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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沙十里 海棠花 불교 안에서의 삶과 죽음의 旅程 - (탄탄스님 불교중앙박물관장)
- 53선지식 시즌2, 열세 번째 법회봉행
삼보에 귀의 하옵고 _()_
■.법회주제 :明沙十里(명사십리) 海棠花(해당화) 불교 안에서의 삶과 죽음의 旅程(여정)
일 시 : 불기 2566년 4 월 22일 (금) 저녁7시~9시
장 소 : 조계사 대웅전
법 사 : 불교중앙박물관장 탄탄 스님
사 회 : 총무부장 보현행 안영주님
참석자 : 총동문회 회장 혜월 권순석님 외145명 참여
집 전 : 신행부장 일심행 전지유님
반 주 : 정진경 삼조님
■. 법회식순 : 화엄경 약찬게(다함께) - 공지사항(사회자) - 개회사 - 삼귀의 - 우리말반야심경 -음성공양 ( 바람의 인연 / 봄 처
녀 ) - 인사말씀( 제9대 회장 혜월 권순석님 ) -청법가 - 입 정 - 법 문 ( 불교중앙박물관장 탄탄 스님)- 사홍서원 -폐회사 - 기념
사진 촬영
(조계사 불교대학총동문회 53선지수 합창단 )
□. 지휘 : 경희대학교 박경태교수님
□. 반주 : 삼조 정진경님
□. 포교부장 보명신 오달금님 외 단원 일동
□.촬영 : 기획부 수석차장 관음수님
■.법회 이모저모
형형색색 피어난 봄꽃들이 발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봄꽃들을 즐길 여유도 없었지만 올 해는 거리
두기 완화소식과 함께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는 포스트 오미크론을 준비하는 요즘, 조계사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봉축
표어 “나누면 따듯해요." 로 부처님 자비광명이 온 세상에 비추길 희망하는 연등이 마당에도 장엄되어 축제 분위기입니다.
조계사불교대학 총동문회는 불기2566년 4월22일 대웅전에서 성해 장경태(교육본부 부회장)상임고문, 호연 김경숙(신도회 부
회장)장학회이사장, 대덕심 김영숙 자문위원장, 삼조 정진경님, 자문위원(명선 박종화, 영윤 김용규, 경담 이원굉, 수연심 남미
화, 정진행 양순덕, 현진화 김정미, 도안심 이순화, 환희지 권종순, 평전 하용수, 월광지 임연선) 외 총동문회 운영위원 및 불자
145여명이 참석, 화엄경 약찬게 합송을 시작으로 삼귀의, 우리말 반야심경, 또 53선지수합창단의 음성공양 순으로 법회를 봉행
하였습니다.
법석이 마련된 자리에서 총동문회 제9대 회장 혜월 권순석님께서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아름다운 도량 우리절 조계사
경내에 불교 중앙 박물관장이시며 삼각산 적조사 주지소임을 맡고 계시는 탄탄 스님께 오십삼선지식 구법여행 시즌2, 열세번
째 법회를 선후배 동문님및 여러 불자님들과 함께하게 되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시며 반갑게 인사말씀을 주셨습니
다.
이번 법회는 자승스님을 은사로 출가, 1993년 통도사에서 청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이후 1997년 구족계를 수지하시고, 동
국대 졸업 (문학박사), 전) 총무원 조사국장 및 상임감찰, 현) 조계종 교육원 교육아사리, 용인대 객원교수, 삼각산 적조사 주지,
조계종 제17대 중앙종회의원, 조계종 불교박물관장을 역임하시고 계신 탄탄 스님을 초청 법사로 모셨는데요 이 자리에서 “우
리 부처님의 사생관은 이러한 견지로 사생관은 이러한 견지로 정리해 볼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란 오온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거짓 된다. 과가 인연이 되어 다 하여 호흡이 정지되고 체온이 상실되고 그리고 의식이 사라진 상태라고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죽음은 신체 기관의 통합 기능이 회복 불가능한 상실에 처하였을 때를 뜻하며 중생이 생사를 이전하는 과정으로 신.
구.의를 통한 선악의 인에 따른 과로 사유로 하여 생유 본유 사유 중유로 사분하여 중생이 무명의 세계에 윤회한다는 한 기관
의 상사를 뜻하는데 여기서 윤은 중생의 생존을 의미합니다. 생유는 곧 생을 받는 찰나 본유는 생을 받은 뒤 임종 직전까지 생
유와 사유의 중간을 말하며 사유는 최후에 임종하는 찰나 중유는 죽음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사유와 생유의 중간으로 죽은
영이 다음 생에 태어나기 전 중음의 상태인 49일 동안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일반적 죽음의 상태인 중유를 또 다른 생존의 형태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죽음은 단멸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
의 곧 다른 연장선으로서 인식하는 특징을 갖습니다. 생과 사 죽음과 열반은 둘로 볼 수 없으며 죽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출발점으로써 생과 사의 본성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그 고정된 발점으로 생과 사의 본성을 진지하게 관찰할수록 실체적 현상이
아니고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곧 마음속에 번뇌 망상일 뿐이다.” 라 하시며 불교 안에서의 삶과 죽음의 여정을 노래
와 곁들여 설해주셨습니다.
[ 공지사항 ]
■.천수다라니기도법회 안내
1. 일 시 : 매월 첫째 주 금요일 저녁 7시
2. 장 소 : 조계사 극락전
■.교육법회 - 5 월
-. 주 제 : 초발심자경문 (계초심학인문) - 3강
-. 법 사 : 지월스님-(정수사 주지)
-. 일 시 : 2022년 5월 13일 금요일 저녁 7시
-. 장 소 : 조계사 극락전
■.53선지식 구법여행 시즌2 - 열네 번째
1. 주 제 :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공하는 금강경 수행
2. 법 사 : 김원수 법사 (재단법인 백성욱박사 교육문화재단 이사장)
3. 일 시 : 2022년 5월27일 (금) 저녁7시
4. 장 소 : 조계사 대웅전
■.총동문회 53선지수 합창단 연습
-. 일 시 : 매월 1,2,3째 주 (토) 12시 30분 ~2시
4째 주 (금) 오후 5~6시30분
-. 장 소 : 안심당 지하 합창단실
-. 문 의 : 포교부장 보명신 오달금 010-9955-7070
■. 53선지식 구법여행 시즌2 법사비 보시
(2022년 4월 53선지식 시즌2-열세 번째 법사비: 고문 호연 김경숙님 보시)
■.목탁습의
-. 일 시 : 매주 토요일 오후3시30분~5시
-. 장 소 : 관음전 지하어린이법당
-. 문 의 : 신행부장 일심행 전지유 010-3240-2694
■.동문회비 및 53선지식 구법여행 법회 보시구좌 안내
-.동문회비 : 연회비-5만원, 평생회비-50만원
-.하나은행 111-054579-03005. 예금주 대한불교조계종조계사
-.문의 재무부장 정진행 윤점애 010-2929-3788
■. 장학기금 후원 (조계사불교대학총동문회 장학회)
-.조계사불교대학 동문이면 누구나 월1천 원 이상의 장학기금 후원가능
-.장학회 정회원 조건: 출자금10만원 월 1천 원 이상 후원하시는 분
-.후원계좌 : 신한은행 100-030-532200 (조계종조계사 불대총동문회)
-.문의: 장학회 총무 보현행 안영주 ,010-6272-2895
재무 신명덕 오혜식 ,010-9068-9049
■.동양금박 건축물 매입 불사
-.동양금박 건축물 매입 (일주문)불사 동참
-.1구좌 10만원/ 총 구좌 수 : 300구좌/임원 및 동문 동참 : 1인1구좌 이상
-.동참안내; 신한은행 100-030-532280 대한불교조계종조계사(불대총동문회)
-.문의 : 재무부장 정진행 윤점애,010-2929-3788
■.불교신문 구독신청
-. 53선지식 구법여행을 함께 진행하고 있는 불교신문 구독 신청바랍니다.
-. 문 의 : 부회장 공덕화 이종례 010-6847-6863
■.연등모연“1동문1등 달기”
-.등모연은 총동문회로 접수바랍니다.
-.문의 : 총무부장 보현행,010-6272-2895, 총무수석차장 명심등,010-8842-6742
■. ( 인 사 말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조계사불교대학 총동문회장 혜월 권 순석입니다. 아름다운 도량 우리절 조계사 경내에는 지금 아름다운 화장장엄 세계의 오색
연등이 장엄되어, 함께 나누면 따뜻해지는 자비와 지혜의 등불이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법회를 위하여 바쁘신 일정속에서도 귀한 걸음을 주신, 불교 중앙 박물관장이시며 삼각산 적조사 주지소임을 맡고 계시는
탄탄 스님께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또한, 오십삼선지식 구법여행 시즌2, 열세번째 법회를 선후배 동문님및 여러 불자님들과 함께하게 되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
니다.
조계사불교대학총동문회는 4월 한달 코로나바이러스의 환경속에서도 조금도 물러남이 없이
성역화불사를 위한 천수다라니기도법회, 2회차 교육법회, 제27회 일반포교사양성을 위한 4개월간에 걸쳐 고시반 운영하였으
며, 매주 토요일 목탁습의 및 경전독송 “53선지수합창단”의 동아리활동, 그리고 대웅전 열지킴이 와 부처님오신날 연등모연등
각종 봉사활동과 또한 각종 보시에 동참을 주신 동문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말씀을 올립니다.
다음주 토요일 4월30일은 불기 2566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3년만에 거리 연등회를 봉행 할수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
니다.
동문님들의 많은 동참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다함께 축복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오늘 귀한 이 시간, 탄탄 스님의 명사십리 해당화“불교 안에서의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의 귀한 한 말씀 한 말씀을 깊이 수지하
시어 늘 지혜롭고 행복한 생활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불기 2566년(2022년)4월 22일
조계사불교대학총동문회 회장 혜월 권 순석합장
■. 법문 - 탄탄 스님 (明沙十里(명사십리) 海棠花(해당화) 불교 안에서의 삶과 죽음의 旅程(여정) )
불혹의 나이를 지나고 지천명을 넘어서 보니 세상만사 모든 일이 말 그대로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세상 절절하게 폐부
에 과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동안에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은 채워지지 않는 욕구와 욕망을 채우려고 아등바등 하며 본능적
으로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자책과 반성을 하게 됩니다. 세속 공부와 외전에만 몰두해 왔는데 요즘 들어 말 그대로 부처님 일
대시교 내전 공부라고 하죠. 내전 공부가 또 이렇게 절절하게 와 닿고 지친 심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골 깊은 산사에서 낭랑하
게 염불을 하며 틈틈이 보고 싶은 책을 실컷 보고 마음껏 읽으며 살고 싶은 때가 간혹 있습니다. 지난 시절에 홍안의 신학도 엿
던 여기 이 사람이 30년도 훌쩍 더 지난 일이지만 인생의 모든 것이었던 예수를 가슴 속에서 지우고 저 멀고도 먼 옛 스승이신
부처님을 만나게 된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인류의 4대 종교 가운데 삶과 죽음의 진리를 가장 명쾌하고 정확하게
성찰하는 종교는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대권을 이어 국왕이 된 왕자의 신분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부처님께서 싯다르타 태자
로 계셨을 적에 어느 날 하루 동서남북의 사대문을 나가 바라본 궁궐 밖의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태어나서 늙어가야 하
고 병들어서 죽어가는 이른바 중생의 고통을 직면하였습니다. 그 느낀 바를 계기로 발심 출발을 결심하게 됩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이를 사문유관상이라고 합니다. 싯다르타가 카필라공을 나서 동쪽 문에서 인간의 늙음을 보게 됩니다. 그 순
간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궁 안에서 호위호식하면서 대접만 받고 살다가 인간의 늙은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부처님께서
남문에서 병자를 또 보게 됩니다. 병든 사람을 병자를 보게 됩니다. 이 인간 육체의 병듦을 직시하게 되고 그리고 서문에서 시
신을 시체를 보게 돼요. 그래서 인간의 죽음을 맞닥뜨리고 북문에서 출가를 결심합니다.
수행하는 사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태자 싯다르타의 출가 동기가 되고 태자 싯다르타께서는 우리 인간 존재의 생로
병사와 이에 얽힌 윤회의 모습을 통찰하고 관찰하고 그로부터 고뇌하게 되었으며 윤회의 사슬을 끊는 길은 오로지 출가 사원
의 길을 걷는 것이며 성도를 갈망하여서 붓다의 경지에 이르는 최종의 목적지가 되는 그 첫 발걸음을 떼게 됩니다. 인류에게는
부처님 이전이나 이후에도 많은 종교인의 종교인과 철학자 또는 사회 과학자들에 의해 인간의 삶과 죽음 그 이후의 삶에 대한
많은 연구와 수행과 성찰이 있어 왔으며 이러한 사상은 종교와 신화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부처님께서 왕위를 결
성할 수 있는 세자의 신분을 던지고 출가하시게 된 그 동기를 유추한다면 죽음에 대한 권민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
한 불안감에 그 원인이 무명에 있음을 일찍이 설파하신 부처님께서는 삶은 곧 한 번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윤회
한다고 설파하시게 됩니다. 이러한 직관은 당시 인도의 사조와도 직결합니다. 베다 또는 우파니샤드 일련의 고대 인도의 사상
에서는 윤회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지배적이고 부처님께서는 이 윤회의 사고를 수용하신 것입니다.
삶의 연속성을 깨닫고 올바른 삶의 길을 걷는 것이 초기 불교에서 강조하고 있는데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삶의 연속성이 아니
라 수시로 변화하면서 생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초기 불교 교외에서는 무상의 진실 무상의 진실이란 삶과 죽음에 대한 이
해를 불교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며 무상은 허무가 아니며 무상하게 진실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확연하게 깨달은
진리는 마음이라고 부르는 청정한 고유의 바다 위에 일어난 하나의 물결이며 결국 절대적인 인간의 개념과 경험의 현상으로서
의 삶과 죽음이라는 이 현상도 만나 만유 중에 한 가지 현상일 뿐이며 삶과 죽음 역시 인연에 의해 생긴다는 현상이며 실체나
실체로서의 불변적 속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이 다른 개념이 아니며 언제나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생사불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죽음관
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이 곧 죽음 위기에 산다는
것은 곧 죽고 있다는 뜻이며 죽음을 향하여 성큼성큼 가고 있다는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삶의 입장에서는 살아있다고 말하지만 죽음의 편에서 보면 아직 죽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늙고 병들고 누구에게
나 산다는 것은 늙는다는 것이오. 늙는다는 것은 병든다는 것입니다. 삶은 사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는 말
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려면 삶도 벗어나야 하고 생이 있다면 사도 곧 필연적인 것입니다. 인간고의 근본은 생로병사
이며 인간의 존재는 결국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이 다섯 가지 요소가 인연에 의해 임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존재인 것으로
써 경전에서는 죽음이란 곧 근이 무너진다고 그래요 근이라는 게 홀이 근자입니다. 생이란 새로운 모든 근이 일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뿌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분이 무너진다. 라는 것은 모든 감각기관의 기능이 멈춘다는 의미로 죽음은 들숨과 날숨
즉 호흡기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호흡의 의미는 뭐냐 곧 체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식은 정신현상으로서의 의식을
의미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부처님의 사생관은 이러한 견지로 사생관은 이러한 견지로 정리해 볼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란 오온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거짓 된다. 과가 인연이 되어 다 하여 호흡이 정지되고 체온이 상실되고 그리고 의식이 사라진 상태라고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죽음은 신체 기관의 통합 기능이 회복 불가능한 상실에 처하였을 때를 뜻하며 중생이 생사를 이전하는 과정으로 신.
구.의를 통한 선악의 인에 따른 과로 사유로 하여 생유 본유 사유 중유로 사분하여 중생이 무명의 세계에 윤회한다는 한 기관
의 상사를 뜻하는데 여기서 윤은 중생의 생존을 의미합니다. 생유는 곧 생을 받는 찰나 본유는 생을 받은 뒤 임종 직전까지 생
유와 사유의 중간을 말하며 사유는 최후에 임종하는 찰나 중유는 죽음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사유와 생유의 중간으로 죽은
영이 다음 생에 태어나기 전 중음의 상태인 49일 동안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일반적 죽음의 상태인 중유를 또 다른 생존의 형태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죽음은 단멸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
의 곧 다른 연장선으로서 인식하는 특징을 갖습니다. 생과 사 죽음과 열반은 둘로 볼 수 없으며 죽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출발점으로써 생과 사의 본성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그 고정된 발점으로 생과 사의 본성을 진지하게 관찰할수록 실체적 현상이
아니고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곧 마음속에 번뇌 망상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 부처님의 사생관을 정리해 보면은 생사
인연이고 살고 죽음이 다르지 않으며 미혹한 이들은 나 또는 나의 것을 애착하고 집착을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육신은 무아라
고 가르치시며 죽음 앞에서 자신이 애착했던 육신은 사라지고 허무하지만 무상한 육신을 넘어 불생불멸을 말씀하시며 죽음과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의 본질이라고 하겠습니다.
(염주 한 알 생애 번뇌 염주 두 알 사해번뇌 백팔염주 마디마다 님 의 모습 담겼으니 낭랑한 목탁 소리~ 님 에게 드리울 때 풍
경 소리 허공에 울려 퍼지네 사람 산사에 홀로 앉아 108번뇌 잊으려고 두 손을 합장하고 두 눈을 꼭 감아도 속세에 묻힌 정을
어디에서 풀겠는가. 달빛만이 서러웁게 나를 감싸네.)
요즘 온전히 하루하루 다시금 제 자신에게 되묻고 답하는 절절한 화두가 이 죽음이라는 화제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을 명
쾌하게 제시한 인류의 4대 종교는 사실 불교밖에 없다는 것을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의 불교문화는 말 그
대로 뿌리와 줄기이고 곧 근저이고 민족문화의 창달과 융성에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는 큰 원동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꼭 불자가 아니어도 이 땅 한반도에 태어난 그 누구 아마 삼척동자라도 익지 않은 사실입니다.
또한 불교 철학은 매우 심오합니다. 기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은 고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불교적 가르침이지만 삶이 고통
이라는 것 그 고통의 원인은 중생의 집착이라고 말합니다. 남보다 더 잘 살아보려고 타인을 지배하거나 군림하려는 이 모든 집
착의 근저에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 원인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자아가 무지와 무명이 그 기반입니다. 부처님 교육학인 불교는
인간의 8가지 고통 그 기본적인 생로병사의 사고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이 애별리고 싫어하는 곳과 만나는 고통인 원
중회고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인 구불득고 오음 즉 오음에 대한 집착이 생기는 보통 이를 오음성고라고 합니다. 여기에 또
사고를 추가합니다. 팔고 중 사고의 8가지를 또 4가지를 또 더하면 8구가 되지 않습니까. 팔구는 결코 뭐냐 인간 세계의 모든
고통을 망라한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의 팔고 가운데 낮고 늙고 병들어주는 생로병사가 일체가 고통이라고 하고
태어나는 생고요 늙고 가는 노고요 병들어 가는 병고요 죽는 사고는 곧 육체적인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으로는 곧 마음의 고통
이라고 할 수 있는 애별리고 원중회고 구불득고 오음성고 인간 근본 문제인 생로병사의 네 가지 육신의 고통과 정신세계의 네
가지 고통을 합쳐서 이른바 팔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지는 괴로움 부모 자식 형제 부부 친구 이웃 등 어
떤 이유 이유에서든지 사람과 사람이 헤어져 죽어서 이별이오. 살아서의 이별이요 사별 또는 생이별 생별 모두 고통이 나니 미
워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이며 싫어하는 대상을 피할 수 없는 곳에서 필연적으로 만나지는 것으로 원수
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진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를 원증회고라 범부들이 아무리 구한다 해도 얻어지지 않는 죄로 그것을 구불
득고 라고 합니다.
곧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는 우리의 몸 육신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고 우리 몸의 육근 곧 눈 귀 코 혀 몸 이걸 안.이.비.설.
신.의라고 하죠. 마음 인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 이를 불교적 가르침에서는 이를 오온이라고 합니다. 오온 팔고의 원인은 바로
욕심이 그 원인이요
욕심 성냄 어리석음 때문이죠. 이를 삼독심 곧 세 가지 독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삼독심은 왜 생길까요. 그것은 세상 돌아
가는 위치를 알지 못하는 말하자면 무명 때문입니다. 무명 세상은 8가지 고통이 존재하는 고통의 바다에 이를 고해하고 고통의
바다 다시 말해 집착하는 것이 내 정신과 육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저 있으면 있는 대로 좋으시고 없으면 없는
대로 좋으시고 하면 속편이 지내는 긍정적인 사고가 심신을 더욱 평안하게 하여줍니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증오의 마음이 싹 치면 자신의 정신 건강에도 결코 이렇지 않습니다.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온라인상에서도 보면 의견이 좀 다르다고 하면 비방하거나 헐뜯고 그러한 일들이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설득해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도 해보고 이견조차도 존중하여 주면 되는 것입니다. 참고 인내하고 자비로워
라 자비 무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토록 불교적 가치가 하니 위대한 이유는 한없는 자비의 종교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명쾌
한 진리를 담고 있는 가장 고정적이고 위대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이 있으니 비록 생일
날과 제삿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태어난 날 죽은 날은 극과 극입니다. 삶의 시작과 삶의 끝을 맺은 날입니
다. 태어나서 죽는다는 삶과 죽음의 문제 햄릿의 연극 대사가 있듯이 인간의 모든 문제의식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며 사느냐 죽
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인간의 절대 절명에 절실하고 다급한 문제이며 꼭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
교적 대안은 죽음이란 어느 누구든 결코 피할 수 없는 인간이 직면한 현실이기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기에 삶과 죽음 속에서
생사가 없는 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닫기 위한 불도의 길이 그 노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가야 할
마지막 길인데 문득 살아온 날 삶의 편린들 돌아보면 그 조각조각을 맞춰 보면 지나온 길은 왜 이리 덧없으며 가슴 한 모퉁이
가 이렇게 아려오는 것일까요. 산다는 건
죽음의 길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더디 가든 바삐 가든 걸음걸음 가야 하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죽음이 두렵고 무서움에
이를 극복해 보려고 뒷걸음을 친 듯 인생의 종지부인 죽음은 이처럼 두려워라 정처 없는 삶도 두려워라 한과 죽음이 둘이 아니
듯 삶이 있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 네 경허 선사의 천상국에 이러한 귀절이 있습니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몽주홍이로다. 천만 번 ~~ 오호오라 나의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에 등불이라 삼계대사 부처님
이 청령에 이르사대 마음 깨처 성불하여 생사윤회 영단하고 불생불멸 저고 포에 상락아정 무희 도를 사람마다 깨치라고 8만
장육 유전이라 사람 되어 못다 끄면 다시 공부 어려우니 나도 어서 닦아 보세 닦는 길을 말하려면 어허 많고 많은 대강 줄여 적
어보세 앉고 보고 ~~ 일체 초 일체지혜 소소 영영 지각하는 이것이 무엇 인고 몸뚱이는 송장이요 망상 번뇌 본고 모고 천진면
목 ~~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 번 깜짝 탓에 천리만리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 명함 나의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
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줄인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르니 물 찾듯이~ )
깨달은 이를 곧 부처라고 합니다. 석가모니불은 깨달아서 부처이고 고승도 보살도 처사도 저 서울역 앞에 노숙자도 깨닫기만
하면 그 누구도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부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깨달아
야 할까요. 그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서 상단의 부처님 전에 간절하게 비는 것입니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요. 깨달음을 위
해서 무엇을 위해서 우리가 비는 것입니까
(가야지 가야 하지 꽃 피고 새 울면 나를 가야지 산 넘고 물 건너 혼자 가야까지 꽃이 피면 꽃에서 자고 ~ 바람 불면 바람에 자
고 머나 먼 길 울며불며 혼자 가야하지 우리 절 부처님은 마음씨도 좋아 오냐 오냐 잘 가라고 나무아미타불 가야지 꽃 피고 새
울면 나는 가야지 산 넘고 물 건너 혼자 가야지 속절없는 세상살이 소리 없이 지고 마는 꽃잎처럼 호이호이 홀로 가야 하지 조
계사 부처님은 마음씨도 좋아 오냐 오냐 잘 가라고 나무아미타불)
인류의 성인은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소크라테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학자 철인 사상과 역사가 예술과 문학과 이들에게도
사실은 절대 절망의 과제가 삶과 죽음입니다. 시공의 시공과 민족을 초월해서 죽음의 문제는 인류의 숙제이고 이를 구명하기
위한 성찰은 인류가 태동하고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생고 노고 병고 죽는 거 이를테면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극명한 이치는 물질의 변증법적인 논쟁인 생성 변화 발전 소멸의 단계를 걸을 수가 없습니다.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사복 불원주의 이러한 설화가 전합니다. 신라 진평왕 서라벌에 어느 마을에 서라벌 어느 마을에 하
는 바보가 살았는데 남편도 없이 아들 하나 낳았습니다. 귀하게도 이 아들이 나이가 12살이 돼도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말도 할 줄 모르는 채 누워만 있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귀하게 여겼지만 아이가 10살이 넘도록 누워만 있다는 뜻으로 이를 사동
이라고 사동 대마의 또는 사복이라고 그래요 사복이 사복이라고 부른 이 사람이 어느 날 어머니가 죽으니까 누워만 있던 사복
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도선사에서 보림하고 계시던 원효대사를 찾아갑니다.
대사께서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답내도 하지 않던 사복이 전생의 그대와 내가 병을 싣고 다니던 암소 현생의 모친을 말하는
거예요. 암소가 죽었으니 우리 함께 장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을 하니 원효는 그리하기로 하고 사복을 따라서 그 집에
가서는 사복은 원효에게 우선 포살 포살부터 시켜 계율을 주러 갑니다. 계율은 쉽게 설명해서 주석하는 것을 포살이라고 하는
데 원효는 시신 앞에 분양하고 단정히 앉아서 태어나지 말라 죽는 것이 고통이니라 죽지도 말라 세상에 나는 것이 고통이니라
죄를 설하였습니다.
사복이 원효에게 말이 너무 길어 번거롭다고 하니까 원효는 이에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고통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서 두 사람
은 상여를 메고 한리산에 가서 장사를 치렀습니다. 진정 사바세계의 고통을 열심히 보여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사
족을 붙이자면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말라 죽게 되니 고통이다. 라고 저는 말합니다.
(여기 비가 왕중유태 ~ 땡그랑 땡그랑 어~ 어~ 북만 삼천리~ 이제 가면 언제 올라요.~~)
이렇게 상여 소리만 하니까 여기 계신 신도님들이 눈물바다 안 되더라도 마음이 찹찹하지요. 그렇죠. 마음이 착잡하죠.
(연불동 잠은 시방 시주님 원만 정치가 발원이오. 효자 춘신 열려 효부가 발원이오. 있는 아비는 수명장수 없는 아비는 탄생 발
론 헌고원명 이댁전에 아들을 낳으면 효자 낳고 딸을 낳으면 열렬을 낳아 여러 자손을 꼭대기로 백대천손 만대유전 자손 창성
의 북이 영화를 누리소서 명복이요.~ 사실지라도 사대만사대만 사시소서) 비나리 축원 비나리 축원 상여 소리 했으니까 비나리
축원 한번 해야죠. 우리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나 어린 아이가 되고 죽음이 두렵습니다. 죽음이 싫어서 죽음으로부터 멀리 도
피하려고 합니다.
살아서 어떠한 일에 종사를 했든지 무슨 일을 하였든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권력도 재물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우리 부처님의 죽음은 어떠했을까요. 당시 어느 도시 변두리에 있는 숲에서 조용히 열반을 맞이한 부처
님은 정작 죽음을 맞이하신 우리 부처님은 어떤 감정과 혜안을 지니셨을까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자등명법등명을 부촉하십니다. 마지막 임종을 지킨 아난다의 눈으로 부처님의 임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부처님의 죽음을 우리가 열반으로 높이 부릅니다. 높이 부르면 지구한 초월성 때문에 원어 니르바나 그 니르바나는 뜻
은 불이 꺼졌다. 불이 꺼져 재 만 남은 상태에 이르는 말입니다.
생물학적 사망만이 아니라 번뇌를 완벽하게 제거한 완벽한 인간을 위한 찬사이며 그 삶을 붙잡으려는 욕심에서 해탈한 부처님
은 죽음을 피하고 싶은 욕심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반면 부처님이 열반하고 한참 뒤에야 깨달은 아난다는 애도의 진
정성이 너무 뜨거워서 그 심리적 충격과 방황으로 어지럽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걱정하시어 스스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법에 귀의하여 홀로 깨치기를 주문하신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석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한 세상 가슴에 한을 삭히며 굽
이굽이 울퉁불퉁 인생길을 걷다 보면 눈이 퉁퉁 붓도록 시원하게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울고 싶어도 보는 눈이 많아서 뭔
사연이 곡절이 저리 많아서 젊은 것이 여자가 저리도 서럽게 운다냐. 하는 주변의 숙덕거림에 속편이 울 수 없는 이들을 우리
사회에 모래알보다 많은 세상인데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어 예전에 대신 울어준다면 곡비 아십니까? 곡비 밤을 지세며 울어
준다는 그 여인 그 소구름도 구성져가지고 절제된 슬픔 세 사람이 울어 밤새도록 그리고 사연도 모르고 울어요. 그 울기조차
참 말은 울음을 듣는 이조차 서러워서 그 울음소리 때문에 상가 집 문전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원 바닥에라도 하나 던져줄까 하
고 두리번거리던 어느 집 밤나무에 묶여 있다가 목줄을 끊고 가출하는 가출 나온 황구조차 그 애절하게 서글피 울어 그 서러운
울음에 동안이 되어서 낑낑거리고 울다가 개 팔자가 서럽다 하고 낑낑 울어 그렇겠죠. 개도 울고 사람도 울고 밤을 지새워 서
럽지 서럽게 울다가 그 울던 곡비가 지쳐가지고 새벽녘에 고인이 발인제에 상주 큰 상주에 다가가서 조용히 묻어납니다.
울다가 지쳐가지고 이렇게 못 들어나 그게 누가 죽은 거야 밤새 도록하고 있다가 누가 죽는 거야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술이
울어주는 그 곡비라고 곡비 곡해주는 대리 대신 웃어주는 사람 내가 대신 화장실 가 있는 사람은 봤어도 대신 울어주는 사람
아직 못 봤어요. 그 인연도 없는 일가 일가도 아니고 알지도 못하는 상가에 가서 제 설움에 울고 그 울음을 팔면서 밤새워 울어
주던 곡비 인생에 울고 싶을 때 불보살림의 명운을 부르며 밤을 지새우며 정진을 하면 그 슬픔도 사라지는 법입니다. 유행가는
안 불러야 되겠다.
시간 됐지 어느 정도 너무 오래 하면 또 법사가 너무 오래 하면 지루하면 안 되고 지루하지 않게 짧게 해야 되는데 오늘 좀 지
루한 것 같아 보니까 두 명 반이 졸아 이거 그래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꿈속이요. 이런 좋은 것이 꿈이로다.
꿈도 꿈이로다. 꿈에 살고 꿈은 죽어가는 인생 부럽다. 그려는 꿈은 꾸어서 무엇을 할 거라
만날 풍자 내 어머님 너와 하나 원 정을 주고 득점자로 노니다가 모진 바람이 몰아쳐서 이별 별자 웬 말이냐 이별 별자를 내 어
머님 만날 복자가 웬일이란 말이냐 경부선 철로야 전라남도 호남선아 너는 무사한 사람과 있어 우리 시절 우리 님을 부질없이
길어다가 바쁜 동사가 웬일이냐 맹렬아 맹렬아 잘 가거라 나를 두고 팔려 거 던 정마저 가져가지 청은 두고 못 만나니 쓸쓸한
빈방 아래. 외로이도 홀로 누워 황 적적 깊었나니 오늘도 뜬 눈으로 이 밤을 새우고 아이고 데고 )
기원전 399년 봄 70세의 노 철인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태연이 자약하게 그 생명의 막을 내립니다. 그
는 자기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아테네의 500명의 배심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 떠날 때가 왔다.
우리는 길을 가는 것이다. 나는 죽으로 가고 여러분들은 살로 간다.누가 다 행복할 것이냐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은 다
음 그 유명한 감옥소로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감옥수를 제가 한번 가봤습니다. 소크라테스는 40세에서 70세에 이르기까지 약
30년 동안 아테네 시민의 정신 혁명을 위해서 그의 생애를 바쳐 부패하고 타락한 아테네 사람들의 양심과 생활을 바로잡기 위
해서 교만과 허용 속에서 방황하는 청중들의 인격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아테네 거리에 나가 시민들과 대화하고 가르치고 질책
하고 호소하고 계도하고 아테네의 어리석은 민중은 그를 법정에 고소합니다. 그 소장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정한 신들을 믿지 아니하고 새로운 신을 끌어이고 또 청년들은 부패 타락시켰다. 그 뒤에는 마땅히 죽음
에 해당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청년의 유혹이라는 두 죄명에 걸려서 불신하고 불신함과 청년의 유혹이라는 두 죄명에 의해서 고
소되고 아테네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법정에서 두 차례의 투표 결과 소크라트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누가 소크라테스
를 죽였습니까. 아테네의 어리석은 시민들입니다. 민중은 사리사육과 그 정의를 잃어버릴 때 우중으로 변합니다. 우중 어리석
은 대중으로 변합니다. 인간의 군 중심 인간이 그 우중으로 변했을 때 iq 80으로 떨어진답니다. 민중은 올바른 직업을 가지면
슬기로운 편중이 되지만 민중은 우중이 되기도 하고 편중이 되기도 합니다.
역사의 어두운 반동 세력도 되고 역사의 밝은 개혁 세력도 됩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했습니까. 이스라엘 어
리석은 민중들입니다. 민중의 기 문제입니다. 아테네 시민의 무지와 아귀와 오판이 위대한 철인 소크라테스를 속였으며 소크라
테스를 죽였으며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죽인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건 그 당시의 우중들이고 죽어가는 소크라테스 진리
를 정의를 진리와 정의를 죽인 나라는 반드시 새마음이라 우리는 이 역사에 준엄함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
네 법정에서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테네를 사랑하는 시민들이요
여러분들은 가장 위대하고 지혜와 위력으로 명성을 자랑하면서 될수록 돈이나 많이 모을 생각을 하고 또 이름이나 명예에만
관심이 쏠려서 지혜와 지위와 자기의 인격을 더럽히고 그는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 플라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생존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
다. 그 어떻게 라는 말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지상에서 어느 누구나 자의든 타의든 어느 날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서 잠시 사바
에 머물다가 속설 없이 가야 하는 세상 인연이 길고 짧으면 뭔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어느 때에 이르러 너도 갈 테고 나도
갈 텐데 한 세상 머물다 갈 때에는 공평하게 빈손 빈 몸으로 돌아갈 텐데 아무리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써 봐도 미래를 떨어본 듯
운명은 정해져 있는 듯 다 던져버리고 홀로 털고 등지에 남은 부질없는 인연에 연연하지 않으려 해도 미련에 발목 이어 가는
너도 보내는 나도 정작 눈물 바람이 웬일이라는 말입니까
부질없는 인생살 어느 나 어느 시에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떠나야 하지 잘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더냐.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살아야 잘 살 수 있고 바로 살지 않고는 제대로 잘 살 수 없으며 소크라테스를 다시 외칩니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죽는 연습 죽는 공부 죽는 준비 죽는 훈련을 하는 학문이며
언제 죽더라도 태연자약하게 죽을 수 있는 마음자리를 준비하는 것이 철학이다. 확고부동한 사생활을 확립하고 조용하게 죽을
수 있는 정신적 준비를 하는 것이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철학자처럼 사색하고 농부처럼 이러해라 이것은 바람직한 인간상
이다. 이것은 에밀이라는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과 장작고 루스의 말입니다. 철학이 없는 세상 그러한 인생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철학이 없는 생활은 공허하고 빈약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바로 사는 지혜와 태어나게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 불
교적 가르침이 지향하는 바이며 이것이 철학적 정신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우리에게 그 위대한 죽음의 모범을 보여주었
습니다. 삶과 죽음이 뭐 별거냐 숨 쉬고 숨만 죽어지 생일날과 제삿날이 뭔 차이더냐.
미역국을 내가 먹으면 생일이고 탕국을 자손이나 상자가 먹으면 제삿날이지 이 지상에 내가 숨을 쉬고 있으니 삶이오. 이 지상
에 내가 부재중이면 죽음입니다. 세상 생사의 문제사는 거의 죽는 거의 다 내려놓고 내 안에서 훨훨 타던 번뇌의 불이 아주 꺼
져버리면 그것이 니르바나입니다.
인생이란 많은 선인들이 진부한 표현처럼 빛나던 젊은 날도 허물어져 쇼인도에 미친 내 초라한 모습에서 사뭇 놀리 놀라듯 성
형을 하고 고급 화장품으로 몸을 가꿔주어도 나와 상의도 없이 이런 반 곳 없이 늙어 가는데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고 모피 옷
을 걸치고 한껏 치장을 해도 물기 없이 마른 낙엽처럼 몸뚱이도 말라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이 우주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 기
정사실입니다.
명사십리 해당화는 명 년 봄이 오면 다시 피련만 우리 인생 어느 때 어느 시에 온다는 기약도 없이 어느 날 훌쩍 떠나가는 법이
니 우주 만물의 섭리니 반드시 피어난 꽃은 져야 하고 태어난 생명은 죽음을 기약한다는 그 이치 오늘 아침에도 관을 운구하는
장례식장 리무진 차를 보리도 있을 것이며 노랗고 하얀 꽃송이 황홀한 꽃봉오리 속에 숨은 소명의 섭리를 깨우쳐 이 지상에서
내가 사라질 때 올 때는 나 홀로 울고 왔지만 갈 때는 만인이 울어주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진정한 불교적 가르침의
시작이고 삶 마치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에 여러 비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유비경을 남기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견고한 것도 없으며 결국은 모두 흩어지고 만다. 망상 분별하는 일은 속인이 될 뿐이다. 세속의 인연
으로 만나는 것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겠느냐 천지와 저 수미산도 결국은 무너질 것인데 이까지 사람 몸 따이 겠느냐. 나는 석
달에 열반에 들 것이니 놀라거나 슬퍼하지 말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는 다 법으로 부풀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
습니다. 욕망을 절제하고 마음을 깨쳐 나아가는 수행이야말로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장 큰 덕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유비경 또는 열반경이라고 하는데 이 마지막 가르침을 잘 새긴다면 부처님을 닮아가는 경건한 생애가 아닐까 합니다. 함박눈도
녹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법인데 우리는 삶도 어느 날 이 지상에서 호련이 사라져야 하는 운명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순간
입니다.
순간순간 찰나의 시간도 소중합니다.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하여 최선을 다한 삶 아름다운 봄꽃도 때가
지나면 사라지고 이 세상에 아무리 위대한 그 무엇도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아름다운 해당화 한 떨기 그 우주의 섭리가 담겨
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이제 사실은 이렇게 따듯하고 봄날은 간다. 하고 딱 멋있게 하고 내려가려고 그러는데 아까 처음에 저
대중가요 하는데 꼬이더라구요. 그래서 긴장이 돼가지고 이제 봄날을 만 나 보라고 내려갈게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 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식어 가면 뭐야 서낭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
뜰한 그 맹세 봄날은 간다.~)
이 지상에서 마지막 죽음 길을 나서는 망자 앞에서 망연하게 고개 숙이고 아미타 부처님 계신 서방정토에 태어나 계시길 간곡
하게 염원하고 발원드리며 오늘 모자란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_()_
내 몸처럼 알고 베푸는 마음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형편 따라 베풀지어다.
그들을 한 몸처럼 알고 베푸는 마음이
부처님의 자비이니 참다운 보시니라. ----[ 선가귀감 ]
불기 2566년4월25일
[조계사불교대학 총동문회 자문위원 법연 이동엽 합장 ]
첫댓글 늦은 밤 귀한 법문을 설해주신 탄탄스님께 감사드립니다 ._()_
이동엽(법연)자문위원님 매달 법문정리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제9회 종단 신행수기공모전에포교원장스님 수상을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혜월합장_()_
듣고 싶었던 법사님의 법문을 들으니 좋아요 .~
혜월 회장님의 불자사랑 귀감이 되어요.
건강 조심하세요._()_
법연 자문위원님 불편한 중에도 이 긴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부처님 오신 달 5월에 합창실 에서 꼭 뵙겠습니다 ^^
네~ 삼조선배님! 오월 두째주 부터는 연습에 동참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