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字) 희백(僖伯). 호(號) 중악선생(中岳先生).
허난성[河南省] 잉양[滎陽] 출생. 명문 출신으로, 박학다재하고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다.
벼슬은 산기상시(散騎常侍) ·청주자사(靑州刺史) 따위를 역임하였고, 광주(光州:山東省 掖縣)로 부임하는 도중
그 관내 산 속의 석벽(石壁)에 수많은 시문을 새겼다. 그 작품이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은 청나라 때부터였다.
완원(阮元)이 그것을 탁본으로 소개하였고, 양수창(楊守敞) 등이 칭찬한 뒤로 일약 북위의 대표적 서예가로 지목되었다.
서풍은 웅대하고, 강한 필세(筆勢)와 풍부한 변화가 특징이다.
작품에 《정문공비(鄭文公碑)》 《관해동시(觀海童詩)》 《태기산명(太基山銘)》 《논경서시(論經書詩)》 따위의 비문이 있다.
北朝의 ‘北聖’으로 불리운 鄭道昭
정도소(鄭道昭, 약 455-516)는 형양개봉(滎陽開封, 지금의 河南省 開封市) 사람으로 자는 희백(喜伯)이다.
그는 정문공(鄭文公)인 정희(鄭羲)의 차남으로 스스로 중악선생(中岳先生)이라 불렀다.
정도소의 집안은 대대로 중원의 명망있는 귀족으로 어려서부터 전통문화에 젖어 박학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재주가 뛰어나 그림을 연구하고 전서에 주력했다. 후에 아버지를 따라 대동(大同)에 가서 오랫동안
선비족 귀족 자제들과 어울렸다. 후에 북위의 도성이 남쪽인 낙양으로 옮기자 다시 중원으로 가서 벼슬생활을 했다.
이어서 청주(淸州)광주(光州)의 변방에 사신으로 나갔고 강대리(疆大吏)에 봉해져 벼슬이 올라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어 평동장군(平東將軍)광주자사전청주자사(光州刺史轉靑州刺史)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비서감(秘書監)이 되었다. 그는 한평생 조야를 전전하면서 풍부한 경력을 쌓았고 일찍이
산동에서 대량의 마애를 새겼다. 송나라 조명성(趙明誠)은 『금석록(金石錄)』에서 이를 수집하여 기록했다.
그러나 북위 역사서에는 오히려 그의 서예에 대한 기록이 없다. 청나라 중말기에 이르러
포세신오희재강유위 등이 위비를 숭상하면서 처음으로 정도소가 쓴 <정문공상.하비(鄭文公上.下碑)>를
받들면서부터 그의 서예에 대한 명성이 나타났다. 이후 산동성 액현(掖縣)의 운봉산(雲峰山)
태기산(太基山), 평도현(平度縣)의 천주산(天柱山), 익도현(益都縣)의 영롱산(玲瓏山) 등지의 정도소 마애석각이
점차로 세상에 크게 유행하자 정도소의 서예 이름은 날로 성했다.
그의 글씨는 방원(方圓)비수(肥瘦)졸수(拙秀)장목(莊穆)표일(飄逸) 등 각종 풍격이 모두
큰 변화의 경지에 이르러 가히 위비를 집대성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남방의 동진시대 왕희지와 서로 나란히 거론해 ‘북성(北聖)’이라 존칭했다.
鄭道昭의 서예 성취와 의의
왕희지를 ‘서성(書聖)’이라 부르는 주요한 이유는 바로 ‘천하제일행서’인 <난정서(蘭亭序)>에 기인한 것처럼
정도소의 글씨는 주로 산동성 액현(掖縣) 운봉산(雲峰山)태기산(太基山)의 30여종의 위비 마애각석에 나타나 있다.
위진남북조는 문자가 예서에서 해서로 발전하는 대 변혁의 시기이다. 진서행서초서의 각 서체가 점차로 성숙하고
완미해지면서 서체 풍모의 변화가 다양해졌으며 예서에서 해서로 변화하는 과정이 분명하다.
정도소(?-515)는 특수한 생활환경과 풍부한 경력으로 해박한 학식을 쌓았으며 중원문화와
서북 소수민족문화를 크게 융합했다. 그는 도교유교불교가 서로 나타나 소멸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수를 흡수하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널리 취해 한 용광로에 녹여 독특한 경지를 형성했다.
글씨는 마음의 소리여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면모와 풍격이 다양한 서예 체계를 이루었다.
강유위는 『광예주쌍즙』에서 그의 글씨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높고 수려한 기운과 향기로움이 눈에 넘친다.
高氣秀韻, 馨芬溢目.
형체가 고상하고 기운이 표일하며 조밀한 운치에 이치가 통한다. 마치 신선이 나무에서 퉁소를 불고
바다에 뗏목을 띄워 객이 된 것과 같아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을 다할 수 없게 한다.
體高氣逸, 密致而通理, 如仙人嘯樹, 海客泛槎, 令人想象無盡.
글씨의 점과 획의 형태 및 기법의 조합에서 방원(方圓)비수(肥瘦)장단(長短)대소(大小)관박(寬博)
긴주(緊湊) 등을 갖추지 않음이 없다. 풍격의 면모에서는 졸후(拙厚)경수(勁秀)장목(莊穆)표일(飄逸)
웅혼(雄渾)유아(儒雅) 등을 찬란하게 나타났다. 서체의 변천과정에서 어떤 것은 막 예서에서 탈태한
‘이찬(二爨, 즉 爨寶子碑爨龍眼碑)’<숭고령묘비(嵩高靈墓碑)>와 같고, 어떤 것은 위비 발전 중기의
<용문조상기(龍門造像記)>와 일부분의 북위 묘지명과 비슷하며, 어떤 것은 해서기법의 풍모가
이미 변화의 경지에 이른 후기의 유명한 비인 <장맹룡(張猛龍)><석문명(石門銘)><예학명(瘞鶴銘)> 등과
서로 견줄 만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정도소의 석각글씨는 예서에서 진서로 변천하는 흐름을 거의 완전하게 볼 수 있다.
설령 일부분 사람들이 정도소 글씨의 전반적인 면모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운봉산 각석의 서예성취와
작자에 대해 완전히 긍정하지 않지만, 전파 매체의 발달에 따라 북조의 서성(書聖)인 정도소의 이름이 갈수록
서단과 문화계에 알려져 존경을 받고 있다.
鄭道昭의 서예작품
세상에 전하는 정도소의 서예작품은 주로 산동성 여러 현의 산에 있는 마애각석에 집중되어 있다.
이 중에서 규모가 큰 작품으로는 운봉산(雲峰山)의 <논경서시(論經書詩)><관해동시(觀海童詩)>
<정문공하비(鄭文公下碑)>, 천주산(天柱山)의 <정문공상비(鄭文公上碑)><동감석실명(東堪石室銘)>,
태기산(太基山)의 <선단시(仙壇詩)>와 영롱산(玲瓏山)에 방필로 지름이 1척이나 되는 큰 글자의
<백구곡제자(白駒谷題字)> 등이 있다. 또한 유기(游記), 제명(題銘), 고시(告示)가 있다. 예를 들어
<구선제명(九仙題銘)> 6개, <당문석좌(當門石坐)><우차유지(于此游止)>‘운봉산의 좌우궐(左右闕)’ 2개,
<비선실시(飛仙室詩)><운봉지산(雲峰之山)><선단명암(仙壇銘岩)><태기산제자(太基山題字)>
<세재임진건(歲在壬辰建)>등 12개, <상유천주(上游天柱), 하식운봉(下息雲峰)><차천주지산(此天主之山)>
제자 3개 등 모두 37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