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철나무도 계절이 있다. 항상 푸른빛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철없이 눈물만 흘렀던 시절을 넘어 이제 잘게 부서지는 햇빛을 본다. 슬픔에다 기쁨을 반반씩 섞어 놓는다. 먹구름 속에 길을 가다가 소낙비 피해 큰 바위 아래 머물렀던 그때의 시간은 길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기억조차 없다. 사철나무 아래서 꽃그늘을 보았다. 반쯤은 희고 그 나머지는 눈물이 섞은 꽃그늘이었다. 봄이 오면 새들을 기다린다. 고요한 새소리에도 사철나무는 떨림이 있다. 아궁이에 솔가지를 빽빽하게 집어넣는 어머니는 화색이 돈다. 고래 타는 냄새가 밤을 새우고 나면 온돌방 구석구석마다 따뜻한 온기로 가득하다. 따뜻한 온기로 늘 채웠던 철나무가 생각난다. 여름에 베어 잠을 재웠다가 겨울에 따뜻한 땔감이 된다. 우리나라 숲은 계절이 분명하다. 철새들이 오고 가면 겨울을 맞이한다. 사철나무는 철새, 텃새, 산새, 들새 모두 반갑게 맞이한다. 마삭줄은 사철 덩굴식물이다. 5월에 흰색 팔랑개비 모양으로 꽃이 핀다. 돌담 위에서 자란다. 돌과 돌 사이에 잘 이어지도록 덩굴을 뻗어간다. 늘 푸른 마삭줄도 한 장의 편지를 쓰고 싶은 모양이다. 단풍잎 빨갛게 물들여 가을 편지로 쓴다. 산 위에선 바위 위에 있다. 가을 잎 줄줄이 엮어 가을 길을 열어간다. 숲속 사철나무 위에서도 시가 있다. 나무에 기대어 하늘로 올라간다. 담쟁이 잎도 사철나무 위에 있다. 원고지 위에 시를 쓰고 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다. 매일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산새들의 집은 사철나무다. 늘 푸른빛을 하고 있으면서 그 공간은 넓다. 새들의 노랫소리를 더욱 울창하게 만든다. 산벚꽃 그늘 아래서도 그리움이 적힌 편지가 벌써 11월 마삭줄 앞에 서있다. 골목마다 꽃향기가 가득했다. 5월에 핀 꽃향기는 첫사랑이다. 꽃이 전해오는 이야기는 그때 순간이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이것이 지금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다. 5월의 꽃은 지고 11월의 햇살은 붉게 타는 노을로 꽃이 되게 한다. 지는 게 좋다. 봄날의 꽃그늘, 11월의 산그늘을 보면서 채워도 허전함이다. 생생하게 살아있기에 눈물을 본다. 계절이 지났다 해서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오히려 더 그리워하고 사랑스럽다. 날이 추워질수록 숲속은 공간이 열린다. 나뭇잎 한 잎은 나약하지만 마지막 사랑은 충만하다. 마삭줄 사랑을 영글어간다. 외롭고 쓸쓸한 마음 숨기고 살기 때문에 충만한 사랑이 보인다. 사철나무는 반은 외롭고 쓸쓸하다. 그 나머지는 기쁨이다. 그러나 차마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 못한다. 외줄타기 마삭줄은 내 안에서만 영원한 꽃이 되었다고 한다. 11월의 하늘은 시간의 간격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그리움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