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 (2)] '춘향전'으로 살펴본 19세기 조선의 연애
월간중앙 202304호 (2023.03.17)
남녀칠세부동석… 유교국가에서 젊은 남녀의 사랑이 가능했을까?
양반 사대부는 성리학적 남녀 규범 따라야… 배우자도 부모가 결정
하층민 여성이 양반 도령에게 ‘사랑의 각서’ 요구한 대목도 파격적
카자흐스탄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이 창립 90주년을 맞아 지난해 10월 1일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기념식과 공연을 열었다. 사진은 고려극장 90주년 기념공연의 일부로 무대에 올려진 ‘춘향전’. / 사진:연합뉴스
부부 사이에 각서를 썼다는 얘기가 가끔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술을 먹지 않겠다든지, 도박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등의 약속을 문서로 작성해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쓰거나 아내가 남편에게 써주기도 하는데, 부부가 함께 작성하고 같이 서명해 가지고 있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런 문서를 ‘부부각서’라고 말하는데, 결혼하기 전 예비부부들도 이런 각서를 작성한다는 얘기도 있다.
인터넷에서 ‘부부각서’나 ‘결혼각서’라는 단어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주로 변호사들이 쓴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대부분 이혼과 관련된 것으로, 부부 사이 작성해놓은 각서가 법률적 효력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인간 사이 수많은 갈등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 남녀 사이 갈등이다. 이런 갈등을 방지하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리 각서를 작성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부부 사이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런 각서가 법률적으로 어떤 효력이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주는 인터넷 사이트도 꽤 있다.
[춘향전]에도 이도령이 춘향에게 각서를 써주는 대목이 있다. 광한루에서 그네를 뛰는 춘향을 본 이도령이 같이 살자고 졸라대자 춘향이 이를 허락하면서 훗날 증거로 삼을 수 있는 문서를 한 장 써달라고 한다. 허락을 받지 못할까 노심초사하던 이도령은 너무 신이 나 그 자리에서 문서를 써 춘향에게 준다.
그 내용은 평생 같이 살 것을 맹세할 뿐 아니라 절대로 이 약속을 어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약속을 어기면 이 문서를 관가에 제출해 증거로 쓰라는 말도 덧붙인다. 춘향은 문서를 받고는 바로 이도령과 광한루에서 어울려 재미있게 놀다가 해가 기울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이도령이 춘향에게 써준 문서는 오늘날 서로 사귀거나 결혼을 약속한 남녀 사이 작성해두는 각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 차이가 있다. 현대사회 남녀는 신분 차이 때문에 각서를 쓰는 일이 없지만, 이도령과 춘향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커다란 신분 장벽 때문에 각서를 썼다는 점이다. 이도령이 작성한 ‘사랑의 각서’를 보기에 앞서 조선시대 각서 종류를 알아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각서였던 ‘수기’와 ‘수표’
‘각서(覺書)’라는 단어는 조선시대에는 없던 말로, 일본어에서 온 것이다. 일본어로 ‘覺書’는 잊지 않기 위해 간단히 적어두는 문서를 말하는데, 서양과 접촉 이후에는 영어의 ‘memorandum’이라는 단어를 각서로 번역하기도 했다. 흔히 메모로 줄여 말하는 메모랜덤은 조약보다는 강제성이 약한 외교 문서를 뜻한다. 그런데 일본의 각서라는 단어가 한국에 들어와서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내용을 적은 문서’라는 의미가 됐다.
조선시대에 현재 우리가 쓰는 각서라는 의미로 사용한 용어는 ‘수기(手記)’가 대표적이다. 이밖에 ‘수표(手標)’나 ‘명문(明文)’ 등의 용어도 있다. 수기는 문자 그대로 손으로 쓴 것이라는 의미다. 어떤 약속을 할 경우 약속의 내용을 적은 다음 서명해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다. 수표는 수기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데, 주로 돈을 빌릴 때 작성했다. 반면 명문은 부동산 매매에서 주로 쓰였다.
수기를 작성하는 방식은 정해져 있었다. 먼저 날짜를 쓴 다음 수기를 받는 사람의 이름을 명시하고, 약속하는 일의 구체적 내용을 기술한 뒤 수기를 작성한 사람이 서명을 했다. 여기에 또 하나 정해진 문구가 덧붙여지는데 ‘만약 약속을 어길 경우 이 수기를 가지고 관가에 고발해 일을 바로잡으라’는 내용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받아둔 수기를 관청에 제출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현재의 각서와 비슷한 성격의 조선시대 문서가 수기라고 볼 수 있는데, 각서와 수기의 근본적 차이는 아마도 약속하는 내용일 것이다. 조선시대 수기는 구체적 물건을 두고 약속이 이뤄지는 것이었다. 빌린 돈을 언제 갚겠다든지, 묘지를 언제까지 이장하겠다는 등 돈이나 토지에 관한 내용을 약속하는 것이다. 반면 요즘 각서에는 구체적 물질이 아닌 추상적 내용도 들어있다는 것이 과거와 다른 점이다.
부부각서에는 변함없는 사랑을 약속하는 내용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는 물질적 내용이 아니다. 결혼하면 상대방의 기념일을 반드시 챙기겠다든지 상대방의 전화는 꼭 받겠다는 등의 약속을 각서에 쓰는 일도 있다는데, 이런 것도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춘향이 이도령에게 요구한 각서는 당시 일반적 수기와 다르다. 춘향이 요구한 내용은 물질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생 같이 살기로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으며, 약속을 배반하면 이 각서를 관청에 내고 소송을 해도 좋다’는 내용의 문서를 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도령이 작성해 춘향에게 준 것은 현대의 부부각서와 오히려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부부각서’ 격인 이도령의 약속
전북 남원시민으로 구성된 ‘최초춘향 영정복위 시민추진연대’가 지난해 10월 26일 전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초 춘향 영정을 춘향사당에 봉안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진 속 춘향 영정은 단체가 주장하는 최초 춘향 영정의 사본. / 사진:연합뉴스
이도령의 각서는 춘향의 요구로 쓴 것이다. 남원부사의 아들이 남원 기생에게 “우리 둘이 백년해로하자”고 요구하는데, 기생인 춘향이 이를 거절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춘향과 이도령의 관계는 신분 차이를 통한 강압으로만 이뤄진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이도령이 처음 춘향을 봤을 때 기생인 줄 모른 상태에서 끌렸고, 춘향도 이도령을 본 순간 그의 풍채와 거동에 영웅의 기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비록 두 사람 사이 높은 신분의 장벽이 있지만, 청춘남녀로서 서로 끌린 면도 있었다는 얘기다.
춘향이 처음 이도령의 요구를 거절한 이유는 자신이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남의 첩 노릇은 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하고나 몸을 섞는 노류장화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이미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은 뛰어난 인물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겠다는 말까지 이도령에게 한다.
이와 같이 춘향이 이도령의 요구를 거절하자 이도령은 정식 의례를 갖춘 결혼식은 못 올리지만, 평생 같이 살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춘향은 이도령에게 “당장은 욕심으로 같이 살겠다는 말을 하지만, 나중에 지체 높은 가문의 여자와 결혼한 후 나를 버리면 나의 신세는 가련하게 된다”며 아무리 양반의 분부지만 따를 수 없다고 말한다.
조선 사회는 신분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이 규제 대상이었기 때문에 양반인 이도령이 기생 춘향과 정식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평범한 상식이었다. 그러므로 처음 춘향이 이도령의 요구를 거절할 때 “도련님은 귀공자시고, 저는 천한 기생”이라고 말한 것은 당대 현실을 춘향이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기생 춘향이 남원부사의 아들 이도령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이도령의 인물에 춘향 또한 반한 면이 없지 않기도 했다. 춘향이 영악한 기생으로, 이도령을 호리려고 일부러 광한루에 가서 그네를 뛴 것이 아니라면 춘향의 말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춘향이 이도령에게 각서를 요구한 까닭도 세상일은 알 수 없으니 훗날 증거로 삼기 위해 문서를 작성해놓자는 당대의 일반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일종의 다짐인 셈이다. 춘향의 요구로 이도령이 쓴 각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년 모일 춘향에게 쓰는 각서. 이 각서를 작성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남원 구경을 하면서 광한루에 왔다가 우연이 하늘이 낸 배필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기로 서로 약속했다. 만약 약속을 어기는 잘못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가에 고발해 바로잡으라. 문서 작성자는 이몽룡.’
조선시대에는 ‘종문권시행(從文券施行)’이라는 말이 있었다. 분쟁의 해결은 ‘문서에 의해 처리한다’는 뜻인데, 특히 관청에서 문서를 중요하게 여겼다. 춘향이 각서를 요구하면서 “관청은 종문권시행이니 수기 한 장 써 달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춘향의 요구에 따라 이도령이 써준 각서에는 앞에서 본 수기에 들어가야 할 내용인 날짜, 상대방 이름, 핵심 내용, 고발해도 좋다는 말, 작성자 성명 등이 모두 들어있는 만큼 문서 양식에 맞게 잘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분이 다른 남녀가 결혼하면 규제 받아
춘향을 추모하는 제92회 ‘춘향제향’이 지난해 5월 4일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 특설무대에서 열리고 있다. 춘향제향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춘향사당을 짓고 단옷날인 음력 5월 5일 제를 올린 것이 시초다. / 사진:남원시
조선은 유교의 나라이고, 이 유교 도덕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던 국가였다. 남녀 관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따르지 않으면 안 됐다. 흔히 얘기하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조선시대 남녀 관계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는 일곱 살이 되면 함께 자리하지 않는다는 이 말은 원래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예기]에서 온 것으로, [예기]에는 ‘일곱 살이 되면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지 않고, 함께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이 주자가 제자와 함께 편찬한 [소학]에도 들어가게 된다.
앞에서 조선을 유교의 나라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주자학의 국가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주자가 한 말은 절대로 어겨선 안 되는 것이었으므로, [소학]에 들어있는 ‘일곱 살이 되면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지 않고, 함께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조선시대 반드시 지켜야 할 남녀 관계의 지침이었다.
[소학]에 들어있는 이 내용을 조선에서는 간단히 줄여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아주 단순하고 강력한 규제 용어로 만들었다. 이처럼 일곱 살 이후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지도 않는 사회라면 현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남녀 사이 사귐도 조선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조선 전기까지는 성리학이 그렇게까지 절대적 규범이 아니었으므로 남녀 문제도 자유로운 고려시대 풍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당쟁이 심해지고, 성리학(주자학)이 체제 이데올로기로 굳어지면서 조선 후기에는 남녀 관계도 성리학적 규범 안에서만 가능했다. 특히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는 성리학적 남녀 관계 규범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녀칠세부동석처럼 경직된 남녀사이 규범이 강제되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연애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조선시대에는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남녀의 결혼은 완전히 부모나 조부모가 결정하는 것으로, 철저하게 가문 사이 계약 형태를 띠게 된다. 따라서 결혼 당사자인 남녀가 자신 의지대로 결혼한다는 것은 조선 상류층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 후기 수많은 기록에서 상류계층 남녀 연애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이 같은 조선사회의 특수한 남녀관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사랑 이야기라는 것은 대개 양반 남성과 기생 사이 이야기다. 등장하는 남성은 지방에 부임한 관료인 경우가 대부분으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남녀 사이 사랑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사랑 얘기가 주로 양반 남성과 기생 사이 이뤄지는 이야기인 것 또한 이런 특수한 사정 때문이다.
그러나 성리학적 규범이 적용되는 범위가 주로 양반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던 만큼 중인 이하 계층에서는 남녀 관계가 그리 엄격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지배층은 성리학적 규범을 중하층까지 적용하려 애썼지만,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결국 사랑 얘기는 중하층 계급 사이에서나 가능한 저급한 것이 되고, 이들의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겨지지도 못한다.
[춘향전]의 사랑이 획기적인 이유는 이도령과 춘향이 처녀 총각인 데다 각기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결혼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앞서 본 것처럼 조선 후기 남녀 관계는 현재와 전혀 달라서 젊은 남녀 사이 자유로운 연애가 불가능했다. 특히 상류계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춘향전' 통해 대리만족했을 조선시대 독자들
작자의 상상력이란 당대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기 어렵다. 비현실적인 양반사대부 집안 젊은 남녀의 자유로운 연애를 주제로 삼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혼 양반 남성과 기생 사이 사랑 얘기는 사실상 일반적이었던 만큼 여기에서 착안해 양반집 도련님과 기생 사이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므로, 이들의 만남에 ‘사랑의 각서’ 에피소드를 끼워 넣었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 수기는 일상적으로 작성하는 문서였던 만큼 작자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수기를 작성하는 기발한 착상을 해낼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 [춘향전]을 읽은 독자는 춘향과 이도령에 자신을 대입시켜 읽었을 것이다. 독자 대부분이 이도령 정도의 높은 신분이 아니었을 테니 이도령보다는 춘향 편에 서서 이야기 진행을 따라가게 된다.
열여섯 양반 청년이 같은 나이 기생에게 끌리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춘향이 주도권을 잡고 나가는 것을 즐겼음이 틀림없다. 춘향이 이도령에게 각서를 요구하는 장면에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빌리는 사람에게 수기를 쓰라고 하는 상황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낮은 신분의 여성이 지체 높은 양반 도령에게 수기를 요구하는 대목에서, 여성 독자들은 이 장면에 자기를 대입시켜 상상만으로도 통쾌함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