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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34회 제54차 문화답사; 昌德宮과 後苑
경복34회 제54차 문화답사는 2016.05.10(화) 銅雀洞 일대를 답사하기 위하여 전철 9호선
黑石驛에 15명(부인 5명 포함)이 집결하였으나 비가 내려 답사지를 昌德宮과 後苑으로 변경하여
전철 3호선 安國驛으로 移動, 昌德宮에 도착하였다.
창덕궁과 후원을 내내 비를 맞으며 답사하고 齋洞에서 점심식사 후 ‘이디야’에서
崔南植 동문이 제공한 커피로 입가심까지 하고 답사를 마무리하였다.
사진을 3회로 나누어 올린다.
景福34회 제54차 문화답사(3-1); 昌德宮
景福34회 제54차 문화답사(3-2); 昌德宮 後苑(1)
景福34회 제54차 문화답사(3-3); 昌德宮 後苑(2) 및 齋洞
2016. 05. 13 孤 山 朴 春慶
景福34회 제54차 문화답사(3-1); 昌德宮
昌德宮 -史蹟 제122호-
조선 太祖 3년(1394) 李成桂가 漢陽으로 遷都하고 이듬해 景福宮을 건립하였으나 定宗이
開京으로 還都하여 太宗 4년(1404) 10월부터 경복궁 동쪽 鄕校洞에 궁궐을 造營하기 시작하여
태종은 이듬해인 1405년 다시 遷都하여 10월 신축된 궁궐에 臨御하고 宮號를 昌德宮이라고
했는데 昌德은 ‘德의 근본을 밝혀 昌盛하라’는 뜻이며 태종 12년(1412) 敦化門을 건립함으로써
완전한 宮闕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당시 宗廟∙社稷과 正宮인 景福宮이 있었으므로 昌德宮은 別宮으로 건립되었으며, 端宗 때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世祖 7년(1461) 殿閣의 이름을 改定하였다.
初期에는 임금들이 주로 경복궁에서 정치를 했기 때문에 昌德宮은 크게 이용되지 않았으나
壬辰倭亂으로 景福宮∙昌慶宮과 함께 燒失되어 光海君 2년(1610) 昌德宮이 제일 먼저 重建되었으나
仁祖反正(1623)으로 仁政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殿閣이 소실되어 仁祖 25년(1647) 광해군 때
仁王山 아래 건립했던 仁慶宮의 전각을 옮겨 복구했는데 外殿의 仁政殿∇月廊·承政院·宣政殿 등과
內殿의 大造殿·熙政堂·泰和堂·澄光樓와 行閣·月廊 등 735칸을 건립하는 큰 공사였다.
그 후 朝鮮王朝의 중심이 되는 正宮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正祖 즉위년(1776) 芙蓉池를 造成하고
宙合樓를 건립하였으며, 純祖 3년(1803) 仁政殿이 소실되어 이듬해 重建하고, 純祖 33년에는
熙政堂과 大造殿 등이 소실되고 憲宗 12년(1846) 後宮들을 위한 樂善齋 일원이 조성되었다.
沒落하고 있던 朝鮮은 온갖 外侵에 시달리다 高宗의 王位를 물려받은 純宗이 창덕궁에
任御하였으나 1910년 8월 29일 仁政殿에서 ‘韓日合邦’ 조약이 체결되면서 朝鮮王朝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1917년 大造殿을 중심으로 內殿 일대가 큰 화재로 소실되어 경복궁 내의 交泰殿,
康寧殿 東∙西 行閣 등 많은 건물을 解體
昌德宮도 본래의 모습을 잃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昌德宮은 임금과 신하들이 政事를 돌보던 外殿,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內殿과 휴식공간인
後苑으로 나누어지며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亭子들이
마련되어 自然景觀을 최대로 살린 점이 뛰어나다.
正宮인 景福宮이 질서정연한 對稱構圖를 보이는데 대하여 昌德宮은 北岳山 鷹峯 에서 뻗어 내린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順理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調和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1997년 유네스코의 世界文化遺産으로 등재되었다.
昌德宮 사진
(01) 전철 9호선 흑석역 집결
(02) 敦化門 앞 月臺와 계단
大韓帝國 末期에 純宗과 朝鮮總督府 高官들이 자동차가 출입할 수 있도록 묻어버렸으며,
90여 년이 지난 1997년에 月臺 復元工事를 하였으나 도로 면보다 낮게 復元되었다.
오른쪽 벽은 栗谷路이며 여기에서 鍾路까지 官廳街가 造成되었다.
(03) 昌德宮 敦化門 -보물 제383호-
昌德宮의 正門인 敦化門은 太宗 12년(1412)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燒失되어
光海君 원년(1609)에 완공되어 현존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이다.
돈화문은 다른 궁궐의 정문보다 규모가 큰 정면 5칸 측면 2칸에 2층 구조이며, 특이한 것은
정면 5칸으로 좌우로 한 칸씩이 벽으로 마감되었는데 이는 중국을 의식하여,
중국의 皇帝가 아닌 諸侯國의 君主는 대문을 3칸으로 해야 한다는 그 당시 동아시아에
通用되던 원칙을 수용한 결과로 보고 있다.
(04) 안쪽에서 본 昌德宮 敦化門
敦化門은 王의 行次와 같은 儀禮에 사용되고 臣下들은 궁궐 서쪽의 金虎門을 이용하였다.
창건 당시 宗廟가 昌德宮 앞에 자리잡고 있어 돈화문은 宮闕의 서쪽 끝에 건립하여 궁궐의
중심부가 동쪽에 있으므로 정문을 들어서서 동쪽으로 錦川橋를 건너 正殿인 仁政殿 일대로
연결된다.
(05) 창덕궁 회화나무群 -천연기념물 제472호-
돈화문 안마당 좌우에 있는 회화나무 8구루는 나무높이 15~16m, 가슴높이 줄기둘레 2~3m,
나이는 300~400년에 이르며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을 重建할 때 심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敦化門 주변은 朝廷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官廳이 배치된
공간으로 ‘궁궐 정문 안쪽에 槐木(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을 심고 그 아래에서 三公이 國事를
論했다’는 中國 故事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 이외에 學德이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도 심어 ‘學者나무’라고도 한다.
*중국 周에서 太師, 太傅, 太保의 官職을 三公이라 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周에서는
宮庭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槐]를 심고 三公이 이를 향해 앉았다고 전해진다.
(06) <창덕궁 세계유산> 標石
(07) 錦川橋와 進善門
금천교는 敦化門을 지나 進善門으로 가는 길에 창덕궁 내부를 흐르는 禁川(明堂水)을
건너게 되는 돌다리로 길이 13m, 폭은 12m이며, 長臺石으로 깔린 三道의 가운데는 御道,
左右 양쪽은 臣道이다.
(08) 昌德宮 禁川
창덕궁의 明堂水, 즉 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흘러 대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御溝 물가에는 花崗石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다.
禁川은 궁궐을 드나드는 官吏들이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궁궐 안팎을 구분하고, 背山臨水의 뜻을 살리기 위한 明堂水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明堂水: 風水地理에서 明堂과 관련되거나 명당자리에 흐르는 물.
(09) 昌德宮 錦川橋 -보물 제1762호-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太宗 11년(1411) 進善門 밖 御溝에 설치되었으며
여러 번의 火災와 戰亂을 겪으면서도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현존하는
궁궐 안에 있는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중앙에 虹霓가 모이는 곳에 큼직한 홍예 基石을 놓아 地覆石을 삼았으며, 蜻蜓武沙로 불리는
도깨비 얼굴을 새긴 逆三角形 石面을 배치하고 홍예 기석상의 間石에 사자머리를 浮彫하였다.
*蜻蜓武沙: 잠자리무사(홍예문과 홍예문을 잇대어 쌓은 뒤 벌어진 사이에 처음으로 놓는 돌).
(*蜻: 잠자리 청 *蜓: 잠자리 정)
(10) 창덕궁 금천교 난간, 한 덩어리의 돌로 조각하였다.
(11) 금천교 난간 엄지기둥의 僻邪 기능을 하는 石獸
*僻邪(벽사):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 (*僻: 더러울 벽)
(12) 昌德宮 進善門
창덕궁의 정문인 敦化門을 지나 錦川橋를 건너면 나오는 中門으로 창덕궁 창건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08년 仁政殿 改修工事 때 헐렸다가 1999년 復元하였다.
太宗 때 申聞鼓를 설치했던 문이다.
(13) 進善門에서 본 仁政門-肅章門과 行閣으로 둘러싸인 ‘仁政殿 外行廊 뜰’
이곳 마당은 모양이 다른 궁궐처럼 직사각형이 아닌 사다리꼴로 進善門이 있는 서쪽 行廊은
길고, 肅章門이 있는 동쪽 행랑은 짧다.
숙장문 쪽 바로 뒤에 宗廟에 이르는 산줄기가 뻗어 있어 종묘를 받치고 있는 산의 뿌리를
훼손하면서 궁궐을 건립할 수 없기 때문에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넓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사다리꼴 마당이 되었다.
世宗 1년(1419년) 上王인 太宗이 仁政門 밖 마당이 반듯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창덕궁 건설을 현장에서 지휘한 朴子靑을 下獄시킨 바 있다.
*朴子靑
조선 전기 平民출신의 武臣으로 궁궐을 지키는 兵士로 시작하여 경복궁 출입문에서 매를
맞으면서도 太祖의 異腹동생 義安大君의 출입을 막은 것을 계기로 御前을 지키게 되고
이후 中郞將, 繕工少監, 虎翼司 겸 大將軍 東北面宣慰使, 太宗 때는 工曹判書,
世宗 1년 參贊을 거쳐 右軍都摠制府判事에 올랐다.
昌德宮과 宗廟를 비롯하여 健元陵, 獻陵, 景福宮, 成均館, 淸溪川공사에 기여했으며
仁政門 앞마당을 지형의 특징을 보존하면서 최대한 공간을 넓게 사용하기 위하여 사다리꼴로
만든 것을 알게 되어 더욱 신임을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 漢陽의 도시계획은 鄭道傳이 했지만 공사를 완성한 인물은 朴子靑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늘날 서울의 틀을 완성한 조선 초기 최고의 建築家였다.
(14) 進善門 南行閣. 扈衛廳과 尙瑞院, 뒤쪽에는 內兵曹가 있었다.
*扈衛廳: 仁祖反正으로 집권한 西人들이 자신들의 군사적 세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하여
國王 호위를 명목으로 창설한 부대로 호위청에는 대장 1명∙별장 3명이 근무했으며
군관 350명을 거느렸다고 한다.
*尙瑞院: 玉璽를 비롯하여 임금의 명령을 상징하는 각종 물건들을 관리하던 관청으로
節鉞(임금을 상징하는 도끼), 兵符(군대를 동원하는 표지로 쓰던 나무 패), 巡牌(궁궐이나
都城 안팎을 순찰할 때 차고 다니던 패), 馬牌 등을 관리하였다. (*鉞: 도끼 월)
*內兵曹: 궁궐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하기 위하여 兵曹에서 파견된 支部(출장소)로, 내병조의
궁궐 수비 병력은 각 문의 자물쇠를 관리하고 侍衛와 儀仗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15) 진선문 南行閣 내부
(16) 進善門 西行閣에 있는 政廳
政廳은 吏曹와 兵曹의 銓官이 都目政事를 보던 곳으로 司憲府의 大司憲, 兵曹 堂上官,
吏∙兵房承旨, 史官 등이 참여하여 관리의 詮衡∙ 任免∙ 黜陟 등 인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처리하였다. (*銓: 저울질 할 전)
*都目政事: 吏曹와 兵曹에서 관원의 치적을 조사하여 출척(黜陟)과 異動을 행하던 인사제도.
(17) 昌德宮 肅章門
숙장문은 錦川橋와 進善門을 지나 맞은편에 나오는 中門으로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에 있는
‘仁政殿 外行廊 뜰’을 빙 둘러 扈衛廳∙尙瑞院 등의 行閣을 비롯하여 仁政門이 있고 숙장문을
통과하면 內殿으로 갈 수 있다.
숙장문은 成宗 6년(1475) 左贊成 徐居正이 지어 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사용된
이름이며, 日帝强占期에 헐렸다가 1996년 復元되었다.
(18) 仁政門과 仁政殿, 尙瑞院 쪽에서 본 모습
(19) 昌德宮 仁政門 -보물 제813호-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仁政殿의 正門으로 1405년 太宗이 창덕궁을 지으면서 건립한
문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光海君 때 복원되었다.
孝宗·顯宗·肅宗·英祖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卽位式을 거행했던 곳으로,
正殿인 仁政殿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20) 인정문의 추녀와 雜像
(21) 朝廷과 仁政殿
인정전 앞 넓은 마당은 朝會가 거행되던 뜰이란 뜻으로 ‘朝廷’이라고 하며 三道(중앙은 御道,
양쪽은 臣道) 좌우에 세운 品階石은 文武百官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文武官 각각
18품계를 새겼는데 正四品부터는 從을 함께 포함시켰으므로 정1품에서 정9품까지
각각 동, 서로 12개씩 있다.
품계석에 맞추어 동쪽에는 文官, 서쪽에는 武官이 중앙을 향해 서는데,
문관은 동쪽에 선다고 東班, 武官은 서쪽에 선다고 西班이라 했으며 이를 합쳐서
조선시대의 상류 계급을 ‘兩班’이라고 했다.
正祖 때 조정의 위계질서가 문란해졌다고 臣下의 품계에 따른 비석을 세우게 되었으며
正三品 이상을 堂上官, 從三品 이하를 堂下官이라고 한다.
朝廷 바닥에 깔린 薄石은 표면을 거칠게 마감하여 빛을 亂反射시켜 임금의 눈이 부시지 않게
하고 신하들의 가죽바닥신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였으며 비가 오거나 햇빛이 강할 때는
遮日을 치기 위하여 쇠고리를 설치하였다.
(22) 昌德宮 仁政殿 -國寶 제225호-
‘仁政’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며, 인정전은 창덕궁의 法殿으로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世子 冊封式, 文武百官의 賀禮式. 外國使臣 接見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던
창덕궁의 正殿이다.
太宗 5년(1405) 창덕궁과 동시에 정면 3칸의 작은 殿閣으로 건립되었다가 1418년에 규모가
큰 건물로 改築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燒失되어 光海君 때 重建된 이후 純祖 3년(1803)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에 再建되고 哲宗 8년(1857년) 보수공사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23) 仁政殿 石階 및 月臺
상하층 月臺에는 돌계단을 설치했으며 난간에는 8마리의 石獸를 새기고, 가운데 계단에는
踏道를 설치하여 鳳凰을 새겼다.
月臺는 궁궐의 正殿과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놓이는 넓은 臺로 궁중의 각종 행사가 있을 때
이용된다.
‘달을 바라보는 대’라는 月見臺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대개의 경우 월대는
궁궐에서 賀禮∙嘉禮와 같은 큰 행사 때 사람들이 올라서서 행사에 참여하는 데 이용되며
祭禮 때에도 이용되었다.
(24) 仁政殿 御座
御座 뒤에는 나무로 만든 曲屛과 그 뒤에 日月五岳圖 병풍이 있다.
병풍에 있는 陰陽을 뜻하는 해와 달은 왕과 왕비를 상징하며,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五嶽을 가리키며 이는 國土를 의미하는데 임금이 중앙에서 四方을 다스리고,
陰陽의 理致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五嶽: 한국의 이름난 다섯 산으로 東嶽-金剛山, 西嶽-妙香山, 南嶽-智異山, 北嶽-白頭山,
中嶽-三角山이다.
電球나 커튼 등 서양식 裝飾具는 1907년 純宗이 德壽宮에서 창덕궁으로 移御한 후에
설치하였다.
(25) 仁政殿 月臺에 있는 드므
인정전 외부 정면 좌우에는 무쇠로 만든 드므에 물을 담아두어 이 물에 火魔의 얼굴이
비치면 자기의 험상궂은 얼굴모습을 보고 놀라 숨거나 움츠려 火氣가 진압된다고 생각했던
呪術的 意味의 防火水를 담는 그릇이다.
(26) 인정전에서 바라본 朝廷과 仁政門
(27) 인정전 左側面
(28) 인정전 추녀
(29) 宣政門, 宣政殿으로 들어가는 문.
(30) 宣政殿 複道閣
(31) 昌德宮 宣政殿 -보물 제814호-
창건 당시에는 朝啓廳이라고 했으나 世祖 7년(1461)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宣政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啓: 열 계)
선정전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로 임금과 신하가 정치를 논하고, 儒敎 經典과 역사를 공부하는
便殿으로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것을 ‘常參’이라고 하며 참여할 수 있는
신하는 正三品 堂上官 이상이다.
현재의 宣政殿은 光海君이 仁王山 아래에 세웠던 ‘仁慶宮’의 光政殿을 仁祖 25년(1647)에
移建한 殿閣으로 朝鮮 中期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목조건물이며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집이다.
(32) 宣政殿 동쪽 側面
(33) 선정전 띠살창 分閤門
(34) 붓꽃
(35) 熙政堂 後苑
(36) 昌德宮 熙政堂(뒷면) -보물 제815호-
희정당은 본래 寢殿이었으나 조선 후기부터 왕의 執務室로 사용하였다.
본래는 창덕궁의 창건 때 崇文堂으로 세웠으나, 소실되어 燕山君 2년(1496) 이를 다시 짓고
熙政堂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壬辰倭亂 등 여러 차례의 화재로 燒失되어 1834년에 재건되었으나 1917년의 화재로
불에 타 1920년 景福宮의 침전인 康寧殿을 헐어 移建한 것이다.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玄關과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설비되어 마차나
자동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채택된 서양식 구조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와 大韓帝國時代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使臣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韓式과 西洋式이 어우러진 건물로, 時代의 變遷史를 엿볼 수 있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37) 희정당 완자살창 분합문
(38) 희정당 내부(뒤쪽에서 본 모습)
서쪽은 회의실,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응접실에는
海岡 金圭鎭의 昌德宮 熙政堂 叢石亭絶景圖(등록문화재 제240호)와
昌德宮 熙政堂 金剛山萬物肖勝景圖(등록문화재 제241호) 벽화가 걸려있다.
(39) 熙政堂 南行閣
마차나 자동차를 타고 현관에 내릴 수 있도록 개조하여 우리의 전통 건축과 어색한 組合을
이루고 있다.
(40) 宣平門, 大造殿의 정문
(41) 昌德宮 大造殿 -보물 제816호-
대조전은 王妃가 거처하는 內殿 중 으뜸되는 건물로 제9대 成宗과 仁祖, 孝宗이 昇遐하고,
純祖의 世子로 나중에 왕으로 追尊된 翼宗이 태어난 곳이다.
太宗 5년(140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과 여러 차례의 火災로 再建된 건물도 1917년
燒失되어 1920년 경복궁의 交泰殿을 移建하고 ‘大造殿’이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대조전은 동쪽으로 興福軒, 서쪽에는 隆慶軒을 翼閣으로 거느리고, 養心閤과 淸香閣과는
行閣으로 연결되었다.
*왕이 사는 곳을 겹겹이 문으로 막고 있어 ‘九重宮闕’이라 하고, 王妃의 거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곳, 가장 깊은 곳에 있다고 ‘中殿’ 혹은 ‘中宮殿’이라 불렀다.
*대조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은 龍은 王을 상징하며, 왕비의 寢殿인 동시에 왕의 침전이며
새로운 龍인 王子가 탄생하는 곳으로 용마루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이루니 陰과 陽,
天地間의 交通을 방해한다고 믿었으며 용이 깃든 곳에 또 용이 깃들면 용이 충돌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42) 大造殿 月臺와 드므
(43) 大造殿 앞쪽 계단과 소맷돌
(44) 대조전 정면과 <大造殿> 편액
(45) 대조전 내부
(46) 大造殿 완자살창분합문
(47) 昌德宮 興福軒
大造殿 동쪽에 딸려 있는 전각으로 1917년 창덕궁 내전 일대에 큰 불이 나자 日帝는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交泰殿을 비롯한 景福宮의 內殿 건물을 모두 뜯어내 그 목재로
창덕궁의 大造殿∙熙政堂∙興福軒∙景薰閣 등을 재건하였다. 흥복헌은 1910년 8월 22일
조선 왕조의 마지막 御前會議가 열린 곳이며, 1926년 4월 25일 純宗이 昇遐한 장소이다.
(48) 昌德宮 誠正閣
東宮에 속한 殿閣으로 世子가 학문을 연마했던 곳으로 熙政堂 동쪽에 있으며,
‘誠正’이라는 명칭은 孔子의 儒敎經典 <大學>에 나오는 ‘誠意와 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學問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한다.
건물의 오른쪽에 樓마루가 있는데 남쪽에는 <報春亭>, 동쪽에 <喜雨樓>라는 판액을
걸었으며, 한때는 이곳을 內醫院으로 사용하여 우측 4칸짜리 전각에는 내의원이었음을
알리는 <保護聖躬>, <調和御藥>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49) 三三窩와 承華樓
誠正閣과 이 일대는 王世子의 거처인 東宮이었으며 七分序-三三窩-承華樓는 복도로
연결되어 書庫와 讀書室로 사용되었다. (*窩: 움 와)
낙선재에서 後苑과 昌慶宮으로 넘어가는 언덕 오른쪽에 있으며 誠正閣 一圓의 건물로
서쪽 誠正閣과 사이에는 重熙堂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지금은 後苑으로 가는 길이 나있다.
(50) 원래 觀物軒과 <緝熙> 편액
誠正閣 뒤편의 <緝熙>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건물은 왕이 신하들과 만나고 經筵을 열던
곳으로 원래는 觀物軒이었다. 정조 이후 애용되어 正祖 7년(1783) 이곳에서 抄啓文臣의
시험을 치른 적이 있으며, 純祖 13년(1813)부터는 孝明世子의 書筵 장소(왕세자에게
經書를 강론하던 자리)로 쓰였으며, 甲申政變 때(1884년) 金玉均 일파가 高宗을 옹위하고
淸軍과 맞서던 곳이기도 하다. (*筵: 대자리 연)
현재 걸려 있는 편액 <緝熙>는 甲子年에 쓴 御筆이라는 표기로 보아 高宗 元年(1864)
고종이 열세 살 되던 해에 쓴 것이다.
*抄啓文臣: 奎章閣에 특별히 마련된 교육 및 연구과정을 밟던 文臣
-景福34회 제54차 문화답사(3-2); 昌德宮 後苑(1)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