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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5: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 로마 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았지만, 1:13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여러 차례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로마를 방문하는 것이 늦어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방금 서술한 바울 사도 자신의 선교 원칙에 뿌리를 둔 장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즉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독특한 사역 방식이 작용한 것이다. (2) 복음 전도 사역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지경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워야 할 일이 쉴사이 없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또한 장애 요소가 된 것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 곳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그의 사역의 원칙으로 삼았기에 연달아 진행되는 복음 전파와 교회를 세우는 일은 바울의 로마행을 본의 아니게 가로막은 외적인 장애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막혔더니'로 번역된 '에네콰토멘'은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 수동태형으로서 외적인 장애요소가 계속해서 가로막았음을 보여 준다. 즉, 로마 방문 계획이 번번이 성취되지 못한 것이 바울 자신의 고의적인 뜻이 아니었음을 나타내 준다.
[롬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 '이제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뉘니'는 일반적으로 '지금', '현재'라는 의미로 쓰이나 바울 서신에서는 새로운 시대나 상황의 전개를 분명하게 할 때에 자주 쓰인다. 여기서는 특히 상황의 전개를 분명하게 할 때에 자주 쓰인다.여기서는 특히 상황의 전개에 관하여 쓰인 것으로 앞절의 상황과 대조되는 다른 경우가 펼쳐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지방' 복수이므로 '지방들'을 말하며 바울의 현재 선교하는 지역들을 의미한다. 즉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까지 지중해 동부 지역의 도시들을 가리키며 대체적으로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아, 빌립보, 다메섹 등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곳을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이제 더 이상 그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할 새로운 곳이 없었기 때문에 좀더 새로운 지역에 눈을 돌리고자 하였다.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 '여러 해 전부터'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 폴론 에톤'은 '상당히 오래 전의 해부터'라고 직역할 수 있다. 바울의 서바나와 로마 방문 계획은 갑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계획된 것이었다.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대개 로마 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바울의 서바나에 대한 전도 계획은 그가 지중해 동부 지역에 전도 사역을 치중하였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서바나는 서쪽 변방으로 땅끝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곳에 복음을 전파하기에 앞서 그가 로마에 들르기로 작정했던 것은 로마가 당시 세계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바나 선교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로마 교회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단순히 선교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서만은 아님을 1:11-13에서 보여준다.
즉 선교 계획에 동참하게 하기 전에 저들의 믿음을 확인하고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저희를 견고케 하며, 영적인 사귐을 통해 피차 유익을 받고 안위케하려는 목적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위에서 '원'이란 '간절한 열망'으로서 본절에서는 서바나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하지 않고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라 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롬 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이는 지나가는 길에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삭제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서바나'가 삽입되어 있다. 즉 '서바나로 지나가는'(호스 안 포류오 마이 에이스 텐 스파니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바나는 지중해 연안의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 스페인 지역이며 당시 그곳은 로마의 영토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중에 지중해 전지역에 걸쳐 전도하였으나 아직 서바나 지역은 전도하지 못했다. 그는 원래부터 서바나에 대한 선교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교회 내에서의 끊임없는 분쟁과 위기와 바쁜 전도 일정들 때문에 그곳에 전도를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2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어 그 일을 위해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지나가는 길에'란 말은 '통과하는 길에'란 뜻으로 로마에서 오래 머물지 않겠다는 바울의 여행 계획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 교회를 향한 무성의한 모습이 아니다. 서바나로 가는 길에 잠깐 들려 간다고 한 것은 앞절에서 밝힌 것처럼 '남의 터위에 건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쓴다'는 바울 사도의선교 원칙에 근거한 것이고 또한 될 수 있는대로 빨리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망과 전도 계획 때문인 것이지 결코 로마 교회를 무성의하게 취급한 것이 아니다.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사도의 관심과 사랑을 생각할진대 더욱 그러하다.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 바울이 서바나를 향한 선교 계획의 중간 기착지로서 로마를 방문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너희를 보고. 여기서 '보고'라고 번역된 '데아사스다이'는 단순 과거행으로서 '본다'는 동작과 행위를 강조한다. 즉 그토록 보기 원했던 로마 교회 성도들을 보는 것이 바울의 방문 이유 중에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바울 사도가 저들의 얼굴 보기를 사모한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한 형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2)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여기서 보듯이 헬라어 성경에는 '교제하여'라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원문 그대로 해석한다면 '먼저 너희의'라는 해석이 되지만 휘몬이란 말이 제2인칭 복수 제 2격이란 점과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상호 관계를 생각할 때 한글 개역 성경에서 '교제하여'란 해석을 덧붙인 것은 행간의 의미를 살려주는 무난한 의역이라 생각된다.
이 어구를 의역한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여러분을 만나''여러분을 만나 함께 지내면서'(공동번역), '먼저 로마에 있는 여러분을 방문하여 교제를 가진 후에'.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교제는 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베푼 구원의 은혜를 들으면서 저들의 믿음을 확인하고 또한 사도 자신이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교 계획을 알려주어 그들도 참여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차 안위를 받는 성격의 사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처음하는 그들이었지만 한 믿음 안에서 한 하나님 아버지의 권속인 형제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약간'이란 말은 '얼마동안', '잠시나마'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만족을 받은 후에'란 말은 '충분한 기쁨을 누린다'는 뜻이다.
즉 오랫동안 사모했던 교인들의 얼굴을 직접 보고 교제를 나누는 사귐을 통해서 저들이 진실로 진리위에 굳게 서 있는 것을 확인한 사역자의 기쁨을 의미하며 또한 바울의 선교 계획에 참여하겠다는 저들의 믿음을 확인한 후에 오는 사역자의 즐거움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무성의하게 대하지 않고 얼마나 간절히 보고 싶어했는지를 보여준다.
(4)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여기서 '그리로'란 서바나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도는 그의 여행 목적지를 로마 교인들 앞에서 밝히고 있다. '너희의 보내줌'이란 말에서 '프로펨프데나이'란 말은 '프로펨포'의 제 1부정 과거 수동태 부정사로서 '너희로 말미암아 보냄을 당하기를' 또는 '너희가 나를 보내줌'이란 뜻으로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의 파송을 받을 것을 기대한 표현인 것이다.
바울은 지금까지 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다른 교회의 도움의 손길과 지원을 통해서 새로운 선교지로 파송을 받아 복음을 증거해왔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상기하면서 이제 마지막이 될지 모를 서바나 선교 계획에 로마 교회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기도, 재정적인 도움, 함께 복음 전파에 수고해 줄 조력자 등의 도움을 받아 로마 교회 이름으로 파송을 받아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서쪽 변방까지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보건대 바울의 로마 체류 성경이 잠정적이고 제한적인 것이며 또한 그의 방문 목적이 로마 교회와의 교제의 협력가가 지원을 힘입으려 함에 더 강조점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 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과 각 교회들과의 유대 관계가 굉장히 밀접했으며, 바울의 사역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통한 선교 사역이었다는 점이다.그리고 '바람이라'를 가리키는 '엘피조'란 말은 '내가 바람이라'는 뜻으로 단순히 서바나에 파송받는 것뿐 아니라 본절 전체의 내용을 사도가 기대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왜냐하면 '엘피조'가 '가르' 이하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롬 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 바울은 23절에 사용한 역접을 나타내는 접속사 '그러나 이제는'을 반복 사용하여 서바나 선교 계획의 중간 경유지로서 로마를 바로 가야하지만 도중에 예루살렘을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그렇게 가기를 소원하였던 로마 교회의 방문을 또 뒤로 미룬 채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 교회로서 교회 지도자들 즉 사도들이 있는 교회이지만 지금은 핍박과 어려움 중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위급한 교회를 모든 교회가 협력하여 도와줄 의무가 있었다. 이것은 모교회에 대해 이방 교회가 지녀야 할 당연한 태도이며 그들이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과 기타 이방 교회의 성도들과의 화합과 일치였다.
예루살렘 이외의 모든 교회는 대부분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대 기독교들과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 사이에는 적지 않은 충돌과 마찰이 있었는데 유대 기독교 신자들은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일부는 이방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구약의 규례들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 간의 관계가 극복되어 견고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리라 생각했었다. 이전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교인들을 돌보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로부터 헌금을 거두어서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갈 2:10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줄 것을 이방인 교회에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울의 로마 교회의 방문이 다시 한번 불가피하게 지체되었고, 이와 같은 사정을 로마 교회에 알림으로 그들로 하여금 양해를 구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이러한 모범을 따르도록 독려하고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이러한 구제의 행동을 '성도를 섬기는 일'(디아코논 토이스 하기오이스)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를 섬기는 일'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의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이방인 성도들이 모금한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역자 바울이 일을 진행시키는 우선 순위를 배우게 된다. 즉 사도가 그토록 보기를 사모했던 로마 교회의 교인들과 만나게 되는 개인적인 기쁨보다는 우선적으로 어려운 성도들을 도와주고 그들이 다른 성도들과 서로 사랑 가운데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한몸 의식을 갖게 하는 일에 무엇보다도 먼저 힘쓰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롬 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이는...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고 온 헌금은 고린도, 갈라디아, 마게도냐 등 많은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힘껏 헌금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만 언급한 것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쓸 때 아가야에 있었고 최근에 마게도니아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본 서신이 고린도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아가야는 헬라 명칭 '아카이아'로 고린도의 수도였다. 그들은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헌금을 억지로 하거나 마지 못해서 하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사랑의 선물을 바울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다.
위에서 '얼마를 동정'의 헬라어는 '코이노니안 티나'인데 '코이노니안'은 일반적으로 '교제', '친교'의 의미이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얼마의 친교'를 세웠다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실제로 공동 번역에서는 '교우로서 정을 나누려고'라고 '친교'의 의미로써 번역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코이노니안'을 '친교'로 해석하기 보다는 '헌금'으로 해석하는 것이 좀더 무난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