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시험관 8차가 실패로 종결된 후 나는 무너져 내렸다.
3년간의 시험관 시술 동안 과배란과 유산, 소파수술, 자궁경 수술 등으로 나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아이를 너무나 갖고 싶지만, 어쩌면 생물학적인 아이를 이번 생에서는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난임여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큰 상실감을 겪게 된다.
아이를 낳지도 않았는데 무슨 상실감을 겪냐고 반문하겠지만, 난임을 겪어본 여성들은 알 것이다.
한 번도 본 적도 없지만, '우리 아기는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울까?' 라는 생각을 하며 기쁨과 절망을 수없이 반복한다.
하지만, 임신에 계속 실패할 때 간절히 기다리는 그 아기를 볼 수 없기에 생생한 상실의 아픔을 느낀다.
그래서 난임여성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애도작업을 거치듯, 만나지 못한 아기와의 애도작업이 필요하다.
난임과 더불어 유산을 반복 하거나, 자식을 먼저 앞세워 보낸 어머니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품속에 잠시라도 아기를 품고 있었던 여성은 아기와 자신을 동일시 하게 된다.
그래서 아기가 죽게 되면 자신의 삶의 일부가 떨어져나간 느낌이 들고 자식을 따라 죽고 싶은 충동이 올라온다.
또한 자신의 몸을 컨트롤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좌절감에 빠져들기 쉽다.
생명탄생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인데, 자신의 몸으로 '아기'라는 생명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좌절감은 고스란히 일과 인간 관계로 이어져서 나의 모든 생활이 삐걱대었다.
슬픔과 좌절감 속에 있는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상담한단 말인가?
도저히 내담자들을 만날 수 없었다.
내담자들이 쏟아내는 삶의 힘겨움이 나에게 전이되었고 그들의 아픔과 내 아픔이 뒤섞여버렸다
코로나도 겹치고, 내 상태가 이러하니 상담고객도 뚝 끊겼다.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이래도 되나, 이렇게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다가 내 삶 전체가 무너지지 않을까란 불안감이 올라왔다.
멘토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그동안 내가 임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이야기하며 펑펑 울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108배를 하고, 쑥뜸을 뜨고, 운동을 하고, 과배란 주사를 투여하고 , 영양제를 한 웅큼씩 먹고, 심상화를 하고.....
가만히 듣던 선생님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서은님이 너무 애를 쓰고 노력하니까 오히려 더 애가 안 생겨요.
임신은 아주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인데, 너무 긴장되어 있고 애를 쓰니까 아기가 들어올 틈이 없는거예요.
이제부터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늦잠 자고, 산책이나 하고, 음악듣고 영화보고. 그렇게 하고 싶은대로 해요."
" 선생님, 난임 병원 의사들은 제 나이가 많아서 임신이 힘들대요. 난자가 기형일 확률이 높아서요. "
" 서은님도 의사들의 말에 세뇌됐네요.
왜 암환자들이 죽는지 아세요?
의사들이 살 날이 몇 개월 남았다고 선고하면 암환자가 그걸 믿는 순간 죽는 거예요.
의사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멀쩡히 낫는 암환자들도 있어요.
사람의 몸은 모두 개별적인거예요.
의사들은 데이터를 갖고 이야기하니까 확률상 그렇다는 거지요.
아직 생리 하잖아요? 그럼 임신의 가능성도 당연히 있는 거지요.
임신이 되면 좋은거고, 안돼도 세상이 끝장나지 않아요. 끝장날 것 같은 생각때문에 두려운 거지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고, 정말 일에서 손을 놓고 집안일과 산책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긴 했으나, 좌절감과 무력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상담을 받으며 그 분을 매우 존경하지만, 남성치료사의 한계를 보았다.
선생님의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말씀이 혼란속에 빠져있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치료사라 할지라도 '자궁'이 없는 남성이기에 난임여성의 고통을 공감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여성이기에 남성 내담자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성(性)이 달라서 겪는 이해의 간극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내가 계속 연구하고 공부할 주제이다.
마음의 고통을 덜기 위해 명상과 글쓰기를 하며 셀프 치유를 하던차에, 유명화 선생님이 이끄는 <가족세우기 - 좌절다루기> 과정을 하게 되었다.
나는 가족세우기 프로그램을 통해서 임신에 대한 이슈는 내버려두고라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아이가 있든 없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내 마음은 '그래도 아기가 있어야 내가 더 행복해질 수 있어'라고 저항하였다.
워크샵 과정중에 내 가슴을 때린 것은 "목적과 수단을 분리하기" 였다.
나의 좌절은 목적과 수단을 동일시 한데서 왔음을 보게 되었다.
< 나의 목적과 수단>
* 목적 :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나의 일에서 보람을 찾으며 풍요롭게 살기
* 수단 : 생물학적인 아이를 낳기 / 입양하기 / 일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며 우리 부부 둘이서 행복하게 살기
목적과 수단을 동일시하여 선택한 수단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것을 실패로 여기고 포기하면 목적도 상실하게 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실패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삶 자체가 작고 큰 좌절의 연속입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것보다 작은 좌절을 놓치지 않고 돌보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
" 어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 반드시 어떠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전제하면 삶이 비참해집니다'
유명화 선생님의 말씀에 좌절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생물학적인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붙들고 있는 한, 나는 불행의 구덩이 속에 갇혀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론적 배경을 알고 나서도 마음속에서 계속 의문이 일어났다.
' 여성으로 태어나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경험을 못하는 대신, 일을 열심히 한다고 마음속의 공허감이 채워질까?'란 생각이었다.
이런 의문속에서 파트너와 치유작업을 하던 중 '정말 그럴 수 있겠다'라는 깨달음이 왔다.
부모님과의 해원은 내 치유 여정의 오랜 화두였다.
가정불화의 원인이 술먹고 때리는 아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부추기는 엄마 또한 2차 가해자라는 생각이 들어 원망도 많이 했다.
반복하여 부모님과의 관계를 치유하는 작업을 해오면서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지난 삶을 불쌍하고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자식 때문에 원수(?)같은 남편과 이혼하지도 못하고, 꾹꾹 참으며 살아낸 엄마에게 나는 부채의식이 있었다.
'우리 삼남매만 아니었다면, 엄마가 훌훌 털고 이혼해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텐데.
자식들 때문에 엄마 인생이 너무 불행했어.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
엄마 대역인 파트너를 바라보니 눈물이 흘렀다.
엄마에 대한 사랑이 깊은만큼 엄마의 지난 인생이 불쌍하게 느껴져서였다.
파트너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는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자식낳고 산 거예요. 이렇게 따라서 말해보세요.
엄마가 불행하게 사셔도 저는 행복하게 삽니다."
하지만 이 말을 따라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불행한데, 어떻게 제가 행복하게 살아요?
엄마는 우리 자식들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을거예요. " 라고 반문하며 울었다.
이것을 가족세우기에서는 '눈 먼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자녀는 부모에게 충성하려는 본능이 있기에, 부모의 아픔을 대신하려 한다.
하지만,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를 수 없기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녀는 힘들어하는 부모를 위로해주지 못해 끊임없이 좌절하고 무력감을 느낀다.
파트너가 나에게 자식이 있냐고 질문해서 없다고 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자식이 없는 사람은 일이 자식이에요.
그럼 당신은 자신의 일(심리상담)을 하면서 불행하기만 한가요?"
질문을 받는 순간, 가슴속이 쿵하고 울리며 깨달음이 왔다.
'아 , 맞아. 나는 내 일이 때론 힘들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일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도 해.
그리고 이 일은 누가 하라고 시킨 것이 아니고 내가 선택한 것이야.
엄마도 마찬가지야. 아빠와의 힘든 결혼생활을 견디며 우리를 낳고 키운 것은 엄마의 선택이야.'
엄마는 힘들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삼남매를 낳고 키우며 행복하고 보람찬 순간들도 많았을 것이다.
아버지와 죽일듯이 서로를 미워하며 싸웠지만, 두 분 은 운명의 끌림속에서 서로 사랑으로 부부가 맺어졌고 결실로 우리들이 태어났다.
어찌 부부사이를 자식이 '헤어지는게 더 나았다'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두 분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이런 깨달음이 오자, 엄마에 대한 부채감에서 매우 가벼워졌다.
엄마들의 레퍼토리, '내가 뉘들 때문에 니 아버지랑 참고 살았다'라는 말이 사실이 아님을 확연히 보게 된 것이다.
' 엄마,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엄마의 사랑과 헌신을 생명으로 받아, 저는 기쁘고 행복하게 삽니다.
저는 당신의 운명으로부터 물러섭니다.
엄마, 저를 축복해주세요.'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면 그 사랑이 자연스럽게 다음세대로 흐른다.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자녀를 양육하는데에, 자녀가 없는 사람은 일을 통해 사회에 헌신한다고 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을 대한다면, 그 일에서 전문가가 되고 기쁨과 보람을 찾게 될 것이다.
가족세우기 워크샵을 통해 많이 자유롭고 편안해졌다.
나와 남편을 닮은 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만약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조금씩 피어오른다.
지금 이순간 나에게 주어진 일을 사랑으로 대한다면, 아이를 갖지 못하는 슬픔이 기쁨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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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블로그 <창조와 치유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