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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제1판 서문(1781년)
임마누엘 칸트/ 김희정 역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대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이성 자체의 본성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성이 거부할 수가 없으며, 또한 그것이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였기 때문에 해답을 얻을 수도 없는 문제들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해야 할 운명인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이러한 곤경에 빠지는 것은 이성의 책임이 아니다. 이성은 원칙에서 출발하는데, 이 원칙들은 경험의 과정에서 꼭 사용되어야 하며 동시에 그 사용이 경험에 의해 충분히 증명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이성----이것은 이성의 본성으로 보아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은 점점 더 높이,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조건으로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결코 끝날 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은 자기의 임무가 이러한 방식으로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성은 모든 가능한 경험적 사용을 초월하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과도 일치하는 듯이 보이는 원칙들에게로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성은 혼미와 모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물론 이성은 가까운 어디인가에 오류가 반드시 숨어 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는 있으나 이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 이성은 모든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여 있으며, 이성이 사용하는 원칙은 경험에 의한 비판을 이미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끝없는 논쟁의 싸움터가 곧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형이상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졌던 시대가 있었다. 만일 의지를 그대로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면, 형이상학은 그가 의지하는 대상이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존칭을 마땅히 받을 만 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형이상학에 대하여 온갖 경멸을 나타내는 것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추방되고 버림받은 이 노부老婦, 즉, 형이상학은 마치 헤쿠바(트로이의 왕 프리암의 왕비)처럼 탄식하는 것이다. “나는 조금 전까지 많은 사위들과 자식들에게 둘러싸여 모든 사람들 중에서 최고의 권력자이며 지배자였으나..... 이제 나는 조국에서 추방되어 어찌할 도리가 없이 끌려가고 있다.”
처음의 형이상학 통치는 ‘독단론자’의 지배하에 있어서 ‘전제적’이었다. 그러나 그입법이 아직도 옛날의 야만적인 흔적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내란에 의하여 점차로 완전한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어 한곳에 정착하여 개간하기를 싫어하는 일종의 유목민적 회의론자들이 시민의 단결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회의론자의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이들은 독단론자들이 서로 일치된 계획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나 언제나 새로이 형이상학을 개척하려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근세에 이르러 한때는 (저 유명한 로크의) 인간 오성에 관한 일종의 ‘심리학’에 의하여 이러한 모든 분쟁이 종결되고 형이상학적 요구의 합법성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듯이 보였다. 이리하여 이 자칭 여왕(형이상학)의 혈통이 통상적인 경험이라는 천민에서 유래되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여왕이라는 신분은 당연히 의심스러운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천민에서 유래되었다는 이 ‘계보’가 사실과는 틀린 것이며 잘못 날조되어 형이상학에 뒤집어 씌운 것이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여전히 여왕임을 주장하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것은 또다시 진부하고 쓸모 없는 독단론으로부터 학문을 구출해 내려고 했던 그 경멸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오늘날 온갖 방법들이 시도되었으나 허사로 돌아갔으며, 따라서 학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권태와 무관심이다. 이 무관심이 곧 혼돈과 암흑의 모체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학문이 잘못된 노력으로 말미암아 암흑과 혼란과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면 무관심은 오히려 학문이 머지 않아 개조되고 개명될 근원이 되며, 적어도 그 서막이 될 것이다.
사실, 인간의 본성상 ‘무관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억지로 ‘무관심’을 가장하려고 해도 그것은 ‘무익한’ 일이다. 스스로 형이상학에는 무관심하다고 일컫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어느 정도 학술적 용어를 통설적인 어조로 바꾸어서 자기의 정체를 감추려고 하더라도, 여하튼 그들이 무엇인가를 사유하고 있는 한 그들이 통렬히 경멸했던 그 형이상학적 견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관심은 모든 학문의 전성기 한 가운데서 생겨났으며 또한 이러한 학문들과 만나게 된, 따라서 만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지식 중 절대로 단념해서는 안 될 이러한 학문적인 지식에 대한 무관심은 주의와 숙고할 가치가 있는 현상인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무관심은 경박한 생각에서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이미 그릇된 지식에 의해서는 속일 수 없는 현대의 성숙한 판단력의 결과이며1), 또한 이성의 온갖 임무 중 가장 어려운 일, 즉, 자기 인식이라는 과업을 이성이 새로이 맡아서 이성의 정당한 요구에 대하여는 이성을 옹호하고 이와 반대로 근거가 없는 부당한 요구에 대하여서는 이를 강압적인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의 영구불변한 법칙에 따라서 거절할 수 없는 하나의 법정을 설치하도록 이성에 대하여 요구하는 것이다. 이 법정이 바로 다름아닌 ‘순수이성비판’인 것이다.
한편 내가 여기서 말하는 비판이란, 책이나 체계의 비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일체의 경험과는 상관없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인식에 관한 이성 능력의 일반을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또한 이 비판은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결정하고 형이상학의 원천과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지만, 그것은 모두 원리에 의하여 행하여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지금까지 남겨져 있었던 비판이라는 유일한 길을 택하여 이성의 경험을 떠나서 사용된 경우에 이성을 자가당착에 빠지게 하였던 일체의 오류가 이 길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나는 이 경우, 인간 이성의 무력을 구실로 하여 이성의 문제들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성의 문제들을 원리에 따라서 충분히 분류하고 또한 이성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점을 밝힌 다음에 이러한 문제들을 이성이 충분히 만족하도록 해결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문제의 해답은 독단적이고 망상적인 호기심이 기대하는 대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이러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은 마력에 의존하는데, 그 기술은 내가 풀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기술에 의하여 만족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이성이 본래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철학의 의무는 오해에서 비롯된 환상을 제거하는 일이다. 설사 이때에 극히 찬미되고 애호되던 망상이 무너진다 하여도 나의 뜻과는 상관 없는 것이다. 이 일을 함에 있어서 나는 면밀성을 나의 주요한 목표로 하였다. 한편 나는 형이상학의 과제로서 이 비판에서 해결되지 않은 것, 또는 적어도 그 해결에의 열쇠가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감히 단언한다. 사실 순수이성은 하나의 완전한 통일체를 이루는 것으로서, 만일 이성의 원리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 주어진 모든 문제 중에서 단 한 가지라도 그것을 해결하기에 미흡한 경우에는 이러한 원리는 가차없이 버려도 좋을 것이다. 그처럼 불충분한 경우에는 원리가 다른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실성을 들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의 거만하고 불손한 언급에 대하여 경멸섞인 불쾌한 표정이 독자들의 얼굴에 떠오를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예컨대 ‘영혼’의 단순성이나 ‘세계의 개시’의 필연성을 증명한다고 자칭하는 가장 통설적인 저술가의 주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온건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저술가는 가능한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인식을 확장하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이 나의 능력에서 완전히 지나쳐 있음을 겸허하게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나는 전적으로 이성 그 자체와 이성의 순수한 사유만을 문제 삼는다. 따라서 이성에 대한 면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나는 나의 주위를 멀리 떠나서 찾을 필요가 없다. 나는 이러한 지식을 나 자신의 내부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성의 단순한 작용들이 완전하고도 체계적으로 열거되는 범례를 이미 일반논리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내 경우에 있어서는 경험의 모든 소재와 보조가 제거된다면 이성을 가지고도 대체 어느 정도의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점만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개개의 목적을 달성하는 완전성과 모든 목적을 달성하는 면밀성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그치겠다. 이 양자는 임의의 의도로 우리들에게 과하여진 것이 아니며, 실로 우리의 비판적 연구의 소재로서의 인식 자체의 본성인 것이다.
또한 확실성과 명료성이라는 두 개의 특성이 우리의 비판적 연구의 형식으로 있는데, 이것은 이처럼 힘에 벅찬 연구를 하려는 저자에게 당연히 주어질 본질적 요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나는 확실성에 대해서는, 이런 종류의 고찰에 있어서 결코 억측을 해서는 안 되며, 또한 거기에 조금이라도 가정假定과 비슷한 것은 아무리 염가라 하더라도 팔 수는 없으며, 그것이 발견되기만 하면 곧 몰수되어야 하는 금기품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선천적으로 확실한 인식은 모두 자기가 무조건 필연적이라고 인정하여 줄 것을 스스로 선언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또한 모든 절대필연적(철학적) 확실성의 기준이며, 범례이어야 하는 바, 일체의 선천적 순수인식의 규정에 대해서는 더 한층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스스로 맡은 소임에 대한 완수의 여부는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다만 저자로서 할 일은 증거를 제시하는 일 뿐이며, 이 증거가 재판관인 독자 측에 미칠 결과에 대해서는 판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하튼 그러한 결과를 약화시킬 원인이 될 만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다소라도 의혹을 가져올 우려가 있는 곳을 저자 스스로가 지적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곳은 모두가 본질적인 목적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점에 대하여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의혹을 품게 되어 그 때문에 주목적에 관한 독자의 판단에 미칠지도 모를 악영향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들이 오성悟性이라고 부르는 능력의 탐구와, 또한 오성사용의 규칙과 한계를 규정하는 데에는, 내가 ‘선험적 분석론’의 제2장 [순수오성개념]의 연역에서 행했던 연구만큼 중요한 연구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연구는 사실 나에게 말할 수 없이 많은 노고를 치르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노고가 무익한 것으로 끝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한편 이 고찰은 깊은 근거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순수오성의 대상에 관한 것으로서 선천적인 순수오성 개념의 객관적 타당성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며, 따라서 내가 본질적 목적으로 삼는 면이다. 또 다른 하나는 순수오성 자체를 그것의 가능 여부와 순수오성의 기초에 존재하는 인식능력을 고찰하는 측면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찰은 나의 주목적에 대하여 주요한 문제는 아니다. 주문제는 오성이나 이성이 모든 경험을 떠나서 무엇을 얼마나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 사고 능력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후자는 어떤 주어진 결과에 대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가설과 비슷한 것을 지니고 있으므로----다른 기회에 언급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얼른 보기에 이 경우 나는 내 나름대로의 사견을 세우고, 따라서 또한 독자도 다른 의견을 자유롭게 세울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나는 독자에게 미리 다음과 같은 주의를 해두어야겠다. 그것은 나의 주관적 연역이 내가 기대하였던 만큼의 전면적인 확신을 독자에게 주지 못한 경우라 하더라도 여기서 내가 특히 문제로 삼고 있는 객관적 연역은 역시 그 전면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범주의 선험적 연역으로의 이행’에서 언급될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명료성’에 대하여 독자들은 우선 개념에 의한 추론적(논리적) 명료성을, 그 다음에는 또한 직관에 의한, 즉 예증이나 그밖의 구체적 설명에 의한 직각적(直覺的: 감성적) 명료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첫째 명료성에 대하여 나는 충분히 배려하였다. 그것은 나의 의도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으나 이 때문에 둘째의 요구, 즉 그다지 엄밀한 것은 아니나 정단한 요구에 대하여 만족을 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 일을 진행시켜 나가면서 끊임없이 이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예증이나 구체적 설명이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실제로 처음의 초고草稿에서는 적당한 곳에서 그것을 삽입하였다. 그러나 나의 과제의 중대성과 내가 다루어야 할 대상이 너무 많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무미건조하고 엄밀한 학구적 논술만으로도 이미 너무 방대한 저서가 될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통속적인 목적에서 필요한 정도의 예증이나 설명을 가지고 이 저서를 더 한층 방대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이 비판서는 결코 통속적인 사용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또한 본래 학문에 밝은 사람들은 이러한 예증이나 주석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런 도움이 언제든지 호감을 주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 목적에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없지 않다. 사실 수도원장 테라송은 “만일 서적의 양이 부피에 의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의하여 가늠된다고 하면, 대개의 서적의 경우 그처럼 짧지 않으면 (이해하는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만일 광범하다 하더라도 하나의 원리에 의하여 통합시킨 사변적 인식의 전체적 체계는 이해하기 쉽다는 점을 유의한다면 이와 동일한 타당성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개의 서적들이 만일 그렇게까지 명료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명료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명료성을 도우려는 방법은 사실 부분적으로는 이해를 돕지만 흔히 전체를 산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재빨리 전체를 개관하는 것을 방해하며 그것의 여러 가지 밝은 색채가 오히려 체계의 맥락이나 구조야말로 체계의 통일과 탁월성을 판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만일 독자가 여기에 제시된 계획에 따라서 하나의 커다란, 그리고 중요한 사업을 충분하고 연속적으로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예견을 갖게 된다면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저자와 협력하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우리들이 여기서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형이상학은, 모든 학문 중에서 완성을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적은 노력으로 일치한 협력에 의하여 이러한 완성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며, 또한 그것이 완성된 다음에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남겨진 일이란 다만 교수법敎授法에 있어서 모든 것을 각자의 의도에 따라서 정리하는 일 뿐이며, 이 때문에 그 내용이 조금도 증가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형이상학은 순수이성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체계적으로 주어진 정리된 재산목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이 재산목록에 수록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있을 수 없다. 그 까닭은 이성이 자기 자신 속에서 산출하는 것은 그 공통적인 원리가 발견되기만 하면 감추어질 수가 없으며, 저절로 이성에 의하여 밝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전적으로 순수한 개념에 의한 것으로서 어떠한 경험도 또 일정한 경험을 가능케 하여 주는 특수한 직관까지도 이 인식을 확장하거나 증대시키는 등의 영향을 미칠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인식의 완전한 통일이야말로 형이상학의 절대적인 완전성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필연적인 것이 되도록 해준다. “너 홀로 살아 보아라, 그러면 재산목록이 얼마만큼 간단해도 좋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페르시우스(로마 시인)는 말하고 있다.
순수 (사변적) 이성의 이러한 체계를 나는 ‘자연의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으려고 한다. 그것은 이 ‘비판’에 비하면 그 분량은 거의 절반도 되지 않으나 훨씬 풍부한 내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비판’은 무엇보다도 먼저 형이상학의 가능성의 원천과 조건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잡초가 무성한 토지를 깨끗이 하고 평탄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비판’에 있어서 나는 독자에게 ‘재판’의 인내와 공평을 바라지만 ‘자연의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협력자’의 호의와 조력을 바라고 싶다. 왜냐하면 체계를 위한 온갖 원리는 ‘비판’에 있어서 충분히 언급되어 있으나 체계 그 자체를 면밀하게 하기 위해서는 파생적인 개념도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판’에 있어서는 여러 개의 개념들의 총합이 빠짐없이 다루어지고 있고, 이 ‘자연의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다시 분석에 대해서도 동일한 완전성이 요구되고 있으나 이것은 모두 쉬운 일로서 작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락이라 할 수 있다.
또 나는 인쇄에 대해서 몇 가지 주의하여 두고자 한다. 인쇄가 다소 늦게 시작되어 나는 교정판의 약 절반밖에 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 속에는 약간의 오식誤植이 있으나 의미를 혼란시킬 만한 오식은 ‘선험적 변증론’의 ‘회의적’을 ‘특수적’으로 고치는 외에는 없다. 그리고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에서 정립과 반정립이 서로 쉽게 비교될 수 있도록 ‘정립’에 속하는 것은 모두 왼쪽에, 그리고 ‘반정립’에 속하는 것은 바른쪽에 차례로 표의 형식으로 배치하였다.
1) 오늘날의 사고방식은 천박하고, 근본적인 학문이 쇠퇴하고 있다는 탄성을 우리들은 종종 듣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근거가 확립된 학문, 예컨대 수학이나 자연학 등에 대하여는 이러한 비난은 조금도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러한 학문들은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예부터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학의 경우에 종래의 명성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 정도이다. 다른 인식에 있어서도 각자의 원리의 수정에 계속 유의하기만 한다면 그와 같은 ‘근본적’ 정신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정이 행하여 지지 않는 한 무관심과 회의와, 결국에는 엄정한 비판이 오히려 하나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현대는 바로 비판의 시대이며 모든 것이 비판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교는 그 신성에 의하여, 그리고 입법은 그 존엄에 의하여 비판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종교이든 입법이든 자기 자신에 대한 의혹을 당연히 초래할 것이며, 또한 이성이 그의 공명정대한 비판을 견디어 낸 것에만 허용하는 진정한 존경을 요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제2판 서문(1787년)
인식은 이성의 기능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 인식의 연구가 하나의 학문으로서 확실한 길을 걷고 있느냐의 여부는 그 성과를 보면 곧 알 수 있다. 만일 이 연구가 많은 준비를 마친 다음,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할 즈음에 좌절되거나 또는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되돌아 서서 다른 길을 취해야 하거나, 만일 여러 동료 학자들로 하여금 공동의 의도를 어떻게 추구하느냐 하는 방법의 일치를 보게 할 수 없을 경우엔, 이러한 연구는 하나의 학문으로서 확고한 길을 걷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우며, 다만 단순한 모색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확실한 길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성에 대한 하나의 공헌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설사 그 때문에 숙고함이 없이 세워진 목적 속에 이전부터 포함된 많은 것들이 비록 필요없는 것으로 폐기된다 하더라도 공헌은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논리학이 이러한 확실한 길을 고대로부터 걸어오고 있다는 것은, 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한 걸음도 후퇴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명백한 것이다. 물론 약간의 불필요한 번잡성을 제거하거나, 다루어 오던 문제를 보다 명석하게 규정하는 일은 있었으나, 이것은 논리학을 확실히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세련되게 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논리학의 개량이라고는 보지 않는 것이다. 또한 논리학에 대하여 주목할 것은, 그것이 오늘날까지 한 걸음의 전진도 없었으며, 따라서 겉으로는 완결되고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근세인들 중에는 여러 가지 인식능력(구상력이나 기지)에 대한 심리학적인 본문을 삽입하거나 인식의 근원이나 대상에 따라서 나타는 확실성의 여러 가지 종류(관념론, 회의론 등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삽입하거나, 또는 편견(그 원인과 대책)에 대한 인간학적인 장을 넣음으로써 논리학을 확장하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으나, 이러한 시도는 그들이 논리학의 특수한 성질을 잘 몰랐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인 것이다. 여러 가지 학문의 한계를 서로 혼입시킨다는 것은 여러 학문의 증대가 아니라 기형화된 모습이다. 이와는 달리 논리학의 한계는 그것에 모든 사유----그것이 선천적이든 경험적이든, 어떠한 근원 또는 객체를 가지든, 또한 우리들의 심성 속에서 제기되는 장애가 우연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간에----의 형식적 규칙만을 상세히 서술하거나 엄밀히 증명하는 것만으로 철저히 한정되어 있다.
논리학이 이처럼 훌륭히 성공하게 된 이로운 점은 학문이 온전히 그 영역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한에 의하여 논리학은 인식의 모든 대상과 그 구별을 도외시 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 오히려 의무로 주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논리학에 있어서 오성은 그 자신과 그 자신의 형식 이외에는 아무 것도 다룰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성은 단지 이성 자체 뿐만 아니라 그 대상도 다루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학문으로서의 확실한 길을 걷기란 매우 곤란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또한 예비학으로서 다만 여러 학문의 시작이 되는 것이며 지식이 문제될 경우에는 물론 논리학은 지식의 평가를 위하여 전제되기는 하지만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본래 객관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학문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에서 얻어야 한다.
그런데 이 학문 중에는 이성이 작용하고 있어야 하는 만큼 그것들에 무엇인가 선험적인 인식이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이성의 인식은 두 가지 방법 중의 그 어느 것에 의해서든 관계를 맺는다. 즉 대상과 개념----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져야 한다---을 다만 ‘한정할’ 뿐이거나 또는 대상을 더욱 ‘현실화’하거나 한다. 전자는 이성이 가지는 것이다. 이들 두 인식에 있어서 그 다소를 불문하고 포함되어 있는 ‘순수한’ 부분, 즉 이성이 선천적으로 객체를 규정하는 부분이 우선 연구되어야 하며 다른 기원에서 유래된 것과 그것을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들이 수입을 맹목적으로 낭비하여 가계가 궁지에 빠졌을 경우에 수입의 어떤 부분이 지출을 지탱하며, 또 어떤 부분을 억제하여야 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면 그것을 불량한 가계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학’과 ‘물리학’은 모두 이성의 이론적 인식으로서 이 양자는 그들의 ‘대상’을 선천적으로 규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전자는 전적으로 순수하며 후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순수한 것으로서, 이처럼 부분적으로 순수할 경우에는 이성의 인식 근원과는 다른 인식 근원에 따라서 규정되는 것이다.
수학은 인간의 이성의 역사가 소급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옛날부터 그리스인이라는 놀라운 민족 사이에서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확실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논리학에 있어서의 이성은 그 자신을 문제삼음으로써 학문의 왕도를 찾게 되어서 이러한 길을 걸어나가는 것이 쉬웠으나 수학에 있어서는 그것이 논리학의 경우처럼 쉽게 성취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수학에는----주로 이집트인들 사이에서는----오히려 오랜 모색의 시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학문으로 급전한 이 ‘혁명’은 어떤 사람의 시도에 의한 훌륭한 착상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다. 그 후로 우리들이 걸어온 길은 틀림없었으며, 학문으로서의 확실한 길이 항상 무한히 열려 있었다. 저 유명한 ‘희망봉’을 도는 항로를 발견한 것보다도 훨씬 중대한 이 사고법의 혁명과 이 혁명을 성취한 행운의 인물의 역사는 우리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우리에게 전해 준 전설은, 이 새로운 학문의 길을 발견한 제1보에 의해서 생긴 변혁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수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었으며, 따라서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이등변삼각형’을 최초로 증명한 사람----그가 탈레스이든, 또는 다른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든----에게 한 줄기 빛이 번쩍인 것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자기가 이 도형에서 본 것이나 혹은 도형의 개념을 탐구하여 이들로부터 도형의 성질을 배우려 하지 않고, 그 스스로가 개념에 따라서 선천적으로 도형 속에 포함시켜 생각하고, 또 나타낸 구성 작용에 의해서 도형의 성질을 산출해야 하며, 무엇을 선천적으로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자기 개념에 일치하도록 사물 속에 투입한 것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된 것 이외에 어떤 것도 그 사물에 첨가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내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학문의 대도大道에 오르기까지 수학보다는 걸음이 느렸다. 총명한 베룰람의 베이컨의 제창이 한편에서는 이 발견의 길을 터놓기도 하고, 다른 면에서는 그것이 이미 발견의 도상에 있었으므로 이것을 촉진시키게 된 것은 불과 약1세기 반 이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연과학상의 발견’도 ‘수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급속히 일어난 사고방식의 혁명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자연과학을 다만 경험적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한에서만 고찰하고자 한다.
갈릴레이가 일정한 무게를 가진 공을 경사면에 굴렸을 때나, 토리첼리가 자신이 미리 짐작한 수은주의 무게와 같은 무게를 공기로 하여금 지탱하게 하였을 때나, 또는 그보다 훨씬 뒤에 슈탈이 금속이나 석회로부터 어떤 것을 제거 또는 첨가함으로써 금속을 석회로 변화시키고, 다시 석회를 금속으로 변화시켰을 때 모든 자연 연구자에게 한 줄기 빛이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이성이 통찰하는 것은 이성 스스로의 계획에 따라서 산출되는 것일 뿐이며, 이성이 무엇보다도 영구불멸의 법칙에 따르는 이성판단의 원리에 의해서 자연이 자기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러나 그가 오직 자연에만 이끌려선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앞서 계획에 따르지 않는 우연적인 고찰들이 이성이 추구하고 필요로 하는 필연적 법칙에 총괄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다만 그것에 일치하는 현상들만이 법칙으로 간주되는 이성의 원리를 한 손에 가지고, 또 이성이 이 원리에 따라서 생각해낸 실험을 다른 손에 가지고 자연을 대해야만 한다. 그것은 물론 자연에게서 배우기 때문이지만, 교사가 바라는 대로 무엇이든지 들어야 하는 학생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제시하는 질문에 대하여 증인으로 하여금 대답하도록 강요하는 재판관의 자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리학도 그 사고방식의 혁신을 통하여 많은 이득을 보게 되었다. 한편 물리학의 경우도 다음과 같은 참신한 착상에 의하여 사고방식의 혁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이성이 자연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성 자체만으로 자연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이성 자신이 자연 속에 투입한 것에 의하여 자연 속에 없는 것을 날조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찾는다는 것을 깨달은 덕택이다. 몇 세기를 통하여 갈팡질팡하다가 자연과학은 이와 같은 사고방식의 혁신에 의해서 비로소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확실한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한편 ‘형이상학’을 보면 이것은 전적으로 경험적 지식을 무시하고 다만 개념에 의해서----수학처럼 개념을 직관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성립되는 완전히 고립된 사변적 이성인식이며, 따라서 이 학문에 있어서는 이성이 그 자신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다른 모든 학문보다도 역사가 길며, 또한 다른 학문들이 모든 것을 절멸해 버리는 야만주의의 나락에 빠져 들어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남겨져 있을 법한 그러한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운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확실한 길을 잡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에 있어서 이성은 보통의 경험이 확증할 수 있는 법칙을----그 자신이 일컫고 있는 것처럼----선천적으로 통찰하려고 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장애에 부딪치게 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에 있어서 우리들은 몇 번이고 수없이 뒤들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은 그 길이 우리들이 목적하고 있는 곳으로 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형이상학을 신봉하고 있는 학도들이 일치된 주장을 보면 그것은 아직까지 그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은 본래 투사가 그 힘을 연마하는 장소로 설치된 하나의 투기장으로서 이곳에서는 어떠한 투사도 아직 한 뼘의 땅을 정복할 수 없고, 한때의 승리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이를 오래 지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방법은 지금까지 암중모색에 불과하며, 더욱이 최악의 경우에는 단순한 개념들 사이의 암중모색이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도대체 형이상학에 있어서 지금까지 학문으로서의 확실한 길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또 이러한 길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도대체 자연은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길을 탐구하려고 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우리의 이성의 가장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서 맡긴 것일까? 그 뿐만이 아니라, 만일 우리의 이성이 우리의 지식욕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점에 임하여 우리를 못 본 체할 뿐만 아니라 감언으로써 우리를 낚아 두었다가 최후에 우리를 배신한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이성에 대해서 신뢰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지고 말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길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우리들이 새로 나아가야 할 길을 탐구함에 즈음하여 과거의 사람들보다 행운을 바라고자 한다면 어떤 지시에 따라야 할 것인가?
수학과 자연과학은 갑자기 성취된 혁명에 의하여 오늘날과 같은 학문으로 이루어졌으나 이들 학문에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준 사고방식에 대한 변화의 본질적인 점을 고려하기 위해, 또는 형이상학이 수학, 또는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이성적 인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 두 학문과 형이상학과의 비교가 허용된다면, 형이상학에 있어서도 최소한 그 시도로서 이들 두 학문의 범례를 따르면 어떨까 하는 나의 생각이 당연할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인식이 모두 대상에 따라서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대상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선천적으로 개념에 의해서 규정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인식을 확대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전제 밑에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따라서 이번에는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서 규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면 형이상학의 여러 가지 과제가 보다 잘 해결되리라는 것을 한번 시도해 보기로 하자. 형이상학에서는 선천적인 인식, 즉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대상에 무엇인가 결정하는 인식의 가능성이 요구되고 있으며, 또한 이미 말한 상정은 그것만으로도 벌써 이러한 요구와 보다 잘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주요한 사상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온 천체가 관찰자의 둘레를 회전한다고 하게 되면 천체운동의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으므로, 이와는 반대로 천체를 정지시키고 관찰자로 하여금 그 둘레를 회전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다음 그렇게 시도해 본 것이다.
한편 형이상학에 있어서도 우리가 대상을 직관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방법으로 시도해 볼 수가 있다. 만일 직관이 대상의 성질에 따라서 규정되어야만 한다면 나는 이 성질에 대하여 어떻게 선천적으로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감관의 대상으로서) 대상이 우리들의 직관능력의 성질에 따라야 한다면 우리는 선천적으로 이 가능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직관이 인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러한 직관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으며, 표상으로서의 이들 직관을 대상으로 하여 어떤 것에 관계지우고, 또 이 대상을 표상에 의하여 규정지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대상의 규정에 대해 두 가지 방법만을 상정할 수 있다. 즉, 첫째는 내가 대상을 규정하는데 사용한 ‘개념’들이 대상에 따른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대상, 또는 대상이 그것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경험’이 이들 개념들에 따른다고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나는 또다시 어떻게 선천적으로 그 대상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는 방법에 대하여 똑같은 곤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후자의 경우에 있어선 경험 그 자체가 오성을 필요로 하는 일종의 인식방법이 되는 한편, 이 오성의 규칙은 나에게 아직 대상이 주어지기 이전, 내 속에 선천적으로 전제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으로서 경험의 모든 대상이 필연적으로 그러한 오성 개념에 따라서 규정되고, 이들 개념과 일치하여야 하는 선천적인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대상 중에는 이성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으나----적어도 이성이 그것을 생각하는 대로는----경험에 온전하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이러한 대상에 대하여 이것을 고찰하려고 하는 시도는 우리들이 사유방식의 변화라고 생각하였던 것, 즉 우리가 사물에 대하여 선천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사물 속에 투입한 것 뿐이라는 가정에 대한 좋은 기초를 앞으로 제공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바라던 대로 성공을 이루었으며, 형이상학에 대하여 ‘선험적 분석론’에서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확실한 길을 약속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형이상학은 선천적 개념을 논하고 있으나 이들 개념에 대응하는 대상은 경험에 있어서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고방법의 이러한 변혁에 따라서 선천적인 인식의 가능함을 실로 잘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경험하는 대상의 총괄로서의 자연적인 바탕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법칙들을 충분히 증명할 수가 있기 때문이며, 이들은 모두 과거의 방법론으로는 전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한편 형이상학의 제1부에서는 우리의 선천적인 인식능력의 이러한 ‘연역’으로부터 형이상학의 목적으로 보아 매우 불리한듯 하면서도 기이한 결론이 나올 것이며, 따라서 형이상학의 목적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선험적 변증론’의 요지인 것이다. 즉, 불리한 결론이란 우리가 그러한 선천적인 인식능력에 의해서는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결론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바로 형이상학의 본질적인 관심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선천적인 이성 인식은 현상에만 관계하는 것이며, 사물자체事物自體는 사실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한 우리들에게는 인식되지 않는 것으로서 이를 도외시 한다는 결론이, 즉 제1부에 있어서 우리의 선천적인 이성인식에 주어진 평가였다.
그리고 이런 결론의 진실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실험이 바로 제2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들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경험의 한계 및 모든 현상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강요하는 것은 ‘무제약자無制約者’이며 이성은 모든 피제약자에 대립시켜 이러한 무제약자를 사물자체 속에서 구하고 이것에 의해서 여러 제약의 계열을 완결한 것으로 요구함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경험적 인식이 사물자체로서의 대상에 따라서 규정되는 것으로 상정하는 한 무제약자는 ‘모순 없이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사물이 우리들에게 주어지기 전에 우리는 그러한 사물을 표상하고, 또 이 표상이 사물자체로서의 사물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대상이 현상으로서 우리의 방식에 따르는 것으로 상정한다면 이런 ‘모순은 해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제약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물에서는 찾아낼 수 없으나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범위의, 즉 사물자체로서의 사물에서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들이 처음에 그저 단순한 시도로서 상정한 것이 근거를 갖게 되는 셈이다.
반면 사변적 이성은 이러한 초감성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으나 그래도 우리들에게 남겨진 일이 있다. 그것은 이성의 실천적인 인식 중에서 무제약자라는 저 초험적 이성개념을 한정하여, 오직 실천적인 의도에서만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초월할 여건이 발견되는지의 여부를 실험해 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조치가 행해 지는 경우 사변적 이성은 그것을 공허한 대로 남길 수밖에 없다고는 할망정, 항상 이러한 확대를 위하여 우리들에게 여지를 마련하여 주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이곳을 이성의 실천적 자료에 의해서 충당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하도록 우리는 이성에 의하여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종래의 방법을 변혁시키려는 의도, 더욱이 그것을 기하학자나 자연과학자의 범례에 따라서 형이상학의 전면적인 혁신을 꾀함으로써 그러한 변혁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이 이 사변적 순수이성비판의 목적인 것이다. 이 순수이성비판은 방법론으로서의 그러한 학문의 체계는 아니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변적 순수이성은 그러한 학문의 외적 한계와 그 내적 구조 전체를 고려하면서 그 학문의 윤곽을 그리고자 한다. 사변적 순수이성의 특성은 첫째로 사유의 대상을 선택하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능력을 철저하게 검토하며, 또한 둘째, 자기 자신에게 과제를 제시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빠짐없이 열거하고, 이렇게 하여 형이상학의 한 체계에 대한 전체 구도를 그릴 수가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를 보면, 선천적 인식에 있어서는 사유하는 주관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끌어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이를 객관에 부여할 수가 없기 때문이고, 두 번째를 보면 사변적 순수이성은 인식 원리에 대하여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통일체이기 때문이다. 즉, 이 통일체에 있어서 각각의 구성요소는 유기체에 있어서와 같이 다른 일체의 구성요소를 위하여 존재한다. 또한 어떠한 원리도 하나의 관련 속에 확실히 들기 위해서는 동시에 순수한 이성사용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관련에 있어서 고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대신 사유일반의 형식을 연구하는 ‘논리학’을 제외하고 형이상학은 대상을 연구하는 다른 어떠한 이성의 학문도 얻을 수 없는 행운, 즉, 형이상학이 이 비판에 의해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확실한 길을 잡게 되면 자기에게 속하는 인식의 전영역을 충분히 파악하여 그의 업무를 완수하고 후세를 위해서 결코 그 이상 증가할 필요가 없는 자본으로서 이를 사용하는 행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다만 원리와 원리 사용의 제한에 관한 연구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제한은 이 원리 자체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은 기초학으로서 이처럼 완전을 기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한, 아무 것도 완결되었다고 볼 수 없다.”
한편 비판에 의해서 순화되고 또 그것에 의해서 하나의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된 그러한 형이상학에는 어떠한 가치가 있으며, 또한 그것에 의해서 어떠한 재물을 후세에 남기려고 하느냐고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이 저서를 잘못 읽은 사람은 사변적 이성으로는 경험의 한계를 결코 넘어서지 않으려는 것이 이 저서의 효용으로, 그것은 전적으로 소극적인 효용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실제로 형이상학의 가장 중요한 효용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효용은 사변적 이성이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할 때에 사용하는 원칙들이 실제로 그가 속해 있는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확장하며’ 그리하여 순수(실천) 이성의 사용을 배제하려고까지 노리는 것이므로 이들을 자세히 고찰해 보면 사실은 우리의 이성사용의 확장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라는 필연적인 결과를 낳게 됨을 알게 됐을 때, 곧 적극적 ‘효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판은 사변적 이성에 제한을 가하는 점에서 보면 과연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제한하거나 또는 이 실천적 사용을 부정하려고 노리는 장애를 제거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적극적’이고 따라서 매우 주요한 효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순수이성의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실천적(도덕적) 사용이 있음을 확신함과 동시에 이 사용에 의하여 순수이성은 필연적으로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자기를 확장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를 위하여 순수이성은 사변적 이성으로부터의 아무런 도움도 구하지 않지만,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변적 이성의 저항에 대하여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비판의 이러한 임무에 적극적인 효용이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마치 경찰의 주요 임무가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이 맡은 직무에 평안하게 종사할 수 있도록 폭력 활동을 막는 데 있다고 하며 경찰은 ‘적극적’인 효용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비판이 분석론 부분에서 증명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공간과 시간은 다만 감성적 직관의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현상으로서의 사물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조건에 불과하다는 것과, 또한 우리의 오성개념에 대응하는 직관이 주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떠한 오성개념도 가질 수 없고 그에 따라 사물을 인식하는 데 필요한 요소를 하나도 가지지 않은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물자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감성적 직관의 대상으로서의 사물, 다시 말하면 현상으로서의 사물 뿐인 것이다. 이처럼 이 증명에서 보면 이성의 가능한 사변적 인식이 경험의 대상에 제한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이것은 충분히 주의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들은 동일한 대상을 설사 사물자체로서 ‘인식’할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이것을 사물자체로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일단 보류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현상이 존재한다고 하는 불합리한 명제가 거기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비판은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사물자체로서 사물과의 구별을 세웠으나 이러한 필연적 구별이 전혀 일어지지 않은 경우를 상정하여 보자. 그렇게 되면 인간성의 법칙과 또한 인간성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는 자연의 기계성은 작용 원인으로서의 일체의 사물일반에 그대로 통용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동일한 실재자, 예컨대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인간의 의지는 자유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필연성에 지배받고 있다고, 즉, 자유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두 명제에 있어서 영혼을 ‘동일한 의미’로, 즉, 사물일반인 사물자체로서 해석해 왔으며, 한편, 미리 비판을 선행시키지 않으면 이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비판은 객관적을 ‘이중의 의미로’, 즉 현상으로서의 객관과 사물자체로서의 객관으로 해석하도록 가르쳐 준다. 만일 비판에서 논술되고 있는 오성개념의 연역이 정당하다면 인간성의 법칙은 첫 번째 의미로 해석되는 사물, 즉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사물에만 관계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동일한 사물이 두 번째 의미로 해석되어 인간성의 법칙에 지배되지 않는다고 하면, 동일한 의지가 현상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으로서 이러한 경우엔 ‘부자유하다’고 생각되지만, 다른 한편에 있어선 사물자체에 속하는 것으로서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므로, 또한 ‘자유롭다’고 생각되는, 여기에 모순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한편 나는 나의 영혼을 사물자체라고 볼 때 사변적 이성(더우기 경험적 관찰)에 의해서는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감성계에 나타나게 된 여러 가지 결과의 원인이 어떤 존재자의 성질로서의 자유도 인식할 수가 없다. 만일 그것이 인식된다고 하면 나는 이러한 존재자의 실재를 시간에 있어서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자의 개념은 직관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유를 생각할 수는 있다. 우리들의 비판이 두 가지 감성적이고 지성적인 표상방식을 분명히 구별하며, 또한 이 구별에 의하여 순수오성 개념이 제한되고, 따라서 또한 이들 순수오성개념에서 파생되는 원칙들이 제한되면 자유의 개념은 아무런 모순도 갖지 않게 된다. 그런데 도덕은 우리들의 이성 속에 있는 근원적인 실천원칙을 자유를 전제하지 않고는 절대로 성립될 수 없는 이성의 선천적 여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사변적 이성이 자유를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하였다고 가정한다면 저 도덕적 전제는 명백한 모순을 내포하는 전제에 필연적으로 굴복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결과로 자유와 도덕이 자연기계론에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의 전제에 반대하는 것은 분명히 모순을 포함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자유가 자기 모순을 갖지 않으며, 우리들이 자유에 대하여 그 이상의 인식을 할 필요 없이, 다만, 자유는 최소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므로 동일한 행위(다른 관계에 있어서 파악된)의 자연적 기계성을 조금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윤리학과 아울러 자연학도 각기 자기의 자리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비판이 우리에게 사물자체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을 미리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또 우리가 이론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오직 현상에만 제한시키지 않았다면 이것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순수이성의 비판적 원칙에서 나타나는 적극적 효용에 대해서는 신神이나 우리 ‘영혼의 단순성’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규명할 수 있지만, 나는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이것은 생략하고자 한다. 요컨대 사변적 이성으로부터 경험을 초월하여 인식하려는 지나친 생각을 제거하지 않는 한, 나는 ‘신’, ‘자유’, ‘영원한 삶’을 나의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위해 상정할 수밖에 없다. 사변적 이성이 초경험적 인식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원칙은 가능적 경험의 대상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칙을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에 적용하게 되면 사실상 이러한 초경험적인 것을 언제나 현상으로 바꾸어서 순수이성의 ‘실천적 확장’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선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신앙’을 받아들일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 ‘지식’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독단론인 순수이성을 비판하지도 않고 형이상학에 있어서 성과를 거두려는 편견은 도덕성에 위배되는 모든 불신의 원천이 되는 것이며, 또한 언제나 심히 독단적인 것이다.
따라서 만일 순수이성비판에 의하여 이루어진 체계적 형이상학이 하나의 유산으로서 후세에 남기는 것이 반드시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이 유산은 경시할 수 없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일반적인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이 확실한 길을 걸으면서 이성이 개발되어 가는 것과 비판이나 이성의 근거가 없이 도색이나 기분에 들떠서 방황하는 것과 비교하여 보자. 또는 지식욕에 불타는 청년들에게 이 형이상학의 확실한 길을 따라서 시간을 보다 잘 이용할 것을 생각해 보자. 이 청년들은 통상적인 독단론에 의하여 일찍부터 강하게 고무되고 자신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 또는 그 자신이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그 본질을 인식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 안이한 궤변으로 조롱하거나 새로운 사상과 의견을 탐구하려 함으로써 근본적인 학문의 습득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도덕이나 종교를 부정하는 모든 반론에 대하여 소크라테스적 방법에 따라, 즉 상대방의 무지를가장 선명하게 증명함으로써 장래에 영원히 종식시킬 수 있는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큰 이익을 생각한다면 이 유산을 경시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이든 이미 존재하였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이 형이상학과 아울러 순수이성의 변증론 또한 존재할 것이다. 변증론을 순수이성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순수이성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의 시초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오류의 원천을 막음으로써 한꺼번에 형이상학으로부터 좋지 않은 모든 영향을 제거하는 것이다.
학문의 분야에 있어서 이와 같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또한 사변적 이성이 지금까지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커다란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한편 인간이 일반적인 관심사와 지금까지 세계가 순수이성에 기초를 둔 학설들로부터 얻은 효용을 보면, 모든 것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유리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손실은 “다만 여러 학파가 차지하였던 권리”에 관한 것 뿐이며, 결코 “인간의 이익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나는 가장 완고한 독단론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우리들의 영혼이 죽음 뒤에도 계속 존속한다는 것을 실체의 단일성에서 증명하거나 주관적 필연성과 객관적, 실천적 필연성을 구별한다는, 치밀하지만 아무 효력이 없는 구별에 의해서 의지의 자유를 일반적인 기계성에 대립시켜 증명하거나 또는 가장 실재적인 본체의 개념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등이 여러 학파에 의하여 시도되어 왔으나, 과연 그것이 일반대중에게까지 도달하여 그들의 신념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만일 이러한 것이 아직까지 제대로 되지 않고, 또한 인간의 상식이 이와 같은 치밀한 사변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고 앞으로도 도저히 이것을 기대할 수 없다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한편 영혼불멸이라는 첫째 문제를 보면 누구에게나 인간의 본성으로서 예외없이 주어진 소질이 시간적으로 유한한 것에 의해서는----그것은 전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소질을 충분히 나타낼 수 없으므로----도저히 만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영혼은 삶에 대한 희망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의지의 자유라는 둘째 문제를 보면 욕구적 성향의 모든 요구에 대립시켜 의무를 다만 명백히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자유의 의식을 낳게 하였으며, 그리고 끝으로 신의 존재라는 제3의 문제를 보면 자연의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엄한 질서와 아름다움과 섭리가 전적으로 총명하고 위대한 ‘세계창조자’에 대한 신앙을 낳게 한 것이다. 즉, 이러한 것들은 이성적 근거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한 일반 대중 사이에 퍼지고 있는 확신인 것이다. 만일 그렇게 생각해 보면 실로 이러한 확신을 갖는 데 아무런 방해도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권위를 더 높이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되면 여러 학파들은 인간의 일반적인 관심사에 있어서 다수의 우리들이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쉽사리 도달할 수 없는 보다 고차적이고 광범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가 없게 되며 따라서 이처럼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또한 도덕적인 관점에 있어서도 충분한 증명근거를 밝히는 일에 그치도록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변혁에 의해서 영향을 입게 되는 것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문제와 다른 많은 문제에 있어서도 당연히 그렇지만, 자기만이 이러한 진리의 유일한 정통자인 동시에 수호자임을 인정받고자 하며 일반 대중에게는 이 진리를 다만 사용하게 하고 그 열쇠는 자신만이 가지려고 하는 각 학파의 오만한 요구 뿐인 것이다(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사변적 철학자의 비교적 정당하고 공정한 요구에 대해서도 나는 충분한 배려를 하였다. 사변적 철학자는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에게도 유용한 학문인 이성비판의 유일한 보관자인 것이다. 그러나 이성비판은 결코 통속적일 수 없으며, 또한 통속적일 필요도 없다. 유용한 진리를 위한 정교한 논증은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와 동시에 이러한 논증에 대한 자세한 반론도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학파들과 사변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논의와 반론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학파들은 사변적 이성의 권리를 철저히 연구하여 형이상학자들이----궁극적으로는 형이상학자라고 할 수 있는 성직자들도----비판을 결여하게 되면 반드시 말려들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의 교설까지도 변조할 수밖에 없게 되는 논쟁으로부터 비롯되는 분규를, 또한 대중들 사이에서 ‘무신론’, ‘유물론’, ‘숙명론’, ‘자유사상적 무신앙’, ‘광신’, ‘미신’과 같이 일반적으로 유해할 수 있는 사상으로부터 대중에게는 전파되기 어려운 사상에 이르기까지 이를 모두 근절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정부가 학자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면 학문 및 학자에 대한 정부의 현명한 배려로서는, 주어지는 곳에서의 이와 같은 비판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만이 오히려 여러 학파의 가소로운 전제를 지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절할 것이다. 이들 학파들은 그들의 거미집이 망가지게 되면 마치 공공의 위험이 발생된 것처럼 소란을 피우지만 일반인들은 그들 학파들의 거미집에 한번도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것이 없어졌다고 해서 아무런 느낌도 가질 까닭이 없는 것이다.
비판은 학문으로서의 순수인식에 있어서 이성이 독단적으로 처리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학문이란 언제나 독단적이므로 확실한 선천적 원리로부터 엄밀한 증명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이 오랫동안 사용하여 왔던 원리들에 따르고 있으면서도 무엇에 의해서 이성이 이러한 원리들에 도달하였는가 하는 방식이나 권리를 묻지도 아니하고 개념(철학적인)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순수인식에 의해서만 성과를 거두려고 하는 전제적인 주장, 즉, ‘독단론’에 반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독단론은 ‘이성 자체의 능력을 미리 비판하지 않고’ 순수이성에 의해서 행해지는 독단적 처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독단론을 반대하는 것은 통속적이라는 이름 아래 제멋대로 행해지는 천박한 잡담을 변호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형이상학을 전면적으로 간단히 부정해 버리는 회의론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비판은 학문으로서 근본적인 형이상학을 반드시 독단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매우 엄밀한 요구에 따라서 통속적이 아니라 체계적이고도 학술적으로 완성시켜야 하는 형이상학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예비적 준비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근본적인 형이상학은 어디까지나 선천적으로 사변적 이성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도록 이 작업을 완성할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요구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이 지시하는 계획의 수행에 있어서, 즉 형이상학이 이루어야 할 체계에 있어서는 우리들은 저 유명한 볼프----모든 독단적 철학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인----의 엄밀한 방법에 따라야 할 것이다. 볼프는 원리들을 법칙에 따라서 발휘하고 개념을 명료하게 한정하며 증명을 엄밀히 검토하고, 추론에 있어서의 대담한 비약을 방지함으로써 학문의 확실한 길을 얻을 수 있다는 실례를 처음으로 보여준 인물이다(또한 이 실례에 있어서 그는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독일의 철저성의 정신의 창시자가 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순수이성 자체를 비판함으로써 미리 이 학문의 분야를 마련할 것을 생각하였더라면 형이상학이라는 이 독단적인 학문을 이처럼 확실한 학문의 위치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은 볼프 자신의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독단론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것으로서 이에 대해서는 그와 동시대의 철학자나 그 이전의 모든 철학자도 서로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볼프의 학문적 방법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순수이성비판의 방법까지도 부인하는 사람들은 학문에 특유한 구속을 모두 떨쳐버리고 노력을 장난으로 바꾸고 확실한 인식을 의견으로 바꾸며, 또한 애지愛知를 애설愛設로 바꾸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 제2판에 대해서는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총명한 사람들이 비평함에 있어서 발생된 오해, 나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던 그러한 오해를 받게된 난해함과 불명료한 것을 이 기회에 빠지지 않도록 가능한 한 교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비판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명제 자체나 그 명제의 증명근거와 이 저술의 계획의 형식과 그온전성에 대해서도 전혀 변경할 필요를 찾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내가 이 저서를 출판함에 앞서서 이러한 점들을 오랫동안 검토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한편 문제 자체의 성질, 즉, 사변적 순수이성의 하나의 진정한 유기적 구조를 가지는 것이며, 거기에서는 모두가 하나의 기관器官이다. 다시 말하면 전체는 개별적인 기관을 위하여 있음과 동시에 개별적인 기관은 전체를 위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작은 결점이라도 그것이 잘못이든, 또는 결함이든간에 사용하여 보면 그 모습을 남김없이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변적 순수이성의 본성인 것이다. 나는 이 체계가 앞으로도 변경할 필요가 없이 계속 주장될 것을 바란다.
나는 내 스스로의 황홀감에 빠져서 이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증거에 의해서 확신하는 것이다. 즉 순수이성의 가장 작은 요소에서 출발하여 점차 그 전체에 도달하며, 또한 반대로 독립적으로 순수이성의 실천적 영역에 있어서의 궁극적 의도에 의하여 주어진 전체로부터 출발하여 각 부분에 도달함에 있어서, 그 결과는 같지만 어떠한 사소한 부분이라도 이것을 변경하려고 하면 곧 순수이성의 체계에 있어서의 모순 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이성에 있어서도 모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요컨대 나의 확신은 이러한 실험에 의한 명확한 증거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서술’에 대해서는 개선할 것이 허다하다.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이 제2판에서 여러 가지로 교정을 꾀하였다. 그것은 1, 감성론에 대한 오해와, 특히 시간개념에 대한 오해 2, 오성개념의 연역에 있어서의 애매한 점 3, 순수이성 원칙의 증명에 있어서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되지 않는 점 4, 끝으로 합리적 심리학을 논한 오류 추리에 대한 오해 등을 교정하고자 했다. 서술방식을 변경한 것은 선험적 변증론 제1장의 끝까지이며, 그 이후에는 없다.
그 까닭은 시간이 너무나 모자랐으며, 그밖의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공정한 비판자의 오해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합당한 찬사의 말로써 이 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들 수는 없으나 나에게 보내주신 충고에 대하여 내가 충분한 고려를 하였다는 사실을 각 부분에서 확인하여 주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정정은 독자에게 다소의 손실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손실을 막으려고 하면 결국 이 저서가 매우 장황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나는 몇 부분을 삭제하거나 또한 단축하여 서술하였는데, 이러한 부분이 사실 전체의 완전성을 기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다른 의미로 보아서는 필요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독자들 중에는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 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삭제나 단축에 의해서 교정의 여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훨씬 이해하기 쉬운 서술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 새로운 서술은 명제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고 그 증명근거에 대해서까지도 근본적으로는 제1판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다만 논술의 방식은 곳곳에서 삽입만으로는 다할 수 없을 만큼 초판과는 다르게 서술되었다. 사실 이러한 손실은 단지 독자들이 임의로 제1판과 비교함으로써 보상될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이번 판이 초판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게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보상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출판된 여러 가지 저서들, 많은 서평이나 특수한 논문에 있어서 철저한 정신이 독일에서 아직 소멸되는 일없이 다만 천재 행세를 하는 자유사상 풍조에 의하여 잠시 소멸되었음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비판이라는 가시밭길로서 그것은 학술적이기 때문에 영속적이며 따라서 가장 필연적인 학문, 즉 순수이성의 학문에로 이끄는 길이며 이 길이 험하긴 하나 대담하고 명석한 사람들이 이 길을 극복하는 데 방해되지 않았음을 감사와 만족한 마음으로 시인해 왔다.
나는 통찰의 철저성과 명쾌한 서술 재능----이 재능은 나로서도 자신이 없는 것이지만----을 함께 지닌 이 훌륭한 분들에게 명쾌한 서술이라고 보기엔 아직 여러 곳에 결함이 많은 이 저서의 완성을 부탁하고 싶다. 그것은 이 저서가 논박당할 위험은 전혀 없으나 이해되지 않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앞으로의 논쟁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찬성자이든 반대자이든 주어진 모든 시사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고, 비판이라는 이 예비학의 지시에 따라서 형이상학의 체계를 완성하는 데 이용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일에 몰두해 있는 사이에 이미 상당한 노령(64세가 된다)에 들어섰기 때문에 나는 이제 자연의 형이상학 및 도덕의 형이상학을 발표하여 사변적 이성 및 실천적 이성의 비판의 정당성을 실증할 계획을 갖고 있으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한편 이러한 저서에서 처음에는 거의 불가피했던 불명료한 점을 밝히고, 또한 전체에 대해서 변명을 하는 일은 나의 저서를 잘 소화시킨 훌륭한 분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겠다.
여하튼 철학적 논문은 각 부분에 있어서 결함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철학적 논문은 수학적 논문만큼 빈틈없이 무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체계의 구조가 유기적 통일을 이룬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는 위험에 빠질 아무런 염려도 없다. 하지만 새로운 체계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를 개관할 수 있는 숙달된 정신을 가진 자가 실로 적다. 더욱이 혁신이란 사람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체계의 개관에 흥미를 가진 사람은 더욱 적은 것이다. 거기다 각 부분을그 전체의 연관으로부터 무리하게 잘라내어 서로 비교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저서라도, 특히 자유로운 대담 형식으로 씌어진 저서에 있어선 모순된 부분을 지적할 수가 있다. 이러한 모순이 다른 사람의 평가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불리한 것이지만, 그러나 전체이념을 파악한 사람이 보면 매우 쉽사리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이론이 그 자체만으로 확립되어 있다면 최초에는 여러 가지 위험을 수반하였던 작용과 반작용은 시간과 더불어 다만 이론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또한 공평한 식견이 있으며, 그 위에 참된 의미에서의 통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일을 맡게 된다면, 거기에 필요한 세련미까지도 짧은 시간에 이 이론에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1787년 4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계몽주의 사상의 완성자임과 동시에, 독일 관념철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가 있다.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 비판]은 그의 삼대 비판철학서이며, “현대는 바로 비판의 시대이며 모든 것이 비판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교는 그 신성에 의하여, 그리고 입법은 그 존엄에 의하여 비판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종교이든 입법이든 자기 자신에 대한 의혹을 당연히 초래할 것이며, 또한 이성이 그의 공명정대한 비판을 견디어 낸 것에만 허용하는 진정한 존경을 요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라는, 그의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정신이 각인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피히테, 셸링, 헤겔 등은 칸트의 관념철학의 정신을 이어 받았고,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니체 등은 그의 비판철학의 정신을 이어 받았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는 ‘일체의 경험과 상관 없는’ ‘형이상학’과 ‘순수이성’에 대한 그의 비판정신과 함께, 새로운 형이상학의 체계(순수이성의 체계)를 완성해야겠다는 그의 인식론의 목표가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는 어떠한 형이상학의 체계도 완성하지를 못했고, 오히려, 거꾸로 형이상학의 살해범이라는 불명예(또는 명예)를 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형이상학이 그의 비판에 의해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아주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서문은 김희정 역의 {순수이성비판)}(일신서적, 1991년)의 서문이며, 독자 여러분들은 이 책을 꼭 구입해서 정독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