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내려오면서 보니, 그 주변엔 의외로 들이 넓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 '숫고개'는, 아까 내가 음성 쪽에서 올라올 때는 그다지 멀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올라올 때는 힘이 상당히 들어서 진이 다 빠졌었다.),
내리막은 어찌나 긴지,
아, 만약... 거꾸로, 이 쪽에서 올라갔다면(아까 그 젊은 사이클 청년처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할 정도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긴 거리였다.
그러니 그런 상황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내려오는데, 한 마을의 진입로에는 상당히 많은 '맨드라미'가 빨갛게 피어 있었다.
그러니 내가 그냥 달릴 수만은 없어 자전거를 세워야만 했는데,
다만 안타까웠던 건, 그 순간엔 해가 구름에 가려, 그 붉은 색이 더 밝고 강한 상태로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해가 나오기를 한참 기다렸지만, 내가 기다린다고 해가 나와줄 리는 없었고.
그러고도 한참을 달렸는데 여전히 '내리막'이 이어지다 보니,
야, 오늘은 무슨 날이기에 이렇게 재수가 좋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만약 내가 이쪽에서 올라가는 행로였다면, 고개마루에 닿기 전에 쓰러지고 말았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긴 오르막이 됐을 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놀라운 건,
가만히 보니 충주 주변은 '월악산' 등 의외로 산이 많은 것 같았는데(실재로도 산이 많았다.),
오늘 내가 달리는 길엔 상당히 넓은 들판길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내가 큰도로를 피해 농로 위주로 자전거를 달리고 있기는 했지만, 보통 들판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리 밑 신선(神仙)?)
이제 평지에 닿았고 도심에 접어들고도 있는 것 같았다.
길도 넓어지고(아스팔트를 탈 수밖에 없었고) 집들도 많아졌는데,
자전거길 표시가 난 한 천변 둑방길로 접어들었고, 그 앞쪽엔 커다란 교량이 있어서 그 아래를 통과하려다 보니,
차량 몇 대가 주차돼 있었고 둑방엔 평상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에 서너 사람이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다리 밑을 지나치려다, 마침 그 때는 강렬한 햇볕이 내려쬐는 순간이기도 해서,
이제 평진데, 뭐, 바쁠 일 있어? 하는 생각에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고 그 쪽으로 자전거를 끌고 갔다.
아까 산간 마을에서 식사를 대접받아 좋았던 일은 그렇다 쳐도, 내 몸은 여전히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내가 그들에 인사를 하면서 자전거를 세우자,
"어쩐 일이셔?" 하고 그 중 한 분이 물었다.
"좀, 쉬어갈까 해서요."
"그러슈! 근데, 자전거를 타고 다니세요?" 하고 호기심어린 질문을 해왔다.
"예..."
"어디서 오셨는데?"
나는 그런저런 자세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원래 그런 얘긴 잘 않는다.) 그래서,
"예, 충주에 가는데, 한낮이라 그런지 해가 너무 뜨거워서......" 하고 말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는데,
"그럼, 음성 쪽에서 내려왔단 말이오?" 하고 물어서,
"예." 했더니,
"연세가 몇인데, 그 긴 고갯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닌단 말이오?" 하기에,
"음... 56년 생입니다." 하자,
"아, 그래요? 우리는 셋 다 57인데......" 하는 식으로 얘기가 시작됐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들의 질문공세를 받아), 어제 '양평'을 출발해 '충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주변을 돌다가 오늘도 충주에 간다는 말까지는 해야만 했다.
그러자 그들도,
"대단하시네요!"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면, 행복하면 된 거 아니겠어요?" "자전거가 좋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저 자전거로요?" 하는 등, 매우 관심을 가지고 나에게 얘기를 시켰는데,
그런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내 관심을 끄는 게 있었다.
그 다리 밑에는, 그들 그룹이 특별히 만들어 놓았다는 그 평상(그들 셋은 평상에 앉아 막 점심을 먹은 뒤라는 것이었다. 그 주변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서. 그렇 듯 거기는 그들의 모임장소였고, 그 뒤쪽엔 간이 화장실을 마련해 놓았을 정도로 그들만의 특별 모임장소라는 것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어떤 한 사람이 누워서 잠을 잤던 것 같은, 골판지가 바닥에 깔려 있었는데,
나도 저기에 좀 누웠다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래)
그래서, 얘기를 하다가 기회를 잡아,
"저기 누군가 누웠다 간 흔적이 보이는데, 나도 좀 누웠다 갈까?" 하고 나는 일부러 그들이 듣게끔 조금 큰 소리로,
마치 그들의 허락을 받기라도 할 것처럼 말을 했더니,
"그러세요. 시원할 테니......" 하면서야, 나는 그들의 질문공세에서 벗어나...
그 자리에 가서 정말 눕고 말았다.
그들 평상과는 한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독립된 공간 같은 기분도 들었고, 다리 밑이라 시원하기는 이를 데가 없었다.
아, 너무 편하고 시원했다. 그러다 보니,
오늘, 무슨 날이기에... 이렇게 여행을 다니면서 그 '참맛'을 골고루 느끼게 된다지? 하고,
아까 마을에서 식사대접을 받았던 것과 연결시켜가며, 여전히 나에게 다가오는 '행운'과 '자유로움'에,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야......
나는 마치 무슨 '도인'이거나 '신선'이라도 된 듯(?), 호기까지가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강가 다리밑에서......
아마 한 시간은 더 지났을 것이다.
정말, 참 잘 자고 일어났는데(너무나 맛있는 낮잠을 잔 뒤 눈이 저절로 떠졌는데),
그들은 여전히 도란도란 자기들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누워서도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제 슬슬 떠나볼까? 하며 일어났다가,
그냥, 그대로 떠나오면... 그런 것 역시 '기억'에만 남을 일이 될 터라,
기왕에 기록을 해두는 김에, 이것도 사진으로 남겨두는 게 좋겠다. 란 결론을 내고는,
그렇지만 그 옆의 노인들에게 너무 경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조심조심 디카를 조절해가며, 그 '기록 사진' 몇 컷을 찍기에 이르렀다.
내가 그런 생뚱맞은 행동을 하자, 역시 아주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들은,
"참, 재주도 좋네요. 혼자 자동으로 사진도 찍으시고...... " "근데, 동영상을 찍어서, 어디 유튜브 같은 데에 올리는 분이세요?" 하고 묻기도 하기에,
이번에도,
"이건 사진인데요, 이렇게 제가 여행 다니는 모습을... 기록을 해놓기는 한답니다. 그런 뒤, 괜찮은 게 있으면... 나중에 동영상 같은 걸 만들어 볼 생각은 있지만, 일단 기록을 위해 사진을 찍어두는 거지요." 하는 식으로 대답을 해주고는,
내가 원래 가려던 방향엔 길이 끊긴다기에,
들어왔던 길로 다시 나와, 충주를 향해 그 건너편에 있던 둑방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쩐지 여태까지의 내 피곤했던 몸이 상당히 회복돼 있는 느낌이었던 것으로,
이제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것도 그리 힘들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참 신기했다.
그래봤자 이제 하루 반이 지났을 것 같은데,
어느새 내 몸이 이 '자전거 여행'에 익숙해져 있는 것일까? 하고 스스로도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건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그렇게나마 몸이 풀려준다면, 앞으로의 행로에 나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들판은 아무리 봐도 넓었다.
여기가 평야지대가 아닌데도 이런 넓은 들판이 있다니! 세상은, 이렇게 돌아다녀봐야 알 수가 있어...... 하는 생각이 아니 들지가 않았다.
이제 멀리 충주 도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저 산보가듯 나왔던 오늘 여정도 그리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었다.
허긴,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나오면, 그 자체가 편하고 안락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 하면서, 역시 힘에 부쳐 페달을 밟아 나가는데,
그 강에는 '수상스키'를 타는, 물찬 제비 같은 처자가 시원한 물보라를 내뿜고 있었다. (아래)
그래, 이 세상엔... 나 같은 '못 말리는 사람'도 있는 거지만, 저런, 나에겐 해보라고 갖다 준 떡이 된다해도(천금을 준다고 해도) 하지 않을 일을 즐기는 사람도 있는 거지. 그렇게 각자는 자신의 행복을 찾으면서 사는 거고...... 하면서, 사진에 담아두기까지 했다.
첫댓글 자유를 만끽하는 여행, 삶.
그게 인생 최고입니다.
궁핍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바빠서 여행도 못 가는 사람에게는 그렇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