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중 제4사단은 일본에서 “가장 형편없는 오합지졸”이라는 오명으로 유명하였다. 원래 제4사단은 일본 육군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된 사단 가운데 하나로, 1871년 10월에 창설된 오사카진대에서 시작하였다. 1888년 메이지 정부는 프로이센식 군제 개혁을 실시하면서 각 진대를 사단편제로 개편하였다. 오사카진대 또한 4개 연대(제8연대, 제9연대, 제10연대, 제20연대)로 구성된 제4사단으로 편성되었다.
제4사단은 서남전쟁을 비롯한 메이지 시절 국내 반란 진압에서는 크게 활약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연전연패를 당하고 패주를 거듭하여 “또 졌는가, 제8연대”라고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이후 군 수뇌부는 제4사단을 극도로 불신하여 오사카에 놔둔 채 단 한번도 전투에 출동시킨 적이 없었다.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교대근무원칙에 따라 관동군에 배속되어 만주로 이동했으나 이후에도 주로 후방 경비와 타 부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을 뿐 중요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노몬한 전투에서는 전멸의 위기에 처한 제6군을 지원하기 위해 제2사단과 함께 출동했으나 일부러 미적거리며 노몬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출동을 지연시켰다. 덕분에 제2사단은 많은 손실을 입은 반면 제4사단은 단 한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았다.
제4사단이 주력으로 참전한 유일한 전투가 장사 전투였다. 초반에는 중국군의 후퇴로 순조롭게 진격하여 장사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그 직후 중국군의 반격을 받자 순식간에 와해되어 패주하였다. 전투명령만 받으면 갑자기 없던 병이 생겨 환자가 급증하고 싸우는 족족 연패하다보니 전선에서 완전히 따돌림당하는 부대가 되어 대본영은 마지못해 직속 관할부대로 배속시켰다. 전쟁 후반 중국이 매우 피폐해지면서 통상 일본군과 싸우려면 5배, 특히 큐슈출신 부대는 10배의 병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나 오사카 사단만은 예외라고 말할 정도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핀 공략작전에 투입되었으나 특별히 활약한 전투 없이 본토로 도로 소환되었다가 1943년 9월 버마 방콕으로 이동하여 현지 치안과 수비 임무를 맡다 종전을 맞이하였다. 항복이 치욕이라며 할복 자결하던 여타 부대들과 달리 제4사단은 즉각 연합군에게 투항하였고 본국으로 귀국한 후 미군을 상대로 자판을 펼쳐 장사를 하였다. 제4사단 장병들의 평소 인사말은 “御身大切(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였다. 맹목적인 복종과 희생을 강요하던 일본 육군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제4사단은 자유분방하고 이색적인 부대였다.
이에 대해 일본의 베스트셀러 역사작가인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오사카는 오래전부터 유명한 상업도시였고 오사카 사람들 역시 주로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천황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식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전투에는 약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일본이 결국 패망했다는 점에서 차라리 일본의 군대가 모두 그들과 같았다면 그런 무모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무력 대신 대화와 타협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오사카 사람들이 모인 제4사단. “이길 싸움도 지게 만드는 부대”, “멍청이 사단”이라고 비웃음 당했지만 군 수뇌부의 무모한 명령에 절대 복종하다 무수한 병사들이 개죽음 당하던 상황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똑똑한 부대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적어도 오사카 사단의 사람들은 무모하게 죽지는 않았군요;;
현재 일본 자위대 4사단 8연대도 오사카에 주둔중이죠.
오사카 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