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한 편의 탄원서 내지는 응원글을 글쓴이의 동의를 얻어 게재하고자 합니다.
탄원의 글 또는 응원의 글을 통해 조금 더 진실에 다가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상임연구원),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님의 글을 게재합니다.
재판장님께
저희는 곽노현이라는 사람을 20여년 가까이 지켜봐온 인권단체 활동가들입니다. 그분이 평소 어떤 성정을 갖고 생활해 오셨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난한 인권단체에 벗이자 둥지가 되어준 사람
1992년 여름, 새로운 인권단체를 만들어보겠다고 몇 명이 모였습니다. 인권이라는 말이 일반 시민들에게 아주 낯선 언어였던 시절이었고, 몇몇 민주화 관련 단체를 제외하고는 인권단체라 부를 만한 단체도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무실을 마련할 돈도 없었고, 활동가들의 생계비도 제대로 마련하기 힘들 만큼 척박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저와 동료들은 제과점, 중국집, 카페 등을 전전하며 간신히 모임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된 어느 날, 동료 중 한 사람이 화색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한 토론회 자리에서 생전 처음 보는 대학교수 한 사람이 우리 사정을 듣더니 자기 단체 사무실을 그냥 쓰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대학교수가 당시 방송대에 재직 중이던 곽노현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저희에게 내어준 사무실은 곽 교수와 강경선 교수가 만들고 번갈아 회장을 지낸 민주주의법학연구회였습니다. 자기 사무실처럼 마음 편히 쓰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합니다. 그 사무실을 기반으로 태어난 단체가 바로 ‘인권운동사랑방’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인권운동사랑방은 한국 최초로 인권 전문 일간지인 <인권하루소식>(현재는 인터넷 주간 매체로 바뀜)을 발간했고, 1996년부터는 한국 최초로 인권영화제를 매년 개최했으며, 시민․전문직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권교육을 개척하는 등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 인권단체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곽노현 교수가 아무 대가없이 제공한 사무실에서 저희가 둥지를 틀고 활동을 한 기간이 무려 10년입니다. 그 사이 서너 번 이사를 다닐 때마다 곽 교수와 민주주의법학연구회는 저희를 고려해 사무실의 지리적 위치도, 평수도 정했습니다. 연구회 성격상 매일 상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던 탓에 사무실은 거의 인권운동사랑방 동료들이 독차지하던 상황이었는데도 그렇게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운영비가 모자라 활동가들의 생계비도 지급할 수 없는 어려운 시절에는 선뜻 목돈을 내어주기도 했습니다. 적은 활동비와 피곤에 찌든 저희에게 잠시 쉼을 가지라며 시골집의 열쇠를 내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 인권운동사랑방이 자리를 잡고 소액 후원인들의 정기 후원으로 사무실 보증금까지 마련하게 되자 저희 힘으로 새 둥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얹혀 지냈던 사무실의 보증금을 돌려드렸을 때 ‘이 돈을 받으면 안 되는데……’ 하며 오히려 미안해했던 분이 바로 곽 교수와 강경선 교수였습니다. 그것이 그분들의 심성이었습니다.
곽노현 교수는 사무실만 선뜻 내어준 것이 아니라, 뜨거운 인권감수성으로 인권활동도 적극 지원해 주었습니다. 1993년 9월 7일에 창간된 <인권하루소식>은 적은 인원과 자원으로 매일 발행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다른 매체에서 인권 관련 소식도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적은 수의 인권활동가들이 인권 현장을 누비며 매일 인권 신문을 발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강행군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모두들 한 달도 못가 그만둘 거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문은 무려 13년을 넘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발행되었고, 이후 매체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인터넷 주간언론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인권하루소식>이 발행되는 동안, 곽노현 교수는 늘 신문을 꼼꼼히 읽고 따로 부탁을 드리지 않아도 평가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100호, 200호, 300호, 1000호, 2000호 발간일이 될 때마다 잊지 않고 찾아와 피곤에 지친 저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격려는 물론이고 곽 교수는 스스로 필자가 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인권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일을 알게 되면 먼저 전화를 걸어와 글을 쓰고 싶으니 지면을 내어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하곤 했습니다. 원고료 한 푼 주지 않는 신문, 그렇지만 자정이 넘어서도 글을 보완해달라고 서슴없이 괴롭히던 신문인데도 말입니다. 곽 교수가 먼저 지면을 내어달라고 했던 기고 글 가운데 하나가 매향리 관련 글이었습니다. 미군의 폭격 연습으로 소음 공해를 비롯해 온갖 고통을 받아온 매향리 주민들은 폭격장이 폐쇄되기를 평생의 소원으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매향리 문제가 언론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곽 교수는 매향리까지 직접 찾아가 마을 주민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던 길에 곧장 저희에게 전화를 걸어 매향리 주민들을 위한 글을 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장문의 글이 들어왔습니다. 청탁을 넣어 겨우 받아내는 글이 아니라 늘 자발적으로 글을 보내오던 곽 교수는 인권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주체할 줄 모르는 뜨거운 마음을 보여주는 필자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랑받는 스승
교육자로서도 곽 교수는 제자들과 잘 어울리는 멋진 스승이었습니다. 방송대를 다니는 제자들 중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뒤늦게 법학에 대한 애정을 갖고 공부를 시작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간혹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곽 교수의 초대를 받아 과 모임이나 졸업생 모임에 가 보면 제자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주고받고 제자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곽 교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받는 스승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제자들 중 한 분은 저희 단체 사무실과 가까운 삼선교 쪽에 작은 중국집을 운영하던 분이었습니다. 곽 교수는 그 중국집으로 부러 저희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희와 인연을 맺은 그분은 가난한 인권단체 사무실에 짜장면을 배달하실 때마다 늘 푸짐한 서비스를 챙겨다 주시곤 했습니다. 인권단체를 후원하는 의미로 말입니다. ‘제가 곽노현 교수님 제자입니다.’라는 말을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그분을 볼 때마다, 누구의 제자라는 걸 그렇게 즐겁게 말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 저희 마음도 절로 흐뭇해지곤 했습니다.
사회적 약자 지향성을 가진 사람
그랬던 그였기에 인권활동에도 과감히 뛰어들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희는 1998년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움직임이 최초로 태동하던 시절부터 최근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자문위원장을 맡아 조례 제정을 일구어내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권활동을, 그리고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정부로부터 독립적 위상을 갖춘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기 위한 민간단체들의 움직임이 3년여 지속되는 동안, 곽 교수는 공동집행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다양한 인권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법률안을 하나하나 다듬어나갔습니다. 민간단체가 만든 국가인권위원회법안은 경찰 수사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 금쪽같은 자식을 군대에서 잃은 어머니들, 지하철 리프트에서 떨어져 죽는 위험을 감수하며 이동해야 하는 장애인들, 자신의 존재조차 드러내지 못한 채 숨죽여 지내야 하는 성소수자들까지 우리 사회의 음지로 내몰린 이들의 삶을 반영하고, 그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예방할 수 있는 국가인권기구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담은 법안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곽 교수는 여느 정치인이나 명사들처럼 ‘들은 척’만 하지 않고 진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환대하고 미안해하고 감격해하곤 했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범적인 국가인권기구로 칭송받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이후 그는 초대 인권위원으로, 나중에는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본 궤도에 올려놓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국가기관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의 삶터로 직접 찾아가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국가인권위에 있던 시절입니다.
2006년 국가인권위가 설립 5돌을 맞는 기념식에서 그는 “국가인권위원회는 권력이 아니라 매력으로 승부하는 기관입니다. 몸은 국가기관이면서, 발은 시민사회에 딛고, 마음에는 약자와 소수자의 감수성을 안은 채로, 머리는 국제사회의 보편성을 지향해야 할 기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희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상과 역할을 이토록 적절하고 아름다운 말로 설명하는 이를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왔는지, 국가인권위원회라는 조직을 운용해 왔는지를 가늠케 합니다. 당시 인권단체들이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던 정신장애인의 인권 문제를 국가인권위원회가 최초로 제기하고 정신보건법 개정까지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온갖 열정을 바쳤던 이가 바로 곽노현이었습니다. 장애인들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아와 농성을 시작했을 때도 그들을 그냥 내치지 않고, 전 직원들에게 이동이 불편한 장애인의 입장에서 출근길에 얼마나 많은 이동 장벽들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부탁했던 이도 바로 곽노현이었습니다.
사회적 약자 지향성은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자문위원장을 맡은 시절에도 어김없이 발휘되었습니다. 자문위원들이 조례안을 만들기 전에 먼저 서울을 중심에 두고 넓게 퍼져 있는 경기도를 9개 권역으로 나누어 학생과 교사, 학부모들의 의견을 찾아가 듣자는 고단한(?) 절차를 제안한 사람이 바로 곽 교수였습니다. 2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는 경기도 곳곳을 수십 차례 오가는 수고를 마다 않았습니다. 그런 그의 눈빛이 가장 빛났던 때는 바로 조례안에 대한 학생 공청회가 열렸던 날이었습니다. 주말에 열린 공청회에 어린 학생들은 종이에 꼬깃꼬깃 적은 의견서를 들고 와서 다양한 의견을 활기차게 쏟아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쏟아진 학생들의 의견을 그는 한마디라도 놓칠 세라 주의를 기울였고 종이에 빼곡히 적어나갔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학생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게 많다는 걸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학생 여러분, 고맙습니다.” 공청회가 끝날 무렵 그는 이렇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공청회를 기획하느라 애쓴 청소년들에게 하나하나 감사를 전하고 자기 돈으로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인권의 원칙과 학생들의 절절한 목소리에 부끄럽지 않은 조례안을 만들어 교육감에게 제출했습니다. 경기도에서 전국 최초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될 수 있던 바탕에는 이런 노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저희가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곽노현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갓 단체 설립을 준비하는 가난한 활동가들에게 사무실을 선뜻 내어주고, 어려운 단체들을 마음으로, 글로, 돈으로 후원해준 이였습니다.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뜨거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현장을 찾아가고 무언가 도울 일이 없는지 찾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 늦은 나이에 배움의 길에 들어선 동네 아저씨․아주머니들을 환대하며 스승이 되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연루되어 있는 일로 인하여 고초를 겪는 이를 보았을 때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상임연구원),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함께 씀
첫댓글 아..빨리 나오셔서..서울 교육 담당하셔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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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부끄럽네요.. 저는 솔직히 곽교육감님을 알게 된게 지난번 지방선거때였습니다. 제 고등학교동창친구 아버님이 곽교육감님 아버님과 오촌당숙이셨거든요.. 후보가 하도 많아서 혼돈이 올때 그친구가 내친척분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깨끗한 분이다라고 하더군요.공정택에 대한 분노도 있고해서 뽑았습니다. 제가 듣기로 곽노현 교육감 아버님이 중앙 우체국국장도 하셨다고 하는데 상당히 깔끔하고 청렴하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곽교육감님이 유학가신후엔 연락을 자주 못했다 하더군요.정말 깨끗하신 분인데 빨리 나오셨음 합니다.
총선 대선만큼 중요한 것이 곽교육감님의 귀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곽교육감님을 응원합니다. 다소 뒤로 밀려있는 사안인것 같아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곽교육감님을 믿고 응원하는 국민이 있습니다. 곽교육감님도 알고계시겠죠?
무죄 받고 빨리 나오셔서 다 잘 이루시길 바랍니다.
판사님의 현명한판단을 기대합니다
학생인권조례를 지켜야하듯이 곽노현 교육감님도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에건 이런 훌륭한분이 계십니다!! 꼭 지켜냅시다~!!!
응원합니다 ! 힘들지만 잘 이겨 내시리라 믿습니다.
명바기의 눈에 가시였는데, 판사가 마음대로, 아마 쉽진 않겠지요? 하지만 빠른 선처의 바람은 갖어 봅니다.
삼성의 저주에 비하면 면박이는 짜증부리는 정도입니다. 교육감을 옥에 가두고 있는 진짜세력은 삼성입니다.
아~ 그래요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삼성이 망해서 분산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를 보면 이해가 가실겁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 이어 가십시오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수감되기 전 이 말씀에..깜짝 놀랐습니다..
절대로 구속될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언론의 무능과..공권력에 유린당하는 것을..
내 자신이 창피해 죽을 지경입니다...ㅠ
참 이상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듯 합니다.... 삼성과의 10여년 싸움을 힘들게 하신 분인데요.... 법조계에서는 정말 정의 편에 서있는 분이신데요... 반드시 무죄로 나올실것을 확신합니다...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