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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여름캠프 주제3강
하늘소망
말씀 / 요한계시록 21:1∼22:5
요절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3)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4)”
여러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숫자가 어떤 숫자인가요? 4라는 숫자를 대부분이 싫어합니다. 왜 그렇죠? 죽을 사(死)자가 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다루는 병원 엘리베이터에는 4층을 F층로 표시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죽음이란 것이 우리가 경험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공포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일을 겪을 때는 빨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 죽고싶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빨리 죽고 싶은 것이나 모두, 죽음으로 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속에는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제일먼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불신자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신자에게는 천국으로 향하는 통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 말씀은 장차 우리가 가게 될 천국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b,3).”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천국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Part1. 새 하늘과 새 땅(21:1~8)
1,2절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의 눈앞에 새하늘과 새 땅이 펼쳐졌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있지 않았습니다(1). (참고로 유대인에게 바다는 어둠과 혼돈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목격합니다. 그 성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해 준비한 것처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2). 요한이 아름다운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을 때, 하나님의 보좌에서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3b),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현재 사도 요한은 하나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한 이유로 밧모섬에 유배된 상태입니다(1:9). 그는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보았습니다(1:10). 그리고 지금 주님 재림하시는 날에 임할 천국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천국은 어떤 곳인가요?
첫째, 천국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곳입니다. 3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하나님은 3번씩이나 거듭거듭 반복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비극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이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그 죄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채 쉼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장막 즉 성막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친히 함께하셨으며, 부활하신 이후에는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안에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기 계신 많은분들이 수양회 기간 말씀을 통해서, 소감을 통해서, 찬양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감동케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체험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경험은 지극히 부분적이고, 희미하며, 일시적인 경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하나님의 임재만으로도 감동하고 감격하는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22:4a) 함께 지내는 천국에서의 경험은 얼마나 황홀하고 감격스러울까요?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천국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며,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주님을 알 수 있는 곳,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곳이 바로 천국인것입니다.
둘째, 천국은 세상의 모든 고통이 치유되는 곳입니다. 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전혀 있지않는 세상, 이런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은 오직 천국뿐입니다. 여러분! 이 천국에 빨리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빨리 가고싶더라고 우리는 이 땅에서 맡겨진 사명을 다 감당하고 하나님 부르실때에 가야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에 가면 제일 먼저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요? 이에 관한 유머 한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도착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그림으로만 보던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보고싶던 예수님을 보게 되자,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을 보게되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엉겹결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처음 뵙습니다 예수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말없이 그 사람을 꽉 안아주더니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고 합니다. 아마 실제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도 제일 먼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립니까?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것도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경험하는 순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여전히 애통으로 가득하고, 곡하는 슬픔과, 육체의 질병과, 마음의 상처로 인한 아픔이 가득하며, 결국은 사망을 피할 수가 없는 곳 아니겠습니까?
소감을 들어보면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물질 문제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가족의 질병으로 인한 슬픔과 아픔, 가정불화로 인한 고통, 단지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눈이 작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고 왕따당한 설움 등으로 남모를 눈물을 흘렸습니다.
청년들은 차별과 경쟁이 만연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지만, 오르지 않은 성적으로 인해 좌절하고, 입시 실패, 취업 실패, 풀리지 않는 결혼문제로 좌절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이런 유머가 있었습니다. 졸업할 때 취업하고 애인도 있으면 금메달, 취업만 하면 은메달, 애인만 있으면 동메달, 둘 다 없으면 목메달, 저는 졸업할 때 목메달이었습니다.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입니까?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캠퍼스에 나가 전도하며 새파랗게 어린 학생들에게 무시당하고 잡상인 취급을 당하기도 합니다. 직장생활은 어떻습니까?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참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 세상이 죽음으로 끝이라면, 만약 천국이 없다면, 이런 자들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들일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이땅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2:19-20).
왜냐하면 저 천국에서 주님이 우리를 맞아주시고,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은 이 땅에서도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러나 저 천국은 슬픔과 아픔 자체가 없는 다시 흘릴 눈물이 전혀 없는 세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겨주시는 예수님, 그분과 함께 하는 곳이 바로 천국인것입니다.
셋째 천국은 만물이 새로워진 세상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창3:17).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으로 인해 땅은 홍수심판을 받았습니다(창6:5).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범죄로 함께 징계를 받았던 만물을 새롭게 회복하심으로, 상실했던 첫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만물이 새로워진 세상은 더이상 어떠한 오염이나 파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화석연료로 인한 지구온난화, 미세먼지, 미세플라스틱으로 인한 걱정, 대기오염, 오존층의 파괴, 후쿠시마 오염수로 인한 수질오염 등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태계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실 것이며 창조된 생태계를 완벽하게 회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죄로 저주 받은 동물들도 새롭게 되어 함께 뛰노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사11:6-9)는 이 아름다운 천국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6),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7),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8),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9).”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까?
6,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6),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7)”
바로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께서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 영원히 타는 불못에 고통받을 우리 인간을 위하여, 성경의 기록된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계21:6b, 계22:17)”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쏟으셨습니다. 삼일만에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된 것입니다(고전15:22)’.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어서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때가 되면 우리를 부르시려 다시 이 땅에 내려오실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 곧 이긴 자들은 이 천국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핍박을 두려워하여 믿음을 저버린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진리를 떠나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져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8)’.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천국, 세상의 모든 고통이 치유되는 천국을 소유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Part2.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21:9-22:5)
이제 천사는 사도요한을 크고 높은 산으로 인도하여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도록 하였습니다(9,10). 그러면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 성의 외형이 어떠합니까? 11절~21절은 성의 외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모양은 지성소와 같은 정육면체 모양(가로,세로,높이 각각 12,000스타디온=2200km)으로, 밑넓이가 미국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의 성입니다(16). 성은 유리같이 맑은 정금으로 지어졌습니다(18b). 성 주위에는 22대의 차가 지나다닐 수 있는 두께(144 규빗=70m)의 성곽이 있습니다(17). (참고로 여리고성 성곽의 두께는 마차가 2대정도 지나갈정도의 두께였다고 합니다.)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18a), 그 아래에는 각종 보석으로 꾸민 열두 기초석이 있고(19), 기초석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14). 성곽에는 동서남북 각각 3개씩 문이 있고(13), 각 문은 커다란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습니다(21). 그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습니다(12).
전체적으로 밖에서 보는 성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름답게 빛이 났습니다. 그 빛은 마치 지극히 귀한 보석이 반짝이는 빛과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은 빛이었습니다(11).
요한은 이제 성의 내부를 보고자 진주로 된 문을 통과하여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맑은 유리같은 정금길을 따라 걸어갔습니다(21b). 새 예루살렘성은 길에 깔린 보도블럭마져도 황금인 것입니다. 요한은 성의 핵심인 성전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후, 광야시대부터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 자체가 그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22). 옛 성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참 성전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새 예루살렘 한가운데 계셨습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과 같이, 특별히 임재하시는 장소로서의 성전이 더이상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성의 내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어린 양 예수님이 등불이 되심으로 해와 달이 필요치 않았습니다(23). 이처럼 세상의 어떤 성이나 성전보다도 크고 웅장하며, 각종 보석이 아름답게 빛나는 거룩한 성,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성, 천사는 이 거룩한 성이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라고 소개합니다(9). 어린양의 아내, 신부는 곧 교회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 당시의 교회공동체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로마인의 생활방식을 따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독교인들은 별종 취급을 받고 차별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향한 핍박은 점점 거세져서, 경제활동이 어려워 굶주렸으며, 누명을 쓰고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 죽어갔습니다. 교회공동체는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초라하며 천대받는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의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로서 세상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고귀하며,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너희들을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수 없이 아름답고 존귀한 나의 신부란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라.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데리러 갈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아라. 힘을 내거라.’ 주님께서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어린양의 신부입니다. 우리는 어린양의 거룩한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며 좌절하거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저 천국을 바라보고 주님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거룩한 신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누가 저 거룩한 성에 들어갑니까?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갑니다(27b). 동서남북 사방으로 뚫린 문들을 통하여 생명책에 기록된 만국 백성들과 땅의 왕들이 빛 가운데로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가지고(24b),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26)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선지자와 같이 거짓말하는 자들은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27a).
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은 짧습니다. 그러나 저 천국에서의 삶은 영원합니다. 눈앞에 현실이 힘들고, 낙심이 되고, 외롭고, 슬프더라도, 예수 이름으로 인해 고난과 핍박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어린양의 거룩한 신부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당당히 세상에 맞서 싸워 승리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 혼자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이 땅에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늘함께 동행하십니다. 또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눈앞에 있는 시험이 비록 우리 눈에 넘지 못할 산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하게 하시고, 또한 피할 길을 내주십니다.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최용덕 간사님이라고 아십니까?” “찬미예수”아시죠? 이 찬미예수를 발간하신 분이 최용덕 간사님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아주 유명했던 CCM 가수였습니다. 그는 미혼모 자식으로 첩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네 살때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가난으로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라면이라도 실컷먹어보는게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소심하고 울음이 많았던 그를 친구들은 ‘찌질이, 쪼다’라고 놀려댔습니다. 그는 늘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운명주의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 갑자기 다리에 류마티스 관절염이 발병하였습니다. 발목에서 시작한 관절염은 무릎과 고관절까지 올라와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퉁퉁부은 다리를 끌고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식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정말로 살아계신다면 제 다리를 고쳐주세요’ 울고불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임했다고 합니다. “용덕아 네 다리만 바라보지 말고 나를 바라봐라” 그는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자 신약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사 나를 위해 영원한 나라 예비하시고, 때가 되면 부르러 오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고 눈물로 회개할 때에, 기어서 들어갔던 기도원을 두발로 걸어나오는 기적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찬양사역자의 삶을 살며, 악보가 귀하던 당시 ‘손악보’를 그리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찬양사역자로 잘나가고 있을 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원인모를 병이 생겼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접고 산골로 들어갔습니다. 6년동안 벙어리 훈련을 하며, 그곳에서 그는 찬미예수 1000과 1500을 출판했다고 합니다. 이후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사역을 섬기는 중 딸이 뇌종양으로 죽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나의 모든 고난과 아픔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든 여러곡중에 벙어리 훈련하며 만든 곡이 있습니다. ‘AM오버튼’이 작사한 글에 곡을 붙인 곡인데, 바로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라는 곡입니다.
내가 걷는 이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스러질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할 길을 잘 아심일세. <이곡을 가사를 생각하며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가야할 길을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 동행하여 주시고, 친히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십니다. 감당할 수있는 힘을 부어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시련이 와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늘 소망을 붙잡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22장 1절에서 5절은 저 천국이 어떤 곳인지 덧붙여 설명해줍니다. 그곳에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길 가운데로 흐릅니다. 이 강의 발원지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입니다. 강가에는 생명나무가 강 좌우에 가로수로 쫙 갈려 있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달마다 맺습니다. 열매 맛이 다 다릅니다. 열두가지 맛이 납니다.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병통치약으로 만국 백성들을 치료해 줍니다. 이곳은 다시 저주가 없으며, 다시 밤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천국에서 신랑되신 우리 주님의 얼굴을 마주보며, 함께 생명수 강가를 산책하는 그날을 소망하며, 담대하게 이 땅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코로나 이전 가을수양회가 끝나고, 요회별 사진콘테스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 담당이었습니다. 각 요회에서 정말 다양하고 창조적인 컨셉으로 사진을 찍어 보내왔습니다. 저희 요회 사람들은 모두가 다 겸손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들이어서, 아무런 컨셉없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다른 요회에 비해 사진이 초라하고 촌스러워 보였습니다. 저는 이사진의 제목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이런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11:38a).” 그래서 저는 사진의 제목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때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내가 도대체 뭔 생각으로 이런 제목을 지었을까? 그래서 저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히브리서 말씀을 찾아봤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에 맞아 죽고 톱과 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들의 믿음의 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까? 말씀에 기초하여 묵상해보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우리와 뭔가 다른 특별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보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히11:16)’.
하나님은 가난과 가정불화로 인생을 비관하며 외롭고 우울한 삶을 살던 제 인생에 일방적으로 찾아오시고 불러주셨습니다. 가정에서 받지 못한 사랑을 교회 선생님을 통해서 받게 하시고, 믿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청년 시절 세상 재미와 쾌락을 쫓아서, 하나님을 떠나 방황할 때에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 마음으로 저를 기다려주셨습니다. 2008년 아름답고 현숙한 혜미목자님과의 결혼을 통해,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제 ‘불행끝 행복시작’일 것이라 생각했던 결혼생활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여러 문제들 앞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특히 자녀문제를 통해 하나님은 저희부부를 연단하셨습니다. 남들은 쉽게만 생기는 아이가 생기지 않음으로 인해 작정기도케하셨고, 그 결과 3명의 자녀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잦은 질병치레와 학교생활 부적응 문제 등으로 저희 부부는 근심이 되었고, 더욱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큰아이는 어려서 편도와 아데노이드 비대로 인해 자주 감기에 걸렸으며, 호흡을 불편해하고 고열에 고생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수술을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틱증상이 심해 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말로만 듣던 ADHD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높은 긴장감과 불안으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자녀문제를 통해 하나님은 저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시고,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깊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나를 단련하시며 인생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자녀문제로 인해 어린 영혼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시고, CBF 사역을 맡게 하심으로, 마지막 시대에 미래의 영적 지도자들을 양육케하시는 목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또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많은 사건사고 가운데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되돌아보면 순간순간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사생활을 하며 학생들에게 나름 인기가 있고, 학생들이 잘 따르던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2년전 학교의 학생들은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사에게 욕을 하며 대들기도하고, 복도에 소화기를 뿌려 난장판을 만들고, 복도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침을 뱉고, 일하는 아저씨에게 욕을하여 아저씨가 일하던 낫을 들고 교장실로 쫓아오기도 하였습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가 이러려고 교사를 했나 자괴감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할때에 내가 바로 이런자임을 깨닫게하시고, 상처입고 방황하는 그들의 내면을 바라보게 하시며,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제가 이런 상처받은 아이들을 위로하고 학생들이 변화되고 회복되도록 말씀으로 돕는 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 나의 믿음을 단련하시고, 이 땅이 아닌 저 천국을 바라보는 하늘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고난은 끝이 없습니다. 시시때때로 우리 인생 가운데 찾아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여 주시고,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여주실 것을 믿기에, 제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믿음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것입니다. 제가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어떠한 시련이 와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늘 소망을 품고 ‘세상도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의 손길을 느낄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문제만을 바라보지말고, 우리 인생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세상 무엇보다도 존귀하고 아름다운 어린양의 신부들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속히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 소망이 아닌, 하늘 소망을 붙들고, 잠시 머무는 이 땅에서 세상도 감당치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굳건하게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