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4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만군의 하나님
호 12:1~6
<설교자의 신학 여정>
정부투자기관에 다니다가 세는나이 쉰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직장에서 저에 대한 소문이 분분했습니다.
“뭐? 황의찬 소장이 신학을 한다고?” 의외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저에게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직전 주님을 영접했지만, 신앙은 자라지 않고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선데이 신자’였습니다. 담배는 안 피웠지만, 술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직장생활 해왔는데, “황소장이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고???”
고향인 전주지역에서의 반응은 더 했습니다.
아무래도 고향 사람들은 저의 실체를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중에 애경사에 참여하면, 저에게 인사를 합니다.
“황소장 신학대학원에 다닌다면서?”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목사되는 거여?” “아마도…” “황소장 목사되면 나도 예수 믿을게~”
이렇게 얘기해 주는 분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덩달아서 “황소장 목사 되면 나도 예수 믿을게”라고 농담으로 얘기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참 고맙다!’
‘저렇게 고맙게 말씀해주는 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
신학대학원 3학년 여름 방학 때, 2006년이었습니다.
전주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목요일에 모였습니다.
마침 도성회 사무실이 있어서 그곳을 장소로 정했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첫걸음을 그렇게 내딛으면서 2006년 말 직장에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전주에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목회자의 정체성>
성경공부 모임을 모체로 하여 전주에서 교회를 개척하겠다니,
딸은 말했습니다. “아빠는 시골에서 수도권으로 올라오는데 왜 거꾸로 가십니까?”
당시 중앙교회 교육 전도사로서 남전도회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수원중앙교회 남전도회 회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도사님은 수도권에서도 통할 것 같은데, 왜 지방으로 가십니까?”
지금 생각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전주로 내려왔습니다.
어느 지역에서 목회하면 더 유리하겠다는 등의 생각은 꿈에도 안 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전주로 보내신다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제가 착각했나요?” ☻
어언 15년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동안을 돌아보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목회자인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다양한 모습의 목회자를 보내십니다. 목사들, 저마다 각기 특색이 있습니다.
저는 “책 쓰는 목사”로서 나의 정체성을 찾고자 합니다.
일곱 번째 책 너 알아 전주대학교? -설립자 강홍모 행전-을 쓰면서 변화를 체험합니다.
고등학교 때 은사 목사님께서 불교 서적을 저에게 한 권 건넸습니다.
‘금강경’입니다. 이 책을 읽어보라시면서 농담하셨습니다.
“황의찬 목사가 머리 깎고 중 되겠다고 할라?”
그때까지 다른 종교의 경전을 펼쳐보지 않았습니다.
애써서 다른 종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신학을 늦게 시작했으니 부지런히 파도 쫓아가기 쉽지 않았습니다.
2017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한 우물을 파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책을 연달아 일곱 권을 냈습니다.
작년에 금강경을 읽고났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쯤에서 타 종교에 대해서도 공부해 보아라!”
메리 보이스, 조로아스터교의 역사,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기를 쓰고 읽어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740쪽 독파했습니다.
칼 야스퍼스, 역사의 기원과 목표, 이미 절판되었지만 구해서 읽었습니다.
여기에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세계종교 둘러보기, 예수는 없다를 읽고 있습니다.
요즘 책 읽기에 푹 빠져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가?
하나님은 다른 종교의 신들과 어떻게 다른가?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파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독특성을 발견하는 중입니다.
사실 성도나 목회자나 타 종교에 대한 공부, 섣불리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리 잡기 전에 타 종교를 접하게 되면요?
자칫 거기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넘어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황 목사는 이제 그런 책들을 읽어도 된다!”라고 허락하셨나 봅니다.
저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오히려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날마다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역작을 펴낸, 저자들, 메리 보이스, 카렌 암스트롱, 칼 야스퍼스, 한국의 오강남…
이분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입니다. 학문을 평생의 업으로 하신 분들입니다.
모두 대학 강단에서 거의 평생 교수로서 강의를 하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쓰는 기독교, 성경해석, 신학은 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분들은 프로페셔널 철학자, 종교학자, 신학자입니다.
저의 실존은 매우 독특합니다. 저는 한 사람의 목회자, 시골 교회 목사입니다.
두 아이를 장애인으로 키우고, 한 아이를 먼저 보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학자들은 학문으로 신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러나 학문이 아니라 치열한 삶,
실존에서 매달리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를 붙들어주는 신을 만나야 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학자, 사상가들에게 구원의 하나님은 보편적인, 일반적인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학문을 합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제가 살아야 했습니다. 제가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만큼 절박했습니다.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서 저의 지난 삶을 반추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견디어왔지?’ 그래서 울 때가 가끔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여간해서 울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잘 견뎠습니다.
현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를 언제 불러가실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니 이전과 다릅니다.
기독교 작가들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결과물이 다를 겁니다.
책을 펴내는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신학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저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무래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은 절체절명, 백척간두입니다.
잠시라도 실수하면 곤두박질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제가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라는 “밧줄”에 의지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나에게 하나님과, 철학자 사상가 신학자들에게 하나님이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실존에 따라 듣는 하나님의 음성이 차이 난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일련의 독서를 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 종교에도 모두 있는 신중의 한 신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황의찬 목사’에게 사명을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신학자, 종교학자, 철학자, 사상가가 설명하는 하나님 말고,
“네가 만난 하나님을 책으로 내라!”
요즘 독서를 하면서 힘을 내고 있는 이유입니다. 할렐루야~
☞ 오늘 설교 제목을 “만군의 하나님”으로 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5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 붙이는 수식어는 매우 많습니다.
앞에서는 “구원의 하나님”을 언급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은 기본입니다.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 승리의 하나님 여호와 닛시, 예비하신 하나님 여호와 이레…
평화의 하나님 여호와 샬롬,
오늘 본문 5절 ‘만군의 하나님’에서 만군은 일만 만萬, 군사 군軍 자를 씁니다.
수없이 많은 군대를 거느리는 하나님으로 얼른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군’ 전쟁하는 대단히 큰 규모의 군사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면 ‘전쟁하는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호세아가 활동했던 주전 8세기, 여러 신들은 모두 전쟁하는 신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주는 신을 각 나라들이 섬겼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는 이들이 오늘 본문을 읽으면 하나님도 그런 신입니다.
고대시대, 각 부족이나 국가들이 섬기는 신은 전쟁하는 신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요?
개념 없이 읽으면, 5절에서 “만군의 하나님”했으니 영락없이 전쟁하는 하나님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참뜻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만군은 그런 만군이 아닙니다.
첫째, 만군은 피조물 중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 중에서 하늘에 두신 것을 총칭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보좌를 모시는 천사들을 ‘만군’으로 표현했습니다.
천사를 비롯하여 하늘에서 활동하는 피조물을 ‘만군’으로 지칭했습니다.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쳐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호통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
하나님은 수많은 천사를 거느리십니다.
이 천사들을 가리켜 “천군 천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종교학자들, 철학자, 신학자들 중에서도 어떤 경우 “만군의 하나님”이라 해서,
전쟁하는 하나님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격하하는 처사입니다.
하나님을 일반적인 우상 중의 하나로 낮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쟁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과 씨름하는 분입니다. 자기 백성과 존쟁하시는 분입니다.
(2절)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3~4절)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어린 아들과 씨름을 하고, 아들을 위해 져주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했습니다.
(6절)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성경의 하나님은 세계의 어느 종교의 신보다 분명한 참 신이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를 선포합니다.
이러한 예언자적 전통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6일 동안 일하시고, 하루 안식함으로써 7일 단위로 생활하도록 싸이클을 정해주셨습니다.
어떤 신이 이렇게 합니까? ~하나님과 같으신 이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진정한 하나님>
하나님은 종교 속의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학문 속의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철학이나 사상 속의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셨을 뿐 아니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인간들의 삶은 천차만별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어떤 이는 학문으로, 어떤 이는 철학으로, 어떤 이는 사상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나는 하나님보다
내 인생, 내 삶의 한 가운데서 섭리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으로 만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