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문화 2023 여름호- 삶 같은 영화, 영화 같은 삶(김지미)에서 발췌함>
<에브리씽>은 중년이 겪는 보편적인 문제에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 이민자의 특수성까지 잘 버무렸다.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에블린(미셸 여)은 부모가 속한 보수적인 중국계 세계로부터 낭만적인 가능성을 꿈꾸며 웨이먼드(키호이콴)을 따라 미국으로 떠났다. 둘은 코인 세탁소를 운영하며 딸 조이(스테파니 수)를 낳아 키운다. 가족을 버리고 과감히 사랑의 도피를 택했지만 에블린의 현재는 행복과 거리가 멀다. 부모를 버리고 떠난 딸을 비난하는 아버지가, 그녀 내면의 잣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음력설 파티를 준비하여, 때마침 방문한 아버지의 성마른 요구를 들어주고, 세무 조사 서류를 점검하며 세탁소 손님까지 응대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결혼 생활 내내 에블린의 불친절하고 무관심한 태도에 지친 웨이먼드가 이혼 서류를 내민다. 조이는 자신의 여자 친구는 물론 자기의 모든 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엄마와 관계를 단절하고 싶어 한다. 권위주의적인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는 비지니스를 폐쇄할 수도 있다며 위협을 가한다. 에블린의 삶은 부모의 기대도, 남편의 사랑도, 자식의 존경도 없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현재의 모든 삶이 붕고될 위험에 처한 에블린 앞에, 문자 그대로 다른 세계들을 향한 문이 열린다. 멀티 유니버스의 경계가 풀리며 현재 웨이먼드와 같은 외모지만 다른 내면을 갖춘 알파 웨이먼드가 당도한다. 그는 에블린만이 악당 조부 투바키의 손길로부터 멀티 유니버스 전체를 구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설득한다. 멀티 유니버스의 개념조차 이해 못해 어리둥절한 에블린 앞에 수많은 유니버스가 정신없이 열렸다 닫힌다. 그때마다 그녀는 다른 세계의 에블린과 접속하여 그들이 단련한 기술들을 장착해 현재의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 에블린은 이제 이혼, 가족 관계의 파탄, 세금 포탈로 인한 사업 종료 같은 현재의 문제와 멀티 유니버스의 구원이라는 초월적인 문제를 두고 숨 막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난해한 플롯과 빠른 편집 그리고 수많은 장르의 교섭으로 <에브리씽>은 다소 난해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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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에게 펼쳐진 멀티 유니버스들은 그녀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때마다 해본 상상의 편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할 때 다른 가능성을 꿈꾼다.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과 다른 존재로 살아볼 수 있다면. 에블린의 다른 유니버스에서 웨이먼드를 거절하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성공한 커리어도 만들어본다. 그렇게 모든 것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단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조부 투바키, 에블린의 딸 조이다. 조부 투바키는 모든 유니버스를 어떻게든 관통해 에블린을 결국 찾아낸다.
에블린과 조부 투바키와의 결투는 물리적인 힘의 문제가 아니다. 에블린은 그가 빚어낸 거대한 베이글을 함께 바라볼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조부 투바키는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이제 이 모든 것을 끝낼 때가 되었어"라며 달콤한 무, 즉 죽음으로 유혹한다. 이 유혹은 우울한 현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포자기한 채 내뱉은 에블린의 독백이라고 볼 수 있다. 조부 투바키는 에로스의 산물이지만 타나토스에 대한 강한 유혹이다. 에블린이 생명을 준 대상이지만, 현재는 스스로의 삶을 종식시키고 싶을 만큼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모든 유니버스들의 점퍼들이 국세청 건물에서 전투를 벌이고,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가 웨이먼드는 모두를 진정시키기 위해 호소한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요. 하지만 왜 싸우는 거지요? 그냥 서로에게 친절하면 안 되나요? 특히 우리가 아무것도 모를 때는 말이에요."
그때야 비로소 에블린은 웨이먼드의 사람 좋음이 무능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혼란스러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방어적으로 공격성을 장착한다. 하지만 웨이먼드는 반대로 생존을 위해, 더 나아가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친절함을 택했던 것이다.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자 에블린의 능력치는 어느 유니버스와 접속했을 때보다도 강력해진다. 유니버스를 횡단하는 모든 점퍼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심지어 자신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디어드리와도 화해한다.
어떤 능력치로도 해결되지 않은 것은 조부 투바키/ 조이와의 관계다. 이 관계를 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특수한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에블린이 자기 자신을, 또 자신과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인 조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는 데서 실마리가 풀린다. 부모와 자식은 분명 다른 개체이지만 태생부터 부정할 수 없는 물리적인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시에 부모에게 자식은, 또 자식에게 부모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유니버스다. 그런 점에서 이 관계는 멀티 유니버스의 구조와 비슷하다. 완벽히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순간 오히려 두 유니버스의 질서는 무너진다. 너는 나에게서 비롯되었지만 결국에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두 세계의 평화로운 공존 가능성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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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 번 봐야겠네요.
예, 강력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