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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타가 있는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소나무
중당(中唐)의 시인 설도(薛濤, 768-832)의 생애와 작품을 가만가만 음미했다. 나보다 먼저 다녀간 누리꾼들의 글을 지팡이 삼아 내 마음은 어느새 촉도(蜀道)로 달려갔고 청두(成都) 비단강(錦江) 가 망강루 대숲 길을 거닐고 있었다.
설도는 당나라 대종(代宗) 대력(大曆) 3년(768)에 장안(長安城)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고구려와 티베트와 싸우고 고구려 멸망 후 당의 평양성 안동도호부 총독이 되었으며, 나당전쟁의 기벌포전에서 신라군에게 패전한 당의 명장 설인귀(薛仁貴, 613-683)의 후예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촉의 자사(刺史)였는데 운(鄖)이고 그녀의 자는 홍도(洪度)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촉으로 왔다. <<촉고(蜀故)>>에는 설도가 8세에 이미 성률(聲律)을 알았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뜰의 늙은 오동 한 그루, 구름 속으로 솟았네(庭除一古桐, 聳于入雲中)”
이라고 읊으니,
“가지는 남북의 새 맞이하고, 잎새는 오가는 바람 보내네.(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
이라 응수하였다.
그이가 다섯 살에 백거이가, 6살에 단문창이, 12세에 원진이 태어났다. 원진(元稹, 779-831)은 나중에 재상이 되었으나 부패한 정치를 탄핵하다가 여러 번 남쪽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시풍은 평이하여 백거이(白居易, 772-846)와 병칭되어 ‘원백(元白)’이라 불리며 그의 시체를 원화체(元和體)라 하고 문집 <<원씨장경집(元氏長慶集)>>이 있다. 설도는 39세에 12살 연하의 촉에 온 원진과 처음 만나고 둘은 평생에 그리워하는 연인이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두보(杜甫, 712-770) 초당에는 어련히 갈 것 이라고 여기고 출발 전에 두시를 다시 읽어 보았다. 하지만 두보 초당은 가지 못하고 대신에 우연히 여기 망강루에서 만난 설도와 원진의 시를 집에 와서 찾아보았다. 우리 집에 내가 간직하고 있는 김달진 시인이 역해한 <<당시전서(唐詩全書)>>에는 원진이 동정호가 있는 옛 초나라 땅 강릉(江陵-荊州)으로 좌천되어 가며 아내를 잃고 어린 딸을 안고 지은 애달픈 시가 한 수 실려 있다.
회포를 풂
遣懷
나는 초택의
물을 따라가는데
그대는 함양의
무덤 속 흙이 되었다.
만사가 모두 시들하거니
어느덧 한식인가.
나는 어린 딸애와
장막 앞에서 울고 있다.
我隨楚澤波中水
君作咸陽泉中泥
百事無心値寒食
身將稚女帳前啼
원진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으로 아내를 잃었고, 또 올곧은 성품으로 부패한 정치에 맞서다 몇 번이나 좌천을 갔다. 세상의 냉혹함과 아내를 먼저 보내야 했던 그는 삶의 고달픔을 설도라고 하는 기생 시인과 정분을 나누며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설도는 또 그러한 원진에게 애련(哀憐)한 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남녀간의 지순한 사랑, 그것도 살아서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헤어져야 하는 비련(悲戀)의 사랑이란 시공을 초월해 사람의 심금을 깊이 울리는 마력이 있다. 그것은 또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고양시키는가.
설도는 14세에 이미 시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전당시소전(全唐詩小傳)>>에는 설도 18세에 위고(韋皐)가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로 부임했는데, 설도를 불러 악적(樂籍: 음악을 담당하는 기생; 기생은 전통시대의 관청에 소속된 예술인)에 올려 관청의 기생이 되게 하였다. 위고는 죽을 때까지 이십년 동안 부모를 졸지에 잃은 설도의 후견인이 된다. 아마도 부모는 티베트와의 전쟁에서 잃었을 것이다. 이 때 여인이지만 박학한 그녀에게 위고는 책 교정과 열람의 소임을 맡은 교서 직책을 특별히 부여하여 설도는 그 뒤로 ‘교서(校書)’라고 불렸다. 이후 ‘교서’는 기생의 아칭이 되었다.
설도 22세에 위고가 티베트 군대를 대파했다. 사천 지방이 예로부터 중국에서 티베트로 들어가는 길목이고, 사천의 차와 티베트의 말이 최근까지도 교역되었다. 20세기 초기까지도 사천성의 일부 지역이 티베트 영토였다. 성도는 당시 티베트와 당의 세력이 충돌하는 지역이었다. 설도가 있는 성도 지역을 관할하는 관리가 서천절도사로 장안에서 파견되었다. 관기인 설도는 이들 절도사들과 끊임없이 교유한 것이다.
설도 28세에 단문창(段文昌)이 후임 교서관이 되었고, 설도는 시 <단교서에게 줌(贈段校書)>를 지었다. 설도 29세에 위고가 재상이 되어 장안으로 갔고, 설도 38세에 위고가 죽고, 원자(袁滋)와 유벽(劉辟)이 서천절도사 정․부사로 부임해왔다. 이 때 설도는 그들의 수청을 거부한 듯 하다. 그해에 설도는 죄를 받고 변방으로 쫓겨났다. 이 때 시 <벌 받고 변방으로 가며 회포가 있어서(罰赴邊有懷)>를 지었다.
설도 39세에 원진이 촉으로 왔고 설도와 운명적으로 해후 했다. 이 해에 유벽이 돌아가고, 고숭(高崇)과 문평(文平)이 후임으로 서천절도사로 부임해 왔다. 설도 이 때 시 <티베트 도적을 평정한 뒤에 고상공에게 올림(平賊后上高相公)>를 지었다.
설도 40세에 무원형이 절도사로 부임했고, 설도 시 <이수(二首)>를 지었다. 42세에 원진이 성도 동천(東川)에 왔고 설도와 만났다. 이 때 설도 벼루․붓․먹․종이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노래하는 재기 넘치는 시 <사우찬(四友贊)>을 지었다.
磨潤色先生之腹 갈아서 윤기나는 색은 선생의 배,(벼루)
濡藏鋒都尉之頭 적셔서 예봉을 갈무리한 것은 도위의 머리,(붓)
引書媒而黯黯 책을 끌어대는 매파는 벙어리,(먹)
入文畝以休休 글밭에 들어서 쉬고 쉰다.(종이)
설도 43세에 원진이 환관의 모함을 받아 강릉으로 좌천되매, 설도 길 위에서 그와 눈물을 뿌리며 이별을 하였다.
버들강아지
柳絮
二月楊花輕復微 이월의 버들강아지는 가볍고 가녀린데
春風搖蕩惹人衣 봄바람 태탕하여 살랑살랑 옷깃에 나부낀다.
他家本是無情物 버들강아지야 본래 무정한 것이건만
一向南飛又北飛 님 향한 마음 남으로 북으로 날아가네.
설도 44세에 잠시 두보가 띠풀로 초가집을 짓고 살았던 망강루와 가까운 완화계(浣花溪) 백화담(百花潭)에 가서 살았다. 이 때 설도가 새롭고 특별한 10색 종이를 만들었다. 설도 46세에 강릉(江陵)에 가서 그리운 원진을 만났다. 시 <서암(西岩)>, <무산사당을 배알하다(謁巫山廟)>를 지었다. 설도 47세에 원진이 시 <촉의 설도에게 주는 시 다섯 머리(貽蜀五首)>를 지었다. 설도 51세에 왕파(王播)가 서천절도사에 부임해 왔고, 설도는 시 <왕상서에게 올림(上王尙書)>, <일찍 핀 국화에게(賦早菊)>를 지었다. 설도 54세에 단문창이 서천절도사에 부임해왔고, 그에게 시를 지어 바쳤다. 원진이 한림원학사로 승진했으며, 시 <설도에게(寄贈薛濤)>를 지었다.
원앙초/설도
鴛鴦草
綠英滿香砌 싱그런 꽃봉오리 향기로운 섬돌에 가득
兩兩鴛鴦小 짝지어 어울린 어린 원앙들이라.
但娛春日長 오직 긴 봄을 즐거워 할 뿐이니
不管秋風早 가을바람 무에 걱정할 것 있으랴
설도에게/원진
寄贈薛濤
錦江滑膩蛾眉秀 금강의 매끄러움과 아미산의 빼어남이
幻出文君與薛濤 변하여 탁문군과 설도가 되었구나.
言語巧偸鸚鵡舌 말씨는 앵무새의 혀와 같고
文章分得鳳皇毛 문장은 봉황의 깃털마냥 화려하네
紛紛辭客多停筆 시인들 부끄러워 붓을 멈춘 이 많고
個個公卿欲夢刀 공경대부들 꿈속에서라도 그대 같은 시를 쓰고 싶어하네
別後相思隔煙水 헤어져 서로 그리운데 아득한 강 저편이라
菖蒲花發五雲高 그대 있는 곳엔 창포 꽃 피고 오색구름 높겠지.
잠시 옆길로 빠져 원진이 시에서 설도와 나란히 세운 탁문군이란 여인과 원진 자신을 암시하는 사마상여의 사랑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179-117)는 시종관이 되어 한나라 경제(景帝)를 섬기고 무기상시(武騎常侍)가 되었으나, 경제의 아우인 양(梁)나라 효왕(孝王)이 문인 추양(鄒陽)·매승(枚乘)·엄기(嚴忌) 등을 거느리고 사신으로 왔는데, 그것을 부러워하여 관직을 내놓고 손님으로서 양나라로 갔다. 얼마 안 되어 효왕이 죽자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하고 궁한 생활을 하며 <자허부(子虛賦)>를 지었다.
이 무렵에 쓰촨성 린충(臨邛)의 거상인 탁왕손(卓王孫)의 집에 열린 잔치에 문장가요 연주가로 이름 높은 그가 초청받았다. 탁왕손의 딸 탁문군은 용모가 수려하고 음악을 사랑했는데, 16세에 시집갔다가 17세에 과부가 되어 친정에 와 있었다. 그는 <봉구황곡(鳳求凰曲)>이란 곡조를 연주하였다.
봉(鳳)아, 봉아, 고향에 돌아왔구나 !
너를 사해에서 찾기를 원하였지만
이제까지 그 원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오늘 밤에야 이 마루에 올라 만나게 되었구나
아름다운 낭자가 규방에 있으나
방은 가까워도 사람은 멀어 비통하게 하는가
그녀와 함께 한 쌍의 원앙이 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함께 저 높은 하늘을 날 수 있을 텐데
봉(鳳)아, 봉아, 나를 따라 머무르렴 !
부지런히 여신님을 위해 뒤를 밀어주렴
정이 흐르고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나니
깊은 밤 서로 의지하길 알아주는 이 누구이던가
두 날개 활짝 펴고 하늘위로 날아오르니
나는 더 이상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구나.
이 곡으로 문틈으로 엿보고 있던 탁문군에게 구애하였고, 둘은 눈이 맞아 청두(成都)로 야반도주하였다. 두 사람의 생활은 극도로 궁핍하여 수레와 말을 팔아 선술집을 차렸다. 문군이 술을 팔고, 상여는 시중에 나가 접시닦이 일을 하였다.
<자허부(子虛賦)>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흉노를 치기 위해 장건을 비단길 너머로 보낸 무제(武帝)의 상찬을 받은 것이 계기가 다시 시종관으로 무제를 섬겼다. 사마상여가 권력과 첩에 둘러싸이자 탁문군은 그에게 결별을 선언하는 <백두음(白頭吟)>을 지어 전했다.
그대 위해 희기론 산 위의 눈과 같고,
깨끗하기는 구름 사이의 달과 같았지요.
듣기에 그대에게 두 마음이 있다 하네요,
이로서 서로 정을 끊게 되었군요.
지금 차린 술자리는 마지막이옵니다,
내일 아침이면 해자(垓子) 머리 위겠지요.
그 해자 위에서 헤어져,
물길 따라 동서로 걸어가겠지요.
쓸쓸하고도 또한 처량 하겠군요.
여자가 출가하면 울면 안 되는데.
나만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백발이 되도록 이별 없이 사는 것이었건만!
대나무 가지는 어찌 이다지도 하늘거리며,
물고기 꼬리는 어찌 이토록이나 날렵할까요?
남아는 의기를 중히 여기건만,
하필이면 돈만 위하나요?
이 노래로 잘못을 뉘우친 사마상여는 다시 탁문군과의 사랑의 약속을 지켰다. 훗날 재산을 분양받아 부유해진 상여는 정치적 야심은 없었다고 한다. 만년에 산시성(陜西省) 마오링(茂陵)에 칩거하다가 일찍부터 앓고 있던 당뇨병(消渴症)으로 병사하고 탁문군은 홀로 늙었다.
설도 55세에 연인 원진이 재상이 되었으나 곧 모함을 받아서 강동관찰사(江東觀察使)로 좌천되었다. 이 때에 설도를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유채춘(劉采春)의 방해로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둘은 이후로 다시는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님 그리는 봄노래
春望詞
(一)
花開不同賞 꽃 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相思處 그리운 이는 어느 곳에 있는가
花開花落時 꽃 피고 꽃 지는 이 시절에
(二)
攬草結同心 풀을 따서 맺은 동심매듭
將以遣知音 님에게 보내어서
春愁正斷絶 이 봄의 시름 뚝 끊으려 했건만
春鳥復哀吟 봄새 다시 애달피 운다
(三)
風花日將老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佳期猶渺渺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不結同心人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四)
那堪花滿枝 어쩔거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
飜作兩相思 바람에 날려 그리움으로 변하네
玉箸垂朝鏡 옥구슬 같은 눈물방울 아침 거울에 떨어지건만
春風知不知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설도 56세에 두원영(杜元穎)이 서천절도사로 부임했고, 설도는 벽계방(碧鷄坊: 망강루 공원)으로 옮겨 살았다. 이 때에 우물을 파고 10색지를 제조하고, 음시루(吟詩樓)를 세웠다.
설도 57세에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시 <설도에게 줌(贈薛濤)>를 지었다. 설도 60세에 원진이 예부상서직(禮部尙書職)을 받았다. 설도 61세에 원진이 설도를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樽前百事皆依舊 술동이 마주하니 모든 일이 의구하건만,
檢点惟無薛秀才 점검하고 생각해보니 설 수재가 없구려.
설도 63세에 이덕유(李德裕)가 서천절도사로 부임해와 주변루(籌邊樓)를 세웠다. 설도 64세에 그의 시중 압권인 <주변루(籌邊樓)>를 지었다.
기념관에는 망강루에 올라 설도의 삶과 시혼을 노래한 문장을 서각(書刻)하여 달아 놓았다. 종수량(鍾樹梁)이 갑술(1994)년 가을에 설도학회에 참석하여 지은 시에 병술년(2006) 초추(初秋)에 발문을 짓고 주초(朱樵)가 쓴 것이다. 여기에 <주변루>의 한 구절이 나온다. 성도는 당과 티베트가 각축했던 전초 기지였다. 이곳의 서천절도사가 머무는 도호부 관청의 악적에 절도사 위고가 천애의 고아가 된 설도를 올려서 기생으로 살게했지만, 그이의 애국애민의 충정과 굳셈이 잘 드러나는 이 시는 여장부 설도의 또 다른 모습을 잘 보여준다.
諸將莫貪羌族馬 여러 장수들 강족(티베트) 말 탐하지 말고,
最高層處見邊頭 주변루 꼭대기에 올라 변방 땅 굽어보시라.
문종 대화 6년(832) 가을에 이곳 성도에서 설도 65세로 삶을 마쳤다. 십일월에 다시 촉에 온 단문창이 설도의 묘지명(墓志銘)을 지었다. 망강루 공원 안에는 1994년 10월에 설도연구회가 ‘당여교서설홍도묘(唐女校書薛洪度墓)’라는 묘비를 세운 시인의 무덤이 있다. 설도는 450여 수의 시를 지었고 그 중에 88수가 현전한다. 시집 <<금강집(錦江집)>> 5권, <<홍도집>>이 있다.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