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제출합니다 :)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문체반정과 이옥
Ⅲ. <봉성문여>를 통해 본 조선시대 생활상
ⅰ. 사당패
ⅱ. 무속
Ⅳ. 나오며 - <봉성문여>의 가치
Ⅴ. 참고문헌
Ⅰ. 들어가며
<봉성문여(鳳城文餘)>는 18, 19세기 조선시대 성균관 상재생 이옥이 정조로부터 문체 때문에 견책을 받고 영남의 삼가(三嘉)지방 (일명 鳳城)에서 약 4개월 간 귀양살이를 하며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글이다. 1799년 (정조 23년) 삼가지방으로 충군되어 간 후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보고 들은 내용을 적어두었다가 이듬해 5월 하순 화석정사(花石精舍)에서 정리하여 쓴 것이다. 본래 이 책은 제목 없이 <봉성에서 쓴다(鳳城筆))>이란 언급만 남아 있었던 단순 필사형태의 초고였으며, <봉성문여>라는 제목은 이옥의 지인이던 담정(潭庭) 김려(金鑢)에 의해서 책으로 편찬될 때에 붙여진 것이다. 김려는 문여로 제목을 단 것에 대해서 사(詞)를 시여(詩餘)라고 하듯이 비록 문(文)의 정체(正體)는 아닐지라도 문의 여(餘)는 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발문에서 밝혔다. 즉, 김려는 이옥의 글의 가치를 충분히 인지하여 글을 엮어 편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봉성문여>는 경기도 남양을 터전으로 삼고 있던 조선 말엽의 선비가 영남의 풍속과 백성들의 생활상을 견문한 느낌을 생생히 그려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역사, 유적, 토속, 민속놀이, 무속, 필기, 야담 등에 관한 내용이 총 64항목으로 나누어져 구성되어있다. 이렇게 다양한 내용을 담아낸 그의 문체의 가장 큰 특징은 ‘평이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일들을 담백하고 평이하게 기술하고 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한 문체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근대의 수필문학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내용적은 특징으로는 하층 민중들의 삶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그는 유리걸식하는 이들에게 흥미를 가지며 자세히 묘사하였는데 사대부적, 선민의식을 가지거나 그들을 동정하는 것이 아닌, 정감 어린 표현이 매우 인상 깊다.
내가 조선시대 생활상을 드러내는 여러 책 중 <봉성문여>를 선택한 이유 역시 이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잘 찾아 볼 수 없는 하층민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담겨있다는 점이 우선 흥미로웠고, 특히 사대부 선비 입장에서 지방 하층민의 삶을 어떻게 묘사했을지도 궁금했다. 기록자와 관찰자 간의 신분의 차이, 출신지역의 차이가 어떻게 담겨 있을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옥이 문체 문제로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 기록된 글이라는 점은 그의 문체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봉성문여>를 읽어 보았다.
Ⅱ. 문체반정과 이옥
문체반정(文體反正)은 1788년 (정조 12년) 서학에 대한 문제가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이를 능동적으로 헤쳐 나가기 위해 정조에 의해 마련된 일련의 문체 정책으로, 당시 유행하던 신문체(新文體)인 패관소품체(稗官小品體)를 과거 시험지나 상소문에 사용한 신하들을 처벌하거나 파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조는 성왕정치(聖王政治)의 이념을 잘 보여주는 원시유학과 군신간의 분의(分義)를 강조한 주자학을 바른 학문으로 내세우고자 하였으며 이에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문집, 신문체의 유행에 대해 매우 우려를 보였다. 명말청초의 문체는 정서가 과도하게 표출되고 수식이 번잡하며 장난기가 농후한 표현이 적지 않아 진지한 글쓰기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에서였다. 1788년 정조와 신하들이 나눈 대화를 보면, “근래 문체가 날로 더욱 박잡(駁雜)해지고 또 소설(小說)을 탐간(貪看)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서학에 빠져드는 까닭이다.”라고 언급을 하고 있다. 즉, 정조는 문체를 서학의 문제의 원인으로 여기고 이를 탄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옥은 1791년 10월 19일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그의 나이 33세에 시험답안에 소품체를 썼다는 이유로 정조로부터 불경스럽고 괴이한 문체를 고치라는 명을 받고 정거(停擧)조치를 당했다. 1795년에는 성균관 상재생으로 있다가 같은 이유로 충군(充軍) 조치를 당했고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만 더 먼 것으로 충군을 당했다. 이어 1799년에는 삼가현의 군적에 소환되어 그는 그곳 점사(店舍)에 방을 얻어 살면서 그곳의 풍물, 인물, 방언 등에 대한 기록, <봉성문여>를 남겼다.
Ⅲ. <봉성문여>를 통해 본 조선시대 생활상
위에 언급했듯이 봉성문여는 역사, 유적에 관한 내용에서부터 야담, 방언, 은어에 관한 내용까지 전통문화와 일반 민중, 하층민의 삶을 두루 다루고 있다. 이번 독후감에서는 이 중 사당패와 무속에 대한 기록을 중점적으로 보며 조선 말기의 민중 생활이 어떠했는가 알아보고자 한다.
ⅰ. 사당패
<봉성문여>의 항목 중 사당패 이야기1,2 에는 사당패에 대한 기술이 자세히 드러난다. 사당패는 남사당(男社堂) 혹은 거사(居士)라고 부르는 남자들과 여사당(女社堂)이라 불리는 여자들 10여명으로 구성되어 전국을 유랑하면서 매찰매기(賣唱賣技)하는 집단으로서, 본래 불사를 위해 모인 집단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계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정착지를 잃고 비승비속의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점차 그 규모를 키워나간다. 나아가 19세기에 이르러 지속적인 억불정책과 가뭄, 흉년 등으로 사찰이 더 어려워지자 한 사찰에 지속적으로 머물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전국을 유랑하는 집단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민가를 유랑하던 이들은 대중의 오락적 요구에 부응하여 세속의 잡가를 부르거나 매춘을 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영위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봉성문여> 사당패 이야기1은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는 무당과 비슷하지만 무당은 아니고, 광대와 비슷하지만 광대도 아니고, 거지와 비슷하지만 거지도 아닌 자가 있다. 떼 지어 다니면서 음란한 짓을 하고, 손에 부채 하나 들고 마당놀이를 하다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러주고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해결한다. 사투리로 이들을 사당패라 한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를 통해 사당패의 공연 종목은 노래와 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연구들에 따르면 사당패들이 불렀던 노래는 주로 염불소리, 잡가, 민요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당패 구성인원에 대한 내용은 다른 기록들과 마찬가지로 <봉성문여>에서도 우두머리 남자인 거사와 ‘남자를 녹이는 재주를 가진 여자’인 사당이 등장한다.
이옥은 이들이 구경꾼들에게 입술을 갖다 대고 손을 잡아 끌어서 돈을 찾아낸다고 하며, 생업 가운데 가장 추잡하며 인간의 도리를 잃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나는 일찍이 이들을 매우 미워했다”고 하며 사당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었다.
ⅱ. 무속
다음으로, <봉성문여>에 실린 무사(무당의 굿)와 무가지와(와전된 무가)에서 무속과 무가관계 자료를 통해 19세기 이전 경상남도 내륙지역의 굿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먼저 무사에는 18세기 말의 경상남도 무속의례에 대한 일반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굿의 시기와 제물, 무당의 복식과 무구, 굿의 진행방식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집집마다 모두 귀신을 숭상하는 굿을 하며, 이때에 떡, 술, 과일, 생선, 고기 들을 매우 성대하게 차린다. 무당은 붉은 저고리에 푸른띠를 매며 왼손에는 방울더미, 오른 손에는 종이깃발을 쥐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이를 통해 당시 영남지방에서는 귀신을 숭상하는 풍속이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집마다 모두 귀신에게 굿을 한다는 것을 보아, 굿의 유형은 각기 집안의 가신에게 가족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안택굿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조그마한 질병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무당에게 살려달라고 청한다는 부분을 통해 질병이 생겼을 때 행해지는 ‘병굿’이 존재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또 무당의 활동과 소득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상 앞에 꿇어앉으면, 풍성하게 차리지 못한 죄를 꾸짖고 종이칼을 목에 씌우고 포와 돈을 바친 연후에라야 풀어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무당은 굿을 통해 제주집에게 제수를 풍성하게 장만치 못한 것을 꾸중하고 베나 돈을 받아내었음을 보여준다. 또, 제주를 포함한 관객들에게 귀신의 명령이라고 술잔을 돌렸는데 마신 관객들은 술잔을 돌려줄 때는 반드시 돈을 줘야했다. 이를 통해 볼 때, 무속은 종교적 의식이기는 하지만 엄숙하게 이루어지는 의례는 아니었다. “노래가 빨라지면서 성을 내다가 웃기도 하며 팔짝팔짝 뛰다가 주위를 한 바퀴 빙 돌기도 한다”라는 언급에서 보듯이, 당시의 무속은 축제적, 놀이적 성격이 부각되었다.
이옥은 이에 대해 “대개 허탄하고 괴이한 것 치고 결말나는 것이라고는 더욱 없는 법이다”, “광대처럼 간간히 우스개소리도 하지만 죄다 추잡하다”라고 언급했다. 즉 무속에 대한 이옥의 생각은 부정적이기는 하나 무속의례의 절차를 자세히 기록한 걸로 보아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진행된다고 인식한 듯하다. 마지막에는 “영남의 무당은 모두 이와 달라 방술(方術)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즉, 삼가지방의 무속의례는 서울이나 이옥이 있던 경기지방의 무속의례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Ⅳ. 나오며 - <봉성문여>의 가치
우선, <봉성문여>는 문체반정으로 귀양살이를 간 유생 이옥이 쓴 글이라는 점에서 이를 통해 당시 정조가 탄압하고자 했던 패사소품체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옥의 글은 흔히 우리가 접했던 조선 사대부들의 글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글은 엄숙하지도, 학술적이거나 경세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문체를 추구했던 그이기에 평범한 것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묘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그는 평민, 하층민과 관련된 것들, 어찌 보면 자질구레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미시적인 시선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예를 들어, 지극히 평범한 갑남을녀를 다루는 항목들이 많은데, “-이라는 자가 있었다.”라고 시작하면서 그 인물이 했던 특별할 것 없는 말, 행동들을 설명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글을 읽는 것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학창시절부터 교과서에서 쉬이 접했던 왕조 위주의 역사, 정치 사상사 중심의 역사가 아닌, 평범한 민중의 생활사라서 전혀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마치 내가 조선시대 삼가현에 있으면서 마을에 떠도는 소문을 엿듣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즉, <봉성문여>는 당시 경북지방의 평민생활과 문화, 풍속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귀중한 기록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패사소품체, 즉 현대의 글쓰기와 접점이 많은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더 쉬이 읽힐 수 있는 대중성을 갖추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옥 봉성에서를 읽고.hwp
Ⅳ. 참고문헌
이경진, 조선시대 불교계 연희집단과 유랑연희패의 관계 양상
이옥, 정용수 역, 『봉성에서』, 국학자료원, 2001
윤동환, 「경상도 내륙무속의 실체와 특징」, 『한국무속학, Vol.22 No.-』, 한국무속학회, 2011
장예준, 「특집논문 : 문체반정(文體反正)과 이옥」, 『시민인문학, Vol.25 No.-』, 경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3
장휘주, 「사당패의 집단성격과 공연내용에 대한 史的 考察」, 『한국음악연구, Vol.35 No.-』, 한국음악연구,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봉성문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936, 2018/5/8 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