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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파팍!
순간적으로 뛰쳐나간 장추삼을 눈으로 쫓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의 추뢰보
는 이제 일정 경지를 넘어 몸과 마음이 동화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니까,
물론 제동이라는 측면에서 아직까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헉!”
언제 저런 식의 보법을 보았겠는가. 감귀수의 억눌린 신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추삼은 오정사사를 그대로 지나쳤다.
꽝!
사당 바닥이 산산이 부서지며 다섯의 사내를 등진 상태에서 빙글 몸을 돌린
장추삼이 황급히 뒤로 돌아서며 검집에서 칼을 뽑는 두 명에게 바싹 다가
섰다.
촹! 촹!
칼이 뽑히는 순간 그의 손이 부챗살 퍼지듯 뻗어나가 두 사내의 손을 얽어
매고 그대로 팔을 안으로 접었다. 그렇게 되자 두 사내는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된 형국이 되어버렸다.
“으윽!”
“큭!”
자연히 동료를 제 손으로 베거나 아니면 동료의 칼에 의해 목이 달아날 판
이기에 두명의 흑의인은 칼을 쥔 손에 강한 힘을 실어 장추삼의 아귀에서
팔목을 빼려했다.
우드득.
양손을 교차시킨 상태에서 장추삼이 손목을 반 바퀴 구르자 강한 힘으로 지
탱되던 두 사내의 관절은 그대로 탈골이 되었다. 긴장이나 기타의 상태로
굳어진 관절처럼 부러지기 쉬운 것은 없으니까.
워낙 갑작스런 상황이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칼을 떨구는
사내들에게 무릎을 조금 낮추면서 교차시켰던 팔을 빠르게 빼자 장추삼의
팔꿈치는 자연스레 그들의 명치를 가격하게 되었다.
제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명치를 가격 당하고는 버텨내지 못할 터. 그리고
장추삼은 그저 빠르게 쳐낸 정도가 아니라 격타의 순간 팔꿈치를 회전시켰
기에 그 타격은 거의 치명적이었다.
쿵! 쿵!
앞으로 고꾸라지는 두 사내를 무시하고 다시 한번 발을 구르자 장추삼의 신
형은 두개로 분리되었다 싶은 순간 달려드는 세 명의 사내에게 육박해 들어
갔다.
촥!
동료들이 쓰러졌음에도 세 명의 흑의인은 냉정한 시선으로 장추삼의 돌진을
흘려냈다. 애당초 산무영으로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킬 요량이었기에 그의
발걸음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어라?’
놀랍도록 침착한 사내들의 반응에 장추삼이 일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여태
까지 수많은 싸움을 치렀지만 이 사내들만큼 감정을 잘 통제하는 인물들은
별로 없었다.
절대적인 무위를 앞세워 그를 괴롭혔던 기학의 명정한 마음이 있었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우월의식이었기에 사내들의
지금 상태와는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으로서 저런 무의식이 가능한 거야?’
장추삼은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전문살수들이다. 그들은 아이
때부터 인간적인 모든 것을 버리도록 훈련받아야하고, 또 감정을 버리지 않
으면 살수로서 살아가지 못한다.
전문 살수로서 키워진 오정사사. 하지만 쓰러진 두 사내는 잠시나마 인간적
인 감정을 품었었다.
그건...
팍!
다시 한번 뛰쳐나간 장추삼이 세 사내의 가운데에 섰다.
“와봐.”
묵묵히 칼을 쳐든 사내들이 일제히 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천고의 산무영을
뚫기엔 무리였는지 그들은 헛손질만을 반복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해...”
부지런히 발을 놀리며 장추삼이 독백처럼 말을 시작했다.
“가끔 내가 왜 사나 싶어...”
세 명의 흑의인은 그의 말과 상관없이 칼을 쳐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장추삼의 시선은 적을 대하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고 싶은 것도 아니거든...”
철저한 연민.
“해서 그냥 편안하게 생각하기로 했지...”
그라고 분노.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기다리기로 했어...”
미래를 바라보는 자와 과거조차 없는 사람들.
그들의 무감정한 칼놀림의 사이로 장추삼의 신형이 희끗 움직였다.
꿍!
한 사내의 몸을 팔등으로 밀어붙여 사당의 벽으로 퉁겨낸 그가 번개처럼 주
먹을 휘둘렀다. 벽에 밀린 사내의 얼굴 주위로 여덟 개의 구멍이 생겨났다.
무감정했던 사내의 눈망울에 최초의 감정이 떠올랐다.
“이제... 알겠나?”
마지막 한번의 손놀림에 의해 목을 가격당하고 쓰러진 사내를 뒤로 하고 장
추삼이 크게 한발 앞으로 딛었다. 그의 기세는 처음과 판이하게 달라서 관
전하던 감귀수의 뒷덜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일개 삼류무사라고 했는데 어디 저런 무위를 삼류라고 하겠는가. 무섭도록
빠르고 변화무쌍한 보법과 냉정한 상황판단능력, 그리고 철퇴 같은 주먹까
지!
문득 감귀수는 한 사내의 명호를 떠올렸다. 여러 면에서 위의 조건과 일치
하는 인물이지만 그 애송이는 정파 쪽이라고 들었다. 무룡숙을 괴멸시키고
떠났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 하남에 남아 있었단 말인가.
두 사내는 폭발적인 보법으로 그들의 검식을 무력화 시키며 남은 동료 하나
를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꺾어버린 장추삼의 무위에 순간적으로 칼을 늘어
트렸다. 비록 살수수업을 받았다고는 해도 그들 역시 무인이다.
실력의 차이 정도는 바로 알 수 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청년은 자신들
이 감당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래도 그들은 습관적으로
검을 올려 상대의 가슴에 겨누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이것 밖에 없었으니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들의
존재이유는 사라지니까.
걸음을 옮기던 장추삼이 문득 감귀수를 보았다.
‘뭐, 뭐야!’
그의 눈빛에 담긴 분노의 연유를 알 길이 없었지만 워낙에 강렬한 힘을 실
은 시선이라 천하의 빙심혈세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마치 배수진이라도 친 표정으로 검
을 들고 있는 흑의인들을 발끝부터 훑었다.
굳건하게 버티고는 있지만 신념이라는 뿌리가 없어서 금새라도 뽑혀버릴 것
같은 두 다리, 기복을 숨겨서 언제든지 파열될 듯한 가슴의 움직임, 그리
고 가늘게 떨리는 입술의 파리함까지.
“내 참...”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들은 죄가 없다. 벌을 내려야 한다면...
팍!
딱 한걸음이었지만 크게 딛었기에 사내들은 장추삼과 자신들의 거리가 단축
되었다고 생각했다. 중단으로 검을 세웠다는 의미는 수비와 공격을 병행하
겠다는 뜻이지만 다른 말로 공수가 혼재된 상태이기에 어느 한쪽의 전환이
쉽지 않다는 거다.
급히 검극을 틀어 공세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흑의인들의 동작은 일류의 검
객답게 매끄러웠지만 장추삼에겐 느려도 한참 느려 터져 보였다.
미처 검극이 허공에서 선회를 하기도전에 그의 왼발이 허공을 갈랐고 가슴
을 강타당한 사내가 상체를 수그리자 오른발로 지면을 박찬 장추삼이 사내
의 등을 왼발로 강하게 찍고 허공으로 몸을 띄워 다른 한명의 머리 위로 떨
어져 내렸다.
“어...”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 그의 얼굴을 살짝 밟은 장추삼이 제차 뛰어
올랐다가 공중에서 한바퀴 몸을 돌리며 착지했다. 그 와중에 천고의 삼음
추가 흑의인의 이마와 목, 그리고 가슴에 머물렀음은 물론이다.
척.
순식간에 다섯 명의 일류검수들을 잠재운 장추삼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흑의
인들을 물끄러미 보다 감귀수에게 몸을 틀었다.
“안됐네, 나 같은 하수에게 손을 쓰게 생겨서 말이야.”
“으음...”
감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정사사는 늘 감귀수의 지근거리에서 그를 호
위했었고 웬만한 일은 알아서 처리했기에 지저분한 문제 따위로 골머리 썩
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묻혀야할 피는 모두 오정사사가 떠맡았으니까.
그게 감귀수가 아는 오정사사의 존재이유였다. 오정사사는 인간일 필요가
없었다. 감귀수만의 도구로 족했던 거다.
더러운 일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손은 깨끗하고 싶은 심리. 그 속내가 뻔
히 보여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장추삼은 어깨를 한번 떨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상대는 고수다. 비열하고, 치사하지만 무공은 그런 것과 별개
였으니까.
“더 부를 사람 없으면 빨리 시작하자고. 보아하니 맹 내에서도 당신의 행
각은 비밀로 붙여야 했던 거 같으니.”
“오정사사를 쓰러트렸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노부를 안다면 그런 방자
한 태도를 취하지 못할 거다, 장추삼.”
“오, 나를 알아?”
순순히 인정하는 장추삼을 뚫어지게 보던 감귀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괴성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네가 모든 사실을 얘기해준다면 아까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그리
고...”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만 냥짜리 전표다.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이것도 주겠다. 너
도 정파에 몸을 담고 있으니 무림맹에서 평지풍파가 일어남을 원치는 않겠
지?”
“누가 나더러 정파라고 했지?”
“음?”
알려진 바라면 삼성은 분명 정파라고 했다. 그런데 부인이라니.
감귀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비록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
는 하나 어디까지나 정파의 일원이기에 사마의 계열이라면 이대로 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사마외도냐고 물어보려 했지? 당신들은 참으로 단순해. 왜 모든 걸 흑과
백으로 나누는 거지? 당신들 편이 아니라고 다 적인가?”
이번에는 장추삼이 툴툴거리며 웃었다.
“난 나야. 그냥 장추삼이지. 정(正)이니 사(邪)니 마(魔)같은 게 앞에 붙
지 않는, 그런 장추삼이란 말이야...”
무엇이든 사물을 재대로 보려하지 않고 자신의 눈과 틀에 맞추어 변형시켜
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주류가 되는 사회. 그리고 이방인.
“무림, 아니 인생을 모르는 놈이로군. 어린 녀석아, 살아간다는 게 그리
만만하다고 생각하느냐?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워서 목표한 바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란 말이다. 비천한 하류생활을 하는 것들이야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겠지만 높은 곳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런 삶은 무의미할 뿐.”
감귀수의 손이 반짝 빛났다.
“두드려 맞는 정으로 평생을 보내겠느냐, 아니면 두드리는 망치가 되어 세
상을 굽어보겠느냐?”
“물론... 망치가 낫겠지.”
득의만만한 미소를 흘리며 감귀수가 전표를 장추삼에게 날렸다. 나풀거리며
날아온 종이쪼가리에는 네 식구가 일년을 놀고먹을 수 있는 액수가 적혀있
었다.
전표에 눈을 가져간 장추삼을 보며 빙심혈세가 야릇한 표정으로 뒷짐을 짓
자 얼굴을 든 그가 발로 돌멩이 하나를 툭 찼다.
“근데... 사람끼리의 만남이라는 게 꼭 정과 망치의 관계로 흘러가는 건
아니거든.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이들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함
께 오르려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야해. 당신과 나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가 씨익 웃으며 만 냥짜리 전표를 두 조각으로 주욱 찢어 버렸다.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있어. 뭔지 알아?”
“신념이나 뭐 그런 고리타분한 소리는 집어치...”
“추억이야.”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감귀수가 깜짝 놀랐다. 도대체 저 소리가 지금 나올 이
유는 뭔가?
“그래, 추억. 내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 가운데 하나가 당신의 손에 더럽혀
졌거든. 그리고 이젠 추억조차도 가물가물해. 그래서 당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
“대체 무슨 말이냐!”
“일단 맞고 시작하자고.”
장추삼의 눈에 스산한 빛이 깔렸다. 위험신호를 느낀 감귀수가 등에 걸린
칼을 뽑아 들었지만 이미 그는 움직이고 있었다.
202
슥.
장추삼이 빠르게 한발을 내딛었다. 예전 같으면 바로 추뢰보였을 것이나 요
즘의 그는 크게 일보를 떼어 상대와의 거리를 단축시킨다.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들지만 알고 보면 허점이 많았던 추뢰보... 아니, 여
태까지의 추뢰보.
그러나 한발자국의 접근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선점하려는 위치를 장악했
으니까. 추뢰보의 본래적인 의미로 볼 때 이동거리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검을 내치려면 상대와 자신의 일정한 간격이 수반되어야함은 물론이다. 반
대로 얘기해서 손으로 닿을 수 없는 위치라도 검이라는 보조적 수단으로 그
만큼의 거리를 상쇄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거리가 없으면 검은 무용지물이 된다.
지금처럼...
“이익!”
칼을 들고 검극을 이동시키려는 감귀수의 가슴팍까지 단 한걸음으로 밀고
들어온 장추삼이 빛살처럼 손을 뻗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금나수법이 뭔지
는 몰라도 이보다 비쾌한 손동작은 없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움직임은 천고의 초쾌권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유
성우에서 그 빠름만을 차용하여 손을 내쳤으니까. 어떤 동작을 취할 사이도
없이 옷깃을 빼앗긴 빙심혈세에게 그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었다.
꽝!
감귀수의 가슴팍에 둔중한 타격이 왔다. 너무 아파서 눈물까지 나려 했지만
그것이 시작이었다.
꽝! 꽝! 꽝!
연속적으로 아홉 번이나 장추삼의 어깨에 가슴이 받힌 감귀수가 발악적인
소리를 지르며 검을 교묘하게 틀었다. 기습적으로 당하긴 했지만 빙심혈세
라는 명호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한번의 칼놀림.
스륵.
밑에서부터 쳐 올라오는 검에 손목이 날아갈 판이라 감귀수의 옷깃을 놓고
빙글 몸을 돌린 장추삼이 비틀거리며 가슴을 부여잡는 빙심혈세를 보며 혀
를 찼다.
단지 혓바닥을 위아래로 몇 번 움직였을 뿐이지만 감귀수에게는 수백 번의
조롱보다 더욱 치욕스러웠다.
“아픈가?”
무감정한 물음.
“이노옴!!”
“아픈가보군.”
빙심혈세의 눈에서 귀화와 같은 살기가 일렁였다. 장포는 팽팽히 부풀어 올
랐고, 그의 주위에는 얇은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공력을
극성까지 끌어 올렸다는 증거이니 감귀수의 분노를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아픈데다가 열까지 받았나보군.”
여전한 이죽거림. 그런데 표정으로 봐서는 빈정거림이 아니었다.
“네놈이 감히 노부를 능멸하느냐!”
감귀수의 외침 따윈 장추삼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강호의 명숙이
자 검정오존의 일인이라는 위치도.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픈 거야...”
밀을 늘이던 그가 짧게 대화를 맺었다.
“썩을 영감아.”
쿠쿠쿠쿠.
간접적인 모욕을 받은 상태에서 직접적으로 욕설까지 듣자 감귀수의 이성은
그대로 끊어졌다. 언제나 높은 곳에서 굽어보기만 했기에 이런 식의 대접
은 그가 감내할 성질이 아니었다.
“죽여주마...”
명부의 야차와도 같이 으르릉 거리며 감귀수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입으
로는 실컷 난도질했지만 장추삼 역시 그의 변화에 상체를 조금 숙이고 심호
흡을 가다듬어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싸움을 치렀지만 이렇게 적의를 드러내고 달려든
적과의 생사결은 없었다. 이건 기세싸움의 차원이 아니다. 오로지 상대의
파괴만을 염두하고 벌이는 난장판이다.
왠지... 거부감이 느껴진다.
막무가내의 저돌성과 판단 이전에 손부터 나가는 성격처럼 보여도 장추삼은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 가운데 한명이다. 아직 피와 살육에 익숙하지도 않
고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익숙해질 가능성 또한 없다.
절로 움츠러드는 근육. 심장 박동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좋은 것을 가까이하고 나쁜 것에서 멀어지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본능이 그
의 마음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무섭다거나 두려워서 이런 반응이 튀어나온
게 아니다. 그저 피하고 싶은 거다.
하지만 어디로?
“훗!”
장추삼이 짧게 코웃음 쳤다, 목을 옆으로 꺾으면서. 생각해보니 긴장할 것
도 없다. 개싸움이든, 막싸움이든, 고수들 간의 대결이든 간에 승부는 언제
나 나뉜다.
애당초에 차분히 앉아서 대화로 풀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박 터지게 싸워야 할 거라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그뿐이다. 그럼 됐지 않은가? 뭘 더 바라는가? 비무도 아닌데 얌전히 포권
하고 통성명 나누고 초식명 일일이 불러주며 화기애애하게 노닥거리길 바랐
는가?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다. 이겨야만하고.
‘에라, 머리 굴려봐야 돌 튀기는 소리만 나지!’
편하게 앞을 보자 기세니, 파괴니 하는 것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눈앞
에는 정신 나간 노인 하나가 어디서 주워왔는지 시퍼렇게 날이 선 칼 하나
를 들고 신성한 사당 안을 어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에 꽃만 꼽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베어 나왔다. 장추삼은 잘 모르고 있지만 이 웃음으로
그는 커다란 짐을 덜게 되었다. 극단적인 살기, 즉 앙심(怏心)이라는 감정
에 처음으로 노출되었기에 의식하지 못했지만 운동신경이 굳어졌었다.
만약 이대로 충돌했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지 모를 터. 가벼운 생각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전신근육에 가벼운 이완현상이 왔고 무거운 마음까지
도 벗어버릴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감귀수의 증오는 마구마구 증폭되어 거의 유형화를 이루었다. 눈빛 한번,
움직임 하나에도 상대를 갈아 마실 것만 같은 독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 느린 걸음으로 장추삼의 앞에선 그가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스륵.
순간 장추삼이 반보 옆으로 움직였다. 너무 자연스러운 보법이라 처음부터
검이 노린 지점에서 반보 옆으로 비껴서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칼이 몰
고 온 검풍(劍風)은 예상 외로 묵직한 터라 미쳐 움직임을 끝내지 못한 오
른 소매가 잘라져 나갔다.
발을 교묘하게 교차시켜 반 바퀴 몸을 틀고 감귀수에게 달려들려던 장추삼
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이상하다!’
그의 눈이 감귀수의 손을 쫓았다. 방금 전의 일검은 초식이라고 하기에 너
무 평이했다. 검정오존의 일원이자 신비의 고수라 칭해지는 빙심혈세의 검
법이 이정도로 단순할리는 없다.
차라리 다음 수를 준비하기 위한 무엇이라고 할까?
내려진 검을 쳐들 생각도하지 않고 그렇게 멈춰있던 감귀수가 눈동자만 움
직여서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달려 들어올 줄 알았는데 멈춘 그의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남들은 노부의 검식을 두려워하여 검정오존의 하나로 지칭했다...”
그의 칼에 강력한 기운이 맺혔다. 검기의 극성에 이른 형태일까? 감귀수의
검신에 아지랑이와도 같은 무엇이 흐르는 착각마저 일었다.
“그래. 그랬지. 검만으로도 적수를 찾기 어려웠지...”
주박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장추삼은 움직이지 않았다. 감귀수의 독백은 을
씨년스러운 사당을 가득 메웠지만 그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있다!’
끼이익...
검극이 땅을 천천히 긁으며 이동했다. 듣기 싫은 마찰음은 귀곡성이 되어
장내를 떠돌았고 감귀수의 입가에 알 수 없는 사기가 스쳐 지나갔다.
“이제... 놀아보자.”
팍!
쳐들렸다 싶었는데 그의 검은 수십 개로 불어났다. 물론 검이 분열 되었을
리 없으니 환검의 일종이라는 소리인데 갈래갈래 나뉜 칼끝마다 웅혼하면서
도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엄청나다!’
칠십이파검(七十二破劍).
청성의 절기로 청운적하검과 함께 청성파를 중원오대검파로 이끈 무서운 검
식이다. 일수에 일흔 두 번의 변화를 보인다는, 다소 과장된 설명이 붙는
검법이지만 그만큼 변화가 심하며 마지막의 파(破)자에서 암시하듯 검세의
성질은 패도적이다.
변환과 강함을 두루 갖춘 검식. 이 검식만으로 감귀수는 빙심혈세라는 칭호
를 얻으며 강호를 종횡했으니 검법의 무서움은 부연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장추삼은 움직이지 않았다. 변환을 일으킨 검들이 그의 목
전에 온 순간까지도.
‘아직 아니다!’
그의 눈은 감귀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았다.
콰콰콰!
검식이 무르익자 빙심혈세의 검결지를 맺었던 왼손가락들이 춤을 추듯 움직
이기 시작했다. 검결지란 검수들이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모아 날렵하게 뻗
은 상태에서 운용하는 검신에 밀착시켜 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수법이다.
결코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일 리 없다!
돌연 장추삼이 숙였던 상체를 세웠다. 검기가 눈앞까지 이르렀으니 어떤 식
으로든 움직여야 함은 당연하다.
“기다렸다!”
창노한 외침과 함께 감귀수의 왼손이 활짝 펴졌다.
콰릉!
그의 장심에서 은유하나 뭔가 섬짓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칠십이파검의
진행방향을 완전히 차단하는 형태로.
장추삼은 전혀 모르지만 감귀수의 장법은 천고의 절기라는 최심장(催心掌)
이었다. 마음을 열 듯 소리 없이 다가와 치명적인 흔적을 남기고 돌아선다
는 장법으로 청성에서도 꺼린다는 독한 수법이다.
그렇다면 칠십이파검은 미끼였다는 소리. 늑대를 피하려다 법을 만나는 격
이라 장추삼으로는 진퇴양난의 지경일 터.
그런데...
장추삼은 움직이지 않았다. 상체를 꼿꼿이 세운 그대로 뚫어지게 감귀수의
변화를 쫓고만 있었다. 최심장을 날린 빙심혈세의 득의만만했던 얼굴이 딱
굳어지는 순간 그가 움직였다.
슥!
왼발을 축으로 반 바퀴 회전하여 - 상식적으로 물리적인 공세를 받으면 사
람들은 대개 오른편으로 피한다 - 칠십이파검의 전위공세를 흘려낸 장추삼
이 꺼지듯 사라졌다.
“헉!”
감귀수의 헛바람 삼킨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솟아난 그가 사선으로 튕겨
오른 힘을 실어 왼쪽 어깨로 빙심혈세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큭!”
급급히 뒤로 물러서는 감귀수가 칼을 고쳐 잡았으나 착지하며 딛은 왼발을
축으로 다시 반 바퀴 회전하며 오른발을 강하게 내지르는 장추삼의 동작은
군더더기 하나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깔끔했다..
검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근거리였기에 취심장을 뻗은 왼손으로 겨우
그의 발길질을 비껴냈지만 장추삼의 회전은 반 바퀴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
다.
스륵.
다시 반 바퀴를 회전하게 되자 장추삼과 빙심혈세의 거리는 반보로 좁혀졌
다.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몸을 틀고 돌리는 동작만으로 감귀수
와 자신과의 거리를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으니 그는 이미 산무영과 추뢰보
라는 굴레를 벗어 던졌는지도 모른다.
뻔히 보이는 투로(鬪路)에서 나온 발길질, 그것도 변화 없이 일직선이었기
에 막아내긴 쉬웠지만 감귀수의 손목은 부러져나갈 것 같았다. 어찌나 세게
내질렀는지 장추삼의 발에는 만근거석이라도 부셔버릴 듯한 힘이 담겨 있
었으니까.
그리고 확보되지 않은 거리였기에 쇠붙이만도 못한 검...
화살처럼 날아든 장추삼의 팔꿈치는 감귀수의 명치를 노렸고 한발 물러서며
피하는 감귀수의 목젖에 벌떡 세우듯 펴진 그의 손목이 강하게 꽂혔다. 기
도가 막혀 벌어지는 턱을 마지막으로 손등이 강타하자 빙심혈세의 무릎이
푹 꺾였다.
한손만으로 연결시킨 삼연환타법(三連環打法)!
팔꿈치와 손목과 손등을 연계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관절을 펴는 것이었으
니 그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쓰러진 감귀수의 앞에 선 장추삼이 손을 탁탁 털며 한마디 던졌다. 들어야
할 사람은 혼절했지만 입이 근질거려서 혼났기에 반드시 뱉고 싶었던 말.
“나를 재대로 알았다면 그런 방자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 거야, 감귀수..
.”
203
“어이, 영감! 일어나!”
“음, 으음...”
“내가 영감 자는 거 보러 온 줄 알아, 얼른 일어나라고! 나도 바쁜 몸이야
!”
쫘악~
물은 많았다.
“으윽, 머리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바닥에 이마를 박은 탓인지 감귀수는 윗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해서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목이며 턱이며... 어디 하나 안 아픈 곳이 없다.
그런데...
‘음? 지금 내가 움직이고 있잖아? 어설픈 녀석... 그러니까 네놈이 강호초
출이지...’
마혈도 짚어놓지 않았고, 그렇다고 단단한 줄 따위로 묶지도 않았기에 감귀
수는 자유로운 상태였다. 완벽한 패배였지만 내상을 입지도 않았으니 마음
만 먹으면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얘기다.
‘흐흐흐...’
비틀거리는 동작을 더욱 크게 취하며 일어서던 감귀수가 벼락처럼 검을 빼
들었다.
“죽어랏!”
뻑!
몸을 돌리기도 전에 날아든 장추삼의 발은 반전을 시도해보려던 감귀수의
턱을 매정하게 뒤흔들었다.
“어이, 영감! 일어나!”
“크, 크윽...”
“잔머리 굴린 것까진 좋은데 눈동자 관리가 소흘했어. 청빈로 최고의 눈치를
자랑하던 이 장추삼이를 속이려고 하다니... 쯔쯔. 안 일어나? 여기서 밤 샐
거야?”
쫘악~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물은 많았다.
물에 푹 적셔진 생쥐 꼴이 된 감귀수가 장추삼을 꼬아본 건 당연한 일이었
다. 허나 이것의 해석을 도발로 인식한 장추삼의 주먹이 빛살처럼 뻗은 것
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몇 차례 눕고 그 회수만큼 물벼락을 맞으니 감귀수의 꼴은 물에 빠
진 생쥐가 따로 없었다. 행색도 행색이지만 무엇보다 춥다. 바람 많은 가을
날의 새벽 공기는 만만치 않은 매서움으로 감귀수의 전신을 난타했다.
솔직히...
맞아서 아픈 것도 서럽다!
물 뿌려서 쑤시는 데에 시리게 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으, 으윽...”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서는 감귀수를 쏘아보던 장추삼이 슥 앞으로 나섰다.
“왜 이러는 거야! 안 덤빌 테니 그만 좀 때리라고!”
너무 맞아서일까?
악만 남아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감귀수를 보다 때리는 것에 지친 장추삼이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 패면서 쾌감을 느끼는 가학성변태는 아니기에 그도
이런 일의 반복이 지겹기만 했다.
솔직히 퉁퉁 분 얼굴로 발악하는 노인네가 불쌍하기도 했고.
“앉아요...”
장추삼의 넋두리와도 같은 말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있던 감귀수
가 그의 얼굴이 천천히 돌아 자신에게 이르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신나게 팰 땐 언제고 이제는 친절인가.
“두드려 맞고 무릎 꿇을래요! 아님 그냥 앉을 거예요!”
“앉을게, 앉을게!”
찍소리 못하고 앉은 감귀수가 문득 탄식을 터트렸다. 그의 인생에 이런 수
모를 언제 겪었겠는가.
‘차라리 죽어버릴까!’
갑자기 처량해졌다. 이렇게 비굴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자신의 신세가 불쌍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어 반항다운 반항 한번 할 수 없다는 무력
함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욱, 우우욱...”
“얼레...”
사내가 우는 모습은 썩 보기 안 좋다. 거기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라면 그
강도는 몇 곱절 더해진다. 청승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질질 짜는 감귀수
를 멀거니 바라보던 장추삼이 신경질적으로 목을 꺾었다.
이러면 곤란해진다. 더 포악을 떨어야 부담 없이 즈려 밟을 수 있고, 원하
는 얘기를 토설(吐說)케 할 텐데.
“내 참...”
사당 안은 감귀수의 처량한 목울음으로 가득 찼다. 얼마나 불쌍한 연출이었
으면 보는 장추삼의 입에서 한숨이 다 나왔을까.
‘으으... 이거, 적응 안 되네!’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던 장추삼이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대로 가다간 영롱하게 빛나는 아침햇살 맞으며 ‘늙고 힘없는 남자의 사
회적 지위’에 관한 고찰을 나누게 생겼다.
“가마안~! 가만 좀 있어요!”
뚝.
매가 무섭긴 무서운가보다. 순간적으로 울음을 그친 감귀수가 풀린 눈으로
장추삼을 물끄러미 보다 제단으로 시선을 던졌다. 위맹한 관우의 초상.
“노부에게도 관성제군처럼 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지...”
발가벗겨진 자신에의 체념일까. 묻지도 않았는데 감귀수는 그가 걸어온 길
을 술술 풀어 놓기 시작했다.
감귀수. 청성의 72대 제자이자 한때는 대사형이었던 사람.
장문직을 사제였던 쇄심검자 유배운에게 내주고 검을 닦기 위해 심심산골에
은거할 정도로 담백한 성품을 가졌던 인물. 그 무렵 이미 감귀수는 무림에
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검술 실력을 가졌었을 것이다.
검정오존의 일원이자 장문직을 이은 유배운이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 위의 가설을 입증하는 사실이리라.
“십팔 년 전... 그래, 십팔 년 전에 죽었더라면 이런 치욕은 없었을 것을.
..”
“십팔 년 전?”
장추삼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아하, 하고 손뼉을 쳤다. 십팔 년 전이라면
혜성과도 같이 출두한 태양광무존으로 인해 구파의 자존심이 쑥대밭 되었었
다.
청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장문이 목을 매고 자진했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칼이 미쳐 세상과는
동떨어져 살았었으니까. 참으로 한심한 일이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청성을 찾은 감귀수를 반긴 건 싸늘히 식
은 사제, 유배운의 시신이었다.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한 사제의 부릅
뜬 눈동자를 감겨주며 복수를 다짐한 감귀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치무환검
존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검존께서 광무존을 상대했기에 그에 대한 단서를 얻으려는 심산이었지.
기필코 광무존을 이손으로 꺾어야 사제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릴 거라 믿었
으니까. 그러나 검존도 아시는 바가 없었다.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지.”
핏발선 눈으로 강호를 종횡하며 광무존의 단서를 찾는 그의 손속이 고울 리
없을 터. 조금의 반항이라도 용납하지 않고 내치는 검과 차디차게 얼어붙
은 마음으로 감귀수의 명성은 단숨에 유배운의 빈 자리를 메웠다.
원치도 않았고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검정오존의 자리. 그것도 죽은 사제를
밀어내고 얻은 위치였기에 감귀수의 마음은 씁쓸했지만 일단은 모든 걸 잊
었다.
복수만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으니까.
그렇게 십여 년을 보냈지만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광무존의 종
적은 도대체 알 길이 없었다. 자포자기하던 차에 무림맹에서 자리를 제의했
고 각지로 퍼져있는 지부들의 정보력을 이용할 심산으로 제일호법의 자리를
수락했다.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던 차에 이상한 소문이 들리더군...”
흑월회라면 무림맹에서도 기피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흑도라고는 하나
무림을 어지럽히는 일을 벌인 적도 없고, 지닌바 힘을 측정하기 어려웠기에
두 단체는 서로를 소 닭 보듯 무시하면서 지냈었다.
문제는 흑월회주의 가슴에 있었다.
“그자는 달 문양을 상의에 새겨놓았다고 했다. 해와 달... 물론 억측일지
도 모르지만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기묘했던 거지. 그래서 하남지
부로 왔다. 그때의 노부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으니까...”
“내가 봐도 묘하네. 해와 달이라... 그냥 지나치기엔 왠지 냄새가 나는 걸?”
장추삼의 맞장구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감귀수가 왱왱거리며 바삐 오가는
날벌레들을 손짓으로 쫓았다. 차분한 가운데 진행된 얘기였지만 속에 담긴
의미는 그리 평이한 성질이 아니었다.
하남에서 흑월회의 동정을 살피던 감귀수는 이 커다란 단체가 어떤 수입원
으로 움직이는지 의아스러워졌다. 아무리 지켜봐도 수입을 창출할만한 어떠
한 행위 없이 흑월회는 잘만 돌아갔으니까.
“곧 그 의문이 풀렸지...”
“밀염?”
장추삼의 물음에 쓰게 웃고는 감귀수가 벌떡 일어섰다.
“그들이 밀염을 한다는 걸 알고 노부는 쾌재를 질렀다. 너도 알겠지만 밀
염은 최고로 엄하게 다스릴만한 중죄였으니까. 그렇지만 증거가 없었다. 흑
월회 놈들은 교묘하게도 회의 사람들을 배제시킨 가운데 돈으로 매수한 일
반인들로 거래했었지. 회에서 나온 이들은 그저 감독만 했던 거야.”
도마뱀의 꼬리처럼 언제든지 잘라버릴 수 있을 사람들로만 밀염을 했기에
만약 관에 고변한다고 해도 흑월회가 받을 피해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야겠는데 그놈들은 워낙 교묘하게
빠져있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러던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군. 흑월회가 밀염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문제는 회주라는 자와 태양광무존의 관계가 아닌가하는...”
“그래서 밀염을?”
“맞불이었지. 그렇게 뒤흔들면 뭔가 반응이 나오리라 믿었다. 그런데 놈들
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지분을 잃어버렸음에도 흑월회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 정도 잃어
도 꺼떡 없을 만큼 큰 이문이 남아서인지 몰라도 흑월회는 무림맹의 잠식을
신경 쓰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발목이 잡힌 쪽은 무림맹이 된 것이다.
“사면초가였지. 뭘 해보려 해도 꽉꽉 막혀있었으니. 그렇다고 직접 치고
들어가서 흑월회주를 붙잡고 문초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어처구니없
는 일이지만 검정오존이네, 무림맹 제일호법이니, 하는 지위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의자에 앉아서 한숨만 쉬는 것이 다였다...”
“그래서...”
장추삼이 작가 웅얼거렸다.
“음?”
“그래서 민간인을 이용했던 거였군. 무림맹의 흔적을 남기면 곤란하니까
강호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꼬드겨서 잠입시켰던 거였어.”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대체 뭔 말을 하는 거야?”
꽝!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감귀수를 노려보다 장추삼이 사당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서슬에 움찔했지만 빙심혈세는 차분히 장추삼의 다
음 말을 기다렸다.
필유곡절(必有曲折)!
저만큼의 노화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짧은 시간을 겪었지만 삼성의
하나라는 괴성은 호칭만큼 괴짜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건가... 이건 정말 너무 억울하군. 너무 불공평
해... 불쌍한 형님...”
“형님이라고!”
뛸 듯이 놀란 감귀수가 고개를 돌려 장추삼을 봤다.
형님...
그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볼 때 의형제 같은 인위적인 결합이 아닌,
피를 나눈 형제를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괴성의 친형이 언제
무림맹과 관련을 맺었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군. 자네의 형님이 언제 무림맹에...”
“이렇게 답답할 때가... 내가 싸움 잘한다고 우리형님까지 싸움 잘하라는
법이 어디 있어!”
“아!”
감탄사를 내지른 감귀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헛살았다, 헛살았어... 이런 한심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괴성 장추삼은 분명 대단한 무위를 지니고 있다. 그럼 그의 일가친척까지
전부 고수들일까? 무가출신이라면 몰라도 우연한 기회에 무공을 익혔다면,
아니 무가의 자손들 가운데에도 강호에 뜻을 두지 않는 이들은 무공을 익히
지 않는다.
자신이 정해놓은 틀로만 바라보는 세상. 결코 완전할리 없는데도 그렇게 믿
고, 그것만을 고집하는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에 스스로를 책망하는
감귀수는 자신이 조금 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벌써 까먹은 거야? 칠년 전에 상인 하나를 무림맹에서 흑월회 쪽으로 보
냈었잖아! 치매가 아니라면 기억하고 있겠지. 당연히 기억해야만 하고!”
으르릉거리는 장추삼에게서 눈을 떼고 먼 곳을 응시하며 기억을 반추하던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이야 쉽지만 솔직히 칠년 전의 사소한 일을 누
가 일일이 생각해 낼 수 있겠는...
갑자기 감귀수의 눈이 커졌다.
“그래, 그런 적이 있었지! 칠년 전에 상인 하나를 밀염상으로 위장시켜서
흑월회로 들여보냈었다!”
잊어버릴 만도 한 것이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시도였고, 민간인의 힘을 빌
린다는 자체가 탐탁치 않았었다.
적어도, 적어도 그땐 그랬다.
“이제야 기억하는군. 그래 그 상인이 내 형님이었어... 이름이나 기억하고
있나?”
감귀수가 고개를 젓자 장추삼이 허탈하게 웃었다.
“노인장의 복수를 위해서 희생되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어. 형을 죽
인 놈들은 그들이지만 노인장도 일조를 했지. 개죽음 아냐? 노인장은 형을
위해서 뭘 했지? 목숨까지 건 사람을 위해서 뭘 했냐고!”
“그는 대가를 말 하지 않았다.”
204
“그게 말이 돼? 형님이 무림맹을 찾은 이유가...”
“당시 무림맹의 사정을 네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다. 수많은 사람들
이 매일 찾아와서 그만큼의 민원을 털어놓고는 눈물과 콧물로 부탁했었지.
사정이야 딱했지만 우리도 할 일이 있기에 그들의 사정을 모두 수렴한다는
건 불가능했었다. 뭐라 말을 해도 무림맹의 본질은 강호의 동정을 살피고자
만들어진 기구였으니까...”
감귀수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어찌 보면 장하이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
었을지도 모른다. 강호인들의 속성을 모르는 일반인이 무림의 힘에 기댄 자
체가 실수였는지도.
“그 상인, 다시 말해 네 형 역시 우리가 보기엔 보통의 민원인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남다른 열정으로 매일 찾아왔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노부가 기억을 했던 거지.”
“그래서 이용해 먹었군?”
장추삼의 비아냥에 감귀수가 태연하게 응대했다.
“이용이라... 글쎄, 뭐든 일을 시켜달라고 한 쪽은 네 형이었다. 일의 대
가에 관해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 하더군....”
이리저리 서성이며 말을 하던 감귀수가 제단 위에 걸려있는 관운장의 그림
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딱딱하게 굳어있던 먼지조
각들은 잘게 부서지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꼭 돌아오겠다고, 그때 얘기하겠다고 했다. 우리야 부담 없는 조건이기에
기꺼이 수락했었고.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못했지...”
할 말이 없다. 무림맹에서 잘못한 것이라곤 장하이를 침투시킨 뒤 철저히
방관했었던 거다. 그럼 뭘 요구할 수 있을까? 무림맹에서는 어디까지나 민
간인의 힘이 필요했고 그는 일을 수락했을 뿐이다.
잘못되었을 때 무림맹과의 관계를 불문에 붙이기로 약조했음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 그렇다고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해줄 일은 전무했다
고 봐도 옳다.
그래도 억울하다.
조금만 더 신경써줬더라면...
일순 고개를 떨군 장추삼이 무겁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장하이의 최후에
관해 담담히 말해 주었다, 이매환과 그들이 겪었던 얘기까지도.
“그랬군...”
짧게 답한 감귀수의 눈에서 어떤 결심이 섰다. 그러나 미처 보지 못한 장추
삼이었기에 푸념처럼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냈다. 특별히 뭘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고, 빙심혈세를 비롯한 무림맹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두서없이, 그야말로 정말 아무거나 끄집어냈다.
형의 얘기는 여기까지다. 아무리 이어보려 해도 무리라는 걸 장추삼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너무나 원통해서 아무 말이나 마구 늘어놓았다. 생
각 없이 뱉은 말들을 추리며 듣던 감귀수가 엉뚱한 부분에서 제동을 걸었다.
“가만, 그 기학이라는 자가 학(鶴)문양의 옷을 입었다고?”
“그래요. 그는 정말이지 소름끼치도록 강했지. 비록 내가 이기긴 했지만
순전히 운이었다고. 뭐, 지금 다시 붙어보면 모르지만.”
“묘하군. 학이라... 태양, 학, 물... 그럼 달은 뭐지?”
“물이라니? 뭔 소리요?”
장추삼의 물음에 감귀수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떠오르
는 영상 하나가 그의 치욕스런 어느 날을 되살렸다. 무인으로서의 삶을 송
두리째 앗아간 육년 전의 오후를...
“물, 그래 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수백이라고 했다...”
파견했던 자의 연락이 끊기자 감귀수는 직접 흑월회의 주위를 맴돌며 태양
광무존과의 끈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무인과 하나의 단체가
놀랄 만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양광무존이 무림에 발을 딛기 전까지 그를 아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신진고수라 칭하기에 너무도 강력한 무위를 가진 그의 출신이 없다는 거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흑월회는? 아무런 기반도 없이 불쑥
솟아난 단체일진데 어떻게 그리 견고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을까?”
“듣고 보니...”
무림은 배타적이다. 지독스러울 만큼 편협한 사회다. 그들이 아니면 용납하
지 않고, 그들보다 못하면 내리 누른다. 자생적인 세력이 인정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흑월회는 너무도 손쉽게 강호 십오개대파에 그 이름을 올려놓았다.
그것도 무림의 정신적 지주라는 소림이 버티고 있는 하남땅에서 말이다.
“아참! 거북이!”
“뭐?”
한껏 비장한 마음으로 말을 하려는 감귀수의 마음을 자르며 장추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북이라니?
“거북이도 있소. 기형의 사매라고 자처한 여자의 손목에 거북이 문양이 수
놓아져 있었거든. 그럼 다시 보자... 태양, 달... 아! 또 바위도 있다! 가
만, 가만, 사슴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제발 좀 차근차근 말을 해보게!”
감귀수의 핀잔에 장추삼이 뒷머리를 긁었다. 퍼뜩퍼뜩 떠오르는 생각은 많
은데 갑자기 너무 많은 상념이 뒤엉키니 도통 풀길이 없다.
머리가... 아프다.
“아아, 안되겠다. 일단 하던 말이나 해요. 이거 정리가 안 되네...”
괴로워하는 장추삼을 옆 눈으로 힐끗 보고 헛기침을 몇 번 터트린 후에 감
귀수가 그날의 악몽을 천천히 떠올렸다.
“뭔가 보였다. 물증은 없었지만 분명 흑월회와 태양광무존은 뭔가 관계가
있다는 심증이 노부의 머리를 꽉 채웠다. 그때부터 흑월회의 생성연원을 캐
고 다니기 시작했지. 그때 저 불쌍한 아이들도 만난 것이고...”
감귀수가 아무렇게나 뻗어있는 오정사사를 슬쩍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이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허험, 아무튼 그렇게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을 무렵 한 사내의 방문을 받
았다...”
“그게 수백이라는 자였군?”
장추삼의 말에 대꾸도 없이 감귀수는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흑월회의 뒤를 캐고 다니는 이유를 묻더군. 그런 질문에 답할 이유
따윈 없다고 일축하자 수백이 신비롭게 웃었지...”
그리고 시작된 공격. 오정사사를 부를 사이도 없이 감귀수는 패했다. 칼을
뽑을 시간조차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니 말 그대로 완패였다.
“너무 황당했다. 단 일초 만에 제압당했기에 우연이라고, 방심해서 그랬다
고 생각했다. 그러자 수백은 칼을 뽑으라고 하더군. 뒷짐을 진 채로...”
검술로 명성을 떨친 감귀수가 청성에서도 금기시하는 최심장을 남몰래 익힌
건 태양광무존과의 만남을 가정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백의 현란한
몸놀림은 빙심혈세의 전력을 요구했다.
“칠십이파검과 최심장... 후후후,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하고도 난 그
자의 오른쪽 옷깃을 베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때론 물처럼, 때론 공기처
럼, 수백은 노부의 주위를 완벽하게 장악하면서도 결코 지배하지 않았다.
그때 느꼈지, 만약 지배하려 들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팔십여 초를 나누는 동안 그자는 뒷짐 진 손을 풀지도
... 않았었다.”
장추삼이 감짝 놀랐다. 감귀수를 상대했다는 수백이라는 자의 몸놀림, 기학
의 그것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은가!
“문득 내밀어진 손에 나뒹구는 노부를 냉엄히 바라보던 그가 다시 물었고
거역할 수 없는 압박감에 사실을 말하자 수백이 처음처럼 신비롭게 웃으며
한마디를 던지고는 떠났다.”
감귀수가 자신의 손바닥을 펴서 주름진 골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검을 닦
으며, 장을 익히며, 수없이 다치고 벗겨진 손바닥이건만 이제는 그 시절들
이 모두 덧없다.
“광무존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그날로 무인으로서의 감귀수는 사라졌다. 목적도,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았
다. 살았다? 살았다기보다 살아졌다는 편이 옳다.
“아직까지 그자의 미소를 기억한다. 그 의미까지도...”
‘주제파악...’
비수를 박을 필요는 없어서 혼자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감귀수의 말을
듣고 보니 뭐가 정리된다.
“자 봐요, 노인장의 말마따나 태양광무존이 흑월회와 관련이 있다는 건 확
실해요. 수백이라는 자... 왜 광무존이 자신들의 몫이라고 했을까요? 그를
잡아서 무위를 떨치기 위해? 우스개죠. 그건 아니거든. 그럼 답은 하나지.
흑월회와 광무존은 어떤 식으로든 연이 있다는 거. 그것도 수뇌부 몇몇과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한거 아니겠어요?”
“그 정도는 노부도 예상했다네.”
감귀수의 맥빠진 대답에 장추삼이 검지손가락을 쭉 폈다.
“여기까지는 개나 소나 추리할 수 있는 얘기고!”
졸지에 개, 혹은 소가 되어버린 빙심혈세의 얼굴이 붉어졌다. 잘 몰랐는데
대화를 나누다보니 알았다. 이 녀석은 몇 마디의 말만으로 사람의 울화통을
충분히 터트릴 수 있는 입을 가졌다는 사실을!
“그. 그래... 다음 말이나 해 보게...”
“노인장은 모르는 사실 하나를 알려 드리죠.”
우월적인 미소를 지으며 장추삼이 당문에서 벌어진 혈투에 관해 얘기했다.
하운의 편지를 토대로 말을 하는 주제에 마치 제 싸움처럼 묘사를 하는 정
도가 아니라 일어서서 자세까지 취하며 말을 했기에 듣는 감귀수로는 한편
으로 재미있었고, 한편으로 어이없었다.
사방신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던 그가 북궁단야의 일검에
처참히 패했다는 소리가 뒤따르자 낮게 한숨지었다. 무슨 생각도 떠올릴
사이 없이 바위문양의 사내와 하운의 격돌로 얘기는 이어졌고 감귀수의 눈
에 짙은 의혹이 깔렸다.
“... 그래서 내 추리는 바로 이거요. 흑월회의 수뇌부는 열명이라는 것!
일컬어 십장생이라 불러야겠군. 음, 십장생! 기형하고 돌덩어리가 죽었으니
이제 여덟... 아니, 태양광무존이 사라졌으니 현재 일곱 명이다. 문제는
달문양의 사내인데 원래대로라면 산을 그려 넣었어야 할 텐데 왜 산이지?”
장추삼의 추리는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었다. 하운과 겨루며 한 치도 밀리지
않았던, 아니 압도하기까지 했던 건암이라는 사내 역시 강호에 알려진 바
가 전무한 상태였다. 그건 다른 십장생들도 마찬가지였고.
개개인이 검정오존을 굴복시킬 능력을 가진 - 이는 묘교교의 무위로도 입증
이 되는 바다, 그녀는 십장생에서 여덟 번째의 위치였고 기학보다 아래 항
렬이었으니까 - 이들이 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그야말로 무림정복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열 사람이? 고작 흑월회
인지 뭐시긴지 하는 단체 하나를 끌고? 그건 말이 안 되고...”
장추삼의 독백을 가만히 듣던 감귀수가 천천히 돌아섰다.
“열심히 고민하시게. 이제부터 무림은 자네들의 몫이니...”
“에? 그게 무슨 소리요?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다는 거요? 무슨 몫이니...”
“노부에게 강호를 논할 자격이 없다. 이제 무림에 나설 일은 없을 것이야.
내일 하나의 일만 마무리 지으면 은거할 거라네...”
감귀수의 눈에 초탈한 무엇이 맺혔다. 막혀있던 이물질이 뻥 뚫린 사람처럼
홀가분해진 그가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한번의 복수와 한번의 좌절로 인
해 철저히 망가졌던 감귀수의 마음을 치유한건 우습게도 구타였다.
짓밟혔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로 두드려 맞으며 그의 가슴에 맺혀있던 아집
과 원한은 차츰 작아졌고 강호초출의 풋내기가 던진 한마디 한마디에 빙심(
氷心)이 조금씩 녹아내려 이제 피로 세상을 덮으려는(血世) 사람은 이 자리
에 없었다.
이른바 타심즉통(打心卽通)이라고 할까?
“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함세...”
문을 열고 사당을 나서려던 감귀수가 고개만 돌려 장추삼을 빤히 바라보았
다. 어둡고 축축하던 눈빛은 감내하겠지만 이렇게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대
할라치면 뭔가 찝찝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무, 무슨 말이요?”
더듬거리는 장추삼을 보고 손을 한번 휘저어 별말 아니라는 암시를 하고는
감귀수가 오정사사들에게 다가가 일일이 추궁과혈을 해주었다. 정신이 돌아
온 다섯 사내가 장추삼을 보고 분분히 칼을 찾았으나 감귀수의 제지에 멀뚱
한 얼굴이 되어 한구석에 가만히 시립했다.
그때까지 장추삼은 꿀 먹은 벙어리였다.
“무슨 말이기에 그리 뜸들...”
“이런 생각을 해보았나? 자네들, 다시 말해 강호삼성이라 칭해진 세 명의
젊은이들과 태양광무존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뭐요! 우리가 언제 구파에 난입... 음...”
소림사 가서 깽판 논 전력이 있는지라 장추삼이 버벅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 스스로 찔리는 것만큼 당황스러운 일도 없는 법이다.
“행보를 말하는 게 아니야. 묻겠네. 자네의 사문은 어디인가?”
“사문? 그런 거 없는데요? 사부는 있었지만 사문 같은 걸 말해주지 않았거
든. 그래서 몰라요.”
“재미있지 않은가? 검정오존의 일원을 단 몇 수에 제압하고, 그것도 맨손
으로 말이야, 흉몽지겁의 공포라는 육천염의 두 명을 간단히 꺾어버린 청년
고수가 자기 사문도 모른다는 것이.”
쾅!
이건 분명 충격적인 사실이다. 사부가 전수해준 무공으로 강호를 종횡하며
자신의 힘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던 그로서 사부의 이면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건 분명 바보 같은 일이다.
뭐라 말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어서 장추삼이 애꿎은 나무 벽을 툭툭 쳤다.
고드름처럼 맺혀있던 흙먼지들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렸지만 그의 마음
에 맺힌 무엇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하운이라는 청년을 볼까? 자네말대로 어떤 명가의 출신이라고 쳐도
그런 압도적인 무위를 가졌다는 건 당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야. 아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옳겠지...”
“으음...”
“사방신을 일검으로 도륙했다는 한성 북궁단야? 이게 현 무림에서 가능하
기나 한 일인가?”
망연히 천정을 바라보는 장추삼을 일견하고 오정사사와 사당을 나서며 남긴
감귀수의 마지막 한마디가 그의 가슴 속에 이리저리 메아리쳤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지만 자세히는 볼 수 없다네...”
205
“무슨 말을 그리 오랫동안 나눈 것인가?”
“한담이요.”
한담은 무슨, 하는 얼굴로 장추삼을 멀뚱히 보는 유한초자에게 그가 실눈을
뜨고 투덜거렸다.
“그럼 내가 저 노인네랑 강호의 중요현안 같은 거창하면서도 있어 보이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하는 거요?”
“아니, 뭐... 자네가 하도 씩씩거리면서 하남지부를 방문했었기에 한 말일
세. 그때의 기세로는 현판 하나는 우습게 내릴 것 같았거든.”
생각해보니 그땐 그랬다. 당시의 기분대로라면 하남지부만이 아니라 무림맹
자체를 박살내버리고 싶었던 것도 같다.
새벽공기가 옷깃을 파고들자 장추삼이 어깨를 움츠렸다. 추위는 그럭저럭
버티는 편인데 이건 ‘그럭저럭’의 수준이 아니다. 짧은 싸움과 형의 문제
로 올라갔던 체온이 사건의 해결에 따라 급격히 떨어진 탓이다.
솔직히 졸리기도 하고.
“별로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니까 제발 좀 냅둬요.”
“누가 뭐랬나...”
힘없는 장추삼의 대답에 역시 힘 빠진 응대를 하곤 뒷짐을 진 유한초자가
그의 뒤를 묵묵히 쫓았다. 새벽공기는 매서웠지만 초롱한 별빛들이 그들의
길동무가 되어주었기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좋군...”
뜬금없는 유한초자의 한마디에 멍하니 걸음을 재촉하던 장추삼이 그를 돌아
보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와 얼음장 같은 바람, 그리고 금방이라도 쏟
아져 내릴 것처럼 반짝이는 별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눈길을 준 장추삼의 입에서도 절로 감탄성이 튀어
나왔다. 그만큼이나 새벽의 별빛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오오, 죽이는군. 아주 끝내주는걸? 내가 아는 어느 소저의 눈망울보다 좀
못하긴 해도 꽤나 영롱하게 빛을 뿌리는군.”
“어느 소저?”
“예, 어느 소저.”
“그 어느 소저가 누군가?”
“어느 소저가 어느 소저지, 그럼 어느 노인네겠소?”
“글쎄 그 어느 소저가 누구냐니까?”
이런 실없는 말로 별빛의 초롱한 아름다움을 기꺼워하던 그들이 어느새 묵
던 객잔에 도착했다. 자고로 천하에 쓸데없는 말동무라고 하더라도 심심할
때는 없는 것보다 몇 곱절은 낫다.
“얼라? 갈 때는 무지 오래 걸렸는데 돌아오는 길은 금방이잖아?”
“좋은 말벗이 함께하면 천리 길이라도 힘든 줄을 모르는 법이라네.”
“좋은 말벗...”
“오오, 배가 고프군! 자네도 한담을 나누느라 시장할 텐데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자. 주인장에게는 미안하지만 음식을 청하기로 하세! 따
끈한 국물에 반주 한잔 곁들여서 말이야!”
장추삼의 이죽거림이 번뜩이기 전에 유한초자가 기막힌 순발력으로 화제를
바꿨다. 성질머리 더러운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은 그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
이고 지금의 대응은 그런 견지에서 매우 적절한 사람은 시도였으니 사람은
적응의 동물임에 틀림없다.
꼬르륵.
뱃속을 울리는 처연한 메아리가 장추삼의 심경을 대변해 주었다.
주인장을 외치는 유한초자의 반응속도도 인정해줄만한 것이었지만 부르자마
자 튀어나와 지지고 볶아 그럴듯한 야식거리를 만들어서 객방까지 대령하는
주인장의 속도 역시 찬탄을 금치 못할 만큼 빨랐다.
돈이 좋긴 좋다.
차가운 몸에 들어가는 따뜻한 국물과 알싸하게 넘어가는 쓴 술이 어우러지
자 두 사람은 노곤노곤 풀어졌다.
“뭔 돈을 그리 많이 쥐어주는 거요...”
“아, 밤늦게 깨웠으니 그만한 보상은 해줘야지!”
“딴은...”
느긋하게 풀어져서 목을 젖히고 겔겔거리던 장추삼이 느닷없이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새벽이라고는 해도 아직
은 가을이라 창문을 열어두었기에 시린 숨결처럼 불어오는 바람만큼이나 깨
끗한 별빛이 두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주었다.
보편적으로 남자는 여성보다 감성이 무디다. 하지만 한번 감정이라는 땔감
에 불이 붙으면 여자들보다도 한층 뜨겁게 타오른다.
“저기 달은 이르지 않아서 좋겠네.”
“음?”
왼손을 들어 묵천(墨天)의 중앙에 도도히 자리하는 달을 가리킨 장추삼이
잠꼬대처럼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저기 달 말이오. 제 시간에 제가 있어야할 위치에서 제 소임을 다하고 있
지 않소? 저번에 본 이른 달의 처량함과 달라서 썩 기껍다 이거요.”
“그 달이... 그리도 처량해 보였나...”
술 한 잔을 따라 입에 털어 넣고는 유한초자가 빈 잔을 물끄러미 보았다.
잔의 진정한 모습은 무언가가 차 있을 때일까, 아니면 깨끗하게 비워져 있
을 때일까.
“겨울에 우는 매미만큼.”
“겨울에 우는 매미만큼 이라...”
문득 유한초자는 매미의 일생을 생각해보았다. 고작 일주일간의 비상을 위
해 생의 대부분을 땅속에서 지내며 수많은 탈피를 반복하기에 매미는 불사
와 재생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그 과정은 생성과 소멸의 의미에서 달의 그것
과도 비견된다.
“따사로운 여름의 한때를 위해 일생을 바쳤건만 동토(凍土)와 삭풍(朔風)
을 보상받아야하는 겨울의 매미...”
“어이구... 아주 풍월을 읊으시오, 풍월을 읊어!”
장추삼이 혀를 죽 빼물었다. 하여간 노인들은 어떤 건수만 생기면 그냥 타
령조로 나간다. 대단한 비유도 아니건만 뭔 겨울매미 타령이란 건가.
피곤은 한데 정신은 멀쩡하다. 격한 싸움이었고, 안돌아가는 머리까지 나름
대로 굴리느라 축 처진 몸일진대 이상할 정도로 의식은 생생하다.
‘십장생이라...’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이없다. 붙여놓고 보니 꽤 그럴 듯하긴 한데 그들도
스스로를 그렇게 부를까? 아니, 왜 그들은 하고 많은 상징이나 영물들을 내
버려두고 하필 십장생을 그들의 표식으로 삼았을까?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들의 나이나 행동으로
보아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열 가지를 내세운 건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
진시황의 영화를 꿈꾸는 존재들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그럼 뭐냐...’
생각이 옆길로 새자 장추삼은 완벽하게 자신만의 세계로 몰입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비록 사소하고 자그마한 일에도 그래야만 하는
곡절이 있는 법이거든. 조금 더 근사하고 남들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상징들을 모조리 외면하고 노인네들이나 좋아할만한 십장생이라...’
“뭔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고 있나?”
혼자 술을 홀짝거리던 유한초자가 불쑥 물었지만 장추삼은 듣지 못한 듯 여
전히 상념의 바다에 푹 잠겨있었다. 가끔 제 머리를 툭툭 치기도하고, 뭐라
고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는데 자못 그 기세가 매서워서 멀거니
바라보던 유한초자가 고개를 젓고 또다시 자작을 해야만 했다.
‘묘한 녀석이야. 하릴없이 땅만 보며 걷는 듯하면서도 은근 슬쩍 전체를
관조하고, 멍청하게 끌려 다닌다고 보였는데 어느새 고삐를 움켜쥐고 있거
든. 이런 놈을 두고 괴물이라고 하는가?’
뭐 심각하게 음음거리며 머리를 굴렸지만 결론이 나올 리 없는 추리인지라
파, 하고 한숨을 쉰 장추삼이 입맛을 다시다 냉수 한잔을 급하게 들이켰다.
꿀꺽꿀꺽!
“거 참 시원하게도 마시는군. 산해진미에 미주가효라고 해도 자네가 마시
는 냉수에 비할 바가 아닌 듯 하이.”
“답답해서 그래요, 답답해서!”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유한초자가 뒷목을 손으로 탁탁 쳤다. 아무리
근력이 좋다고 해도 노인네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 서서히 피곤이 몰
려오나보다.
“졸려요?”
“그럼 자네는 안 졸린가?”
“피곤은 한데 졸음은 안 오네, 이거...”
“일단 누워서 눈을 붙여보게. 그럼 잠이 올 거야. 피곤할 땐 그저 잠이 보
약일세. 한숨 푹 자두면 막힌 생각도 숭숭 뚫릴게야.”
“그럴까나...”
역시 노인들의 삶의 지혜는 믿을 만 했다. 유한초자의 강권에 못 이겨 침상
에 오른 장추삼은 일각을 채 견디지 못하고 코를 골았으니까. 하지만 꿈자
리가 별로였는지 연신 잠꼬대를 하며 손발을 휘저었다.
“아, 그... 잠버릇하곤!”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유한초자가 장추삼의 발길질을 버티지 못하고 잠을 청
한지 한식경만에 일어나야만 했다.
“우웅~ 우웅~”
“이것 참!”
그렇다고 곤히 자는 놈의 멱살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해서 머리를 벅벅
긁던 유한초자가 털레털레 의자에 앉았다. 비록 음식은 식어있었지만 객잔
주인이 내온 술은 안주가 없어도 쉽게 들어갈 만큼 순했다.
세월아, 네월아 하고 홀짝홀짝 들이킨 술이어선지 어느새 술병은 비었고 한
번 깬 잠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젠... 장...”
여전한 잠꼬대. 이까지 벅벅 갈며 으르릉거리는 장추삼을 세상에 다시없는
동물처럼 바라보던 유한초자의 눈가에 문득 자애로운 미소가 맺혔다.
지독히도 따사로워 보는 이의 눈시울까지 적실만큼 훈훈한 웃음은 소리로
변조되지 않고 그 표정 그대로 살아났지만 미소의 끝마무리에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의 의미를 알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한초자 자신도.
“주책이다.”
텅 빈 잔과 텅 빈 마음.
주인장을 불러 술을 청하려 일어섰던 유한초자가 한걸음을 채 떼지 못하고
다시 앉아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잔은 비워
두는 편이 더 어울려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비워진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야하나...”
***
“재미있지 않은가! 안 그래, 사매?”
“사형...”
목을 뒤로 젖히고 달을 올려보던 운조가 키득거렸다. 그의 손엔 양피지 한
장이 위태롭게 들려있었고 묵묵히 시립한 녹미랑의 얼굴 위로 진한 안타까
움이 깔려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우스개야. 장추삼에 이어 하운이란다. 하운이란 놈이...”
“사형...”
“하운이라는 놈이...”
킥킥거리던 운조의 눈에서 빨간 핏물이 한줄기 떨어져 내렸다. 너무도 붉어
마주하기 조차 부담스러운 핏물이.
“건암 사형을 베었단다. 누구보다 우직하고, 그래서 외로움을 많이 탔던
사람을 죽였단다...”
“사형...”
이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사실 운조로도 건암에 대해 별 달리 추억할만한
무엇을 그려낼 수 없어서 더욱 미안스러웠다.
건암, 열명의 사형제들 가운데 가장 말수가 적었고 또 특출한 기예나 지혜
도 없었던 인물. 늘 다른 이의 얘기를 경청했지만 자신은 한발자국 벗어나
남들의 의견을 좇았기에 어떨 때는 존재 자체가 희미하기까지 했었던 사람.
궂은 일, 성가신 사건이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나섰었고 그것이 관행처럼
굳어졌기에 사형제 간에는 묵시적으로 귀찮은 일이 생기면 건암이 처리해줄
거라고 믿었었다. 또, 그는 늘 기대에 부응했었고.
그렇게 한 사람은 규정지어졌었고 그렇게 떠나보냈다. 몇 십 년을 같이 보
냈지만 회고할만한 얘깃거리 하나 남겨두지 못한 채.
“사형... 어쩔 도리가 없었잖아요. 자책하지 마세...”
“사형이라는 소리도 듣기 싫다! 뭘 한 게 있어야 사형이고 나발이고를 찾
지! 지금 나란 놈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시간 죽이기도 이정도면 수준
급일 거다! 하루하루 붕괴되는 형제들의 꿈과 목숨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게
전부 아니냐!”
운조의 비명과도 같은 절규가 녹미랑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사형은 최선을 다하고 계세요. 다만 손이 닿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손이 닿지 못해서? 이봐, 사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작해
야 쥐새끼마냥 숨어서 남들이 하는 말이나 엿듣고 그 빌어먹을 책이나 킁킁
거리며 찾아 헤매는 게 전부 아니었어? 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냐
고!”
고개를 바로 한 운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사정없
이 몰아치는 산중턱이었지만 그가 발산하는 기세로 주위는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알고 있다. 무언가가 어그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
다. 차라리 부딪쳐서 깨지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을.
“난 말이야... 노태상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녹미랑의 얼굴에 짙은 우수가 베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가라앉을 듯 내
려지고 운조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 하나가 덜렁 맺혔다.
푸념, 푸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렇게 토로라도 하지 못한다면 가슴이
터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푸념 밖에 할 게 없다.
‘빌어먹을...’
노랗게 시든 풀 한줌을 으스러지게 움켜쥔 운조가 얼굴을 돌려 녹미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첫댓글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