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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제1독서 : 1코린 1,17-25
복 음 : 마태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의 복음에 대해서, 일반적인 해석은 아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해설을 소개하려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여기서 말하는 잠든 처녀들이 세상을 떠난 이들이고
등잔의 기름은 선행이라고 설명합니다.
등잔에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은
이 세상에서 재물을 쌓아 두기만 하고 자선을 베풀지 않은 이들입니다.
비유에서 열 명의 처녀들을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동정의 가치를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9,12 참조).
동정은 계명으로 주어진 의무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동정을 훌륭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동정 생활을 하면서 선행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은 그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처녀들”(25,3)이라고 일컫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그들이 “몸에 대한 사랑을 극복하였지만,
돈에 대한 사랑에는 굴복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동정 생활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하더라도,
가진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선행을 전혀 실천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등불에도 처음에는 기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관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관대함이 요구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가지고 있지만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다음에는 선행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에게 기름을 사는 것은
이 세상에 살 때, 가난한 이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때를 위하여 준비할 기름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지만,
기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한없이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등잔에 기름을 마련할 수 있는 귀한 시간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교장 연수를 받는 교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 강사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감 선생님 여러분, 여러분이 교장이 되려면 그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나요?”
교감 선생님들은 각자
“인성을 쌓아야 해요, 전문성을 키워야 해요. 교장 자격을 취득해야 해요.” 등의 답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강사는 결정적인 조건이 빠졌다고 말합니다.
그 결정적인 조건은 무엇일까요?
“어느 학교의 어느 교장 선생님이든 누군가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여러분에게 기회가 생깁니다.
교장 자격을 아무리 갖춰도 빈자리가 없으면 새로운 교장이 등장할 수 없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교장이 되려면 교장 자리가 먼저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장 자리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을까요?
준비를 미리 철저하게 해야 자리가 났을 때 얼른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 자리가 먼저 나야 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자기에게 절대 오지 않을까요?
100%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준비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입니다.
죽음의 그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세상 안에서의 만족을 위해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간직한다면
절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기 위해 지금 하는 노력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실천을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등만 가지고 있을 뿐, 기름은 준비하지 않습니다.
신랑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습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잘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신랑이 왔을 때, 혼인 잔치에 들어간 사람은 당연히 슬기로운 처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혼인 잔치로 비유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비유의 끝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철저히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기다린 슬기로운 처녀의 모습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는 혼인잔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열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입니다.
신부는 당연히 신랑께 깨어 있어야 하고,
신랑을 고대하고 기다림으로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오면 마중 나가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마중 나갈 뿐 아니라,
신랑이 자신을 잘 찾아오도록 ‘등’을 밝혀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등’을 밝혀 들기 위해서는 ‘기름’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이가 바로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준비해야 할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등’을 ‘선행’으로
등에 불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을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의 ‘세상의 빛과 소금’의 가르침에서 말씀하십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5-16)
그러니 ‘등’은 ‘착한 행실’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기름’은 ‘신랑에 대한 사랑’,
곧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자세’이며,
성령의 기름 부음에 도유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습니다.”(마태 25,6).
여기서, “한밤중”은 가장 예기치 않은 때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등불을 챙겼습니다.”(마태 25,6-7)
여기서 ‘챙기다’(코스메오, κοσμεω)는 ‘심지를 자르다’라는 뜻으로,
다 타버린 심지 끝을 잘라서 그을음이 나지 않고
환하게 타오르도록 정돈하는 행동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곧 불꽃이 잘 타오르도록 그래서 환하게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
심지가 기름에 닿아있는지 기름은 충분한지,
그리고 심지가 타버리지는 않았는지 보고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기름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성령에 젖어 있는지, 그 사랑의 기름에 도유되어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신랑이신 주님’께 깨어 있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인
사랑의 착한 행실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나는 ‘슬기로운 처녀’인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4-2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깨어 있어라.”(마태 25,13)
주님!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되, 신랑인 당신을 향해 깨어있게 하소서.
당신을 희망하고 기다리며, 더더욱 갈망하게 하소서.
빛 속에서 은총을 볼 줄 알게 하시고,
그 은총이 얼마나 큰지,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할 줄 알게 하소서.
사랑의 등불을 켜들고, 임을 보게 하소서. 임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깨어있게 하시고,
당신 사랑에 기름칠 되게 하소서. 아멘.
보든 안 보든 한결같아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과 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갑니다.
신부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 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등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기름이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처녀의 잘못입니다.
우리도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어리석은 처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 내 삶의 태도가 어떠한지 살펴야 합니다.
물론 기준은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어리석은 저는 하루 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 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한 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간혹 확인을 소홀히 한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깊은 관계 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천상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삶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궁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ChatGPT(챗지피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한국 전통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나 성격이 얼마나 잘 맞는지 판단하기 위해
주로 결혼을 앞두고 서로의 사주팔자를 비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궁합은 상대방과의 조화를 보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며,
서로의 생년월일과 시간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가지 요소들을 분석합니다.
이러한 분석은 서로의 성격, 운명, 건강, 재물운, 자녀운 등을 포함하여,
결혼 생활에서의 조화와 성공 가능성을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궁합은 특히 전통적인 결혼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에도 일부 사람들은 이를 참고하여 결혼을 결정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대 사회에서는 궁합뿐만 아니라 서로의 사랑과 이해, 상호 존중 등의 요소가
결혼 생활의 성공에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궁합에는 동양의 철학과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궁합을 삶의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궁합이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동양적인 방법이라면
서양에는 Enneagram(애니어그램)과 MBTI(앰비티아이)가 있습니다.
2002년 사목국에 있을 때입니다.
신부님들의 성격이 다르고, 때로 서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장 신부님은 서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애니어그램, 앰비티아이 프로그램을 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애니어그램은 사람의 성격을 9가지의 범주로 파악합니다.
앰비티아이는 사람의 성격을 16가지의 범주로 파악합니다.
저는 궁합을 본 적은 없지만 애니어그램과 앰비티아이 검사는 받아 보았습니다.
애니어그램 검사에서 저는 ‘협조자형이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앰비티아이 검사에서 저는 ‘동정심이 많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쏟으며,
나눔과 베풂을 중시하며, 타고난 협력자로서 동료애가 많고 친절하며
능동적인 구성원’이라고 파악되었습니다.
애니어그램, 앰비티아이를 믿는 건 아니지만,
저와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직관적인 사람과 논리적인 사람과 대화할 때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결혼의 조건은 궁합도 아니고, 애니어그램이나 앰비티아이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유무’가 결혼의 조건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직업, 재물, 능력을 결혼의 조건으로 볼 수 있겠지만,
어르신들은 그것보다 먼저 ‘신앙’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았습니다.
형수님도 형님과 결혼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았습니다.
부득이하게 세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면 ‘관면혼배’를 하였습니다.
나중에라도 꼭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성공도, 명예도, 권력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복음이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일지라도,
그 복음이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로 보일지라도
우리 신앙인들은 ‘복음과 십자가’를 삶의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잔에 담아야 할 ‘기름’을 말씀하십니다.
그 기름은 타인과 나눌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 기름이 있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 기름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고,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그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열 처녀가 등불을 가지고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시며,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여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2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헤아리고서
신랑의 오심에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방종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것들에만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지 않았다.
신랑이 언제 올지는 별 관심이 없다.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처녀들은 슬기롭고 어떤 처녀들은 어리석었다.
그것은 기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기름의 의미는 아주 큰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다.
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이다.
이 사랑이 없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해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진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그 신랑은 한밤중에 온다. 예기하지 못한 시간을 말한다.
“신랑이 온다!”(6절)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챙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8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9절) 하였다.
하느님 앞에서 선은, 사랑은 얻을 수도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10절)
그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왔다. 그들은 기름을 사서 왔을까?
기름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을까?
아니다. 단지 문이 닫혀있는 것만을 본다. 문을 두드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놓쳐 지나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삶을 항상 노력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아뿔싸, 준비한 기름이 없네.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 복음의 종말과 심판에 관한 설교(24-25장)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에 따른 준비와
최종적인 심판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광경이 많은 은유를 통한 비유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 관한 일들이
비유 속에 묘사되는 것처럼,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은유를 이용한 비유의 맛은 그 속에서
영적인 교훈과 도덕적 지침을 얻어내는 데 있다.
마태오가 수고를 들여 편집한 네 편의 비유를
연이어 수록한 이유도 바로 그런데 있는 것이다.
네 편의 비유를 한 번 언급하면,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달란트의 비유(25,14-30),
그리고 최후의 심판의 비유(25,31-46)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 번째를, 내일 복음에서 세 번째 비유를 듣게 된다.
참고로 네 번째 비유는 <가해>의 그리스도왕 대축일과
부활시기를 제외한 다른 시기의 장례미사 복음으로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열 처녀 비유는
마태오 복음만이 전하는 독자적인 고유전승이다.
비유에서 신랑은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뜻하며,
열 처녀는 신랑을 맞을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열 처녀의 손에 쥐어진 등잔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선사 받은 신앙을 의미한다.
그 신앙의 강도와 열매는 준비된 기름에 비유된다.
따라서 열 명의 처녀 중에 슬기로운 다섯은
복음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지키며 사는 신자들이요,
어리석은 다섯은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신자들이다.
무릇 ‘선인과 악인’이 함께 하는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문제는 신랑인 그리스도의 오심이 늦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처녀들이 등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랑이 이내 왔다면 별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신랑의 오심이 늦어지면서 등불을 위한 기름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신랑이 당도하는 시간이 지체되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신랑이 온다는 사실이다.
기름을 달라고 청하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애절함과 나누고 나면
양쪽 다 모자라니 가게에 가서 사다 쓰라는 슬기로운 처녀들의 야속함이 상충된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와 버렸다.
이것 또한 야속하기 이를 데 없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오실 것은 무엇인가?
허나 인생은 그런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때와 기회를 놓치고 나면 다시 얻기란 힘든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에야 같이 도와가며 사는 듯하지만,
마지막에 가면 철저히 홀로 서야 함을 보여주는 비유가 아닌가.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떠나신 지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마태오복음 공동체에도 그렇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척에 있는 사건으로 믿었고,
개중에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재림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림이 지체되면서 기다림의 열망은 식어가기 시작하였다.
기다리다 지치면 기다림에 대한 열망은 식어가기 마련이다.
오래 기다리다 보면 지치고 짜증나고 화가 나기도 할 것이며,
때로는 포기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각자가 한 생을 살다가 죽는 순간이
바로 신랑이 오신 시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열매를 맺지도 못하고 미지근한 열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다림의 의미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일은 오늘 복음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슬기로운 다섯이나
미련한 다섯이나 모두가 지쳐서 졸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는 사실이다.(5절)
얼마나 솔직한 표현인가?
그러나 기름 준비의 여부에 따라 그 잠이 평화의 잠이 될 수도 있고
공포와 두려움의 잠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13절)이 쉼도 지침도 없이 뜬 눈으로 밤낮 긴장하여 살라는 말은 아니다.
주어진 하루에 예수님의 복음을 따라 최선을 다하여 살고,
하루의 마지막 시간에 평온한 휴식의 잠을 청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25,6)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휴가 중에도 기도하고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입니다.
자칫 휴가 중에 몸과 마음이 흐트러질 수도 있었겠지만,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으로 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늘과 내일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25,1~13)와
‘탈렌트의 비유’(25,14~30)의 주제가
바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의 처음과 마침의 순간까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신랑이신 주님을
우리는 늘, 항상 깨어 기다리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 가까이, 그러나 하늘나라는
아직 우리네 삶에서 성취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깨어 살아가면서 각자의 빈 등잔의 기름을 우리 삶의 많은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을 통한 얻음과 잃음을 거듭하며 채워나가야 하는 삶입니다.
이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저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구분되고,
그로 인해 전혀 다른 삶을 하느님으로부터 정산精算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겪어서 알고 있지만, 쉽게 망각하는 것 하나는
우리네 삶에서 지금 일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잃어버리기 전의 상황으로 되돌리기 위해, 혹 되찾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면서
삶의 시간을 낭비하고 후회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를 잃고 난 뒤에야
잃어버린 것의 소중함과 여기 지금 살아 있다, 는
놀라운 사실에 대한 고마움을 뒤늦게 서야 깨닫게 됩니다.
때늦은 후회와 자책을 하지 않는 충만한 삶과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전 존재로 삶을 직면하고
자기 존재 이유와 의미를 자각하며 깨어 살아야 합니다.
저는 10번의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이나 시술 했었기에,
깨어나다, 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느 정도 체험했습니다.
의학적으로 깨어난 상태는 의식, 정신을 회복했다는 것을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러니 깨어 있어라.”(25,13)라는 권고는 영적이며 실존적 차원에서
내일이 아닌 오늘 깨어 있음이며 깨어 사는 삶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불교적인 ‘깨어 있음은 지켜 봄觀이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모든 것을 놓거나 버리며 마음은 가만히 지켜보고 머무르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자기다움을 남과 다름으로만 이해하고,
남과 다르기 위한 삶을 살려고 애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과 다르게 살기 위해 가장 쉽게 드러난 현상이 남들과 비교해서
끊임없이 더 높은 스펙을 쌓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학교 교육은 진리나 인생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펙을 쌓아 남들과 다르게 만드는 공장과 같지 않나 생각됩니다.
물론 열심히 부단히 노력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과 다르게, 남보다 더 많은 스펙을 쌓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존재의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다움은 남과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남처럼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참된 자기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인들이,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시97,12)처럼
슬기로운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자기다움을 찾음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늘 자유롭고 매사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안팎이 늘 열려 있고 깨어 있기에
일상의 평범한 가운데서 거룩함과 비범함을 느끼고 만지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내일을 위해 오늘 깨어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오늘 그리고 이미 어제부터 깨어 살아가고 있었기에 언제 오실지
모르는 신랑의 오심을 긴장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즐기면서,
자신들이 예상하지 않은 때 오신다고 해도
오신 신랑 앞에서 갈팡질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랑이 오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어제처럼 오늘도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이
신랑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깨어 늘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기에 신랑이 오실 미래 또한
평범하게 어제와 마찬가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맞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슬기롭다는 것은 오늘 복음에 의하면 그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모르지만
늘 깨어 준비하고 대비하며 지금 여기서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과 다르게, 남처럼 되려고 허둥대며 인생에 부질없는 스펙의 탑을 쌓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과 삶을 기쁘게 행복하게 향유 하면서
지금 여기서 이미 자신이 해야 하는 바를 묵묵히 충실히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흔들어 깨우는
영적 자명종의 울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 (25,6)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