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배로운 교회, 보배같은 성도
살전1장 1절 ~ 8절
우리가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실 때에도 그 커피를 끓여주는 사람이 맑고 깨끗하면 커피도 맑고 깨끗하고 향기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지저분한 사람이 끓여주면 그 커피도 지저분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좋은 집이라도 도둑이 살면 그 집은 도둑의 집이 되고, 술꾼이 살면 술꾼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이 좋지 않아도 귀한 사람이 살면 귀한 집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고급 자동차라도 그 자동차를 타는 사람이 형편없으면 자동차도 형편없어 보이고, 차가 없어 걸어 다녀도 사람이 귀하면 그 사람이 걸어다니는 길도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처럼 귀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영광스러우면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영광스러워 보입니다.귀한 사람이 되고, 귀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당시 많은 교회 중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 같은 교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 20절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나 실라나 디모데에게 자랑이요, 기쁨이요,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데살로니가 교회가 얼마나 자랑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1장 7절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에는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귀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우리교회가 은혜로운 교회, 기도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한국과 세계의 소망이 되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교회의 모델이 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부 짜리 다이아몬드도 빛이 나지만, 7부나 10부 정도로 큰 다이아몬드 앞에서는 그 빛이 무색해지듯이, 데살로니가 교회도 보석같이 빛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보다 더 귀한 교회가 성도가 여기저기에서 많이 나오기를 저는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고 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치는 교회들이 이 땅에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소문이 퍼졌을까요? 바울이 무엇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바울의 기쁨, 자랑의 면류관, 소망이라 했을까요?
1. 믿음의 역사 때문이라 했습니다.
본문 2절, 3절에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의 역사’란 ‘믿음의 history, 역사’가 아니라 ‘믿음의 work, 일’이라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부지런히 일할 때 사람의 계산과 판단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믿음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 예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배할 때, 기도할 때, 헌금할 때 믿음으로 해야 됩니다. 우리가 가르치고, 섬기고, 찬양대에서 찬양할 때 믿음으로 해야 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죄라고 로마서 14장 23절에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일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향기로운 예물이 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내 이성, 내 판단, 내 계산으로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0절에 보면,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리고성을 칠일 간 두루 다니니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리고 성은 대단한 철벽성입니다. 여리고 성은 얼마나 강한지, 사람들이 그 성벽 위에 집을 지어 놓고 살았습니다. 그런 성이 사람들이 일곱 바퀴 돈다고 무너지겠습니까?
우리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 말씀대로 여리고 성을 도니 성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라합은 기생이지만 스쳐지나 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기생이든, 창녀든, 조폭이든, 아무리 큰 죄인이든 간에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 믿음이 생겨나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가 귀한 것입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인도해서 교회에 앉혀놓고 하나님 말씀을 받게 하면 그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겨서 하나님의 백성인 두 정탐꾼을 영접했다가, 여리고성의 모든 사람이 망할 때도 그와 그의 가족은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든, 장사를 하든, 공부를 하든, 그 무엇을 하든 믿음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에는 길이가 8cm도 안 되지만 그 누에고치의 실을 풀면 1000m가 넘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왜소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덮여 있습니다. 세 살 먹은 아이에게 무슨 힘이 있고 재산이 있겠습니까마는 그 아버지의 능력이 아이의 능력이고, 그 아버지의 재산이 아이의 재산인 것처럼, 여러분과 제가 왜소하고 별것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국이 우리의 것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것입니다.
시편 18편 1절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힘, 내 실력으로 사는 것은 늘 부족한 것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가정 일이든, 개인 일이든, 교회 일이든 믿음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태양아, 멈추어라! 달아, 멈추어라!”라고 하니 태양과 달이 멈추었습니다.
모세는 홍해를 갈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가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그런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 18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한 때만 반짝 믿음으로 역사하다가 만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3절에 보면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점점 더 커 나가는구나!’ 한 5년 믿음으로 하다가 물러 선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점점 더 강하게 역사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까지 믿음으로 왔습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아,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바라보는 땅을 네게 주리라.” 계속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주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지경을 넓혀주실 줄 믿습니다.
2. 사랑의 수고 때문이라 했습니다.
수고는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면 수고가 수고롭지 않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머슴살이는 힘듭니다. 그런데 창세기 29장 20절에 보면, 야곱이 그 서러운 머슴살이를 칠 년이나 하는데도 라헬을 연애하므로 칠 년을 수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 야곱이 그 힘든 머슴살이를 라헬을 사랑하니 기쁘게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겼지만, 아직 권태가 없는 것입니다. 직분을 받아 지금까지 충성할 수 있는 것은 권태가 없으니 올라 왔습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위해 온 몸에 땀이 줄줄 흐르는데도, 안아주고 엎어주고, 할아버지 손자를 안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수고가 아닌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환난이 많았습니다. 주변으로부터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일을 기쁘게 한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아무리 남편에게 진수성찬을 차려드리고 잘 해드려도 사랑 없이 하는 것은 사랑의 수고가 아닙니다. 사랑해서 하는 것이 참 수고인 것입니다.
사랑은 그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절에 보면, 『너희가 피차 권면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피차 권면하고.” 권면한다는 말이 원어에는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사랑이고 남편은 아내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피차 서로 덕을 세우기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상대를 세워준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세워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서로, 서로 세워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장로님을, 장로님은 목사님을, 집사님은 장로님을, 장로님은 집사님을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세워주는 것입니다.
정치하는 분들보면은 여당이 야당을 그냥 끌어내리면 야당도 여당을 끌어내립니다. 근로자가 경영주를 끌어내리면 경영주도 근로자를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나라가 되려면 여당은 야당을 인정해주며 세워주고 야당은 여당을 세워주고 인정해주면서 협력해 나가야 하고, 회사가 되려면 경영주는 근로자를 세워주고 근로자는 경영주를 세워주어야 하고, 교회가 되려면 교인들은 목사님을 세워주고 목사님은 교인을 세워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세워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정을 일으키고 교회를 일으키고 나라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 1장 3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사랑이 더욱더 풍성해졌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풍성해졌습니다. 잠시 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식는, 남녀간의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사랑이 점점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보석 같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간의 사랑이, 가정의 사랑이, 우리 교회의 사랑이 점점 뜨거워지고 커지기를 축원합니다.
3. 소망의 인내가 뛰어났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둔 사람들은 그 소망을 이루었을 때 공허합니다. 의사가 되는 것이 소망이었는데 의사가 되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판사가 되는 것이 소망이었는데 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어도 공허합니다. 어떤 애인을 목숨 걸고 사랑했는데 그 애인을 아내로 얻어도 공허합니다.
여러분, 처음에는 남.여가 다 펄펄 끓게 사랑을 했습니다. 편지를 주고받고 합니다. 무슨 정신으로 그런 편지를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년 때의 장가가는 날 부인이 하늘같이 보이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이 보였습니다. 결혼하는 날,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비행기타고 제주도로, 해운대 동백섬, 경주보문단지 등으로 신혼여행을 갑니다. 그런데 신혼여행 3일째 되는 날부터 얼마나 힘드는지 모릅니다. 내가 꿈꾸었던 여인과 실제 아내는 너무 달랐습니다. 세상의 소망은 신기루입니다. 가보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십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판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장가가고 시집가도 소망이 흔들리지 않으니 인생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소망일 때, 나의 전부일 때, 내가 아무리 잘못해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 집의 딸이 대학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아빠 엄마가 딸이 대학에 떨어졌다고 축하 파티를 열어 주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축하 전보를 보내왔습니다. ‘사랑하는 ○○야, 네가 대학에 떨어진 것을 축하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더 좋도록 해 주실 것이다.’ 할렐루야!
그 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더 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주님께 소망을 가진 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믿음으로 수고하고, 사랑으로 수고해도 인내하지 못하면 아기입니다. 아기는 참지 못합니다. 소변보는 것도 참지 못합니다. 어린애들 키워보면 얼마나 소변을 자주 보았는지 모릅니다. 또 아기들은 ‘쉬’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면 화장실에 갈 틈도 없이 소변을 바로 누지 않습니까? 그래서 플라스틱 물통을 가지고 있다가 ‘쉬’하면 바로 갖다 대고, 바로 갖다 대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화장실에 갈 때까지 소변을 참습니까?
하지만 어른은 다릅니다. 의자에서나 택시에서 소변을 보지 않습니다. 아기는 인내하지 못하지만 어른은 인내합니다. 조금 열을 받으면 화를 벌컥 내는 사람은 나이가 오십이라도 아기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묵묵히 인내하는 사람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업도 인내해야 성공합니다. 부부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혼하고 싶어도 극복하고 인내해야 금혼식도 하고 다이아몬드식도 합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귀한 교회를 이루었습니까? 그 해답이 6절에 있습니다. “많은 환난 가운데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받으러 교회에 옵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으려 할 때 막는 것도 많고 환난도 많지만 성령으로 달려와 기쁨으로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세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 또 주일이네. 아이고, 주일도 자주 온다.’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사랑 받기가 어렵습니다.
“오! 주께서 만드신 이 날, 주일.”하고 기뻐하면서 하나님 성전에 나와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그 사람이 보석이 되고, 그 교회가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를 본받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가 되어도 자기 멋대로 나가고, 교회 중직을 맡아도 자기 기분대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멋대로’ 그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그 때부터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가고, 예수님께서 가시지 않는 곳에는 가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노래는 부르고 예수님께서 부르지 않으실 노래는 부르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끼리 모여도 예수님께서 하지 않으실 농담은 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격이 주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보석입니다. 아무 데나 뒹굴면 보석이 아닙니다. 누가 보석을, 금덩어리를 거름 터에 둡니까? 누가 다이아몬드를 길가에 던집니까? 보석은 보석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보석 같은 보배로운 사람이 되려면 보석함에 있어야 됩니다. 구별 되어야 됩니다.
믿음의 역사가 커가고, 사랑의 수고가 귀하게 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로 성숙한 삶이 몸에 배인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을 잘 받고, ‘주님을 닮아야지, 우리 주님을 닮아야지,’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매 순간 기쁨으로 주님께 달려와서 말슴을 통해 은혜받고, 성령의 충만함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을 닮아야지, 오늘도 주님을 닮아야지,’ 하며 사셔서 한 분 한 분이 보석이 되어 보배로운 성도가 되고, 보배로운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