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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팔만대장경과 거제도 1.>
1. 개요 : 해인사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과 거제도 관련 각종 역사기록을 소개하고 또한 경판 재료인 나무수종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팔만대장경을 모셔 둔 장경판전(국보52호)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팔만대장경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박상진 박사, 배영기 박사의 해인사 팔만대장경 논문 中, 일부 참고하여 인용함.] 고려문신 최해(崔瀣 1287∼1340) <졸고천백(拙藁千百)>에 따르면, ‘선원사(禪源寺)는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우(崔瑀)가 1245년(고종 32)에 강화도(江華島)에 세운 절로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판목(板木)을 보관하던 곳이다.’ 이 판목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1398년(태조 7)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로 옮겨졌고, 이 터에는 장원서(掌苑署)의 과원(果苑)이 들어섰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1292년(충렬왕 18)에 고려의 선대 실록(實錄)을 이곳에 옮겨다 놓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신형의 시축[信泂詩軸]> 신흠(申欽 1566∼1628)
須爲見性佛 꼭 도를 통한 부처가 되어야지
莫作野狐禪 외도 즐기는 중은 되지 말게나
八萬大藏經 팔만대장경 그것은
兎蹄與魚筌 토끼 올가미와 고기 잡는 통발이지
◯ '초조(初雕)대장경'과 거제도 : 고려 현종 2년 1011년부터 선종 때인 1087년까지 77년 동안 대구 부인사에 도감을 두고 송나라 판과 거란 판의 대장경을 참조해 6천여 권의 경판에 돋을 새김한 ‘초조(初雕)대장경’을 만들어냈다. 그 후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서 가져온 장서 등을 보충해 26년간(1073~1099)의 노력을 경주한 끝에 1,010부 4,740여권에 이르는 증보판인 ‘속장경’을 재간했다. 이렇게 완성된 대장경들의 경판은 부인사에 소장되어 오다가 123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극히 일부만 일본과 국내 몇 곳에 흩어져 있다.
성종 14년 995년 이래 개편된 12절도사(節度使)체제에서는 거제도 지역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여 진주(晋州)절도사의 통제하에 있었다. 5도 양계체계로 재편되기 시작하는 현종 9년(1018년)에는 지금의 통영과 고성지역인 자고현(自固縣)을 거제현의 임내에 두고 현령(縣令)을 파견했다. 자고현을 경상도(慶尙道)의 진주목(晋州牧)에 소속시킴으로써 거제현이 주현(主縣)이 됨과 동시에 그 행정규모가 확대되었으나 뒤에 고성현이 분리됨으로 인해 다시 그 규모가 줄어들었다. 고려초기, 당시 고성현이 거제현에 소속되고 그 행정 중심지가 거제로 옮겨와 있었던 이유가 바로 '초조대장경'의 제작에 따른 거제도의 비중이 컸기 때문이었다. 초조대장경판이 완성된 후, 다시 고성현이 분리 되어 나갔음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또한 이거인 설화나 해인사 사적비의 내용도 이 당시의 여러 이야기가 와전되어 기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 당시(1018년) 거제현의 읍치가 거제시 둔덕면에서 거제시 사등면 사등성으로 옮겨와 1272년 육지로 관청이 피난 갈 때까지 지속된 것으로 판단된다.
1) 먼저 팔만대장경판 제조에 사용된 원목의 수종은 거제도와 남해안 일대에서 벌목하여 실어온 대부분 산벚나무류로서 전체 시편수 대비 62%에 해당하고 경판부위에서만 보더라도 64%에 달하며 마구리의 구성수종에서도 56%에 해당한다. 또한 돌배나무류는 전체 조사시편수 대비 약 13%이고 채취부위별로는 경판부에서도 14%나 점유하고 있다. 기타 자작나무류 8%, 층층나무류 6%, 단풍나무류와 후박나무류가 각각 3%, 버드나무와 굴거리나무가 각각 1점씩 검출되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경판에는 사용하지 않았고 마구리 혹은 부위불명 재료에서 각각 1-2점이 검출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명확한 근거도 없이 오늘날 대장경판은 자작나무 혹은 거제수나무로 알려졌으며 심지어는 후박나무라고 까지 말하고 있는가? 대부분이 산벚나무류와 돌배나무인 대장경판이 왜 자작나무로 알려져 왔는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추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벚나무와 자작나무의 특성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화목(樺木)을 벚나무류로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자작나무로 알고 있다. 따라서 대장경판은 대부분 화목(樺木)을 사용하였다는 기록과 구전(口傳)으로, 자작나무로 알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거제도産 나무가 거제수나무로 변형된 과정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거제도에는 옛부터 우량재가 대량으로 분포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대적으로 맞지 않아 전설로만 치부하고 있는 이거인(李居仁)에 관한 기록에서도 "[伽倻山海印寺大藏經印出文에『羅王招致工匠亦運?板於巨濟島成列不止時入指云杞梓皆稱巨濟木至今仍名馬入我]"라 하여 거제도에서 생산된 목재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즉 "경판을 판각하는 데는 옛 부터 거제도에서 나는 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다. 대장경판을 각판할 때도 몽고군에 유린된 육지보다는 수집과 운반이 손쉬운 거제도, 남해도, 완도, 진도, 멀리는 제주도까지 섬지방에서 많은 경판재를 조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경으로서 총 목판수는 81,340매이다. 그러나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는 81,268매인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대장경은 국보 제 32호이며 경·율·론의 3장을 비롯하여 불교관계 책들을 총망라한 불교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작년도는 고려 고종 때인 1235년~1251년 사이 16년간 소요되었다. 경판 1장의 무게는 평균 3.1kg이며 전체무게는(3.1kg×81,340매=252,154kg) 약 250톤에 달하며 8톤 트럭으로 31대 분량에 해당된다. 경판 1장의 규격은 가로 72.6cm×세로 26.4cm×두께 4cm로 되어있으며, 경판의 네모서리는 99.6% 순동으로 된 장식을 부착하였는데, 당시 고려초기 거제도에는 "연정장(鍊汀莊)"이라는 고려시대 철과 동을 제련하던 곳 "거제제련소", 여기서 만들어 진 것으로 판단된다. 죽토부곡에서 약 5리쯤 떨어진 남서쪽 물가 근처이니, 현재 거제시 연초면 야부 일대와 매립과 복토전의 옛 연사리 하천 하류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1026년(현종17년)에 왜구가 약탈해 간, 일본 좌가현(佐賀縣) 동송포군(東松浦郡) 경정(鏡町) 혜일사(惠日寺) 사찰에 있는 하청부곡(河淸部曲) 북사종명(北寺鐘銘),or 거제북사종(巨濟北寺鐘약72Kg), 청동으로 된 고려범종(高麗梵鐘)이 여기 연초 연사리 제련소 연정장(鍊汀莊)에서 제작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거제도는 예부터 동광 광산이 존재하여 왔다는 사실로 인해, 구한말 영국과 일본의 동광 광산 쟁탈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경제성 없음). 경판 네모서리를 부착하기 위하여 사용된 못은 특수처리 한 것으로 당시의 철 정제기술이 매우 정교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판 제작 시기는 최씨 무신정권시대였다. 최우의 식읍이 진주이며, 또한 당시 거제현은 진주목의 관할이었으며, 산남도 역원 연결도로가 진주 평거역에서 고성 배둔역을 거쳐 마지막 종점인 거제 오양역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인해 진주에 분사장경도감을 설치하자 곧바로 산남도 진주의 속현인 거제도가 팔만대장경의 경판 제작지로 사용되었음은 자명하다. 이 후 삼별초항쟁 때, 거제도까지 점령(1271년)하고 더 이상 부산이나 울산쪽으로 항쟁군이 진격하지 않은 것은 팔만대장경 제작과 진주의 관할지역으로 인한 거제도와 무신정권과의 각별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 경판 재료인 나무는 대부분 거제에서 벌목하여, (1) 3년간 바닷물에 잠겨 두었다(실제 실험으로는 불가능)가 건져서 (2) 소금물에 삶아 그늘에서 말리고 (3) 대패질을 한 후 각자 작업을 하였다. 각자 작업이 끝난 (4) 경판은 옻칠을 한 후 (5) 구리로 네모서리에 못질하여 마구리를 부치는 것으로 경판 1매의 공정이 끝나게 된다. 이와 같은 1차 공정(초벌경판)까지는 거제도에서 모든 것을 마친 후에 진주 쪽으로 보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거제도에서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한 장소로는 남부면 율포 다대와 일운면 지세포, 거제면 서상리, 고현만 수월리, 둔덕면 하둔 하천하류, 등에서 그 여건과 환경이 가장 적합하다.
① 당시 기계 없이 인력으로만 작업을 했으므로, 최소 5년 이상 동안, 순 작업인원 약 1000 명 이상의 장정이 거제도에서 이 일로 거주했을 것이고, ② 몽고의 침입 등으로, 중앙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체적으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으므로, 넓은 들판이 있는 곳이 필요했다. ③ 목재를 3년(?)간 바닷물에 담가 두어야 할 곳, 즉 넓은 갯벌과 사구에 의한 석호(潟湖)를 갖춘 곳(매립 前, 옛 지형). ④ 그리고 예로부터 염전과 봉산이 있는 곳.(경판을 소금물에 반드시 끓여야 함.) 즉 "반드시 염전이 있는 만(灣)을 끼고 있는 항구"이어야 했다. 그 외 ⑤ 경판 운반을 위한 천혜의 항구를 구비 한 곳, 등이다.
<초조•팔만대장경과 거제도 2.>
2. 해인사 팔만대장경 거제도 관련 역사기록.
1) 유진 팔만대장경 개간인유(留鎭八萬大藏經開刊因由) 이거인(李居仁) 기록.
신라 애장왕(802년)때 창건된 천년 고찰 해인사에는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고문서가 있는데 몇 고문서의 기록을 근거로 경판을 새긴 당시부터 해인사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대장경판과 직접 관련을 지어 볼 수 있는 문헌은 해인사 유진 팔만대장경 개간 인유(留鎭 八萬大藏經 開刊 因由)와 해인사 사적비(事跡碑)가 있다. 먼저 팔만대장경 개간 인유를 보면 신라 때 化主 이거인(李居仁)이란 사람이 거제도에서 경판을 새기고 해인사로 운반한 것을 기념하여 축하 법회를 연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대장경개간인유>는 경판 새김의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는 지금의 해인사팔만대장경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 우선 명칭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팔만대장경과 같다. 특히 거제도에서 경판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주목을 끈다. 거제도를 비롯한 남부 섬지방에는 경판 재료로 쓰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및 후박나무 등이 풍부했고 이를 통 털어 거제목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경북 봉화군 춘양지방에서 나오는 나무를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제도에서 새겨진 완성 경판, 혹은 바로 글자를 새길 수 있는 "초벌 경판" 이 개경포를 통해 해인사로 옮겨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시대는 전혀 맞지 않지만, 팔만대장경을 새긴 분사대장도감의 위치로써 다른 어느 곳 보다 유리하므로 전설이나 믿을 수 없는 자료로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팔만대장경각을 적다[題八萬大藏經閣]> 박윤묵(朴允默 1771~1849)
僧言自古大藏閣 스님이 말하길, 대장각은 예로부터
落葉浮埃不敢侵 낙엽이나 먼지가 감히 침범하지 못하게 건축했다.
萬寶光明花點點 수많은 보물이 꽃처럼 점점이 밝고 환하게 빛나니
전각 문 내지에 핀 꽃이 일 년 내내 푸르다고 전한다.(閣門內地花四時長靑云)
千神拱護晝沉沉 많은 신(神)들이 오래도록 함께 지켜주어 왔다.
若微若顯盈天地 없는 듯 있는 듯 천지에 가득하고
無滅無生貫古今 삶도 죽음도 없이 고금을 관통했다.
慧力妙工誰敢測 지혜의 힘과 훌륭한 솜씨를 누가 감히 헤아리랴
板頭箇箇是烏金 경판 모서리 하나하나마다 검은 금(金)으로 둘렀네.
2) 해인사 사적비(事跡碑). [해인사복고사적비(海印寺復古事蹟碑)]
한편 해인사 사적비는 조선 영조45년(1769년)에 세운 것인데 비문내용 중에 [高麗文宗時藏大藏經板 我惠莊大王 戊寅歲 重修板閣又印其經文焉]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고려 고종보다 거의 200여년이나 앞선 고려문종(재위1046-1083년)시대에 경판을 해인사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으로서 이 역시 같은 이유로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 한편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기록된 이거인 관련 내용을 보면 <해인사유진팔만대장경개간인유>와 거의 비슷하나 말미에 주목할 부분이 있다. "이 때 거제도 앞바다에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모를 큰 배가 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배안에 팔만대장경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글자는 모두 금은으로 되어 있었다. 애장왕은 온 나라 기술자를 동원하여 이거인과 함께 대장경을 간행하고 해인사에 옮겨서 보관하게 했다". 해인사 고문서에 나타난 이 두 가지 기록은 경판을 새긴 연대로 보아 팔만대장경판과 직접 관련시키기는 어려울지라도, 해인사에 예로부터 경판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설은 기록의 연대가 맞지 않음으로써 대부분의 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3. 해인사 대장경 경판 나무, 거제도 관련 각종 기록.
1) 해인삼미(海印三味)씨는 내 본산(本山)자랑이라는 잡지의 해인사 장경각 경판(海印寺의 藏經閣과 經板)이라는 글에서 ["경판(經板)의 전면(全面)에 칠을 하고 용재(用材)는 백화[白樺(자장나무)]인데 제주도, 완도, 거제도 등에 산출(産出)한 것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 무능거사(無能巨士)씨는 이조불교사(李朝佛敎史)라는 글에서, ["용재(用材)는 장목[樟木(조선에서는 후박(厚朴)이라 칭함,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鬱陵島)에 産함)]인데"]라 하였다.
3) 한편 만해(萬海) 한용운은 해인사순례기(海印寺巡禮記)라는 수필에서, ["체재(體裁)로 말하면 백화[白樺(자작나무 혹은 거재나무)]의 質인데"]라고 하였다.
4) 기타 李 ?永씨는 고려대장경 역사 의미(高麗大藏經, 그 歷史와 意義)라는 글에서, ["목재는 제주도, 완도 및 거제도산인 자작나무를 ?는 데 조조(雕造)가 시작되기까지는 나무를 오래도록 해수(海水)에 저려 부패를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고 그것을 다시 충분히 말린 후에야 판목을 만들었고 조조(雕造)가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5) 조명기(趙 明基씨)는 국보고려대장경(國寶高麗大藏經)의 가치(價値)라는 글에서, ["용재(用材)는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산출하는 후박[厚朴(화樺, 자작나무 혹은 거재나무라고도 함)]이다. 강화도 본사(本司)에는 적당한 목재가 없기 때문에 영남지방의 남해 거제도 등에서 생산하는 원목을 벌체하여 천리 길을 운반하였다가 수년간 해수에 담그고 또 염수(鹽水,소금물)에 증(蒸,찌다)하고 2.3년씩 건조하여 이것을 판자로 제재한 다음에 필사(筆寫)한 경문을 조각한 뒤 옻칠을 하여 영구히 부식함이 없도록 제작한 것이다"] 라고 하였고
6) 서수생(徐首生)씨는 가야산 해인사 팔만대장경 연구(伽倻山 海印寺 八萬大藏經 硏究)에서, ["용재는 백화(白樺)인데 자작나무라고도 한다. 일명 거제도나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제주도, 완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이 나무를 벌채하여 3년동안 바닷물에 담궜다가 꺼내어 짝을 쳐서 다시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말린 뒤에 대패질을 하고 경문(經文)을 모필(毛筆)로 써서 판에 새긴 것이 이 경판이다. 그리고 뒤틀리지 않도록 두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이고 옻칠을 가볍게 하고 네귀에 동제(銅製)로 장식하여 성판(成板)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해인사[海印寺] 1920년(庚申)> 조긍섭(曺兢燮 1873∼1933)
鍾聲日午出雲遲 한낮 범종소리에 더딘 구름이 나타나더니
梵殿遙從樹裡知 불당 멀리까지 쫓아와 숲속에 떠있네.
玄鶴琴傳于勒語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만들어 전해주었고
梨花雨歇石川詩 배나무 꽃에 비 그치니 석천(石川)의 시(詩)일세.
三千界濶人來往 온 천하가 넓게 트이어 사람들이 오고가는데
八萬經深鬼護持 팔만대장경이 중하니 귀신들이 지켜 보호한다네.
絕頂伽倻餘咫尺 가야산 제일봉이 지척간이니
長鑱聊欲問靈芝 부족하나마 긴 보습 쥐고 영지(靈芝) 찾아볼까 하노라.
<대장경[大藏經]> 이유원(李裕元 1814∼1888)
人在西天法苑塲 인간이 살만한 곳은 서천(西天)에 있다지만
夢魂長濕芸花香 몽혼(夢魂)은 꽃향기에 촉촉이 젖어
板雕靈異遙伽嶽 영리(靈異)한 판조(板雕)를 먼 가야산 큰 산에
卷帙完全庋正陽 완전하게 권질(卷秩)로 갈무리해 두었네
五十凾成充一室 50여 상자는 방 한 칸을 채우고
七千編富演三藏 7천편의 삼장(三藏)으로 넉넉하니
沙門功德唐皇帝 사문(沙門)은 당황제의 공덕이요
萬物終歸種福鄕 만물은 축복의 땅으로 돌아감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