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묘 지덕사(至德祠) 유적 답사기
그동안 벼르고 왔던 양녕대군(讓寧大君) 묘소 답사를 하기 위하여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졸라매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부침(浮沈)하고 명멸(明滅)하여간 사람들 중에 양녕대군이 제일 매력 있는 인물로 생각한다. 그리고 양녕대군에 관한 기록은 보이는 대로 대부분 읽는 편이다. 만일 양녕대군이 태종으로부터 왕위계승을 하였다면 조선 27명의 임금 중에서 누구보다도 훌륭한 임금이 되었을 것으로 보며 조선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동생인 세종(世宗)보다 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인물이라고 본다. 사실 세종은 한글창제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의 업적으로 역사에 크게 클로즈업 되었지만 53년간 재임 중에 몸이 너무 비대하고 건강이 좋지 못하여 매우 소극적인 정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장차 임금이될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한다. 양녕대군의 약사(略史) 기록을 보면 15세의 나이에 왕세자로서 명(明)나라에 가서 황제를 만났던 사실이 있다. 명나라 황제는 몸소 무영전(武英殿)에 나와서 양녕대군의 손을 잡고 “이는 어진 왕자로구나” 하며 격려하고 “나는 너의 아버지와 같다”고 말하면서 칠언고시(七言古詩)를 지어 주었는데 그 시(詩)에서 “나이는 열다섯에 불과하나 재능은 성숙하였구나! 하고 극구 칭찬하였다. 장성하면서 대군은 아버지인 태종(太宗)의 왕권 다툼으로 야기되는 피바람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보게 되고 정치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동생 충녕(후일 세종대왕)이 성군의 자질이 있음을 보고 스스로 세자(世子)자리를 양보하고 기행(奇行)을 일삼으며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게 된다. 양녕대군이 동생 충녕에게 세자자리를 양보한 것을 두고 후세의 뜻있는 선비들은 그의 큰 덕(至德)이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주(周)나라의 태백(泰伯)에 못지않다하여 “동방의 태백”이라 칭송하였다. 지덕(至德)이란 말은 공자가 논어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에게 내린 찬사(讚辭)중에서 최고의 찬사였다. 양녕대군은 당대 최고의 명필이다. 현존하는 숭례문(崇禮門) 경회루(慶會樓)의 현판은 그의 대표적인 글씨다. 조선왕조건국후 도성은 사대문(四大門)이 건설되었으며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강조한 문이다. 그 중에서 숭례문(崇禮門)은 정문(正門)이었으므로 당시에 숭례문(崇禮門)의 현판 글씨를 쓰는 것은 최고의 영예이고 또한 최고의 명필이 아니면 감히 붓을 들 수가 없는 일이었다. 초여름 햇살에 푸른 지덕사의 잔디를 밟으면서 아련한 역사속의 호연지기의 양녕대군을 그려본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항상 자기가 양녕대군의 16대손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농월-
양녕대군 묘인 지덕사(至德祠)의 정문이다.
지덕(至德)이란 말은 논어의 태백편(泰伯篇)에 “子曰泰伯 其可謂至德也己矣 三似天下讓 民無得而稱焉-태백은 더없이 높은 덕이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다.세번이나 천하를 사양했어도 백성들이 칭찬할 줄을 모르는 구나” 하는 공자의 말에서 나온것이다.-농월-
양명문(讓名門)은 양녕대군 묘역(墓域)의 정문이다. 양명(讓名)이란 이름은 조선조 22대왕인 정조대왕이 어제지덕사(御製至德祠)중 사양(辭讓)하는 덕(德)이 가장 지고(至高)의 덕이라는 내용에서 따 온것아다.-농월-
도광재(韜光齋)는 양녕대군의 재실이다.
도광(韜光)이라는 말은 재능이나 학식을 감추어 남에게 드러나지 않게 함을 의미하는 글이다. 양녕대군이 세자자리를 동생 세종에게 물려주기 위해 뛰어난 재능을 감추고 술과 사냥 등을 즐기며 스스로 세자 자리를 사양한 지극한 덕을 의미한다.-농월-
지덕사(至德祠)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김씨 내외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지덕사(至德祠)의 현판은 당대 최고의 문인인 우의정 허목(許穆)이 쓴 것이다.-농월-
지덕사(至德祠) 경내 정원.-농월-
뒤에 양녕대군 묘가 보인다.-농월-
양녕대군과 부인의 묘다.
양녕대군과 부인 수성부부인광산김씨 안장된 묘역이다. 양녕대군이 돌아가시자 국사봉(國思峰)아래 곤좌(坤坐)에 안장되셨는데 이때부터 이곳 지명이 대군의 시호(諡號)를 따라 강정동(剛靖洞) 강적동(康迪洞)등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국사봉은 관악산의 지봉인 삼성산의 한 지맥이 북쪽으로 뻗어 솟아 오른봉우리로 봉천동과 상도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국립묘지의 진산인 화장산의 지맥과 이어진다. 지덕사가 위치한 남쪽산을 국사봉이라 한다. 국사봉이란 이름은 양녕대군이 이 산에 올라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와 세종대왕의 일을 걱정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농월-
칠정모부인추모단(七正母夫人追慕壇)
양녕대군은 삼군(三君)과 칠정(七正)의 열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이단은 영혼을 위안하고 큰 덕을 추모하는 제단으로 춘추로 제향한다.-농월-
이 비는 앙녕대군 묘역 성역화 를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다.
대군의 유언(遺言)에 따라 대군의 묘역은 작은 비석 하나 세우지 않은채 오다가 2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처음으로 묘비를 세웠으나 이 비석마져 1910년 한일합방전야에 까닭없이 부러져 1915년에 다시 적은 시석을 세웠다. 그리고 85년이 지난 2001년에 1차로 봉분을 높이고 잔디를 입히고 목책을 둘렀으며 2004년에 성역화 사업으로 담장을 높이 쌓고 정문인 양명문(讓名門)과 재실인 도광재(韜光齋)를 새로 지었으며 묘비도 대군의 위상에 걸맞게 다시 세우고 망주석도 세웠다.-농월-
양녕대군은 특히 시문(詩文)에 능하셨는데 이 작품은 대군의 시적(詩的)재능을 확인할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중의 하나이다. 이시는 대군께서 즐겨 유람했던 묘향산의 어느 암자에 묵으시면서 한 스님의 시축(詩軸)에 써주신 작품이다. 회화(繪畵)를 보는듯한 선명한 시상(詩想), 고상하고 청아(淸雅)하여 신선의 기운마져 느끼게 하는 시어(詩語)이다. 이 작품은 한국 역대 명시전에 수록되어 있다.-농월-
山霞朝作飯(산하조작반)-산허리에 걸린 노을은 아침 짓는 연기인가
蘿月夜爲燈(라월야위등)-넝쿨에 걸린 달은 밤 밝히는 등불이네
獨宿孤菴下(독숙고암하)-나 홀로 고적한 암자에서 자고나니
猶存塔一層(유존탑일층)-탑 하나만 저만치 홀로 서있네
양녕대군이 쓴 초서체(草書體) 후적벽부(後赤壁賦)다. 이 글씨는 양녕대군이 중국의 문호 소동파의 명작인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초서체로 쓴 작품이다. 이 대군의 친필은 원래 목판(木板)에 새겨진 것으로 사당인 지덕사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게 돌에 원형을 그대로 옮겨 새긴 것이다. 예부터 초서는 서예의 꽃이라 할 만큼 제대로 쓰는 사람이 흔치 않았다. 이 작품은 초서체 작품의 진수를 보여주는 걸작중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후적벽부의 아름다운 해설 내용을 기록하고 싶지만 문장이 너무 길어서 생략하는 것이 아쉽다 -농월-
이 시비는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승만 전대통령의 후손에게 주는 교훈의 시다. 이 짧은 시에는 민족 사랑과 조상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인륜과 사회정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철학이 담겨 있다.-농월-
萬枝同根(만지동근)-만가지로 나뉘어져도 뿌리는 한가지
百派一源(백파일원)-여러갈래로 나뉘어도 근원은 하나일세
尊祖崇宗(존조숭종)-조상을 받들고 종묘를 높히어서
愛親睦族(애친목족)-친척간은 사랑하고 가족간에 화목하여
敬老慈幼(경노자유)-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斥邪護正(척사호정)-나쁜것을 물리치고 바른것을 보호하여
一意循此(일의순차)-한결같이 이뜻을 따라
永無或替(영무혹체)-길이 길이 변함없게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崇禮門)의 현판 글씨
이 글씨는 지금 남대문에 걸려있는 “숭례문(崇禮門)” 현판을 글자체와 글자크기를 그대로 오석(烏石)에 옮겨 색인것이다. 이 현판의 글씨는 양녕대군이 쓰신 것으로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 빼어난 명필로 회자(膾炙)되고 있다.
숭례문(崇禮門)은 서울의 4대문중 사실상 정문(正門)인데 이 문의 현판을 썼다는 것은 당시에 이미 대군의 글씨가 명필로 널리 알려졌음을 말해준다. 필체의 강하고 굳셈은 문무에 두루 능하셨던 대군의 웅위(雄偉)한 인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현판은 임진왜란때 유실되었는데 광해군때 청파동 배다리 밑 도랑에서 밤마다 서광이 비치는 것을 이상히 여겨 파보니 현판이 거기 묻혀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이 현판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정서가 남달랐음을 말해주고 있다.-농월-
지덕사(至德祠) 묘역(墓域) 안내비-농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