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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44
4월28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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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니꼴라오 추기경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http://pf.kakao.com/_xhGxjBxb/6482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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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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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f3p8PhoI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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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 자비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밥먹듯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위로가 되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사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하느님 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우상숭배 앞에 크게 진노하시며 벌주시는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저지른 잘못이나 악행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시는 징벌의 하느님 얼굴을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입에 달고 다니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
은혜롭게도 육화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심판자나 처벌자의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더없이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행길의 절친한 동반자로, 끝도 없이 기다리고 용서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도 제 삶 안에 길게 드리워진 짙은 죄의 뿌리를 슬픈 얼굴로 바라봅니다. 밥 먹듯이 지어온 숱한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죄질이나 죄 값은 뒷전이신 예수님, 오직 우리들의 해방, 구원,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이 지극하신 자비의 예수님 때문에 오늘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서야겠습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모두 구원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 자비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단죄하고 속박하지 않는 한, 결국 우리는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예수님 앞에 오늘 우리 각자가 취해야 할 태도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스스로를,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유심히 바라보면 성(聖)과 속(俗)이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어제 천국을 살았지만 오늘은 지옥 체험을 합니다. 어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탄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각자 개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는 시시각각으로 늘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예수님께로 나아가야합니다. 그분께서 매일 건네시는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듣고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심판받지 않고 구원되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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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4f-XEdH0J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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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에 머물려면 만인 앞에 솔직해져라>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빛은 성전 안에 있는 진리입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빛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누구 곁에 머물거나 어떤 집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집의 규칙을 지켜야 하고 상대를 의식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옆에 머물며 할 수 없는 행동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면 그분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현존이 곧 뜻이고 그리스도의 현존이 곧 빛입니다. 그러니 빛은 현존이고 계명입니다. 우리가 그분 계명 안에 머물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은 우리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게 해서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과 대화함으로써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지 않았다면 선악과를 따먹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현존을 잊음으로써 어둠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 안에 머물며 구원받으려면 항상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의 현존을 항상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이 한 이 말을 되새겨야 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눈에 보이는 사람들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마음에 들기 위해 살기 이전에 사람들 눈에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사람들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빛 속에 머물게 됩니다.
‘정직한 후보’(2020)는 ‘정치인이 거짓말을 못 하게 된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할머니의 죽음과 보험회사와의 싸움을 통해 국회의원이 된 주상숙은 4선 당선을 위해 국민에게 거짓말을 일삼으며 인기몰이를 합니다.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싸구려 옷을 입고 낡은 신발을 신고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척하지만 실은 값나가는 옷을 입고 좋은 구두를 신으며 어마어마한 저택에 삽니다.
하지만 주상숙에게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모두가 죽은 줄 아는 주상숙의 할머니 김옥희입니다. 김옥희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지만 죽은 걸로 기록되어 있고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상숙을 부른 김옥희는 제발 거짓말하지 말고 철 좀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돌탑을 쌓고 소원을 비는데 그날 이후로 주상숙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이상한 현상을 겪게 됩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던 주상숙은 공식 석상과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진실만을 말해 고민에 빠집니다.
사실 줄거리보다는 솔직한 정치인의 생각이 담긴 대사가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가 찾아온다고 할 때 남편에게 “너희 집 얘기만 나오면 짜증이 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사 프로그램에 나가서 야한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자가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런 19금 토크를…. ”이라고 말하니, “어차피 투표는 19금이니까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녀는 고백합니다.
“나, 말이 내 맘처럼 안 나와. 말이 똥처럼 나와.”
그나마 솔직함으로 밀고 나가자는 유일한 희망을 찾고서는 “늦어서… 죄송하진 않아요.”라고 인사합니다.
“나는 서민의 일꾼이다.”라고 말해보라는 보좌관에게 “야, 내가 서민의 일꾼은 아니잖아.”라고 합니다. 연설을 하면서 이런 말들도 쏟아냅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사는 동네로… 만들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똑똑해지면 저 같은 사람은 아주 골치 아파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는 정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 자신과 함께 비리를 저질러 온 사람들을 폭로하고는 자신도 2년 감옥살이까지 합니다. 이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잠시라도 빛 속에서 살던 때가 좋았기에 계속 솔직해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어떤 정치인이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말을 하다 실수를 해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무선 마이크를 차고 미사를 하시다가 미사를 마치고 제의방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다 그 소리가 성당에 다 들렸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었습니다. 이것이야 잘못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듣다보니 ‘항상 신자들이 다 보고 듣는 가운데 살아간다면 죄지을 일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다는 것은 외적인 것으로 덮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솔직함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거짓된 속성을 뜯어버리시고 아드님의 정직함을 입혀주십니다. 그것이 가죽옷입니다.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들이 빛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분과 함께 있으면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계명 안에 머물고 싶거든 먼저 솔직해집시다.
가장 좋은 것은 만인 앞에서 할 수 없는 것은 안 하는 것이고, 만인이 들어도 괜찮은 말만 하는 것입니다. 생각까지 그럴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혼자 있을 때도 만인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시다. 사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의 천상 백성이 지켜보고 있고 하느님도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빛 안에 머무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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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44-50 :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44절) 아들을 모르는 사람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1요한 2,23)고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아들을 고백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을 다 모시고 있다.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그분은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으며 당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들로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당신을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이 같은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흐르는 물을 사용하는 사람은 사실은 그 물이 흐를 수 있게 한 샘의 물을 쓰는 것과 같다. 흐르는 물의 본질은 샘물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는 말씀을 바라봄으로써 아버지를 볼 수 있으며, 아들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는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들을 영원으로부터 보고 계시며, 아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6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세상의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하며,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에 싸일 것이다. 우리를 비추는 빛이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간이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둠 속에 남아있지 않으려면 세상에 오신 빛을 믿고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 한다. 빛을 피해 다시 어둠 속으로 가서는 안 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47절) 주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고 하셨다. 그래서 당신의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다. 정녕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호세 6,6 참조)라고 하신 것과 같이, 희생제물은 의로운 사람을 더욱 맞갖은 사람이 되게 하고, 자비는 죄인이 구원받게 해 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원의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이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48절) 이 말씀은 그분이 마지막 날에 몸소 심판하실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시는 말씀이다. 그분이 하신 말씀은 바로 그분 자신이시다. 그분의 말씀이 바로 그분이기 때문에 그분으로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업신여긴 이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단죄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다.”(49절)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인격적 말씀이시니 아버지를 잘 알려주실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뜻을 밝히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도록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셨으며,그러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니 이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50절)영원한 생명이 아들이고 하느님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곧 아버지의 명령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50절)라고 하신 것이다. 즉, “지금 너희에게 말하는 내가 바로 말씀이다.”라는 말씀이다. 아버지는 참되시고, 아들은 진리이시다. 참되신 분께서 진리를 낳으셨다. 이 진리는 처음부터 완전해서 새로운 진리를 보탤 필요가 없다. 당신의 진리를 말씀하시면 되는 분이다.
이렇게 아버지의 말씀이시고, 진리이신 그분을 맞아들이고 따르면서 항상 빛속에 살며 세상을 비추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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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의 전반부를 마무리하는 부분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하여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참하느님을 모시고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가 알게 해 주시고, 그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주님 성탄 감사송 1)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 주신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세상의 빛’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파스카 성야를 떠올려 보면,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솟아오릅니다. 죄의 어둠, 무지의 어둠, 사랑이 없는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한 줄기 빛을 비추십니다. 마치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밝히듯이,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어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이제 그 십자가 사랑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심판받지 않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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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이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라는 말은, “예수라는 이름의 한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라”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라는 복음서 저자의 신앙고백으로 시작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마무리된 책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표현합니다.(콜로 1,15) 또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고 표현합니다.(히브 1,3)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이 말씀은,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구세주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과 같은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어둠 속에 머무르다.’ 라는 말씀과 ‘어둠 속을 걷는다.’라는 말씀은, 죄 속에서 살다가 멸망한다는 뜻이고,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둠 속을 걷지 않는다, 생명의 빛을 얻는다.’라는 말씀들은 모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라는 말씀과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은, 죄 속에서 살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씀과 “나를 따르는 이”라는 말씀은, ‘멸망’을 피하고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을 가리킵니다. ‘빛’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일은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구원의 길’로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라는 말씀은, “죄 속에서 사는 사람은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모른다.’ 라는 말의 뜻은 ‘무지’보다는 ‘외면’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의 길’을 외면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7-50)
이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내가 주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것이다.”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요한 3,17)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잃은 양’을 하나라도 더 구하려고 찾아 헤매는 목자이신 분이시고(루카 15,4-7), ‘부러진 갈대’ 같은 사람도, ‘연기 나는 심지’ 같은 사람도 살리려고 애를 쓰시는 분이십니다.(마태 12,20)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믿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의 심판을 받기 전에 ‘지금’ 자기들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에 있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보면, 심판관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 세우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마태 25,32-33), 실제 상황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갈라 세우시기 전에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 것입니다. (자기가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를 알고서 그쪽으로 갈 것입니다.) “왼쪽으로 가야 하는데도 시치미를 떼고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또 오른쪽에 설 자격이 충분히 있는데도 너무 겸손해서 왼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바오로 사도는 ‘심판의 날’을,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의 숨은 행실들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로마 2,15-16) ‘그날’은 모든 것이, ‘숨은 행실들’까지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날이고, 각 개인의 양심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날이고, 자신의 죄 때문에 부끄러워서 숨도 쉴 수 없는 날입니다. 그래서 왼쪽으로 가야 할 사람이 시치미를 떼고 오른쪽으로 가는 일은 감히 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날이 닥치면, 왼쪽으로 가야 할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절망하면서 스스로 왼쪽으로 갈 것이고, 오른쪽에 설 자격을 얻은 사람은 기뻐하면서 오른쪽으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은 그날이 되어서야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오늘’ 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삶’이 곧 선택입니다.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구원과 심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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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4년입니다. 중서울지역 ME 대표사제를 맡게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봉사자들에게 ‘가문비나무의 노래’라는 책을 선물했습니다. 책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미처 읽지 못하였습니다. 2021년입니다. 미동북부 ME 대표사제를 맡게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봉사자들에게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서 ‘가문비나무의 노래’를 선물했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내서 책을 읽었습니다. 앞에는 강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 깊은 산 속에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상의 분주함에서 잠시 떠나 피정을 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짧은 글과 사진들이 영혼을 울리는 잠언과 같았습니다.
높은 산에서 자라는 가문비나무는 좋은 악기의 재료가 된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겨울을 이겨내면서 나이테는 촘촘해지고, 세포막이 단단해져서 악기에 필요한 ‘공명’이 잘 생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높은 산에서 자라는 가문비나무는 아래에 있는 줄기는 스스로 잘라내고 높은 곳에 있는 가지만 햇빛을 받는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나무의 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는 넓고 둥근 나무로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나무가 좋은 악기의 재료가 된다고 합니다. 삶의 시련과 고통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습니다.
처음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20여 세대가 성당 땅에서 무상으로 살았습니다. 오랫동안 공소였던 성당은 특별히 관리가 되지 않았고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액수라도 임대차계약을 맺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무런 계약 없이 무상으로 20년 이상 살면 점유권을 주장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계약서를 만들었고 성당 땅에서 사시는 분들을 모시고 임대계약서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임대료를 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이 성당의 땅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느님과 사랑으로 맺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생명에 관한 비유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 내적 깨달음을 얻기는커녕, 더는 우리 주변이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이기를 그만두었다. 우리는 그릇되게 살고 있다. 우리는 그저 오래전에 썩어 버린 인식을 갉아먹고 있을 뿐이다.” 자본과 물질문명에 갇혀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이 세상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함부로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망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나는 소망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모습입니다. 소망과 욕망의 공통점은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욕망은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욕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우리를 죄의 굴레에 떨어지게 합니다. 하지만 소망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소망은 절망 중에서도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기도하고, 늘 감사드리며,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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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가끔 냉담했던 신자들을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한 때는 레지오 마리애도 열심히 쫓아다니고 단체의 단체장도 맡는 등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활동했는데 어느 순간에 냉담자가 되었다며 자신이 냉담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털어놓습니다.
또 냉담 하는 일부 청년들의 부모 중에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복사 활동도 열심히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면서 성당에만 살다시피 해서 염려를 했던 자녀가 이제는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성당에는 통 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걱정을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활동했던 사람이 왜 쉬는 신자가 됐을까요? 이유가 있겠지요.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는 남의 얘기만이 아니라 내 일이 될 수도 있지요.
열심히 하는 교회 안의 활동이 오롯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는 길을 오늘 독서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열심했던 신자가 쉬는 신자로 변질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열심히 한 그 활동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열성적으로 하기는 했는데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욕망으로 했다는 것이지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인사 말씀은 기도의 부탁으로 시작 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기도에 자신을 맡기며 감히 맡겨진 어려운 직책을 수행해 가겠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신앙이 식은 사람들은 이렇게 모든 일에 우선하여 하느님의 뜻 안에서 활동하고 생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치우쳐 행동한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지만 실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처음부터 하느님을 알고 시작하는 신앙 생활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처음에 신앙은 대체로 인간적인 것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되지요. 성당 건물이 아름다워서, 또 차 마시고 쉬는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혹은 청년 시절이라면 예쁜 여학생을 만날 수 있어서 등등 극히 사소한 것에서 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적인 것에서 점차 하느님께로 관심이 옮겨가게 되지요. 하지만 이렇게 승화가 안 되고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냉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게 느꼈던 공간은 시들해지고 예쁜 여학생들은 어느 날 뿔뿔이 제 갈 길로 흩어져 갑니다. 그러면 성당에 다니는 의미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출발은 인간적인 계기에서 비롯되었지만 거기에서 점점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노력을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에서 출발해서 인간적인 것으로 마무리되고 마는 안타까운 경우가 생기는 것이지요.
본당의 신부나 수녀가 내 생각과 다를 수 있고, 열심히 하는 나를 엉뚱하게 오해하는 이웃의 언행이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냉담자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들은 은총의 시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쓰고 신심서적을 읽으며 기도학교를 통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를 맞고 있지요. 이러한 기회는 언제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또 몇 권이나 되는 노트에 성경을 나눠 쓰고 백여 권의 신심서적을 읽으며 기도하는 법을 이렇게 손쉽게 체계적으로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계기가 주어졌을 때 부지런히 나를 성숙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은총에 걸맞게 감사 드리며 살아야지요. 받은 은총은 크고 많은데 그에 걸맞은 감사를 잊고 산다면 그 또한 신심을 무너뜨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은총을 많이 받아서 오히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들을 우리는 성경에서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담과 하와이지요.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을 업신여기고 자신이 신이 되기를 원했던 인류의 조상은 당연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 또한 같은 경우입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특별히 선택을 받아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신 그 은총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봉헌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만 이용하였기에 교만해지는 계기가 되어 결국 죽음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지요.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았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믿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임을 얻어 재정 담당까지 맡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머무르고 말았지요.
많은 은총을 받고 더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더욱 노력하고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갔어야 하는데 그 순간 재물에 대한 유혹에 빠져서 예수님의 은총보다는 자신의 욕심으로 기울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교만해진 그는 배반자의 길을 가고 멸망의 길을 가고 말았지요. 은총은 받을수록 더욱 더 기도하고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도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33년경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게 되지요. 그렇게도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하여 뿌리뽑으러 가던 그를 예수님께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큰 은총으로 변모시키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너무나도 놀라운 예수님의 은총에 즉시 하느님께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열렬한 유다교 신도이자 그리스도의 박해자였던 그에게 그 일은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은 개종한 그를 변절자로 낙인찍어 잡아죽이려고 하였고 그리스도 공동체는 아직 그의 믿음을 믿을 수 없어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전도 여행이 시작되는 45년경까지 바오로 사도는 방황의 시간을 갖게 되지요. 다마스쿠스 체험 이후에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나름대로 기도와 전교를 하다가 죽을 위험에 빠져 도망치는 등 뜨거운 체험 이후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했으나 마음먹은 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자 고향 타르수스에 내려가 칩거 생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당시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였던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방의 주요 도시에 복음이 들어가는 계기가 되는 바오로 사도의 의미심장한 전도 여행이 시작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제부터는 사도행전의 많은 부분이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행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입니다. 은총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신앙이 성숙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좌절을 겪으며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살기를 바라고 노력하면서 신앙은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은총을 받을수록 인간은 더욱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받은 그 은총을 매 선교지에서 확인하는 은총의 일생을 살아갑니다. 수없이 죽을 위험을 겪으며 어려움 중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으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지요.
바오로 사도와 같이 초대교회의 기둥이었던 베드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 사도 또한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지요. 수제자로 뽑히고 으뜸 사도로서의 역할을 맡아 예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받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려는 욕망 앞에서 한 순간 무너지고 말지요. 살고 싶은 인간적인 욕망에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비록 유혹에 무너졌지만 그는 곧 자신의 죄를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였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사랑으로 일으켜 세우시고 교회의 반석으로 우뚝 서게 해 주셨습니다. 그가 바로 초대교회 수장이며 우리 천주교회 1대 교황인 베드로 사도이지요.
우리는 오늘 냉담의 원인이 인간적인 것에 머무르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단체장이 되고 교회의 중요 직책을 맡는 등 하느님의 큰사랑을 받을 때가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는 은총의 때입니다. 그런데 그 때 기도하지 않고 나의 욕망이나 의지, 흥미에 연연하며 움직인다면 그 은총은 오히려 받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것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욕구에 더 치우쳤기 때문이지요. 주일학교 교사를 열심히 하다가 그만 두게 되면 냉담하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또 단체장이나 사목위원 등 열심한 신앙 생활 후에 쉬는 교우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요. 기도하지 않고 활동만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감정의 굴곡이 있고 신앙 생활에 시련의 시기가 닥치기도 합니다. 그 때 더욱 기도하고 노력할 때 베드로 사도나 바오로 사도 같이 큰 무리의 여러 공동체를 이끌어갈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는 큰 은총을 받은 바오로 사도도 시련의 시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늘도 전도 여행을 앞두고 바오로 사도와 그 일행은 단식과 기도로써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이를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사도13,2-3)
바로 이런 모습이 하느님의 은총을 지속시키고 성숙시키는 바탕이지요. 은총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겸손하게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신앙을 성숙시키고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길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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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예정출 가브리엘 신부님]
<신앙인의 삶은 죽음 안에서도 부활을 바라보며 살게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어둠속에 살지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세상사에 얽매여 살고있습니다. 세속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어둠속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잊고서 살고있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즐기고 쾌락을 즐기고, 흥청망청 쓰며 살아가는 삶이 진짜 잘사는 삶인 것처럼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지기 위해서 열심히 모으며 챙기려고 합니다.
제대로 안될 때에는 도둑질을 하고, 사기를 치고. 나쁜짓을 해서라도 주머니를 채워야 하는 모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죄를 짓고도 잘못을 느끼지 못하는 의식불감증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이 가진다고 성공한 삶은 아닙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많은 힘을 누린다고, 그것이 항상 좋은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가르침,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함이 있지 않다면, 그런 것들은 오히려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삶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삶은 공허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삶은 텅빈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배웠다고 하여도 그 배운 지식이 나와 이웃을 위해 좋은 일로 쓰여지지 않고, 남을 등치고 괴롭히는데 사용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이 가진 부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많은 재물이 오히려 불화의 원인이 되고, 형제사이를 이간시키며, 없는 이웃의 피를 말리는 수단이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많은 권한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그 권한으로 사람과 사회, 국가를 위해 겸손되어 봉사하지 않고 그저 군림하는 모습으로 지위를 악용하려 들고 남용한다면 그러한 직책이나 권한, 권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고귀한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신앙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신앙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희망을 안겨줍니다. 인생이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어놓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을 내어바친 마더 데레사같은 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동료를 대신해 죽음을 자청한 막시밀리안 콜베신부를 같은 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한 마음, 이웃을 사랑한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웃의 어려운 이를 찾아보고 돌보아주는 사람들, 별로 가진것도 없어보이는데도 함께 나누며 베푸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자주 전해듣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웬지 바보같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 사랑의 실천이 일종의 사치요, 낭비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은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아무리 주위가 암울하고 어둡더라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의 삶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줍니다. 우리는 작은 베품과 나눔 안에서도 역경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죽음 안에서도 부활을 바라보며 살게합니다.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도 이웃에 대한 관심도 그렇기에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이렇게 우리를 변화시켜줍니다. 우리를 활기차게 만들어 줍니다.
비록 우리가 많이 가지지 못하고,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알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신앙은 우리의 모습을 가치있게 만들어줍니다. 세상을 살아가되 세속의 것만을 추구하지 않게 만들어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로인해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처럼 우리를 영적으로 부유하게 만들어줍니다. 넓은 마음이 되게 합니다. 열린 마음이 되게 합니다. 이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해줍니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더 이상 어둠속에 살지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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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하느님과 인간과의 중개자>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과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뿐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까지 믿는 것이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도 보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는 것은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하느님과 인간과의 중개자 역할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과 만나고, 인간은 하느님을 만나 뵙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만남을 통해서 구원과 심판의 길이 제시됩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둠 속에서 살지 않고 빛속에서 살며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세상 끝날에 단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우리 구원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인데, 그 조건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라고 물을 때 "예 믿습니다"라는 태도를 보일 때 우리는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며 그분을 거부한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굳세게 하고 그분이 명하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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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시면서,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것은 네 번에 걸친 “나는 ~이다”라는 표현과 함께,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는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 “모든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의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주제인 ‘빛의 자녀 찾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라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전체 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3장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조).
<세 번째>는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요한 12,49)라고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7장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네 번째>는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고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38)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는 말씀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에 대한 선언에 앞서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 이면에는 아버지의 권능이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유일한 계시자로,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본 것이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아들의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는 일에 달려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고,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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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을 이루시되, 결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응답을 기다리며, 오히려 저에게 승복하십니다.
이 놀라운 겸손에 제가 무릎 꿇습니다.
주님, 당신의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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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12,46)
<빛이신 예수님!>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의 그림자를 치워주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12,47)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모두의 구원을 위해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요 메시아요 그리스도로 믿으면서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를 살리시려는 예수님의 마음 안에 머물러 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인내심을 가지시고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봅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가는 분의 모습이 이런데도, 우리는 종종 참을성 없이 쉽게 너를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심판합니다. 그럴 권한이 없는데도.
요즘 우리는 세상의 위기 속에서, 종교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와 탐욕주의와 같은 세상 가치들 속에서 이 세상이 어둠의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고, 교회도 그런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이 위기가 하나의 중요한 표지가 되어서, 빛이신 예수님께로 더 나아가는 기회가 되고, 파스카의 역설, 곧 죽어야 부활 할 수 있다는 역설을 더 살아내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가 지금 우리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고, 지금이야말로 정신을 차릴 때이고, 이 위기를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우리와 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것이 바로 모두가 함께 구원되어 생명의 빛 안에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예수님의 뜻이니, 우리 함께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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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 가는 길>
요한 12,44-50 (예수님의 말씀과 심판)
그때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하느님께 가는 길>
모든 길 품고 내는
오직 하나의 길
모든 이가 걷지만
많은 이가 외면하는 길
모르면서도 걷고
걸으면서도 모르는 길
가고파도 갈 수 없어
멈춰선 이에게 열린 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둠 속
한걸음 이끄는 빛의 길
알기 위해 걷는 이에게
기꺼이 알려지는 길
하느님께서 보내신
보내지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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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교 입학 뒤, 제 앞에는 ‘행복’만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토록 되고 싶었던 신부님. 이제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첫걸음을 뗐기 때문이지요. 쉽지 않은 길이어도 원하는 길이니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입학 후 채 1년이 되지 않았는데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해지면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길이 과연 나의 모든 것을 바칠 만큼 의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더 좋아 보이는 화려한 길들이 제 눈에 비쳤습니다. 이런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독서’였습니다. 성경과 함께 다른 책들을 읽으며 지식이 쌓였고, 이 지식이 저에게 지혜를 아주 작지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 자그마한 지혜들이 모여 불신의 마음을 줄여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제로 나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분이 많습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내 안을 채우고 있지 못해서 힘듦만을 느끼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까이하고, 다른 책들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 주님을 아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불평불만으로 일관한다면 주님께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아들을 믿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불신이 가득한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이었지요.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것은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 그 옛날 모세가 보여줬던 모습을 세상에 펼칠 수 있는 그리스도만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만을 찾으니 주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빛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당신 신성의 눈 부신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물러나는 것은 어둠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분께서 당신은 심판하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어둠에 들어가 계속해서 심판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의 믿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이며, 그 판결에 대해 하느님을 탓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적인 지식보다 주님의 지혜를 익혀야 할 것이며,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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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제대로 바라보세요>
이웃에 대해 헐뜯고 험담하는 것을 좋아하는 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대의 단점을 들춰내서 창피를 주었고, 작은 꼬투리라도 잡아서 헐뜯곤 했지요. 이런 자매님을 누가 좋아해서 가까이하겠습니까? 따라서 주변에는 사람이 하나 없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낯선 외부 사람이 오면 이제까지 못 했던 이웃에 대한 험담을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고 둘은 창가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손님에게 맞은편에 사는 이웃집에 대한 험담을 퍼붓습니다.
“저기 좀 봐요. 앞집 빨랫줄에 널린 옷들이 너무 더럽지 않아요? 세탁을 저렇게 엉터리로 하면 어떻게 하지?”
그러자 손님이 이 자매에게 웃으며 말합니다.
“좀 더 자세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웃집 빨래가 더러운 게 아니라 여기 유리창이 더러운 건데요.”
남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가지고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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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시켜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으로부터 벗어 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요한12,35) 그러므로 빛이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께서 나도 보내셨다는 것을 인식하며 언제나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한 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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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씀의 심판>
-말씀 예찬: 영이자 생명이요 빛이신 말씀-
어제의 작지만 아주 소중한 깨달음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예전 선물받은 자그마한 고아古雅하고 품위있는 도자기같은 잔입니다. 밤 1시쯤 일어나면 대충 씻고 정원을 세 바퀴 돌고 맨손체조후 집무실에 들어와 이 잔으로 맥심 1회용 커피 한잔 하고 강론을 씁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제 착한 보물같은 두 자매가 월모임이 코로나로 취소된 까닭에 잠시 들려 집무실 청소를 말끔히 해 준후 강론 말씀 나눔 뒤에 강복을 받고 떠난 다음, 집무실을 살펴보는 중에 커피 잔 없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언젠가 나오겠지 하고 포기했지만 자꾸 생각나 아니다 싶어 용기를 내어 자매에게 카톡 메시지를 전송했고 이어 주고 받은 내용들입니다.
-“혹시 작은 도자기같은 남색 비슷한 커피 잔 치우셨는지요?”
“네, 함께 한 자매가 이가 빠졌다고 버린다고---신부님 찾으셨어요? 신부님 사무실에서 마리아의 집으로 다 오셔서 오른쪽 작은 피정의 집에 휴지통중에 일반쓰레기통에 넣었어요.”
“예, 찾아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해요! 신부님께 소중한 것을 이가 빠졌다고---신부님, 사랑합니다.”
“이 또한 저에겐 새삼스런 좋은 깨우침이 되네요!”
“네, 신부님! 저도 깨달았습니다. 맘이 순간 아득했습니다. 추억의 소중한 물건을--- 겉으로 보는 판단이 아니 진정한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다른 자매도 연락을 듣고 몹시 미안해 하며 메시지를 보냈고 이어진 내용들입니다.
-“에고, 신부님, 죄송해요, 컵안에 줄들이 생겨서--- 신부님께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신부님께 귀한 것임을 미처 생각 못했어요.”
“좋은 마음으로 하셨으니 괜찮습니다! 아무튼 좋은 깨우침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아유, 신부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신부님 덕분에 귀한 배움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는 우리 하나하나가 이런 소중한 잔과 같겠다 싶었습니다. 알리지 말까 하다가 알린 것이 정말 귀한 깨우침의 기회가 됐으니 전화위복이 된 느낌입니다. 작은 찻잔도 이처럼 소중한 데 참 소중한 주님을, 주님의 말씀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간혹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답답해 하다가 이름이 생각났을 때, 또 적절한 어휘가 생각나지 않아 답답해 하다가 어휘가 생각났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체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잊으면 곧장 찾아내야 하는 것이 주님이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소리로 또는 노래로 찬미와 감사 말씀의 성무일도를 바치는 수도자들입니다. 끊임없이 깨어 말씀으로 바치는 기도보다 치매 예방에도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말씀은 존재의 집입니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은 영혼의 밥이자 숨이자 영이자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은 생명을 주는 영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고 치유하고 위로하며 우리의 꼴을 형성합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으로써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도 끝을 맺습니다. 요한복음의 첫째 부분의 맺음말 구실을 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나는 빛으로써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나는 그분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것이다.”
새삼 말씀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의 심판입니다. 하느님이 내리시는 구원이나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이요 거부하면 심판이니 말 그대로 말씀의 심판입니다. 그러니 이런 심판은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마음이 환해지는 것, 바로 지상에서의 구체적 구원체험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잊어 버리는 것보다 결정적인 실패 인생도 없습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일치도 말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와 무의미, 허무와 절망의 어둠을 몰아내어 빛 속에 빛의 자녀되어 살게 합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개나리’란 시가 생각납니다. ‘미나리’ 영화 제목처럼 반갑고 정다운 순 우리말 ‘개나리’입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봄날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 초롱들
가득 켜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다”-2001.4.11
꼭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산수유, 의사리, 민들레, 개나리, 수선화 등 파스카 봄꽃들은 샛노란 빛깔인가 봅니다. 세상의 빛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빠진 대낮의 어둠같은 현대문명입니다. 대낮의 어둠을,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빛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파스카의 축제 계절, 신록과 더불어 만개한 다양하고 무수한 4월의 꽃들은 그대로 ‘말씀의 꽃’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에게는 끝은 없고 영원히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이 끝나자 이어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수님의 바톤을 이어 받아 말씀 선포를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처음도 마지막도 초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살라미스에 이르러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말씀으로 시작하여 말씀으로 끝나는 사도들의 일과입니다. 새삼 우리 믿는 모두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두이자 존재이유요, 고귀한 인간 품위의 삶도 말씀이신 주님과의 일치에서 이뤄짐을 깨닫습니다. 영육의 건강에 말씀의 식食과 약藥보다 더 결정적인 처방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힌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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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순종을 이야기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예수님께서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누차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이 세상에 드러내시기에 예수님은 또한 아버지의 현존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느님을 예수님을 통해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아드님은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시며 그 사랑을 이 세상에 실재하도록 하시니까요. 예수님이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하시기 때문입니다. 굴종이나 맹종이 아닌, 그분 본성 그대로의 사랑의 순종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50)
예수님은 육화하신 아버지의 말씀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예수님이란 존재로 이루어졌을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침과 행적으로 그 말씀을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약함을 안고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합니다.
제1독서는 새로운 시대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2,2)
구약을 성부의 시대, 신약을 성자의 시대,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하지요. 예수님 승천 이후, 성부, 성자와 한 분이신 성령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시면서 주님의 뜻을 전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사도 12,4)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파견하셨고, 아드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변호자요 보호자가 되어 주시지요.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도록 힘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알렐루야."(입당송)
제자들은 성령에 힘 입어 모든 민족들에게 담대히 주님의 이름을 전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 순종하는 사도들의 열정적 행보를 통해 구원의 지평이 온 세상으로 열리고 펼쳐지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하시는 분은 사도 개개인이 아니라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이십니다.(마르 13,11 참조)
사랑하는 벗님! 세상의 작은 변방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개입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아드님이신 성자의 희생제사로 완성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우리가 사는 오늘 여기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성령의 인도로 이 구원 역사 안에서 작은 발걸음을 새기면서 나아가는 중이지요.
우리가 매일 접하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께 순종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세상 안의 작디 작은 나라, 그중에서도 힘 없고 가난하고 미소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지만 마음이 성령의 불로 타오르면 온 세상을 품고도 남을 광대한 그릇이 된답니다. 사랑의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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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복음적 가난의 정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기 마음을 바로 다스리도록 정신을 차려야 하며, 복음적 청빈 정신에 어긋나는 현세 사물의 사용이나 재산에 대한 집착으로 완전한 사랑의 추구를 가로막지 않게 하여야 한다.”(교회 헌장, 42항)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믿으시오. 가난은 구원의 특별한 방법입니다. 그것은 겸손의 근원이며, 모든 완덕의 뿌리이며, 그것의 결실은 보이지 않으나 풍성합니다. 그것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팔아야 할 밭에 감추어진 보화입니다. 팔 수 없는 것은 그것에 대한 사랑으로 포기해야 합니다. - 성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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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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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DBVLAjnKYg&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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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 46)
사람의 아들
하나하나의
삶이 빛이다.
어둠을
밝히는
참된
빛이시다.
거짓의
껍질을
벗게하는
진리의
참빛이시다.
빛은
그 어디에
있어도
빛으로
존재한다.
사랑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신다.
존귀함을
되찾아주신다.
빛은
길이다.
빛이 있기에
길을 찾는다.
빛은
우리 자신을
비추어준다.
빛은 먼저
우리 자신의
먼지를
보게 한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게 된다.
빛은
언제나
늘 가까이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 참된
빛이다.
그래서
빛은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실천이
빛의 참된
생명력이다.
빛은
감출 수
없다.
그래서
올곧은
빛이다.
이미
와 있는
세상의
빛이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
빛의 삶이며
빛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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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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