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냔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
80년대 여성언술의 특성
구술의 확산성2
권대근
문학박사, 데ㅐ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연말 연시, 그 바쁜 시간을 머리 싸매고 누워 앓다가 일어났다는 친지의 힘없이 핼쓱한 얼굴을 바라보며 불현듯 나 또한 지난 10여 년간 홍역처럼 치러냈던 입시지옥의 참담한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네 아이의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1,2차 시험에 재수까지 합치면 15년 동안 무려 13번의 열병을 치루워 냈던 그 괴롭고 고달프던 시간, 우리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했듯이 나 역시 인생 황금기를 아이들의 입시 지옥 속에서 찌들고 시들어 버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p. 203) (굵게 강조 : 인용자)
홍윤숙, 「가지에 부는 어느 바람도」 중에서 -
홍윤숙은 입학시험의 모순과 불합리를 말하면서 그런 제도로 인해 어머니인 여성의 삶이 입시 지옥 속에서 찌들고 시들어 버렸다고 말하듯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실패의 기회를 주는 이런 제도가 있어서 더욱 적극적이고 자립적으로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불행한 것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일이다’는 진술은 체험성과 접맥되어 설득력을 얻는다.
구술 양식에서 청자는 작품을 읽는 독자다. 때문에 독자들은 구술의 언어로 표현된 수필을 읽으면서도 그것을 ‘듣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구술 자체가 청자에게 화자가 직접 말을 건네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독자와의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해주는 형식상의 배려가 구술인 것이다. 여성들은 자기의 체험을 상대와 공유하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구술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이 때 사용되는 언어는 대화적 교류의 매체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구술의 언어에서 배운다거나 안다는 것은 알려지는 대상과 밀접하고도 감정 이입적이며 공유적인 일체화를 이룩한다는 의미이다. 위 인용문의 어투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에 해당하는 독자에게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읽힌다. 이런 어법은 항상 억압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여자의 기구한 일생에 대해 독자의 연민이나 공감을 적극적으로 유도해 내려는 서술자의 의도적인 장치일 수 있다. 이것이 구술언어가 갖는 현장성이나 직접성, 체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구술의 여성언어는 질서 정연하고 진지한 남성의 언어에 비해 하찮고 수준 낮은 언어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여성들이 이처럼 비논리적이고 쓸 데 없어 보이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남성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쏟아냄은 곧 억압된 욕망의 분출을 의미한다. 말을 많이 함으로써 여성들의 억압된 자아가 해방의 활로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말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억압되었던 현실의 응어리가 갑자기 터지면서 “상처에 바람 쏘이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언어들일 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언어는 소수집단의 문학과 연관 된다. 소수집단의 문학이란 지배집단의 언어권에서 소수집단이 지탱해 나가는 문학을 지칭하기에 지배 문학 또는 기존 문학 속에 내재되어 있는 문학의 혁명적 상황을 말해준다. 여성들은 소수집단으로 존재하는 대표적인 존재로서 자신들의 언어를 통해 지배집단인 남성들이 사용하는 기존의 언어를 흔든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용되어 본 적이 드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처럼 존재했던 자신의 언어를 다시 존재하게 한다. 때문에 이런 여성 언어로의 글쓰기는 글쓰기 자체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의 혁명적인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되는 것이다. 남성 언어를 빌어다 쓰지 않을 수 없는 불가능성, 남성 언어를 제대로 쓸 수 없는 불가능성이 여성 언어의 억압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80년대 여성 수필에 나타난 언술의 특성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성작가들은 시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 수필에서도 억압된 여성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여성 특유의 유형화된 언술 특성은 세 가지 양상으로 범주화된다. 첫째, 여성언어가 소외되는 상황을 의미하는 내적 분열성에는 침묵의 단절성과 독백의 유보성이 종속하고, 둘째, 언어의 감금성을 경험했던 여성들이 서서히 말하기 시작하는 통합 지향성에는 서간의 고백성과 비판의 풍자성이 포함된다. 그리고 감금으로부터의 탈출을 의 미하는 열림 지향성에는 대화의 생산성과 구술의 확산성이 그 하위 부류로 드러났다.
이러한 여성 언술의 세 가지 양상은 남성들의 논리적인 언어규칙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저항을 전략적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여성수필도 여성주의 시각으로 고찰될 수 있음을 보여준 적절한 사례라 하겠다. 80년대 이전 수필들과는 달리 80년대 여성수필들에 전략적 글쓰기 차원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것은 여성수필을 여성문학의 범주에서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하겠다.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이와 같이 80년대 이후 여성작가들이 여성 정체성에 구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여 성문학 내에서 소외되고 있는 여성수필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런 결과는 여성적 삶의 고발성을 폭로하는 데 주력했던 80년대 이전 수필과 다른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연구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언술적인 측면에서 가장 저항적이고 적극적인 의식을 보여주는 여성 작가 군으로 정영자, 서영은, 문혜영, 조재은, 이소라, 홍윤숙 등을 들 수 있으며, 특이한 점은 여성작가들 중에서도 수필로 등단하여 수필만을 쓰고 있는 여성수필가들이 여성 정체성의 정도에서 적극성을 나타내는 이런 작가 군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도성을 보이는 통합 지향의 언술 특성 측면에서도 여성 수필가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박완서, 한무숙, 유안진, 허영자, 천양희 등의 여성시인이나 여성소설가가 대거 포진해 있음은 결과적으로 여성수필가들의 여성의식이 다른 여성작가들에 비해서 약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