나만 춥지 않다고 해서 춥지 않은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이 춥다면 나도 추울 수밖에 없다.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그렇다. 추운 겨울엔 더더욱 마음
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넓게 열어 나보다 훨씬 더 추운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그 관심과 사랑으로 인해 상대방은
물론 나 자신 또한 더없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가난한 소년이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쌩쌩 부는 어느 추운 겨울날에도 소년은 변함없이
신문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런지 사람들은
집게 가는 걸음만 재촉할 뿐 신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년의 뺨은 얼어붙어 터질 듯했지만 소년은 신문 팔기를 멈출 수
없었다. 집에선 자신을 기다리는 배고픈 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날이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
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지금쯤 따뜻한 방에서 재롱을 부릴
나이었지만 그 소년은 이를 악물고 신문을 한 장이라도 더 팔기
위해 애를 쓴다. 그 때 문득, 소년 옆을 지나치던 할아버지 한 분이
멈춰 서서 소년을 불렀다.
그는 신문값보다 많은 지폐 한 장을 꺼내 주며 소년의 손을 잡았다.
"이런, 손이 다 얼어 버렸네. 몹시 춥겠구나."
할아버지의 손은 따스했다. 그러자 소년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이젠 춥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관심이,
그 사랑으로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스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훈훈한 미덕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지탱되어 왔고,
또 지탱되어 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마음의 문을 닫아
두기 시작했다. 내 눈에 다래끼 난 것은 아파도 남의 눈에 종기 난
것은 아파하지 않고 있다. 나만 탈이 없으면 그뿐 남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식이다. 함께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내
가 짓밟고 일어서야 할 '남'만 존재하고 있다.
때로 친구의 우정어린 충고나 격려가 있어도 뿌리치기 일쑤다.
무슨 흑심이나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하며,
뒤로는 그 친구보다 한 발짝 더 앞서기 위하여 신발끈을 동여매고 있다.
남을 위해 발길에 채는 돌멩이 한번 집어 낸 적 없으며 앉아 쉴 수 있는
의자 한 번 마련해 준 적 없다. 그러니 동료도 없고, 친구도 없고,
우리 마음이 추울 수밖에.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아무리 난방시설이 잘 되어 있고 좋은 곳이라 하더라도 자기 혼자밖에
없다면, 그 덩그런 곳에 오로지 자기 혼자만 살고 있다면 그 삶은 쓸쓸
하고 외롭지 않을까. 어린 날에 읽었던 동화 속의 얘기처럼 아이들이
찾아오지 않는 거인의 집에는 혹독한 겨울만 계속될 뿐이다.
그러니 우리 더 이상 추워지기 전에 마음을 열자.
대문을 열고 아이들을 맞이했더니 금세 그 집 마당에 봄이 온 것처럼,
우리도 문을 어 내 마음을 나눠 줘 보자.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따스한 것인지 느껴 보자.
브라질 작가 바스콘 셀로스의 작품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는
'제제'라는 주인공 소년이 나온다. 그 소년은 너무 못 먹고 자라서
키가 작았다. 학교에 들어갔지만 도시락 한 번 싸 가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은 이 불쌍한 소년에게 가끔 동전을 주었다.
빵이라도 사먹어서 허기를 면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준다고 해서 소년은 돈을 다 받는 게 아니었다.
애써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그 돈을 받곤 했다.
그 이유를 선생님은 곧 알게 된다. 자기 반에는 그렇게 밥을 못 먹는
가난한 아이가 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제제가 돈을 줄 때마다 빵을 사서 그 가난한 아이와
함께 먹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는 제제보다 더 작고, 가난하고,
아무도 놀아 주지 않는 아주 새까만 흑인아이었다.
그러나 제제는 자기가 배가 고픈데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더 가난한
그 아이에게 빵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함께 놀아 주었다.
살아가는 데 유일한 가난함이란 가슴 속에 사랑이 없는 것이리라.
삶이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을 때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
들이 된다. 그러고 보면 베푼다는 것은 꼭 많이 가진 자만이 행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제제라는 소년은 도시락도 못 싸 갈만큼 가난했
지만 자기보다 더 가난한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기꺼이 빵 한 조
각을 나눠 먹었다. 없는 사람이, 그리고 적은 것이라도 베푸는 행위
는 있는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까.
혹시 나는, 나한테 필요없는 것까지도 꽉 움켜쥐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살펴보자. 나한테 필요없는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많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나한테는 하등 소용없는 그 물건
을 이제 그만 넘겨줌은 어떨런지? 내게는 조금 모자라더라도 하나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약간 나눠줌은 어떨런지? 그래,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바닷가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서로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그래야 아름답다. 그래야 외롭지 않다. 서로 도와가며 사는 세상,
어깨를 부여 안고 서로 의지하며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보여 주려고 신은 우리에게 겨울을 내려 주었다. 겨울이 왜 춥겠는가.
서로 손을 잡고 살라고 추운 것이다.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햇살이 맑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비가 내려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전철을 타고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습니다. 그래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외려 그런 때일수록 그대가 더 생각나더
군요.
그렇습니다. 숱한 날들이 지났습니다만 그대를 잊을 수 있다 생각한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더 많은 날들이 지나간대도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날 또한 없을 겁니다.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지만
숱하고 숱한 날 속에서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대였기에 감히 내 평생 그대를 잊지 못하리라, 잊지 못하리라 추측해
봅니다.
당신이 내게 남겨 준 모든 것들, 하다 못해 그대가 내쉬던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닐는
지요.
언제가 언뜻 지나는 길에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스치는 바람편에라도 그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께 모조리 쏟아부어
놓고..., 펑펑 울음이라도..., 그리하여 담담히 뒤돌아서기 위해섭니다.
아시나요, 지금 내 앞에는 그것들을 돌려 줄 대상이 없다는 것.
당신이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 남김없이 돌려 주어야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엔 장미꽃이 유난히 붉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카페 게시글
--시를 위한 시
◈이정하 시인에 대하여
가송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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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0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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