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아나키즘의 네 가지 특징
아나키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백년 이상된 역사적 전통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말 뿌리인 '아나키'는 원래 사람을 비난하는데 쓰는 용어입니다. 19세기 초 프랑스 사회주의자 프루동이 정형화한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사용하기 전까지는 매사 부정적인 인간형을 조롱할 때 쓰는 형용사로 쓰였습니다.
뒤이어 아나키즘 혁명론을 정립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바쿠닌이 마르크스와 논쟁할 당시엔 마르크스의 동료 엥겔스가 아나키스트들을 슬라브 민족주의자라고 몰아세우면서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점들이 유포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스파링 상대'였던 셈이랄까요.
국내에서는 일제가 불온한 조선인(불령선인)으로 분류한 사람들이 대부분 아나키스트였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 인식이 뿌리박힙니다. 실현불가능한 극단적 자유주의 이념을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견지한 만큼 일반인들이 일탈적인 몽상가들이란 편견을 가질 수 있었다고 봐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과학적 공산주의라는 명쾌한 단문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아나키스트는 그렇게 대답할 여지가 별로 없어요. 명징하게 체계화하고 구조화한 혁명이념이라기보다는 일상 삶의 문제에 매우 가까운, 보편적인 사람들의 심성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체로 네 가지 특징을 이야기합니다. 첫째가 사회에 대한 자연주의적 해석인데요, 흔히들 말하는 사회계약론과 달리 아나키즘은 사회가 인위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자연적 결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개인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는 것인데요. 방종이 아니라 자기 규제된, 즉 자주관리적인 개인적 자유를 강조합니다. '내 자유는 내가 다 가진다'고 보기에 계약중심의 사회틀에 속할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구성된 사회니까 연대의 개념이 소중해지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세번째 특징은 협조와 공생에 바탕한 소규모 자연공동체를 주장한다는 거죠. 고전 마르크시즘이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며 세계주의와 국가소멸, 평등사회 유토피아를 강조하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더욱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죠. 여기에 덧붙여서, 주어진 사회시스 안에서 평등한 분배와 위계구조의 철폐가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하는 반성적 분노와 저항이야말로 사상적 기반이 되는 셈이죠.
아나키즘은 포괄적인 사상체계입니다. 요즘 포스트모더니즘식으로 말하면 거대담론인데, 여러 사상, 심지어 기독교, 불교까지도 연관시킬 수 있어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는 취약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운동의 영역들이 확대되어 각기 다양한 지향과 목표를 갖게 된 상황에서 아나키즘적 틀은 사안별로 각각 친화성을 지닐 수 있다는 장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외국인노동자 권익운동, 여성운동 등이 사안별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데 이들과 넓게 연대·협조할 수 있는 고리가 된다는 거지요.
세계화 시대에 아나키즘은 분절화되는 문화집단간의 차이를 매개하고 절충하고 조절하는 접착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나키즘과 생태학을 접목시킨 개념이지만 아직 완결적인 사상체계는 아닙니다. 살을 더 붙여야겠지만 분명한 지향점 가운데 하나는 환경생태문제가 초계급적으로 풀어야할 과제라는 점입니다.
청와대 산다고 오염된 서울공기를 마시지 않을 수 없고, 부잣집, 판자촌 가릴 것 없이 서울시민이라면 팔당저수지의 오염된 상수도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요? 따라서 환경문제를 계급해방적 관점에서 접근해선 안될 것입니다. 게다가 굉장히 글로벌한 문제임에도 해결은 글로벌하게 이뤄질 수 없다는 고민도 있습니다. 그래서 에코아나키즘의 해법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은 서로 대등한 존재라는 탈중심적인 관점에서 비롯됩니다.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국지적으로 행동하라는 환경운동의 명제를 실천하려면 자기 나라 자기 지역 자기동네의 환경문제 해결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거지요.
러시아의 19세기 사상가 크로포트킨이 역설한 상부상조와 공유의 아나키 공동체가 가장 적절한 대안사상이라고 봐요. 사실 아나키즘이 꿈꾸는 자족적 생태공동체는 스스로 자동차나 기계류까지 만드는 완전무결한 공동체가 아니라 환경자족적 공동체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마을에서는 구정물을 단 한 방울도 배출하지 말자거나 쓰레기수거차가 오지 말게 하자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어요.
자본주의체제의 광고와 같은 욕망의 확대재생산 방식이 아나키즘 공동체에는 없습니다. 아나키 공산주의 공동체는 욕망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아니라 적어도 강제된 욕망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마냥 고상한 공동체는 아니지요. 독일 유학할 때 지도교수 집에서 석달간 사는데 68년산 흑백텔레비전을 보고 있어 깜짝 놀란 기억이 있는데, 아나키즘적 삶은 일상에서 그런 삶의 양식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됩니다.
환경자족적 생태 공동체 꿈꿔
더 이상 보일 색깔은 없어요(웃음). 검은 색깔이 흔히 아나키스트를 상징하는데, 난 가능하면 무정부주의로 대표되는 극단 테러리스트, 허무주의자 따위의 부정적 시각을 엷게 만들고 흑색과 녹색을 잘 조화시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항상 유연하게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 에코이데올로기의 토양을 갈이하는 것이 제 구실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