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채택 450주년을 맞이한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가 지난 9월 28일 서울 신반포중앙교회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한국장로교회’를 주제로 제22회 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 언론에 따르면, 이날 발표회는 1부 개회예배와 2부 학술세미나 순서로 진행됐는데, 2부 학술발표회에서는 이승구 교수(합동신대원), 김재윤 교수(아신대), 이남규 교수(성경신대원), 이성호 교수(고신대원), 김병훈 교수(합동신대원) 등이 발제자로 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나타난 기독론, 교회론, 구원론 등을 고찰했다고 한다. 특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구원론’을 제목으로 발표한 김병훈 교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구원하는 은혜와 믿음’에 대해 명확하게 규명하고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천주교 신학을 상대로 신인협동론적인 구원론을 비판하고 ‘오직 은혜로만’의 신학이며 또한 ‘오직 믿음으로만’의 신학을 세워가는 노력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특별히 천주교 신학의 오류를 시정하고 성경의 교훈을 제시하는 교리를 매우 정밀하게 제시한다. 그 중심은 ‘오직 은혜로만’의 복음을 ‘오직 믿음으로만’의 고백을 통해 전달할 때에만 참된 은혜의 신학이 완전하게 표현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데 있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要理問答)은 개혁주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문답식으로 작성된 신앙고백이다. 16세기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루터파”와 “칼빈파”와 “쯔빙글리파”가 신학적으로 충돌하여 혼란을 야기하자 프레드릭 3세(Frederick III)가 이들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여 “건전한 신앙교육서”를 제정하고자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 우르시누스(Zacharius Ursinus)와 궁정 설교자 올리비아누스(Caspar Olevianus)에게 지시하여 작성케 한 것이다. 올해는 그것이 채택된 지 450년이 되는 해로, 이것을 기념하여 학자들의 논문 발표가 있었던 것인데, 국내 학자들의 평가처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명확”하고 “철저”하고 “정밀”하고 “완전”한 신학인지는 성경으로 살펴볼 문제이다.
첫째, “지옥에 내려가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무지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6주일 44번 문답에 보면 이런 질문과 답변이 있다.
「44. 그것(사도신경)에는 왜 “주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덧붙여졌습니까?」
「내가 크나큰 시험들에 처해 있을 때 내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분의 혼으로 겪으셨던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과 공포를 통해 나를 지옥의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구속하셨음을 내가 확신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말 사도신경에 “음부로 내려가셨다가”로 번역된 부분에 관한 문답이다. 사도신경은 이교도 로마카톨릭이 만든 신조로서, 그것을 형식적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게 하여 로마카톨릭교도가 되게 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들로부터 부분적으로 개혁해 나온 개신교도들 또한 그것을 동일하게 예배 때 헛되이 반복하고 있는데, “주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는 표현과 관련된 성경적인 해석은 위 요리문답의 답변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분의 혼으로 겪으셨던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과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 사도신경을 떠나 “주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점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자.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실제적으로 지옥에 내려가셨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먼저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말씀한다. 『그가 미리 앞을 내다봄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 것은, 주의 혼이 지옥에 버려지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육신도 썩어짐을 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라』(행 2:31). 이 말씀에 따르면 주님은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분명하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마 12:40)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 그대로 『땅의 낮은 부분들[지옥]로 먼저 내려가셨다』(엡 4:9). 성경은 지옥을 “땅의 심장”이라고 표현하며, 주님은 그곳에 우리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들을 가지고 내려가셨고, 우리의 의롭게 하심을 위하여 그 죄들을 그곳에 내려놓고 부활하신 것이다(롬 4:25).
그러나 주님께서 지하세계로 내려가셔서 하신 일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지옥의 열쇠”(계 1:18)로 지옥의 문(욘 2:2)을 여시고 우리의 죄들을 그곳에 내려놓고 문을 잠그신 주님은 지하세계의 『감옥에 있는 영들』(벧전 3:19), 곧 헬라어로 “타타루스”라 불리는 구역에 갇힌 『자기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유 1:6)에게 가셔서 “유죄 판결”을 선언하셨다(벧전 3:19). 이 『죄를 지은 천사들』은 노아의 홍수 이전에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취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사람들처럼 죽게 된 자들로(시 82:7), 현재 영원한 사슬로 묶여 큰 날의 심판 때까지 흑암 속에 갇혀 있다(유 1:6). 주님은 이들 외에도 누가복음 16장에서 『아브라함의 품』(22절)으로 묘사는 낙원으로 가셔서 그곳에 머물던 『죽은 자들』, 곧 “구약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셨고(벧전 4:6), 낙원에 있던 그들을 낙원과 함께 셋째 하늘로 옮기셨다(고후 12:4). 현재 지하세계의 『아브라함의 품』은 비어 있으며, 대환란 때 죽임당한 환란성도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계 6:9-11).
둘째, “성도의 유업”에 관한 무지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4주일 63번 문답에 이런 질문과 답변이 있다.
「63. 하나님께서는 선행에 대해서 이생과 오는 생에서 보상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우리의 선행은 아무런 보상받을 가치가 없는 것입니까?」
「그 보상은 공로가 아닌 은혜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문답은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다는 61번 문답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62번은 행함에 근거한 의가 구원의 요소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63번은 그리스도인의 행함이 그가 받을 보상과 연결되는 것을 부인하고 그 보상마저도 은혜로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구원받는 데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은혜)와, 구원 이후에 행함으로 갖는 “성도 자신의 의”(보상)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너무 은혜만 강조하다보니 보상마저도 행함 없이 은혜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성도가 자기 몸으로 행한 일로 상을 받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대한 진리를 가려 버린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후 5:10). 모든 그리스도인이 셋째 하늘로 휴거되어 서게 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관한 이 구절은 분명히 우리가 『자기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보상은 죄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는 관련이 없고, 성경에서 『정결하고 흰 세마포』로 대변되는 『성도들의 의』와 관련이 있다(계 19:8). 성도가 행함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받고 나면, 그에게는 성도로서 합당한 의로운 행위가 요구되는데, 바로 이 행위를 자기 몸으로 “성경대로” 얼마나 정확하게 했느냐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받을 상과 직결되게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행한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같은 일이면 상을 받게 되지만, 나무나 짚이나 그루터기 같은 『죽은 행실』(히 9:14)로 된 것이면 상을 받을 수 없다(고전 3:11-15).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의 상은 천년왕국에서의 유업을 상속받는 일로 이어진다(갈 5:21). 지금 주님을 성경대로 잘 섬기면 『영원한 영광의 비중』(고후 4:17)을 이루지만, 성경대로 섬기지 않고 교단 교리로 섬기면 영원한 수치를 당하게 된다. 성도에게는 구원 외에도 그의 섬김에 따른 영원한 영광의 보상이 있다(딤후 2:10). 성도의 보상이 마냥 은혜로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넋 놓고 가만히 있다면 천년왕국에서 상속받을 유업은 전무하다.
셋째, 유아침례(세례)에 관한 오류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4번은 유아침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문답한다.
「74. 유아들도 침례를 받아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유아들의 부모들은 물론,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백성에 속해 있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그들의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죄로부터의 구속과 믿음을 주시는 성령이 약속됩니다. 그들은 또한 언약의 표인 침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속으로 심겨져 불신자들의 자녀들과 구별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할례로 이뤄졌고, 신약에서는 이를 대체해 침례가 지정되었습니다.」
흔히 유아세례라 일컫는 이 침례는 로마카톨릭이 인간을 아기 때부터 카톨릭에 귀속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이 부분은 카톨릭을 흉내 낸 칼빈의 “비위를 맞춘” 듯하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4장 16절에서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 그 정당성이 인정되었다고 가르쳤다. 아브라함이 그의 자녀들에게 “할례”를 주었으므로 그리스도인 부모들도 그들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축복하셨는데 유아들에게도 세례를 줘야 하지 않으며, 사도행전 10장에서 코넬료 집안 사람들이 침례(세례)를 받았을 때 유아들을 빼놓고 침례를 주었을 리 만무하므로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런 해석은 궤변 수준이다. 칼빈은 신학적 궤변가였다. 불확실한 구절로 성경을 증명하려 하면 칼빈처럼 이단 교리를 만들어 내게 된다.
칼빈은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인 유대인들과 영적 자손이 신약 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은 자신들이 약속된 팔레스타인 땅의 주인이라는 표시로 『표면적 육체의 할례』(롬 2:28)를 행해야 했다(창 17:11-14). 신약 그리스도인은 팔레스타인 땅의 주인이 아니다. 그와 관련 있는 것은 『마음의 할례』이며, 내면적으로 받는 이 할례로 인해 『내면적 유대인』이라 불리게 된다(롬 2:29). 내면적 유대인과 관련된 할례는 골로새서 2:11에 나와 있다. 『또한 너희가 그의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 버린 것이라.』 이것은 죄인이 거듭날 때 성령께서 그 죄인의 혼과 몸을 분리시키시는 영적 수술이다. 이 『그리스도의 할례』는 내면적이지 표면적이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할례로 영적 유대인이 된 것이며, “물침례”가 아닌 “영적 할례”로 하나님 보시기에 불신자들과 구별되는 것이다. 물침례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히고 부활했음을 믿는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보여 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다(벧전 3:21). 물침례는 결코 구원의 수단도, 성별의 수단도 아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며, 하나님의 교회는 유대인이 아니다(고전 10:32). 따라서 신약의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침례는 구약의 유대인을 위한 할례를 대체하지 않는다. 신약 그리스도인은 그가 구원받은 순간 “성령 침례”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감으로써 죄인들로부터 영적으로 구별되게 된 것이다(고전 12:13). 유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어 이렇게 될 수 없다. 율법을 몰라 죄를 지을 수 없기에 죽으면 지옥이 아닌 하나님께로 가게 될 뿐이다(롬 4:15). 아기들에게 형식적인 물침례를 주어 구원받았다고 하거나 불신자의 자녀들과 구별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마귀의 교리이다.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귀의 종들의 기막힌 “특기”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4번에서는 “성도의 혼의 구원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십계명의 제1계명에 따라 “모든 우상 숭배를 피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뜬금없이 “구약의 십계명”을 들고 나온 그것은 행함에 근거한 의는 구원의 요소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친 62번 문답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습을 보인다. 전 세계 개혁 교회들이 450주년을 기념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 기초적인 구원론부터 혼란의 도가니이다. 『혼란의 창시자』(고전 14:33)인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다. 한 번의 제사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제(히 10:12,14)를 불완전하게 만든 교리집의 무엇이 “명확”하고 “철저”하고 “정밀”하고 “완전”하다는 것인가? 율법의 행위로 난 자들은 누구든지 저주 아래 있다(갈 3:10). 그것은 지난 450년 동안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의심하고 행위구원을 붙든 지옥의 자식들을 양산해 온 교리집일 뿐이다. “루터파”와 “칼빈파”와 “쯔빙글리파”를 적절히 혼합한 비성경적인 에큐메니칼의 영으로 작성된 『헛된 것이요, 잘못 만들어진 것들』인 것이다!(렘 10:15)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다. 거짓을 신뢰하는 자들은 광야의 바람에 사라지는 검불처럼 흩어지고(렘 13:24),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처럼 될 것이라고 주님은 경고하신다(시 1:4).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들의 회중에 들고 싶다면(시 1:5) 거짓 교리를 신뢰하지 말고 바른 말씀을 신뢰해야 한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바른 교리를 공부하는 것이 의인으로서 번성하고 영원을 보장받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딤후 2:15, 시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