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힘든 삶의 고갯길을 오르다 보면, 가쁜 숨을 고르며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절망의 순간, 무엇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누군가는 희망을 믿고, 누군가는 사랑을 믿으며, 또 누군가는 자신의 의지로 삶을 버텨냅니다. 그러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한 사람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습니다.
메마른 논을 적시는 단비처럼,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 길을 잃은 배를 등대가 이끌듯이, 한 사람의 진심 어린 친절은 절망 끝에 선 또 다른 사람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선의인지도 모릅니다.
몇 해 전 큰 주목을 받았던 드라마 '도깨비'에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누구의 인생에나 신이 머물다 가는 순간이 있다."
드라마 속 대사처럼, 신이 우리 삶에 머무는 방식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어두운 날 건네진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일지도 모릅니다. 그 온기가 우리 삶을 바꾸어 놓는 바로 그 순간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1893년 조선에 박성춘이라는 백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백정은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도 없었고, 길을 가다 양반을 만나면 흙바닥에 허리를 굽혀야 했으며, 비가 와도 삿갓조차 쓸 수 없었던 서글픈 존재였고, 사회는 그들을 인간이 아닌 도구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외면했고, 의원마저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그날 밤, 모두가 등을 돌린 초가집 문이 열렸습니다. 들어온 사람은 캐나다 출신 의사 올리버 에비슨이었습니다.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던 그는 신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왕을 돌보던 손으로 천대받던 백정을 치료했고, 며칠 밤낮을 정성을 다해 간호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백정이라는 신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명이었습니다. 어쩌면 박성춘은 그때 처음으로 '나도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겁니다. 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 변화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습니다. 훗날 종로 관민공동회 연단에 선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사람 대접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모두 귀합니다."
그 외침은 한 사람의 감격을 넘어 인간의 존엄을 향한 선언이었습니다.
기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성춘은 자식만큼은 사람답게 살기를 바라며 교육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의 아들 박서양은 훗날 세브란스 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어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선의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고, 그 한 사람은 다시 수많은 사람을 살렸습니다. 작은 돌 하나가 호수에 던져지면 물결은 끝없이 퍼져 나갑니다. 선행도 그렇습니다. 따뜻한 마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작은 친절은 생각보다 훨씬 먼 곳까지 이어집니다.
나이가 들어 지난 삶을 돌아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사람이 몇 명쯤은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산 정상에서 과일과 떡을 건네주시는 등산 회원, 실의에 빠져있을 때 묵묵히 손을 내밀어준 친구, 방황하던 시절 끝까지 믿어준 선생님, 병상에서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해주던 가족의 체온 …. 그때는 단순히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알게 됩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흔히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켜 온 것은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선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소외된 사람을 향한 미소 하나, 먼저 손을 내미는 작은 용기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1893년 어느 허름한 초가집에서 시작된 한 의사의 손길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한 시대의 희망이 되었듯이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인생에 잠시 머물다가는 '기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선의로 조금씩 더 따뜻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첫댓글 잔잔하게 읽어내려가며 백배 공감합니다
문득 생각나는 지난 시간들이 눈을 감아도 끝없이 이어지네요
국민학교 5학년때 선생님이
매일 아침공부 시작전에 파우스트 를
잠깐씩 읽어 주셨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지요
독서시간이 다 끝났을때 그 귀한책을 내게 주셨어요
깜짝놀라 얼른
손을 못내밀고
멍 했었는데
" 네 눈이 가장 초롱초롱 했다 "
이 파우스트는
내인생의 보물이 되었습니다
하늘에서도 책을 읽으실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신 질경이님 감사합니다
이분의 글을 읽고 있으면 저도 갑짜기 유식한 사람이 된것 같습니다.감동적인 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