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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2월31일(일)맑음
인도 성지순례 여정의 막이 올랐다. 새벽5시에 일어나 아침을 대충 먹고 硏耕연경보살님을 기다리다. 연경보살님 차타고 서진주 IC에 모이다. 송계거사가 밤새 끓인 호박죽을 한 그릇씩 대접한다. 대절한 버스는 인천공항까지 우리 팀을 데려다 준다. 먼 길 떠나는 아내를 배웅하러 나온 현정보살 남편과 보정보살의 남편과 초면의 인사를 나누다. 6시경에 출발하여 어둠을 뚫고 달리다. 길은 비에 젖어있다. 인천공항에 11시 무렵 도착하다. 공항3층 K카운터에서 순례 팀 회동하다. 보배여행사 사장 변영호님, 안성에서 오신 연꽃님, 대구에서 오신 두 분, 윤종선님 모두 모였다. 탑승수속하다. 에어 인디어Air India를 타다. 오른 쪽 날개 앞쪽의 좌석에 앉다. 백조의 무리 같은 구름이 푸른 하늘을 흐른다. 오후3시 무렵 하얗던 하늘이 머린블루marine blue로 바뀐다. 해가 저문다. 시야가 닿는 하늘의 끝이 휘어져 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다. 16:40 흰 양떼가 줄을 맞추어 일렬로 늘어서니 광활한 밭이랑처럼 보인다. 16:50 한 점 티끌도 없는 창공이 열린다.17:25 바다 가운데 섬들이 점점이 보인다. 햇빛 찬란하게 비쳐오자 승무원의 방송안내, 곧 착륙할 거라 한다. 고도가 낮아지니 물에 뜬 배들이 장난감처럼 작게 보여 귀엽다. 17:35 홍콩에 랜딩. 1시간 기내에서 대기하는 동안 홍콩에서 내릴 손님들은 내린다. 스튜어디스가 바이 바이 2017년, 해피 뉴이어 2018년! 이라 한다. 홍콩을 날아서 델리에 착륙하다. 12:50 비행기에서 보낸 길고 괴로운 시간이 중음계의 나태지옥을 빠져나온 듯하다. 이럴 때의 비행기는 ‘나르는 짐짝’이라할만하다. 2018년 새해를 인도 땅에서 맞는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인도인 가이드 산딥Sandeep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보라색 신사복을 입은 곱슬머리의 미남이다. 대절한 버스를 타고 프라이드 호텔Pride Hotel로 가서 짐을 부리고 하루 유하다. 학생들은 2, 3층으로 2명씩 짝을 맞추어 방으로 들어가다. 보정보살이 준 누룽지 차를 뜨거운 물에 불려서 먹고 정신을 차리다. 너무 피곤하다. 샤워하고 예경하고 자다.
2018년1월1일(월)맑음
6시 아침 눈을 뜨다. 부처님 나라에서 새해를 맞는다. 예경 드리고 공양 올리다. 세수하고 짐정리하다. 07:00 아침 공양하면서 Happy New Year! 인사 나누다. 08:00 버스타고 델리 공항으로 이동하다. 바라나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다. 짙은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된다. 09:30 공항 검색을 통과하다. 그러나 비행기는 계속 지연된다. 10:15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수행이다. 그냥 기다린다. 현재 순간 호흡은 항상 거기에 있다. 호흡을 보는 것이 기다리는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는 최상의 방법이다. 비행기가 지연되니까 항공사에서 점심을 제공한다. 점심공양을 하면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 킬링 타임killing time, 시간 죽이기가 아니라 '리빙 타임 living time, 시간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매순간에 깨어 있는 것이며 현재순간 호흡 알아차리기이다. 11:00 탑승게이트가 바뀌어 32번 게이트로 이동. 다시 한 시간 기다리니 42번 게이트로 가란다. 안개가 걷히면서 비행이 가능해지자 게이트 앞에 모인 사람들이 기다림에 지쳐 먼저 타려고 달려들고 문지기는 그걸 막느라 옥신각신한다. 우리는 줄을 서서 천천히 움직이다. 14:00 탑승하다. 15:40에 이륙하다. 소형비행기라서 비행기 같지 않다. 안개에 싸인 들판이 시야에 가득하다. 왼쪽 창가에 앉으면 히말라야 설산이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눈을 돌렸으나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16:40 바라나시Varanasi 공항에 착륙하다. 공항 앞에 버스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이드 산딥이 바라나시 역사를 이야기 해준다. 바라나시는 쉬바Shiva신께 봉헌된 古都고도로서 약 6,000년 되었다고 한다. 18:00 마딘 호텔Madin Hotel에 도착하여 짐을 부리다. 이제 갠지스 강가로 가야지! 한 대의 릭샤rickshaw에 두 명 씩 타고 혼돈의 거리를 뚫고 달리다. 욕계의 창자가 터져 나와 온갖 배설물과 잡동사니들이 질펀하게 널브러진 곳. 지옥에서 빚은 만두의 속이 터져 나온 듯. 거리는 온갖 색깔과 소음이 난무한데 군중은 흙탕물처럼 흘러간다. 어두침침한 배경에 유령처럼 허우적거리며 걸어가는 사람들,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리며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툭툭과 오토바이들. 여기에서는 시간이 발에 밟혀 죽은 것 같다가 위로 쑥 뻗쳐 오른다. 보통 시간은 앞에서 와서 뒤로 멀어져 가는 듯이 느껴지는데 인도에서는 시간이 발밑에서 올라와 머리 위로 올라가다 사라진다. 하수와 오물이 널브러진 땅바닥은 수 천 년 전 아득한 과거이며, 릭샤의 페달을 밟느라 부지런히 움직이는 다리는 백 년 전이고, 눈을 들면 보이는 네온사인 찬란한 호텔은 현재이며,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IT산업은 미래를 내다본다. 그러나 바라나시의 하늘은 깜깜하다. 욕계의 삶은 깜깜한 껍질에 싸여 있다. 無明무명이 욕계의 실체이다. 욕계에 묻혀서 하루하루를 사는 삶이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과 같은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히 살고 있는 이 잔인하도록 무관심한 침묵이 무섭다. 그 누구도 ‘아 괴롭다, 괴롭구나!’라고 외치지 않는다. 혹시 속으로 괴로움을 씹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려니, 그렇구나, 그렇지’라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간디Gandhi도 타고르Tagore도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도 마하르쉬Maharshi도 인도를 바꾸지 못했다. 바꾸어지지도 않고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이 인도이다. 인도의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라고 인도인에게 물어보라. 왜 하필 인도만 바뀌어야 하나라고 되물을 것이다. 인도가 문제인 게 아니라 욕계의 보편적인 苦를 문제 삼을 일이다. 인도에 사는 사람, 인도에 놀러 오는 사람, 인도에 순례 오는 사람 모두가 욕계중생이다. 欲욕에 물든 중생이 벌이는 세상이 이렇지 별 다를 것인가? 경제수준이 나아져서 좀 더 잘산다고 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인도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편리한 삶과 문화생활에 젖은 사람들은 바라나시 거리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을 것이다. 질서와 혼돈, 깨끗함과 더러움, 시끄러움과 조용함, 밝음과 어둠, 성스러움과 속됨, 세련됨과 허접함이 온통 뒤섞여 종잡을 수 없는 지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크게 긍정하는 마음, 있는 그대로 모든 걸 받아드리는 마음이 되리라. 그 때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린다. 미스틱 유니언Mystic Union, 신비로운 합일이라 할까, 선과 악, 물듦과 청정함, 성과 속이 미묘하게 얽히어 하나 됨을 이루는 無碍무애 융통함!
갠지스 강가에 다다라 갓트ghat라는 계단을 내려가 강물을 바라보다. 어둠이 깃든 강은 말이 없다. 한편 강가에서는 힌두교도들이 벌이는 火供화공, 불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한다. 이것을 아라띠 뿌자arati puja라 한다. 일곱 명의 사두들이 불을 피워 하늘에 헌공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신의 축복을 기원한다. 부처님이 전도선언을 하시고 가야로 가시어 불의 제사를 드리는 일 천 명의 외도를 교화하셨는데 그들은 바로 저런 아라띠 의식을 행하였을 것이다. 강에서 돌아올 때도 타고 왔던 릭샤를 타고 혼돈의 거리를 요리조리 뚫고 호텔로 돌아오다. 바라나시의 밤거리를 체험한 느낌은 체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호텔로 돌아온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졌고 분위기가 변했다. 아마도 인도의 본색을 맛보았으리라. 아, 여기가 인도구나! 내가 인도에 왔구나!
2018년1월2일(화)맑음
04:30에 모닝 콜morning call해서 05:00 프론트에 모이다. 밤새 안녕? 잘 잤어요? 인사를 나누다. 05:30에 갠지스 강가로 나가다. 강물은 안개 낀 어둠 속에서 말없이 흐르고 있다. 아니 어둠이 물이 되어 흐르는 것이다. 흐르는 것이 어둠이요, 윤회가 아닌가? 흘러가 머물지 못하는 곳이 중생세간이다. 갠지스 강가로 나가 배를 타고 강물 위에 꽃 등잔을 띄운다. 어둠을 밝히는 꽃 등잔을 손에 들고 보리심의 기도를 낭송한다. 자신의 심장을 꺼내 불을 붙여서 어둠의 흐름에 흘려보내면 이 깊이 모를 무명이 밝아지려나? 배 위에서 보이는 강가의 풍경이 마치 저승을 건너갈 때 보인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강을 연상시킨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저승에는 다섯 개의 강이 흐른다고 한다. 인간이 죽으면 이 강들을 건너 저승의 왕 하데스Hades가 지배하는 冥界명계로 간다. 먼저 비통의 강 아케론Acheron을 건너야 한다. 죽은 자는 저승의 뱃사공 카론Charon의 배에 타고 강을 건너는데, 죽은 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슬피 여겨 울며 건너기 때문에 비통의 강이라 한다. 아케론을 건너는 자는 뱃사공 카론에게 뱃삯을 주어야 하므로 고대 그리스 인들은 시체의 입에 동전을 넣어주었다. 저승 갈 때도 돈이 필요하니, 살아서도 돈이요, 죽어서도 돈이다. 당신은 저승 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다시 시름의 강 코퀴투스Cocytus를 건어야 한다. 두 번째로 지나는 강인데, 이 강을 건널 때 강물에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 비치기 때문에 시름에 젖게 된다. 후회할 짓 하지마라. 그 후환은 죽어서 까지 따라간다. 세 번째로 불의 강 플레게톤Phlegethon을 지난다. 보통의 물이 흐르는 강이 아니라 불길이 흐르는 강이다. 죽은 자의 영혼은 이 곳에서 불태워져 정화된다. 자신이 지은 업이 불로 태워져 정화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는 없다. 참회와 정진의 불로써만 업이 정화된다. 네 번째로 망각의 강 레테Lethe를 건너게 된다. 플레게톤에서 불로써 정화된 영혼은 레테 강물로 끓인 망각의 차를 마시고 자신의 모든 과거를 잊게 된다. 망각은 축복인가, 고통의 씨앗인가? 망각은 無知무지, 不覺불각, 無明무명의 다른 말일뿐, 고통의 원인이다. 마지막으로 증오의 강 스틱스Styx를 지나야한다. 명계를 일곱 번 휘감고 있는 강으로 다른 강과는 달리 신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스틱스 강에 대고 한 맹세는 신조차도 절대 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갠지스 강에서 보리심의 맹세를 함께 했으니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금석의 맹약을 한 것이다. 우리의 맹세 헛되지 않아 세세생생 보디만달라Bodhimandala에서 다시 만나리라!
강에서 돌아와 아침 먹고 출발하니 07:00. 초전법륜지 녹야원을 향해 달리다. 08:00 쯤 녹야원 도착. 오다 보니 다섯 고행자가 법을 전하러 오시는 부처님을 나아가 영접했던 일을 기념하여 세운 영불탑迎佛塔이 보였다. 녹야원에 들어서자 푸른 잔디가 깔린 사이로 경행로가 나있고, 경행로를 따라가면 승원터와 아쇼카 석주가 서있다. 그리고 초전법륜탑 다메크 스투파Dhamekh Stupa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스투파가 보이는 잔디에 자리를 펴고 앉다. 빠알리 예경하고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을 읽는다. 그사이 한국 절 녹야원정사에 머물면서 공부하고 계시는 등현스님이 오셔서 苦樂中道고락중도와 다섯 가지 즐거움에 대하여 법문해주시다. 갈 길이 급하여 아쉬움을 뒤로 하고 09:30에 녹야원을 떠나다. 농촌지역을 지난다. 흙과 나뭇가지와 댓가지로 얼기설기 엮은 토담집, 소똥을 말리려 벽에 바른 것하며 입고 있는 옷과 사람들의 모양세가 2,500년 전 부처님 계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인 채 시간이 정지한 듯하다. 도중에서 점심 먹다
13:05. 보드가야에 도착하다. 마하보디 호텔Mahabodhi Hotel에 투숙하다 16:30.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 해졌다. 호텔은 대탑에서 3km 떨어진 들판 가운데 서있다. 아마도 보드가야 관광 붐boom의 영향으로 자본의 세례를 받아 피어난 惡악의 꽃인가 보다. 그래도 선의 꽃인지 될지, 악의 꽃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모든 현상은 뭐라고 한마디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거늘. 3대의 툭툭에 나누어 타고 대탑을 향해 달리다. 나는 거의 15년 만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17:00 대탑에 도착하여 본당main temple에 들어가 부처님께 가사를 공양 올리고 참배하다. 밀려드는 참배객들 가운데 겨우 틈을 얻어서 학생들과 반야심경을 독송하다. 본당을 나와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앉다. 빠알리 예경을 드리고 <보리수 이야기>를 합송하다.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께서 깨달으신 성스러운 곳에서 붓다의 원음으로 예경을 드리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보배여행사 사장님의 안내로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깨달음을 음미하셨던 일곱 군데를 참배하다. 보리수 아래 불족석에 머리를 닿으며 부처님의 몸을 느껴본다. 성지순례의 근원이 되는 보드가야 대탑에서 학생들은 모두 저마다의 기억을 새기며 가슴 가득 감동을 안고 갈 것이다. 무칠린다 용왕 못을 참배할 때 서림(허정)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작년 말 조계종 총무원장 직선제를 위한 촛불법회를 주도했다가 실패로 돌아가 망명 아닌 망명객으로 보드가야에서 두 달 째 정진하고 있다. 대탑 주변에는 참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티베트 스님들의 붉은 고동색, 태국스님들의 짙은 황색, 미얀마 스님들의 진한 갈색, 중국스님과 한국스님들의 회색, monk color스님들의 색깔이 강이 되어 유유히 흐른다. 마하보디 대탑을 향해 몸을 던지며 오체투지를 하는 스님들과 불자들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18:00 호텔로 돌아와 쉬다. 성도지에서 하루를 마무리 하다.
2018년1월3일(수)맑음
05:30 새벽을 깨우다. 06:30 아침 공양. 07:30 출발. 버스 안에서 <날마다 하는 기도문>과 반야심경 20독을 하다. 09:20 영취산에 도착하다. 빔비사라의 계단을 오르다. 돌계단을 빨리 오르느라 숨이 차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울렁거린다. 젊었던 시절의 내가 아닌 것 같다. 문인보살이 부축해서 겨우 올라가다. 올라가는 길옆에 있는 아난다 동굴과 사리불 동굴을 참배하다. 정상에는 신령스러운 독수리 모양의 바위가 있다 해서 영취산靈鷲山 혹은 영축산이라 한다. 먼저 자리 잡은 중국 정토교 계통의 불자들이 하얀 옷을 입고 예경 드리는 의식이 부산스럽다. 우리는 <찬나Channa의 경>을 합송하고 잠시 호흡명상을 하다. 기념 촬영하고 하산하다 11:00. 왕사성 라즈기르Rajghir로 오는 도중에 빔비사라Bimbisara 감옥터를 둘러보다. 죽림정사Veluvana에 들러 연못가에 앉아 죽림정사에 얽힌 연기를 이야기 하다. 수닷타 장자와 케마Khema 왕비 이야기를 들려주다. <교리문답의 작은 경>을 합송하고 호흡명상하다. 부처님과 성스러운 제자들이 숨 쉬었던 그 숨은 아직도 여기 우리 곁에 남아 있지 않느냐.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보자. 부처님께서 숨 쉬었던 그 숨을 호흡하자. 호흡은 항상 현재에 있는 것이요, 우리가 살아있는 내내 가지고 있는 기능이다. 한 호흡, 한 호흡을 정성스레 알아차리면 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 호케Hokke 식당에서 점심 공양하다. 30분 걸려 날란다Nalanda에 도착하다. 여행사 사장이 날란다에서는 석류가 유명하다면서 한 개씩 사준다.
날란다는 우빠띳사와 꼴리따의 귀의한 유서 깊은 곳이다.
라자가하로 몰려드는 수행자의 물결을 유심히 바라보는 청년이 있었다. 일찍부터 세상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이름난 스승을 찾아 도를 묻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몇 년을 보냈다. 그는 날란다 지역의 이름난 유지의 아들인 우빠띳사Upatissa와 그 친구 꼴리따Kolita는 한 마음으로 도를 구하고 있었다. “두려운 죽음을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영원한 삶은 없는 것일까? 죽음이 있듯 죽음에서 벗어나는 법도 있지 않을까? 친구여, 죽지 않는 법을 가르쳐줄 스승을 함께 찾아보자.” 과거 전생에 같이 도를 구하던 인연은 이생에 다시 만나 도반이 된다. 두 청년은 산자야Sanjaya라는 스승을 만난다. 그는 회의자의자로서 일종의 소피스트Sophist와 같은 철학자이었다. 스승의 견해에 만족할 수 없었던 두 청년은 그를 떠나 확신을 주는 스승을 찾아다녔다. “불사의 길을 발견하면 서로에게 알려주어 함께 도를 닦기로 약속하자.” 라는 다짐을 한다. 간절히 두드리는 자에겐 문은 열리는 법. 드디어 우빠띳사의 눈에 한 영상이 비친다. 우빠띳사의 눈에 한 사문의 모습이 들어온 것이다. 그 순간, 주변의 산만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시간이 멈춰버린 듯하였다. 시선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사문의 얼굴은 평화의 빛에 감싸여있다. 손에 든 발우를 응시하며 한 발 한 발 옮기는 그의 걸음걸이는 너무나 평화스럽고 고요했다. 세상에 성자가 있다더니만 저 분이 바로 그 성자가 아닐까. 홀린 듯이 사문의 뒤를 따르던 우빠띳사는 사문이 한적한 곳에 다다라 앉으려고 하자 곧 좌구(坐具, 깔개)를 깔아드렸다. “사문이여, 여기에 앉으소서.”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병에 물을 따라드리고 예를 표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사문이시여, 당신의 몸가짐은 참으로 침착하고 얼굴은 밝게 빛납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이며, 무엇을 배웠습니까?”
“벗이여, 저는 사까족 출신의 위대한 사문을 제 스승으로 섬기며 그분을 따라 배우고 있습니다.”
“당신의 스승, 위대한 사문께서는 어떤 법을 가르치십니까?”
“벗이여, 저는 이제 막 출가한 사람이라, 스승의 가르침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스승의 넓고 큰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제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 앗사지Assaji 존자는 녹야원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초전법륜과 무아상경 법문을 듣고 이미 아라한의 경지를 이룬 분인데도 이토록 겸손하시다.
“저는 우빠띳사입니다. 많은 말씀 바라지 않으니, 저를 가엾이 여겨 요점만이라도 일러주십시오.” 존자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구도심 가득한 청년을 바라보면서 게송을 읊는다.
앗사지 존자의 게송=연기법송緣起法頌, Dependent Origination Dharani, 법신게法身偈라고도 한다.
Ye dhamma hetuppabhava 예 담마 헤뚭빠바와
Tesam hetum tathagato aha, 테삼 헤뚬 타따가토 아하
Tesam ca yo nirodho 테삼 짜 요 니로도
Evamvadi mahasamano. 에방와디 마하사나노.
All phenomena arise from causes;
Those causes have been taught by the Tathagata,
And their cessation too has been proclaimed by the Great Shramana.
諸法從緣生, 제법종연생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如來說是因; 여래설시인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彼法因緣盡, 피법인연진 그리고 그 소멸까지도
是大沙門說. 시대사문설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시네.
우빠띳사는 그 게송을 듣자마자 번민의 열기가 가시고 눈이 시원해진다. 눈앞이 열렸다. 열반의 강물에 몸을 적신 그는 기쁨에 넘쳐 소리쳤다. “대덕이여,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들의 스승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죽림정사에 계십니다.” 법의 환희로 넘친 우빠띠사는 곧장 죽림정사로 달려가려 했지만 도반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꼴리따에게 달려간다. “벗이여, 기뻐하게. 드디어 불사의 길을 찾았네.” 두 청년은 이 좋은 소식을 스승 산자야에게 알렸다. 그러나 자만심과 냉소주의에 물든 산자야는 뱀장어처럼 미끌미끌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 논리를 구사하면서 두 청년을 만류한다. 태양이 높이 떠올랐는데 아직도 잠꼬대를 하고 있으랴. 두 청년은 지체 없이 죽림정사로 달려갔다. 부처님은 설법을 멈추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열어주어라. 저기 훌륭한 나의 두 제자가 오고 있다.”
두 청년은 부처님께 예배하며 간청한다.
“저희는 우빠띳사와 꼴리따입니다. 세존이시여, 당신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오라, 비구들이여. 나의 가르침 안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아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하여라.”
‘Ehi bikkhu에히 빅쿠, 오라, 비구여.’ 한 마디 말씀에 곧 바로 두 청년의 머리카락이 훌러덩 벗겨져 삭발이 되고, 몸에는 가사가 척 걸쳐지며 손에는 발우가 들려진다. 이것을 ‘선래비구善來比’라 한다. 두 청년이 바로 부처님의 두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사리불)과 목갈라나(목련)존자이다.
불교학이 찬란히 발전했던 날란다 대학이 터만 남기고 적막한 침묵에 잠겨있다. 붉은 벽돌무더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노라니 반야중관학자와 유가유식학자의 논쟁하는 梵音범음과 외도사상을 격파하던 사자후가 허공중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당시에 날란다 대학을 위시한 5개의 유수한 불교대학이 있었는데 커리큘럼이 모두 같았다고 한다. 벵골 지역에 있었던 비크라마실라Vikramashila 대학의 학장이셨던 아티샤Atisha 존자가 이런 커리큘럼과 방대한 불교학자료를 구게Guge왕국으로 가져갔으니 티베트불교는 날란다 대학의 학풍을 이어받았다 할 수 있다. 티베트 불교 4대 종파 가운데 특히 겔룩Gelug파가 날란다 학풍을 계승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티샤 존자의 학풍을 중흥 발전시킨 쫑카파Tsongkhapa대사 덕분이다. 쫑가파 대사야 말로 인도불교와 티베트불교 나아가 대승불교를 통틀어 회통시킨 위대한 스승이시다. 보리수 그늘 아래 모여 앉아 기도문을 낭송하고 <도시의 경>을 합송하다. 곧 명상에 잠기다. 15:00에 날란다를 떠나 먼 길을 달리다. 파트나Patna를 지나다. 부처님 재세 시에는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라고 하였고 華氏城화씨성이라 한역되었던 고도이다. 목갈라뿟따 띳사 장로와 아쇼카 대왕의 주도로 열린 제3차 결집이 있었던 유서 깊은 불적이다. 이 도시에는 넓은 강을 건네주는 다리가 있는데, 다리가 길기로 인도에서 유명하다. 19:00 바이샬리 레지던시 호텔Vaishali Residency Hotel에 도착하다. 하루 종일 고통스러웠던 내 몸을 돌보려고 금성, 해성, 문인보살과 초당거사가 CST를 해준다.
2018년1월4일(목)맑음
05:00 모닝콜하다. 06:00 아침공양. 07:00 출발. 바이샬리 부처님 사리를 안치한 곳을 세 바퀴 돌면서 참배하다. 08:20 대림정사Mahavana에서 비구니 승가가 세워지게 된 연기를 이야기하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고향인 카삘라Kapila 성을 방문하신 뒤 부처님의 양모 마하빠짜빠띠Mahapajapati 고따미Gotami는 세 번이나 부처님께 출가를 간청하지만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꺄Sakya족 여인 500명은 카삘라성을 떠나 550km 떨어진 바이샬리 까지 걸어간다. 하루에 12km 정도 걷는다고 가정하면 얼마나 힘들고 오랜 여정이었을까? 보드라운 발바닥으로 모래와 자갈을 밟고 수풀과 가시덤불을 헤치고 걸어오느라 초라해진 행색의 사꺄족 여인들이 부처님께 출가를 받아줄 것을 간청했으나 님께서는 묵연하셨다. 흔쾌히 허락하실 만도 하건만 왜 답이 없으실까? 시자 아난다가 세 번이나 간청을 하였으나 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신다. 무슨 연유이실까? 아난다는 지혜를 굴려서 여성도 님께서 가르친 대로 수행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 사꺄족 여인들도 가르침대로 수행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 님이시여, 지금 밖에 사꺄족 여인들이 와 있습니다. 당신을 길러주고 키워주셨던 어머니도 와 계십니다. 저들을 어떻게 할까요? 님께서 여인의 출가를 흔연히 허락하지 못하는 말 못할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서있는 어머니와 사꺄족의 여인들을 차마 돌려보낼 수 없었으리라. 이와 같이 하여 여인의 출가가 이루어졌다. 출가한 여인을 비구니Bikkhuni라 한다. 당시도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결혼하지 아니한 여자가 보호자 없이 집을 나와 홀로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집 없는 여인은 카스트에서도 제외되어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여 강도와 강간범으로부터 언제든 위해를 당할 수 있다. 부처님은 처음에 그러한 문화를 감안하여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여자를 승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당시 브라만 중심, 남성중심의 사회제도를 완전히 부정하는 혁명적인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래서 비구니들은 비구 승가의 보호를 받기 위해 비구 승가가 거주하는 4km 내에 거주하면서, 보름마다 계를 잘 지켰다는 보고를 하라고 했다. 이런 연유로 해서 대림정사가 세워졌디. 자리를 옮겨 아난다 존자의 사리탑에서 빠알리 예경을 하고 <보배의 경>을 합송하다. 09:30 부처님 삭발터인 케사리아Kesaliya를 지나다. 이 강이 아노마Anoma강인가? 아노마 강을 건넌 싯다르타는 애마 칸타카를 타고 여기까지 와서 마부 찬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잘라서 던졌다. 버스 안에서 독경하고 명상에 잠기다.
이런 사유를 하다.
인도의 빈민대중과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들과 나 사이에는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여행자이며 방관자이고 그들에게 이방인이요, 영원한 타자인가? 그들과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도사리고 있는가, 아니면 안개에 싸여 보이지는 않지만 해가 떠올라 안개가 걷히면 같은 땅을 밟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지구별 이웃마을 사람이라는 걸 아는가, 느끼는가? 맞다, 그들은 나의 이웃이다. 같은 땅에서 동시대를 사는 인생의 동반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보다 못 산다. 그들은 우리보다 불편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가진 게 적고 누리는 게 열악하다. 이 세상 누군가가 우리보다 못 살고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불행한데 우리만 잘 사는 걸 당연하게 여길 수 있을까? 자신이 누리는 걸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타인의 불행과 불편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에게 수행과 불교를 논해서 무엇 하랴? 타인에 비하여 자신의 유복함을 고마워하고 자기보다 못한 타인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가질 때야만 이타적 동기를 일으킬 수 있다. 이타적 동기를 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대승을 말하지 말라. 대승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열린 가슴과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뜨거운 열의가 있는 불자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12:00 쿠시나가르Kushnagar에 도착하다. 준비해온 가사를 넓게 펼친다. 하얀 가사를 걸친 학생들은 양쪽으로 줄을 서서 가사를 펼쳐들고 열반당으로 향해 걸어간다. 걸음 걸음에 열반을 앞두신 부처님을 뵈러가듯, 꽃잎 떨어지듯 걸어간다. 세계의 눈이 닫히기 전 그 눈에 나의 모습을 비추어야 하기에 하늘 꽃이 내리듯 곧바로 가야한다. 살라나무Sal Tree에 흰 꽃이 피어 부처님의 몸 위로 떨어진다. 별들도 별꽃이 되어, 하늘의 눈물이 되어 떨어진다. 우리들 붉은 마음도 떨어진다. 부처님의 몸 위로 엎어지듯 떨어진다. 사자좌로 누우신 부처님 앞에 무릎 꿇고 모인 우리는 빠알리 예경을 드리고 <완전한 열반의 경>을 합송한다.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과 유언을 되새기다. 님은 가셔도 우리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여기 무지개 뜨는 해동에서 온 불자들은 당신의 유언을 잊지 않고 정진하겠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지로 향하면서 춘다의 마지막 공양을 받고 몸이 쇠약해져 누우면서 아난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아난다여, 내 나이 이제 여든 살, 나는 늙고 쇠하였구나.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 끈에 묶여 간신히 움직이는 것과 같이 나의 몸도 가죽 끈에 묶여 겨우 움직이고 있느니라.” 부처님은 당신의 삶의 끝까지 정진하셨다. 부처님께서 열반지 쿠시나가르에 다다라 살라나무 아래 몸을 누이자 아난다가 슬퍼하며 부처님이 그리울 때 어찌할까요 하니까:
“아난다여, 슬퍼하지 말라. 여래가 열반에 든 후에 신심 깊은 제자들은 다음 네 곳을 찾아보면서 여래를 생각하라.
탄생지를 찾아가 ‘이곳에서 여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생각하라.
성도한 곳을 찾아가 ‘이곳에서 여래께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셨다’라고 생각하라.
설법지를 찾아가 ‘이곳에서 여래께서 위없는 법의 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생각하라.
열반에 든 곳을 찾아가 ‘이곳에서 여래께서 온전한 입멸에 드셨다’라고 생각하라.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그대들에게 당부한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 마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 세간의 효자들도 부모의 유언을 받들거늘 불자들이 어찌 부처님의 유훈을 잊을 수 있으리오!
열반당을 세 번 돌고 자리를 옮겨 다비터를 향해 걸어가다. 다비터를 세 번 돌면서 석가모니불을 정근하고 七頂禮칠정례를 올리다. 이어서 축원을 하다.
룸비니를 향해 달리다가 중간에 점심공양을 하다. 식당에서 대구 관오사 성지순례 팀과 조우하다. 지우스님과 만나 인사 나누고 담소하다. 연꽃님과 지우스님은 구면이라 이야기가 이어지다. 14:00에 네팔국경을 향해 달리다. 17:45 소나울리Sonauli 출입국 관리소에 도착하다. 18:45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여 룸비니를 향해 어둠 속을 달리다. 19:50 룸비니 가든 호텔Lumbini Garden Hotel에 짐을 풀다. 저녁 공양할 무렵에 지우스님이 이끄는 순례단이 들이닥친다. 객지에서 만나면 고향 까마귀도 반갑다는 말이 있듯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아는 채를 한다. 세상은 넓고 사람이 많아도 업이 비슷하면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된다. 지우스님에게서 인도인 스님 아바야푸트라Abhayaputra(無畏子)를 소개받다. 지우스님이 태국에서 수행할 때 만난 인도스님인데, 신심과 학식을 갖춘 인도에서는 보기 드문 분이다. 특히 중부 인도의 나그푸르Nagpur에서 포교하고 있는데 한 때에 500명을 출가시키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려가 거주할 공간이 없어서 거개는 집으로 돌아가고 이제는 100여명 정도가 스님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인도에서 불교를 중흥하는 것이 스님의 원력이다. 이 과업을 위해서 법을 알아야하겠기에 법학을 공부하여 내년에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할 것이라 한다. 인도에서는 법을 모르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스님은 외도에게 독살 당할 뻔했는데 부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인도불교의 중흥이란 명제를 던져준 인도스님을 만난 것이 이번 순례에서 받은 선물이라면 선물이다. 밤늦게 먼 길을 달려온 까닭에 피곤이 온몸에 엄습해온다. 무거워짐 육신을 땅에 가라앉힌다. 싯다르타가 태어난 어머니 태중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
2018년1월5일(금)맑음
아침 5시 모닝콜. 6시 공양. 7시에 호텔 체크아웃하고 룸비니 동산을 향해 경행하다. 신도들 하얀 가사 걸치고 일렬로 서서 마야데비Mayadevi 사원을 향해 걸어가다. 걸음 걸음 신심과 열의의 꽃을 피우는 걸음으로, 연꽃을 피우는 걸음으로 걸어간다. 성지순례란 본시 걸으면서 보고 느끼는 것인데 현대인들은 비행기로 날아서 자동차를 타고 빠른 걸음 뛴 걸음으로 설렁설렁 다닌다. 우리가 그렇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은 신라의 구법승 혜초를 닮고자 한다. 그분은 온 몸으로 인도와 서역 전역을 다니셨다. 그분은 우리들이 따라 가야할 성지순례의 선구자이시다. 마야데비 사원에서는 원칙적으로 침묵을 지켜야하는데 경비원이 아침 이른 시간이라 우리에게 예경하는 것을 허용해준다. 예경을 드리고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과 <인간사자의 경>을 독송하다. 싯다르타가 태어나자마자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고 외치면서 일곱 걸음을 걸으니 땅에서 연꽃이 피어난다. 애기 싯다르타의 발자국이 화석처럼 찍혀있는 것이 보인다. 초기경전 디가 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D14)
마야데비 사원을 나서니 아홉 마리의 용왕이 바닷물을 머금었다가 갓 태어난 아기 부처에게 물을 토하면서 몸을 씻겨주었다는 九龍吐水구룡토수의 연못을 한 바퀴 돌다. 연못가에는 보리수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있고, 앞에는 아쇼카 석주가 당당히 서있다. 이곳이 바로 위대한 정등각자 고타마 붓다가 탄생하신 성지임을 만천하에 선언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증거하고 있다.
기원정사를 향해서 또 길을 나선다. 길 위에서 길을 가는 사람이 길을 만든다. 길은 원래 없었다. 길을 가는 사람이 길을 만드는 사람이다. 길을 가면서 길이 된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분의 길을 따라간다. 기원정사에 도착하니 14:45이다. 먼저 점심 공양을 하다. 기원정사에 들어가 경행로를 따라 걸어가니 부처님께서 머무시던 香室향실, 간다꾸티Ghandakuti에는 천안 광덕사에서 참배 온 불자들이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금강경을 설하셨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우리는 아난다 보리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기원정사. 제타바나Jetavana-anathapindasyarama여! 님께서는 이 도량을 사랑하여 45안거 가운데 19안거나 머무셨다. 당시 코살라Kosala 나라의 수도였던 사위성은 풍요롭고 인심이 좋았다. 게다가 수닷타 장자와 위사카Visakha 부인의 정성과 외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일행은 하얀색 가사를 걸치고 줄을 맞춰 아난다 보리수 아래에 자리 잡고 앉아 빠알리 예경을 올리고 <한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을 독경하다.
어느 날 부처님의 시자인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고 정중히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곳 기원정사에 계시지 않을 때에 많은 어린 제자들과 신도들이 부처님을 뵙고 싶고,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싶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고 이웃나라에 가셔서 교화하고 계실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아난다 존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부처님께서는 신통제일인 목갈라나 존자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 “목갈라나여, 내가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를 가져와 여기 기원정사에 심어라.” 목갈라나 존자는 부처님의 분부대로 보드가야 보리수를 옮겨 심고서 정성껏 보살폈다. 그런 후, 보리수가 무성히 자란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보리수나무 밑에 대중들을 모이게 하고서 삼매에 드신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나무를 ‘아난다 보리수’라고 해라. 이는 대중들의 뜻을 헤아린 아난다 존자의 간청에 의해 심어진 보리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 기원정사에 없을 때, 나를 보고 싶거든 이 보리수를 보고, 나에게 예배드리고 싶거든 이 보리수에 예배하고, 내 설법을 듣고 싶거든 이 보리수 주위에 와서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아난다 보리수에 얽힌 인연을 이야기 하면서 부처님과 성스러운 승가를 그리워하다. 기원정사와 조금 떨어진 앙굴리말라 탑을 찾는다. 붉은 벽돌로 쌓아지어진 탑은 허물어져 거의 흔적만 간신히 알뿐이다. 탑 정상에서 <앙굴리말라의 경>을 독송하고 앙굴리말라 존자의 정진과 인욕을 기억한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후 21년(세수 56세)에 사위성의 거리는 공포로 휩싸인다. 밝은 대낮에 사람을 죽여 그 손가락을 줄에 꿰어 목에 걸고 다니는 연쇄살인마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명문가의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받는 청년이었던 아힘사카Ahimsaka였다. 그런 청년이 어찌하여 살인마로 전락했는가? 아힘사카는 스승을 잘못 택했다. 그래서 청정한 수행자가 살인마의 길로 빗나가게 되었다. 그는 전생부터 수행했던 사람이었던지 종교심이 발동하여 한 스승 밑으로 들어갔다. 수행의 길로 들어가는 것, 출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도에 입문하느냐, 어떤 스승을 모시느냐가 이렇게 중요하다. 아힘사카는 어떻게 해서 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가? 그가 모신 스승의 아내가 잘생긴 꽃미남이었던 아힘사카를 꼬셨다. 아힘사카는 제자 된 도리를 지켜 그녀의 유혹을 물리친다. 자기의 미모를 무기삼아 도전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고, 욕망이 좌절된 데 따른 수치심과 원한심이 불타올랐다. 스승은 자기 아내가 모함하는 소리를 듣고 이참에 벌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이 스승이란 작자는 평소부터 제자의 멋진 풍채와 고귀한 가문, 방정한 언행에 질투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잘 걸렸다는 식으로 아힘사카에게 미친 짓을 시킨다. 길에서 만난 사람 백 명을 죽여 그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하고 다니면 범천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악마의 꼬임수이다. 제 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들은 자기 귀를 맑은 물에 씻겠지마는, 범천세계에 태어난다는 말에 정신이 홀린 아힘사카는 메피스토펠레스(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의 말을 따른다. 아힘사카의 신앙 행태는 맹신이다. 무엇을 믿더라도 잘못 믿으면 패가망신한다. 알고 믿어야 한다. 모르고 믿는 것을 눈 먼 신앙, 맹신盲信이라 한다. 모든 사이비교주와 엉터리 스승들이 사람들을 갖고 노는 것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맹신 때문이다. 아힘사카여, 어디로 가는가? 승천昇天한다는 종교적 열정에 미치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이런 사람에게는 도덕이나 윤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오직 하늘나라에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저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도덕이니 윤리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초규범적인 행위가 오히려 장려되기도 한다. 믿음이 강한자여, 세상의 규범을 초월하고 상식을 무시하라고 외친다. 아힘사카는 벌써 98명의 사람을 죽여 사위성에 악명을 떨쳤다. 이제 두 사람만 더 죽이면 된다. 이렇게 죽은 사람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하고 다녔으므로 아힘사카는 ‘앙굴리말라(Angulimala, 손가락 목걸이를 한 사람)’라는 악명을 얻어 지명수배 되었다. 살인자에게도 어머니는 있는 법.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흉측한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아 나섰다. 사람을 죽일만한 귀기鬼氣에 휩싸인 놈도 제 어미의 눈에는 사랑스런 아들로 보인다. 미친 듯이 설치는 아들에 다가가서 “내 새끼야, 애미가 왔다.” 라고 하면서 안아주면 제 정신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그러나 미친놈의 눈엔 어미도 백 명이란 숫자를 채우기 위해 죽여야 할 한 사람에 불과했다. 가만히 두면 백주 노상에서 아들이 어미를 죽이는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사위성의 사람들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본다.
이에 해결사이신 부처님께서 등장하신다. 길 한 쪽에는 앙굴리말라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그 반대편에는 그의 어미가 그를 향해 걸어간다. 부처님께서는 그 중간쯤에 서서 앙굴리말라에게 등을 보인 채 여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신다. 알굴리말라가 표적으로 삼은 여인 앞에 갑자기 머리 깍은 중놈이 끼어들어 여자 쪽으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 마침 잘 됐다, 한꺼번에 두 사람을 죽이면 스승이 시킨 일을 완수하는 게 아닌가?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잡으려고 뛰어가는데 빨리 달릴수록 부처님과의 거리는 더 멀어진다. 뭔 조화인가?
“게 섰거라, 겁쟁이 사문아.” 부처님은 풀잎에 스치는 봄바람처럼 천천히 걸으면 말씀하신다.
“나는 이미 멈추었는데 그대는 멈추지 못하는구나.”
“나는 해치려는 마음을 모두 멈추었는데, 너는 아직 해치려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있구나.
나는 자비심에 머물러 중생을 사랑하는데, 너는 악업을 멈추지 못하고 있구나.
나는 번뇌망상을 멈추고 진리에 머무는데, 너는 그릇된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멈춤과 멈추지 못함, 쉼과 쉬지 못함이라는 양자모순(딜레마)되는 주제로 깊은 임팩트(충격, impact)를 주는 법문을 하신다. 마치 예리한 송곳으로 눈을 푹 찌르는 것 같다. 이에 번개를 맞은 듯, 술이 깬 듯, 정신이 돌아온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귀의하게 된다.
“세존이시여, 저를 제자로 받아주소서.”
보라,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부처님의 천의무봉한 지혜의 검을!
앙굴리말라의 악심을 죽임(殺人劍)으로써 본심을 살려내신(活人劒) 솜씨를 선종(禪宗)에서는 살활자재(殺活自在)라 한다.
“오라, 비구여.” 얼마나 간명직절한가? 본심을 회복한 사람은 불문곡직, 거두절미하고 곧 바로 받아주시는 부처님. 그와 같다. 부처님의 품은 바다와 같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탁류가 없고, 허공과 같아 싫어하여 거부할만한 홍진(紅塵)이 없다. 살인범을 잡으라는 수배령을 내려 범인색출에 나섰던 코살라 국왕 파세나디가 기원정사에 들러 부처님을 친견하려든 차에 앙굴리말라가 머리를 깍고 승복을 걸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감화시켜 진인(眞人, 참사람, Sappurissa, 즉 열반을 얻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놓은 것을 보고는 불법의 신묘함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조복시킬 수 없는 사람을 조복시키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성숙시키나니, 참으로 기이하고 놀랍습니다. 부디 오래 사시어 저희 백성들을 자비로 보살피소서.”
그러나 인연과보는 엄연하다. 앙굴리말라가 비록 깨달음을 얻었지만 살인한 죄의 과보는 피할 수 없다. “아힘사카야, 참아내야 한다. 너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아주 오래 갈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두고 지은 대로 받아야 한다. 내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교리를 배우고, 수행을 조금 했다는 것으로 배짱을 부리면서 ‘부처님께서 나를 잘 봐주시어 이런 것쯤은 그냥 눈 감아 주시겠지. 이 정도 잘못이나 과오는 그냥 잘 봐주시겠지.’ 이런 오만을 부릴 수는 없다. 불자라면 ‘무엇이든 진리대로 이루어지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과보를 기꺼이 받겠다는 자세로 겸허해지자. 과보를 피하려 하지 말라. 티베트 불자들처럼 기도하자.
“제가 죽은 게 좋다면 죽음을 주시어 저를 축복해주소서.
제가 사는 게 좋다면 삶을 주시어 저를 축복해주소서.
무엇이 다가오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에 앙굴리말라는 무릎을 꿇고 맑는 목소리로 노래한다.
“지금 제가 흘리는 피는
지난날의 업장을 녹이는 것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리.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리.”
우리도 앙굴리말라처럼 기도해야 한다.
지금 제가 흘리는 땀은
지난날의 업장을 녹이는 것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리.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리.
지금 제가 흘리는 피는
지난날의 업장을 녹이는 것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리.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리.
지금 제가 겪는 병고는
지난날의 업장을 녹이는 것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리.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리.
지금 제가 겪는 우환과 고통은
지난날의 업장을 녹이는 것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리.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리.
지금 제가 당면한 수행의 장애는
지난날의 업장을 녹이는 것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리.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리.
앙굴리말라는 기도한다.
“저는 이제 스스로를 항복받았습니다.
수많은 고통에서 감정을 다스리며
주는 대로 먹고 만족하며 살겠습니다.
수많은 고통을 참아내는 동안에
제가 지은 악업도 다할 것입니다.
다시는 죽음의 길에 들어서지 않고
구태여 살기를 바라지도 않나니
이제는 그저 때를 기다리며
기쁨을 누릴지언정 번민하지 않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칭찬하신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앙굴리말라 탑 옆에는 수자타 장자의 집터가 있다. 아울러 근처에는 외도들의 도전에 부처님께서 일천 분의 분신을 나투었던 천불화현지와 데바닷다가 지옥에 떨어진 연못이 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머물며 더러 기적을 보이셨는데 경전에서는 이런 기적을 ‘신변(神變)’이라 한다. 그 가운데 사위성에서 보이신 천불화현 이야기가 유명하다. 당시는 브라만 전통이 쇠퇴하고 많은 자유사상가들이 나타나 새로운 교파를 형성하던 때였다. 당연히 새로운 교파들 간에 일종의 경쟁이 있었는데, 고타마 붓다의 선풍적인 인기를 시기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이교도들은 부처님을 방해할 음모를 꾸민다. 사명외도라 일컫는 아지위카Ajivika들은 찐짜마나Ciñcāmānavikā라는 미모의 여인을 시켜 불교신자로 가장케 하고 날이 저물면 기원정사에 들어갔다가 새벽녘에는 나오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자주 보이게 한다. 그리고는 그녀의 배가 조금씩 불러가는 것처럼 꾸민다. 어느 날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대중에게 설법하고 계실 때 대중 한가운데서 만삭의 찐짜마나가 일어나 외친다.
“부처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돌보시면서 어찌 자기 자식은 돌보지 않으시는지요?”
대중은 찐짜마나의 배를 가리키며 웅성거리고 있을 때 외도들의 사악한 음모를 처음부터 알고 있던 인드라(제석천왕)가 생쥐로 변해 그녀의 옷 속으로 들어가 바가지를 갉으니 바가지가 쏙 빠지면서 배가 홀쭉해진다. 거짓이 너무도 쉽게 들통 난 찐짜마나는 부리나케 정사를 빠져나와 도망쳤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 무지한 민중은 신통력이 뛰어난 성자를 최고로 치는 경향이 있다. 부처님의 교화가 넓어질수록 외도의 도전이 거세지자 신심 돈독한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께 신통력을 보여주실 것을 청한다. 부처님은 날짜를 정한 뒤 그날 망고나무 숲에서 기적을 보이겠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날 많은 외도의 성자들이 모여 신통력 대결을 벌인다. 부처님은 먼저 망고 하나를 잡수신 다음 그 씨를 땅에 심었다. 씨는 순식간에 싹을 틔우면서 자라 올라 꽃이 피고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다. 그리고는 망고 열매가 모두 일천 분의 부처님 모습으로 변한다. 이렇게 일 천 분의 부처님이 나타나셨다고 하여 千佛化現천불화현이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칭송하고 있을 때 님은 홀연 모습을 감추시고 하늘로 올라가신다. 님은 도리천에 태어난 어머님께 설법하기 위해 올라가신 것이다. 거기서 우안거를 보내신 뒤 상까시아Sankassa로 세 갈래의 사다리(계단)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오셨다. 이것을 三階寶導삼계보도라 한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과 이교도들이 부처님의 위신력과 부사의함을 찬탄하여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었으며 본래 자이나교도였던 파세나디 왕도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아쇼카 왕이 천불화현을 기념하여 세운 탑은 불적지 가운데 제일 컸다고 하는데 지금은 허물어져 동산 같이 보일 뿐이다. 둘러볼 것은 많으니 일정이 급박하여 다름 행선지로 줄달음친다.
럭나우Luknow를 향해 달리다. 럭나우는 대도시이다. 캄캄한 천지를 달리다가 네온사인이 행렬지어 나타나니 별천지를 만난 기분이다. 피카딜리 호텔Piccadily Hotel에 유하다. 감기 후유증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다. 보정보살이 침을 놓아준다. 문정과 현정, 문인이 도우미를 하다.
2018년1월6일(토)맑음
공식적인 성지순례는 어제로써 끝난 셈이다. 오늘부터 인도를 떠나는 시간까지 인도의 대표적인 건축물과 기념지를 둘러본다. 아그라Agra로 달리다. 아그라 도착. 제이피 팰리스 호텔Jaypee palace Hotel에 여장을 풀고 점심 공양하다. 타즈마할Taj Mahal을 구경하다. 샤자한Sha Jahan의 미친 사랑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말은 공허하여 무의미한 말이다. 자애와 연민, 수희와 평정이라는 사무량심이 있어야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아그라 포트Agra Fort(城砦성채)를 둘러보다. 샤자한이 유폐되어 말년을 보냈던 ‘황제의 감옥’를 본다. 화려하게 장식된 방은 감옥이다. 중생들이 있는 것 없는 것 동산과 부동산을 모두 모아 제 사는 저택과 정원, 가족과 인맥을 형성한다. 말하자면 저마다의 왕국을 꾸민다. 그게 바로 감옥인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그 짓을 한다. 그게 자아중심의 세계구축인데 그것이 욕계의 설계자, 아키텍트Architect이다. 제이피 팰리스 호텔로 돌아오다. 저녁 공양하다. 내 방에 모두 모여 성지순례를 마친 소감을 서로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갖다.
2018년1월7일(일)맑음
학생들과 헤어지다. 학생들을 태운 버스에서 내려 마지막 인사를 나누다. 만남과 헤어짐을 연습하는 것이 세상일이다. 얼마나 만나고 헤어져야 만남과 헤어짐에 흔들리지 않은 평정과 부동심을 얻을 것인가? ‘오는 것 없다, 가는 것 없다 희론을 멸한 적정 설하셨다.’고 용수 존자가 일찍이 설파하셨다. 시티 파크 호텔에 체크인하다. 몸을 죽 뻗고 눕는다. 사람이 세상 가운데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가? 델리 빈민촌의 사람들이나, 노숙자들은 몸을 누일 한 뼘의 땅이 없어 불행한가? 그렇지 않다. 여행자들의 눈에만 불행으로 인식될 뿐, 그들은 천하를 침대로 삼고 하늘을 이불로 삼고 살지도 모른다. 저 노숙자들 가운데 출세간의 도를 닦는 성자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침대에 몸을 누인 나는 우주비행을 하는 파이어니어 같은 기분으로 무중력을 경험한다. 지구는 우주공간을 날아가는 하나의 비행체이다. 침대는 그 비행체에 내장된 하나의 부속물이니 나야말로 공간을 비행하고 있는 것이다. 제 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누구나 우주를 날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이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스님의 인도에서 올린 글을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현지에서 알아치리지 못했던 부분들은 다시 한번 깨우쳐 주셨습니다. 참회와 정진의 불로써만 업이 정화된다는 플레게톤의 불의강...참회하고 그 참회의 힘으로 정진하고 다시또 참회하여야 겠습니다. 갠지즈강의 보리심의 맹약으로 세세생생 보디만달라에서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성지에서 예경할때마다 부처님께서 숨 쉬었던 그 숨을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했습니다.
대승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열린 가슴과 낮은 곳으로의 내려가려는 뜨거운 열의가 있는 불자에게만 가능한 것이라는 스님의 말씀 새기겠습니다. 사무량심으로 사랑합니다~_((()))_
매순간 깨어있기로 맹세했건만
아직도 이곳이 더 꿈 같습니다
그만큼 그리워하던 부처님 나라가 강렬히 제 가슴에 꽂혀버렸나봐요
집중에 집중을 더해주시고
감동에 감동을 불러 일으켜주신 스승님의 사랑에 머리 숙입니다
자애와 연민 수희와 평정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받는 장애는 내가 지은 악업이 소멸되는 것. 무엇이 오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용기가 생깁니다. 순리에 따르며 살겠습니다.()()()
만남과헤어짐을연습하는것이 세상의 일~~
별리의고통에가슴아파했던 순간들 이제 부처님의 숨결로 그 고통 여의니 "오는거없다 가는거없다 다르지 않고 같지않다 희론을멸한적정설하셨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