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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불교학자 11. 초마 코로시 산도르 / 이민용
티베트불교 연구의 창시자
1. 인생은 나그넷길
그는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라 했지만, 그래서인지 그는 모든 걸 잊고 오직 걷는 일에만 집중했다. 마치 인생 목표를 걷는 일로 달성시키려는 듯했다. 실제로 그는 ‘걷는 일’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달성시켰다. 티베트 불자들이라면 오체투지하며 라싸를 향해 평생에 한 번은 순례길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티베트인도 아닌 그는 동유럽 헝가리를 출발하여 중앙아시아 티베트의 어느 지점을 향해 말 그대로 맨발로 걸었다. 길 떠난 동기는 자기 종족의 시원과 그 언어의 뿌리를 찾는 일이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평생을 걸으며 찾아 헤맨 길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종족의 기원도 또 자신의 언어의 뿌리도 찾지 못했고 분명히 확인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기대 이상으로 소득은 컸다. 그는 먼 훗날, 서구 낭만주의 부산물인 인도학(Indology)의 한 분야인 티베트학(Tibetology)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것이다.
초마 코로시 산도르(1784~1842)의 초상
그의 이름은 서구 학계에서는 ‘알렉산더 초마 드 코로스(Alexan-der Csoma de Körös, 1784~1842)’라고 표기되지만, 그의 조국인 헝가리식으로 표기하면 ‘초마 코로시 산도르(Csoma Körösi Sandor)’이니 우리의 이름 호칭법과도 닮았다. 곧 코로스 지역 초마 가계의 산도르이니 우리식으로 하면 ‘안동 지역 김씨 가문의 누구’인 셈이다.
그리고 그가 헝가리 출신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태어난 곳은 루마니아의 트랜실바니아의 하롬제크(Háromszék) 지역으로 이 일대의 주민인 발라키아인(Wallachian)과는 전혀 다른 세케이(Szekely) 종족의 마을이 코로스였다. 완강한 체격의 세케이 종족은 독립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지녀서, 터키(튀르키에)의 침략에 대항해 수 세기 동안 트랜실바니아 변방을 방어하였다. 이 종족의 시원은 마쟈르(Magyar)족이고, 우랄산맥 지역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4세기경 동아시아에 근거를 둔 훈족(Huns)이 아틸라(Attila)의 통치 아래 동로마를 침입했고 이후 서로마까지 진출하여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마쟈르족은 이 훈족의 한 지파이기도 하다. 6세기경에는 터키족(突厥돌궐로 알려진 종족)이 이 지역을 석권하여 용감한 우갈족(Ugars)을 복속시켰다고 한다.
한마디로 지금의 헝가리는 터키를 비롯한 여러 종족과의 길항 관계 속에 위치해 있었다. 그 명칭도 다양해서 ‘우갈(Ugar)’ ‘우골(Ugor)’ ‘웅그리(Ungri)’ ‘헝가르(Hungar)’ ‘웅거(Unger)’ ‘홍그루와(Hungroi)’ 등의 호칭들이 그것이다. 아마도 오늘날의 ‘헝가리(Hungary)’라는 명칭은 이로부터 유래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출신 지역은 이렇듯 혼성된 종족 가운데 위치했고, 그의 모국어 역시 오히려 우랄 알타이계였다.
주목할 사실은 이런 내용들이 이미 초마 드 코로스 산도르(이후 초마로 간략히 표기) 당시에 학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가 자신의 언어와 종족의 시원을 찾아 길을 떠난 것은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추구였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동기였다면 뜻하지 않게 돌아온 소득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흔히 근대기에 꽃을 피운 어느 학술 분야의 개척자들이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시작하지만, 후대에 그것이 새로운 분야의 발주였다는 경우가 초마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셈이다.
오늘날 그는 티베트학과 티베트불교 연구를 발주시킨 공헌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발단과 그 결실은 우연의 연속들이고 그가 오늘날까지 추앙받는 면도 학문적 결실보다는 그가 추구해 온 과정들과 직접 몸으로 겪은 사건들, 곧 요즘 말하는 ‘몸으로 체현시킨(embodiment)’ 점에 집중되고 있다.
그의 학문적 결실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티베트 문법과 티베트어 사전 한 편씩을 편찬했을 뿐이고 《마하비윳파티(Mahãvyutpatti)》라는, 동아시아 불교 연구자들에게는 《번역명의대집(翻譯名義大集)》으로 알려진 티베트-산스끄리뜨 어휘 대조 사전을 영역한 실적이 전부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를 달리 추억하고 그 의의를 살려야 할 사항이 따로 있다. 곧 그는 서구 불교학 연구의 한 분야로 대두한 티베트 원전에 의한 불교 연구의 결정적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불교에 대한 연구는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오늘날 서구에서 불교 원전에 근거한 불교학 연구는 그가 실천했던 전범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미지(terra incognita)로의 출발
그는 프랑스혁명(1789년) 전야인 1784년 4월 4일에 태어나, 영국의 본격적 중국 진출이 시작된 아편전쟁(1839~1842) 와중인 1842년 4월 11일, 58세의 나이로 비교적 짧은 인생을 살고 ‘입적’했다. 곧 서양과 동양이 근대로의 전환을 겪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격변기를 살았다. 그리고 필자는 지금 그의 사망을 굳이 불교 스님들의 죽음을 표시하는 ‘입적(入寂)’이라고 표기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사후, 그가 겪은 파란 많은 행적, 오직 불법 발현을 위해 헌신한 정성을 기려 일본은 그에게 보살이란 법명을 주었다. 일본불교 종파 대학의 하나인 대정대학(大正大學)은 1933년 그에게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보살(菩薩, Bodhisattva)’의 칭호를 부여했고 지금도 서구불교학계에서는 그를 즐겨 ‘헝가리 보살’이라고 부른다. 이 단순한 호칭에 관한 문제는 우연의 소산이 아닌 그의 평생의 삶 속에 얽힌 기막힌 사연들 때문이다.
그의 집안은 무척 가난하여 고향의 김나지움인 나기 에니에드(Nagy Eneyd)에도 늦게 입학했으며,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등록금이나 기숙사비도 불가능한 상태여서, 학생이자 하인(pupil-servants) 같은 처지로 살았다. 이런 재정 상태는 평생 그를 따라 다녔으며, 줄곧 ‘가난한 학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학문적 오리엔테이션은 독일의 괴팅겐대학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동양학을 공부하며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 불어, 독어, 루마니아어를 익혔고, 나중에 몸소 걸어 경유한 지역들의 언어를 하나씩 습득하여 슬라브어, 페르시아어, 벵골어, 마라티어와 인도 고전어인 산스끄리뜨어와 함께 티베트어에 능통했다. 언필칭 14개 언어를 숙달했다고 전기는 기록하고 있으므로, 가히 언어의 천재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에서 그에게 영향을 끼친 학자는 요한 G. 아이히호른(Joh-ann Gottfried Eichhorn, 1752~1827)이다. 그는 역사 신학자로서 구약학을 전공하며 역사학적 접근을 시도했는데, 성서의 기록들이 여러 손과 언어를 거쳤음을 알고 소위 ‘비판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초기 성서 해석학의 발판을 놓기 시작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히호른은 신학보다는 인도학 쪽에서 자주 거론되는 학자여서 초마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언어와 문헌에 근거한 초마의 연구 경향은 아이히호른 교수의 영향이 컸다. 괴팅겐에서 때늦은 학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교편을 잡게 되었으나, 그는 고향을 등지고 다시 떠나게 되었다. 이미 청년기를 지난 36세의 그를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방랑하게 만들었을까?
초마가 학교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떠난 여정들을 살펴보자. 우선 우리에게 익숙한 지역들만 해도 다음과 같다. 동유럽, 발칸의 중심부인 부쿠레슈티-소피아를 지나 터키를 거쳐, 배를 타고 알렉산드리아에 기항하였고 베이루트, 알레포, 모술 지역을 경유했다. 이 세 지역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이마를 마주 대고 살면서도 서로를 적대시하며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을 빚어온 곳이다. 이 같은 정황은 오늘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바그다드, 테헤란을 거쳐 파키스탄의 부카라와 카불에 도착했다. 이쯤 되면 서양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실크로드의 주요 루트에 들어선 셈이 된다. 그는 계속 동진하며 페샤와르(Peshawar), 라왈핀디(Rawalpindi), 슈리나가르(Srinagar)를 거쳐 지금은 티베트의 중요 도시이자 라다크의 중심도시인 레(Le)에 도착했다. 그리고 영국 식민지의 동쪽 끝이자 최전방 초소가 설치된 군사 포스트인 수바트(Subathu: 현 인도 북방 히마찰 프라데시로 지금은 관광 명소 중의 하나)에 당도했는데, 이곳까지 걸린 시간은 5년이었다.
물론 1819년 고향을 떠나 5년간을 줄곧 걷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처음 계획은 러시아의 오데사를 경유하여 이르쿠츠(Irkuts)를 향하는 카라반에 편승하려는 것이었다. 그곳을 통해 중국의 북방 국경선으로부터 티베트의 라싸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크로아티아를 도보로 걸어 그곳에 수개월 머물며 슬라브어를 익혔다. 그러나 러시아 입국은 좌절되었고 결국 먼 길인 남로를 택하게 되었다. 러시아 입국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영국과 러시아가 ‘거대한 게임(Great Game)’으로 서로 대치하는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이렇게 5년 만에 도착한 티베트와의 접경인 수바트에서 흥미로운 장면들이 연출된다.
그의 모습을 윌리암 W. 헌터(Sir William Wilson Hunter, 1840~ 1900)란 동인도회사의 관리 겸 동양학자는 이렇게 기술했다.
초마가 맨발로 자신의 뿌리를 찾아 편력한 지역들
1824년 늦가을 한 유럽인이 히말라야의 오지에서 영국령 동북방 군사 기지인 사바투에 모습을 드러낸다. 얼굴은 분명 유럽인인데 걸친 옷은 산간의 낡아빠진 옷이었다. 오히려 조잡한 담요 쪼가리에 가까웠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초마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나는 언어학을 공부하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지난 5년간 헝가리에서 이곳 중앙아시아까지 걸어왔고 계속 티베트의 미지의 땅으로 걸어 들어갈 계획이다. 영국 식민지 당국은 나를 보호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수상한 신분의 인물로 간주되었다. 스파이로 오인되었고 현지 사령관인 케네디 대위에 의해 반감금 상태의 보호조치를 받았다. 당시는 앞서 말한 강대국들 사이, 특히 러시아와 영국의 식민지 확대를 위한 ‘거대한 게임’의 와중이었다. 특히 인도 북방과 아프가니스탄, 티베트 지역은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팽창하던 영국이 러시아와 치열한 경쟁을 하던 지역이었다. 남루한 옷을 걸치고 수 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고도의 지적 소양을 갖춘 이 인물을 수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의 본의는 전혀 아니었지만, 그의 티베트어 사전과 문법서의 제작 등, 티베트에 대한 전문적 지식은 결국 훗날까지 서구 식민지화의 한 도구로도 활용되는 것이다.
어떻건 그가 편력한 지역들은 헝가리가 위치한 발칸반도를 기점으로 터키, 이라크, 이란, 페샤와르, 아프가니스탄 등의 중근동 지역을 거쳐 실크로드와 바미안 등을 넘어 라다크 지역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가 관통한 지역들은 정치, 문화, 인종, 종교가 난맥처럼 복잡하게 뒤얽힌 혼란한 지역이었다. 한 마디로 파란만장의 경로를 거쳐 티베트 국경에 도달했고 이 과정은 결국 그의 학문을 위한 편력이자 그의 삶의 축도이기도 했다.
3. 샹그릴라를 찾는 학자들
지금 필자가 인용한 초마의 주변의 삽화들과 경유한 지역들, 그의 출신이며 종족적인 세세한 사연들은 믿기 어려울 만큼 세밀하다.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다. 그에 대한 본격적 전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찾은 것만 해도 4권이 넘지만 그에 대한 최초의 전기를 쓴 테오도르 두카(Theodore Duka, 1825~1908)의 전기는 압권이다. 그는 시대적으로 초마와 가장 가까웠고 같은 지역 출신이기도 했다. 따라서 초마에 관한 증언적 자료는 물론 상세한 자료들을 직접 참조할 수 있었다. 이 두카란 인물 역시 서구의 동양학 발전에 일조한 인물이다. 초마와는 동향인 트랜실배니아의 헝가리에서 태어나 동일한 공간과 시대를 살며 그의 기이한 삶의 모습과 빼어난 활동에 주목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헝가리가 처한 고난의 민족적 정황과 영국의 호의로 영국으로 귀화했으며, 인도 동인도회사 소속 의사로서 인도에서 근무한 헝가리 태생의 귀화한 영국인이었다.
그의 눈에 초마가 띄었고 영국의 동인도 ‘벵골아시아학회(The Asiatic Society of Bengal)’에서 이룩한 초마의 활동은 그를 사로잡았다. 두카에게 초마는 또 다른 형태의 자신의 헝가리적인 정체성과 자신의 신분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일종의 자신 투영이었다. 따라서 두카는 이후 초마의 전설을 낳게 한 공전절후의 전기를 쓰게 된 것이다. 그것이 이 글의 대본으로 사용하는 《알렉산더 초마 드 코로스의 생애와 저작》이라는 전기가 나온 연유다.
이 책은 이후 발간되는 여러 형태의 초마 전기들의 저본이 되었다. 또한 오늘날 불교학 연구에 공헌한 수많은 서양의 동양학자들이 존재하지만 초마처럼 많은 전기를 남긴 학자도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불교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마저 낯선 기현상을 빚고 있다. 따라서 학문적 평판과 그 학자의 공헌 상관관계는 불교학에 관한 한 달리 평가된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여하간 이 두카의 전기에 근거하여 초마에 대한 최초의 평론적 약전(略傳)이 윌리엄 헌터 경에 의해 집필된다.
그리고 이 헌터란 인물 역시 달리 주목될 필요가 있다. 그는 《영 제국 인도 관보(The Imperial Gazetteer of India)》(1869년 창간)란 잡지를 통해 인도 통치를 위한 행정적인 자료들을 수집 분석하였고 이 통계자료들은 인도 총독에게 보고되었다. 아마 그의 신분인 ‘관료 겸 동양학자(Administrator-Orientalist)’란 상이한 두 개의 직함의 결합은 동양학이 어떻게 서양에서 발주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고, 결국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장하는 ‘오리엔탈리즘’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헌터 경은 동양학자이자 인도 주재 영국의 관료로서 관보를 통해 불교에 대한 기본 자료들인 산스끄리뜨와 티베트 불전 자료 수집가들을 낱낱이 소개하고 있다. 곧 산스끄리뜨 불전 자료를 수집한 브라이언 H. 호지슨(Brian Houghton Hodgson, 1800~1894)과 더불어 티베트 불전 자료를 소개한 초마를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이다.
아직도 서구에서 불교학의 발단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는 논의의 대상이다. 서구 불교학의 탄생이 문헌적 출발을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 ‘문헌의 출발’을 어디에다 둘 것이냐 하는 것은 초미의 쟁점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초의 불교학 개론서에 해당하는 저술인 외젠 뷔르흐누프(Eugène Burnouf, 1801~1852)의 《인도불교사 개론》과 《법화경(法華經) 번역》을 그 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저술들을 가능케 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내준 사람들은 달리 존재하였으니 오히려 그들을 부각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 자료들을 처음 발견 수집하며 그 문헌들의 중요성을 인지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물론 ‘최초의’ 인지자이니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해석상의 오류와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나름대로 연구하고 분류해 갔다. 요즘처럼 홀로 끼고 앉아 독식하지 않고 영국 도서관이나 프랑스의 뷔르누프 같은 학자들에게까지 이 수집 정리한 문헌들을 보내주었다. 이 호의로 보낸 결실들이 최초의 불교학 개론서를 출간시켰고 현대 서구어로 된 불전들을 번역 출판시킨 것이다.
이러한 수집/분류/발송 작업을 대표적으로 진척시킨 인물이 바로 브라이언 호지슨이었고, 그에 대한 평전 《브라이언 호지슨의 생애와 그의 소장 저술들》을 《제국 관보》에 게재한 것이 바로 이 윌리엄 헌터 경이었다. 그는 또 초마의 평전인 《순례의 학자, 초마 드 코로스(Csoma de Koros; A Pilgrim Scholar)》(1885)를 집필했다. 그러니 헌터 경은 이 두 인물을 학계에 소개하고 부각함으로써 산스끄리뜨 불전 자료와 티베트 불전 문헌의 발견과 수집, 또 그것들의 송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시킨 것이다. 불교 자료 면에서는 산스끄리뜨 불전 문헌은 전적으로 호지슨에 의존하였는데, 티베트 불전에 관한 한 초마의 공헌이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서구 불교학 발주의 단서를 어느 곳에 두어야 하는지 다시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초마의 전기를 쓴 두카의 주변을 훑다 보니 이야기가 빗나가고 말았는데 그의 헝가리와 얽힌 후일담은 더 계속된다. 실크로드학이 되었건 돈황학이 되었건 소위 중앙아시아를 종횡으로 탐험하고 많은 공적을 남긴 인물을 꼽는다면 오렐 스타인 경(Sir Marc Aurel Stein, 1862~1943)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 역시 헝가리 출신이었고 영국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고 영국으로 귀화한 인물이어서 아직도 학계에서는 그를 영국인으로 분류한다. 이 오렐 스타인은 두카를 기리는 추념 행사에서 기념 강연을 헌정한다.
이렇게 추적하다 보면 초마에게서 시작된 ‘헝가리 시원 찾기’는 한 개인의 학문적 호기심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발칸반도 중심에 위치하여 그동안 헝가리가 겪은 수많은 곡절, 즉 그 지역과 역사에 함축된 복잡한 인종적, 정치적 갈등을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땅끝 넘어 《천국까지 찾아 걸어간 헝가리 학자》라는 또 다른 책 제목은 그런 맥락을 지닌 그의 기구한 운명과 분투의 행로가 잘 부각되어 있는 셈이다.
4. 언어의 달인들
괴팅겐대학에서의 동양학 열기와 더불어 당시 유럽의 계몽주의, 낭만주의적 분위기로, 유럽 언어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 학문상의 중요한 이슈로 떠올라 있었다. 영어, 불어, 독일어 등의 서구 언어들의 기원이 인도의 언어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이 프란츠 보프(Franz Bopp, 1791~1867)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보프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서구 언어들의 산스끄리뜨어와 친근성이 나타났고 그는 비교언어학을 위한 방법들을 제시했다. 보프는 《산스끄리뜨와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등의 비교문법학》을 출간했다. 그것이 소위 언어학 분류에서 서구어들의 시원을 ‘인도-유럽 언어(Indo-European)’란 표제 아래 분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서구가 식민지화하고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된 인도 현지 언어와 고전에 대한 번역은 역설적으로 서구의 언어와 신화의 뿌리를 찾아준 셈이 된다. 그러고 보면 초마 자신의 언어적 시원에 관한 관심도 한 개인의 유별난 호기심이나 인종적 시원 때문에 시작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무르익은 당시의 학문적 분위기와 맞물린 서구 식민주의 현장의 반영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초마가 5년 만에 도달한 티베트 경계선 사건은 여행의 끝에 일어난 하나의 해프닝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한 계기이기도 했다. 그의 신분 조회가 이루어졌고 그 덕분에 그에 관한 행적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그리고 초마에게 추천장을 써준 이가 무어크로프트(William Moorcroft, 1767~1825)라는 것도 밝혀졌다. 무어크로프트는 초마가 티베트 경계에 도착하기 전에 레(Le)에서 만나 5개월간 함께 지냈으며, 초마의 긴 여로에 결정적 전환점을 가져다준 인물이었다.
그는 학자도 아니고, 식민지 고위 관리도 아닌 오히려 탐험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군 출신의 수의사로서 이곳저곳을 탐색하며 좋은 종마를 찾아다니다 네팔 등 인도 북부를 경유하며 라다크의 레에서 초마를 만난 것이다. 무어크로프트의 작업은 영국 식민지 당국에서는 무척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런 자신의 영향력을 초마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초마는 5년간의 여행 중 중반기에 해당하는 1822년에 그를 만났고, 그는 초마에게 결정적 방향 전환의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특히 내성적이고 과묵한 초마는 처음으로 무어크로프트에게 마음을 트고 친구가 되었다. 초마가 동양학과 언어에 심취해 있음을 간파한 무어크로프트는 초마에게 《티베트 알파벳(Alphabetum Tibetanum)》이라는 라틴어로 된 책을 주었다. 이 책은 1762년에 가톨릭 선교사인 안토니오 A. 기오르기(Antonio Agostino Giorgio)가 라싸에서 수집 편찬한 무려 820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였다. 이 책과 더불어 무어크로프트는 자신이 이제껏 우정을 쌓아온 현지의 라마들까지 초마에게 소개해 주었다.
5. 고행의 학문 수행자
초마는 라다크에서 초기 계획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개안(開眼)을 하게 된다. 불교로 귀의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임이 무엇인지를 자각하며 방향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정확히 5개월 6일 동안 무어크로프트와 함께 카슈미르와 라다크의 레를 왕복하며 지내고 난 후, 초마는 장글라(Zangla) 지역의 티베트 사원에서 16개월을 보냈다. 거기서 무어크로프트가 소개해 준 상게 푼촉(Sangs-rgyas Phun-tshogs)이라는 라마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그에게서 티베트어와 불교의 심오한 부분까지를 모조리 전수받았다. 그가 푼촉 스님과 보낸 16개월이 무문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짧은 기간이고, 그저 그러려니 하는 정도의 고행으로 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초마는 사방 2.8m 남짓한 토굴에서 히말라야의 엄혹한 추위를 그대로 견디면서 스승으로부터 티베트어와 불경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일 년 반의 토굴 생활 끝에 걸어 내려와, 초마는 앞서 언급한 영국 국경초소인 사바투의 현지 책임자인 케네디 대위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등짐에는 그동안 애써 필사한 320권의 티베트어 어휘사전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훗날 티베트불교뿐만 아니라 산스끄리뜨어와 대조 번역을 가능케 한 범장(梵藏) 대조 어휘사전인 《마하비윳파티(Mahavyutpatthi, 飜譯名義大集)》 가 출현하게 된 소이연(所以然)이다.
초마의 이런 공부 모습과 패턴은 오늘의 서양인들의 티베트불교 연구 모습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오늘날은 티베트까지 걸어가지는 않겠지만, 일정한 라마 스승을 모시고 적어도 일 년 이상을 함께 독대하여 티베트 경전을 읽어가는 방식이다. 대부분 이 기간에 불자(佛子)가 되거나 아예 티베트 승려로 계를 받아 승적에 이름을 올린다. 미국에서 첫 번째 티베트 불승이 된 컬럼비아대학의 로버트 써먼(Robert Thurman) 교수나 달라이 라마의 비서 역할을 했던 버지니아대학의 제프리 홉킨즈(Jeffrey Hopkins) 교수가 대표적인 예인 셈이다. 그러니 초마는 이들 현대 서구 불교학자들보다 2세기는 더 앞선 본보기가 된다. 요즘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쏟아지는 티베트불교 원전에 의한 불교 연구서들은 이렇게 라마승들과의 독대에 의해 이루어진 저술들이다.
이후 그는 몇 번을 더 히말라야 산중의 장글라 등지를 찾아 계속 자료수집과 공부에 몰두하며 1831년에야 인도의 캘커타(지금의 명칭은 콜카타)로 귀환했다. 그곳에 본부를 둔 벵골아시아학회(The Asiatic Society of Bengal)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짊어지고 내려온 문헌 자료를 정리하여 출판했다. 이 학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고, 학회 창설자의 한 사람이자 브라흐미문자와 카로슈티문자를 판독해낸 제임스 프린셉(James Prinsep, 1799~1840)과도 친교를 맺고 그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 식민지 관리에게서 받은 혜택, 얼마간의 여비와 숙소, 그리고 왕립아시아학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된 것을 빌미로 초마는 영국 식민지의 하수인으로 전락된 것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런 점을 예상해서인지 초마는 자신이 처한 미묘한 입지를 이렇게 밝혀 놓았다. “나는 어떤 정부에 의해서도 정치적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파견된 적이 없다.”라거나 또 자신을 학회 회원으로 영접해 준 거물급의 인도학자인 제임스 프린셉에게도 한계를 긋는 편지를 보낸다. “어떤 통계적 자료, 그것이 정치적이 되었건 지리학적인 문제가 되었건 나는 그런 질문에 대해 자제할 것이다.”라고.
초마가 학자로서 보였던 이런 자세는 한 전기 작가가 지적하듯 “중세기 승려들과 같이 세속을 등지거나 청빈함에 묶인 자들”이란 정의에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궁벽한 고행의 생활이며 학문적 열정,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몸으로 때운 초마를 당시에도 “바보로 여겨, 감싸주는가 하면 동시에 비웃어 버리는 태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학문적인 자세는 그가 종교적인 경지로 승화되었음을 인정하여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보살’이란 칭호를 부여하게 한 근거가 되었다.
6. 학문적 결실
오늘날 티베트불교의 학문적 기여라면 일차적으로 티베트 장경 속에 편입된 일실된 산스끄리뜨 원전을 밝혀내는 일이다. 그래서 티베트어를 통해 티베트불교 내용을 해명하는 것이 일차적 작업이 되겠지만, 오늘날 불교학의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는 티베트불교 원전 없이는 오히려 인도불교의 전통과 사상을 일관성 있게 연구하는 작업이 거의 불가능해진 것이 사실이다. 곧 티베트불교 연구는 인도불교 연구의 관건이 되고 두 전통이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문 불전들을 티베트 불전 어휘와 산스끄리뜨 원전의 어휘로 복원시키는 작업은 물론 한문 불전의 애매성을 명확히 밝혀내는 작업도 일부 가능해졌다. 실제로 E. 라모트 같은 학자는 그런 작업을 시도하여 한역 불전 전문 어휘의 애매한 표현들을 티베트어와 산스끄리뜨어로 환원/복원시켜 본래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또 상호 간의 사상적 연관성을 따졌다. 더욱이 초마의 사전은 그 후 다른 사전 편찬의 저본 역할을 했다. 초마가 사전 자료를 준비 중인 시기에 영국 총독부에 의해 세람포 판(Serampo, 1826년 간행) 사전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초마의 사전으로 인해 이 사전은 ‘구시대의 혼성품’으로 모두 고고학적인 수집품으로 격이 떨어졌다. 그리고 지금도 티베트어 연구자들에게 필수의 사전으로 활용되는 H.R. 예슈케(Heinrich A. Jäschke, 1817~1883)의 《티베트-영어 사전(A Tibetan-English Dictionary》 초판(1881)마저 초마의 사전을 근거로 작성되었다. 예슈케는 초마의 사전을 “한 건축물의 주춧돌을 놓은 것이고,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원자료에 근거한 결정적”인 저술로 평가한다. 그 밖에도 라싸를 방문하며 영국과 러시아의 사이의 간첩 역할을 하여 문제를 일으킨 인도학자인 S.C. 다스(Sarat Chandra Das, 1849~1917)의 티베트어 사전 편찬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마디로 그의 사전은 오늘날 티베트어 학습의 모본(母本)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초마는 서구에서 최초로 티베트 장경의 경장(經藏, Bka’‘gyur)과 논장(論藏, Bstan’gyur)을 구분시킨 목록을 작성했다.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경장과 논장의 분류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어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서구에서 이 분류는 초마에 의해 처음 소개된 학문적 성과이다. 티베트 장경의 경전 분류는 이미 14세기 사캬파의 불교학자인 부똥(Bu-ston, 1290~1364)에 의해 채택되어 약 4,569경론이 티베트어 경장과 논장으로 분류되었다. 이 경장들의 분류는 물론, 소승, 대승, 금강승의 학파 분류와 여러 종파들이 그의 《인도-티베트불교사(Chos’byung)》(1322)를 통해 정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이래로 서구에서 산스끄리뜨 불전들이 본격적으로 수집, 번역되고 그 결실로 인도불교사마저 출간되는 상황이었지만 아직도 이 불전의 방대한 양의 경(經)과 장(藏)으로의 분류는 알려지지 않았고 초마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 작업이 빛을 보는 것이다.
끝으로 기억해야 할 사항은 앞서 언급한 《번역명의대집(翻譯名義大集)》의 영어 번역이다. 그의 번역을 통해 학계에 소개된 이래로 이 대조대차 목록은 증광되어 이후 한문, 몽골의 파스파 문자(‘Pags-pa), 만주어까지 포함되는 방대한 불교 전문 어휘집으로 발전 확대되었다. 초마가 고도 1만m 이상의 히말라야 토굴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겪으며 조용히 불전 자료들을 모으고 그 어휘들을 편집한 공로는 잊히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만 가끔 자신의 존재를 알릴 뿐이다. 마치 보살의 행이 그렇게 숨겨져 알려지듯 말이다.
마침내 그는 애초에 계획했던 몽골의 어느 지점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자신의 언어와 인종의 뿌리를 찾아 다시 티베트를 향해 떠났다. 그의 나이 58세. 그러나 그의 여정은 인도의 동북단 다르질링에서 끝나고 만다. 그곳에서 열병에 걸려 티베트로의 입국과 몽골의 어느 지점에 있을 것이라 상정했던 자신의 언어와 인종의 ‘고향’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
이민용 minyonglee@gmail.com
동국대, 하버드대 박사과정 수료(인도불교사상, 동아시아지성사 전공). 동국대 · 영남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장 등 역임. 주요 논저로 《학문의 이종교배-왜 불교신학인가?》 《서구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불교의 근대적 전환-이능화의 문화론적 시각과 민족주의》 《미국의 일본 불교 수용의 굴절-헨리 올콧트, 폴 카루스, 釋宗演, D.T 스즈키의 경우》 등이 있다. 현 한국종교문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