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5년전...그러니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그로부터 다시 11년전인 1978년은 나의 선배이자 영화를 만든 유하감독이 같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게다.
그가 나의 고등학교 선배였다는 것은 영화가 개봉하기전 잡지사의 어느 인터뷰에서 알게되었다.
에피소드 1 -
<말죽거리잔혹사>는 감독이 겪었던 그때 그시절의 한페이지를 스크린에 옮겨놓았다.
나의 모교는 윤제균감독의 데뷔작인 <두사부일체>에서도 소재로 다루어지면서 비리학교로 명성(?)을 날리기도한 - 사실 그 몇해전 언론에서 재단비리를 터뜨려줘서 학교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제법 된다 - 이제는 꽤나 유명세를 치루게된 학교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내가 재학하던 시기는 <말죽거리잔혹사>와 <두사부일체>의 중간지점정도 될것이다.
사실 나와 같은 경우는 당시 강남의 학군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업문제로 초등학교5학년때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 나의 모교는 같은 학군 중3수험생들이 가장 가기싫은 학교 1위였다.
이유로는 크게 두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두발을 짧게 잘라야했다. 영화에서도 잠깐 보여지듯이 실제로도 등교시 앞머리가 3cm가 넘으면 바리깡으로 머리를 뜯어놓기때문에 자르지 않을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학교앞 이발소아저씨는 별다른 테크닉없이 쉽게 돈을 벌수 있었다.
두 번째는 구타가 심하다는 소문때문이었다.
주로 군기를 담당했던이들은 체육선생과 교련선생들이었는데, 역시 영화에서처럼 체육시간에는 늘 선착순을 돌기 바빠 기운을 쏙 빼놓고 수업을 들어야했던 기억이 난다.
그 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학생들은 우리학교에 배정되기를 꺼려했으며 어떤 친구들은 눈물을 흘리기 까지했으니 말 다한셈이다.
<말죽거리잔혹사>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더 관심이 가는 영화이기도 하다.
당시 선배들의 학교생활은 어떠했을까. 물론 70년대 '얄개시리즈'를 기억해낸다면 그시절을 들여다볼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캐릭터들의 코믹한 설정과 그들의 우정을 위주로 이야기할뿐 학원의 실체는 좀처럼 사실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아니 다루지 못했을것이다.
영화가 당시보다도 11년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갔지만 충분히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으며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들도 등장했다.
꼭 반에는 햄버거나 이정진,그리고 한살 더먹은(법적으로 확인된바없는) 김인권같은 캐릭터들이 존재했었다.
그때에도 교련선생들은 영화에서처럼 군복을 입고 수업을 했으며 그들이 주는 기합이나 폭력은 78년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인권이 아침조회시간에 빈교실에서 혼자 책상에 엎어져 자고 있을때 복도를 순찰하던 악질교련선생이 지휘봉으로 그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내리치며 깨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어찌나 통쾌하던지 나는 혼자서 박장대소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김인권이 맞다가 성질이 났던지 교련선생에게 대들며 주먹을 날리는게 아닌가. 그시절 누구나 상상속에서만 꿈꾸던 장면인지라 나도모르게 속으로 "더패라,더패"하면서 김인권을 응원하는 모습을 발견할수 있었다.
에피소드 2 -
<말죽거리잔혹사>에서는 아주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80년대 안소영,오수비에 이어 3代애마부인으로 데뷔한 김부선의 모습을 오랜만에 볼수 있었다. 당시 대표적인 섹스심볼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한창때의 농염함은 온데간데없고 퇴폐적으로 변한 그녀의 주름진 모습에서 隔世之感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90년대초 장현수의<게임의 법칙>이나 장선우의<너에게 나를 보낸다>에 잠깐 출연했을 당시만 해도 그녀만이 간직했던 요염함은 건재했었는데 말이다.
유하감독이 극의 흐름상 없어도 될 그녀를 캐스팅한 것은 아마도 그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위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된다.
에피소드 3 -
감독이기전에 유하는 시인이었다.
영화를 보고난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의 대표작들은 ‘이소룡세대에바친다’‘학교에서배운것’등 제목에서도 알수 있듯이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詩였다는 것에 주목할만하다.
<말죽거리잔혹사>는 그가 시에서 영화로 자리이동하면서 그 추억함의 연장선상이라고도 할수 있겠다.
누구보다 잔혹했기에 그시절의 향수가 더 지독스러운지도 모른다.
곽경택의 <친구>이후로 한국영화에서 심심치않게 유행처럼 등장했던 복고 영화중 단연 복고스럽다. 이 복고스럽다라는말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78년~79년의 불과 1,2년사이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선보인 대표적인 복고영화들<해적디스코왕되다>,<품행제로>,<클래식>과는 다르게 감독은 사춘기적인 감성코드까지 디테일하게 그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덜컹거리는 만원버스에서 첫눈에 반한 은주가 결국 현수의 애정을 확인함에도 불구하고 힘(권력)에서 앞서는 가출한 우식을 따라 나선 것 역시 유신말기 폭력공화국의 한 단면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처럼 <말죽거리잔혹사>는 그저 개인적인 학창시절을 회상하기 위함이 아닌 암울했던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청춘들의 슬프고도 허망했던 현실을 제대로 포착하여 보여준다.
에피소드 4 -
나와 같은 세대의 남자라면 아마도 어린시절 성룡에 열광하지 않았던 이들은 드물것이다.
<영웅본색>으로 주윤발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는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만약 이소룡이 죽지않았다면 성룡이 대중적으로 성공할수 있었을까?
다시말해 성룡은 이소룡의 죽음을 딪고 일어선 스타라고도 할수 있겠다.
<말죽거리잔혹사>의 마지막장면, 성룡의 출세작 <취권>의 간판이 걸린 국제극장앞에서의 엔딩은 80년대로 넘어서게되는 즉, 절권도에서 취권으로 우리들의 우상이 이양됨을 암시한다. 박정희가 서거되고 5공화국이 곧바로 도래되는 것 처럼말이다.
사실 영화에서처럼 내게 이소룡은 살갑게 다가오는 존재가 아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전 우리집에서 하숙을 하던 고등학생 형이 있었는데
그 작은 골방 한켠에는 늘 쌍절곤이 걸려있었다.
시간이 나면 형은 검은 테이프로 쌍절곤을 감곤 했는데, 한번도 돌리는 모습은 본적이 없었다. 그저 쌍절곤 하나 가지고 있는 것, 늘 새것처럼 손질하는것, 그자체가 그에게는 뿌듯함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만큼 당시 이소룡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서 대단한 것이었다.
에필로그 -
<말죽거리잔혹사>를 보고 극장문을 나서며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누가 말했던가
'추억은 무엇이든 아름답게 기억된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