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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그의 눈길이 부담스러웠을까? 숙여있던 여인의 고개가 더욱 침전되어 갔다,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네게 무슨 죄가 있다고...’
크게 숨을 들이켜고 운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넋두리는 여기까지로 족하
다. 계속해봐야 자신을 갉아먹고 소중한 이의 마음에 생채기만 남길 뿐이다.
“가자, 술이던 뭐든 간에 몸을 식혀줄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심한 짓
거리는 고만하고 말이야.”
“사형...”
“너는 할줄 아는 말이 그저 사형, 사형이냐? 사형 죽지 않을 테니 그만 좀
찾아라.”
녹미랑이 고개를 들었다. 일변한 사형의 음성, 억지로일 테지만 아무래도
이쪽 편이 낫다. 평소처럼 오만한 미소까지 입가에 걸고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나 아직 그걸 바라는 건 무리란 걸 그녀도 잘 알고 있기에 말없는 미
소로 대꾸를 대신했다.
“봐라, 그렇게 활짝 웃으니 월궁(月宮)의 항아(姮娥)라도 울고 갈 지경이
지 않느냐! 네겐 역시 달콤한 웃음이 어울린다!”
“과찬은 실례라는 걸 모르세요? 이 소리가 월궁까지 들리지 않기에 망정이
지 만약 항아가 들었다면 대노해서 버선발로 쫓아올 걸요?”
“쫓아오는 건 그녀의 마음이지만 오지 않는 편이 항아로서 낫겠지.”
“예?”
그의 뜻 모를 말에 녹미랑의 고개가 갸우뚱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씀...”
오랜만에 운조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워낙 호쾌한 웃음이었기에 되묻던
녹미랑의 말이 중간에서 차단될 정도였다.
“무슨 말이긴. 네 미모를 본다면 월궁의 주인자리를 내줘야할 테니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 이거다. 하하핫!”
녹미랑의 얼굴이 빨개졌다.
“음? 역시 사매는 선녀임이 틀림없구나! 아니라면 사람의 얼굴에 어찌 단
풍이 깃들 수가 있다는 건가!”
“자꾸 놀리시면 화낼 거예요!”
예쁘게 눈을 흘기는 사매의 자태가 곱디 고와서 운조가 녹미랑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자자, 어서 가자꾸나. 뱃속의 식충이들이 들고 일어날 판이다.”
편안한 덕담을 나누며 둘은 산을 내려왔다. 무겁고 암울한 얘기들은 모두
산에 벗어둔 채로.
‘얼마나 지속될지는 몰라도...’
녹미랑의 긴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앞서 걷는 운조의 등은 그녀에게 있어
마지막 축복이었으니까.
‘이순간의 행복만큼은 놓치기 싫어...’
작은 소망, 그러나 그녀에겐 이 작은 바람조차 무리였나 보다.
스륵.
산길의 초입에 들어설 무렵 한 사내가 꺼지듯 나타났다. 기경할 만한 경신
술이었지만 그도, 그녀도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자전이옵니다.”
“수하를 여섯이나 잃고 도망 다니는 네가 무슨 볼일로 나를 찾느냐?”
냉랭한 운조의 대꾸에 자전이라 칭한 사내가 고개를 땅에 박았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운조가 명한 시간은 겨우 일주일이었거늘 석 달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며 한 일이라곤 인원의 손실이 전부였으니 무리의 좌장
으로서 입이 열개라도 대답하기 어렵다.
하나 그에겐 전할 말이 있다. 그, 아니 그들 스물 네 명이 지금까지 허송세
월만 보내지 않았다는 걸 입증하고 싶다.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동료에의 예의라면 설명될 수 있을까.
“이것을...”
품에서 봉서를 꺼낸 자전이 공손하게 쳐들었다.
“뭐지?”
받아들 생각도 하지 않고 운조가 물었지만 그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들의 삼 개월은 자그마한 종이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것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이 그
들을 가로막았는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 봉서가 갖는 의미
를 조금이나마 헤아려줬으면 해서 편지를 받쳐 든 자전의 손끝이 떨렸다.
묵묵히 그를 내려보던 운조의 침묵이 답답했는지 녹미랑이 살짝 입을 벌렸
지만 제지하는 사형의 손길에 한발 뒤로 물러섰다. 완벽을 추구하는 운조의
냉철함을 좋아하지만 어쩔 때는 야속하리만큼 타인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
그의 단단함에 숨이 막힌다.
지금처럼.
녹미랑의 생각은 아랑곳없이 운조의 시선은 여전한 차가움으로 지친 그의
수하를 내리 누르고만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짧게 머물다 사라지자 운조의 머리카락 한 올이 흘러내렸
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올리기보다 봉서를 받아드는 쪽을 택했다.
부시럭.
봉서에서 편지를 꺼낼 때까지 운조의 얼굴에는 씁쓸한 고소만이 맴돌았다.
절대오존 가운데 신비롭게 사라진 삼인의 모든 것을 알아오라는 명령, 어찌
보면 무리였을지도 모르고 사안에의 접근 자체가 어려웠을 터였다.
솔직히 타초경사(打草驚蛇)를 바랐을지도. 이런 식으로라도 들쑤시고 다니
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그들이 조금이라도 움직이길 기대했던 걸지
도. 그래서 자전이 가져온 정보에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으음...”
세장의 편지 가운데 채 한 장을 넘기지도 않았는데 운조의 입에서 굵은 침
음성이 흘러내렸다. 크게 부릅떠진 그의 눈은 편지의 한 구석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다 부복하고 있는 자전에게 옮겨졌다.
“확실히...”
다시 편지로 시선을 옮기며 혼잣말처럼 운조가 웅얼거렸다.
“확실히 죄를 짓고도 나타날 만큼의 가치가 담긴 보고서로군. 놀라워, 정
말 놀라워! 이 얘기대로라면 지금까지 전 무림은 일대 사기극에 놀아났다는
건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로는 다소 어울리지 않았지만 운조를 보던 녹미랑의 눈썹이 쫑긋 섰다.
그녀가 아는 운조라는 사람은 결코 저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 병적일 정도
로 남에게 지길 싫어하며 다른 이에게 얕보이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기에
타인에 대한 칭찬 역시 매우 인색한 편이다.
그런 그가 이정도로 감탄을 했다면 편지 안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파격적인
가를 짐작케 했지만 그래서 더욱 오리무중이다.
“좋다,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너와 이십사전검의 직무유기는 애당초에 없
었던 거다. 나머지의 두장을 살펴볼 것도 없다. 이 한 장만으로 너희들은
충분히 떳떳한 거다.”
“숙주님!”
격동에 겨워 자전이 머리를 땅에 세 번 박았다. 그간의 어렵고 힘들었던 순
간이 눈 녹듯 사라졌다면 과한 표현일까. 알아주는 이 없이 스러져간 여섯
명의 수하들도 저승에서나마 웃지 않을까.
그의 반응을 보던 운조가 두 번째의 편지를 읽고, 이어서 세 번째의 편지까
지 훑어보는데 걸린 시간이 일식경이었으나 편지를 읽는 이나 기다리는 두
사람 모두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녹미랑으로는 기뻤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생기가 돌아오는 사형
의 얼굴은 그간 잊혀진 모습이었기에 지켜보는 그녀로서 더없이 기꺼운 일
이었다.
‘보세요, 사형께서 그리 어깨를 펴시니 천하의 초패왕이라도 누를 기개가
솟아나잖아요! 역시 사형께 고소 따윈 어울리지 않아요.’
“좋아! 이제 뭔가가 잡히는군, 그래.”
편지를 가로로 접어 부채처럼 손바닥으로 두드리던 운조가 큰 숨과 함께 입
술을 앙다물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입가에 도드라진 잔주름은
그만큼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라 녹미랑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하나 맺혔
다.
고개를 끄덕이고 뭐라고 혼잣말을 계속하던 운조가 문득 고개를 숙였다. 그
곳엔 그가 신뢰하지 않았던, 단지 소모품처럼 생각했던 수하 하나가 변함없
는 신뢰와 충성의 몸짓으로 부복하고 있었다.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은 운조가 자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일어나라. 밤바람이 차갑다.”
“옙!”
크게 고함을 지르고 무릎을 편 자전이 신형을 바로 했으나 운조와 눈길이
마주치자 곧 고개를 숙였다. 눈물지국을 보인다는 것은 사내로서 창피한 일
이었고, 그에게 무룡숙주를 마주볼 담량은 아직 없었다.
“술 한 잔 하러 가지 않겠는가?”
“에?!”
자전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소리가 들렸으니 당연히
놀랄 밖에.
“뭘 그리 놀라는 건가? 그저 술잔을 나누자는 말인데. 강호인으로서 술을
마시지 못할 리는 없고, 그렇다면 나와 술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건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다만, 뭐?”
난감함과 놀라움이 섞여 야릇한 표정이 되어버린 자전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끝내 말을 토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무룡숙주가 누군가! 지닌바 경천동지할 무공은 차지하고서라도 뿜어져 나오
는 기세만으로 충분히 위압적인 사람이 아니던가! 빈틈없는 성품 탓에 필요
한 말 이외에는 수하들과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는 인물이 그였거늘 술
이라니!
“다, 다만...”
말을 더듬는 자전을 바라보던 운조가 녹미랑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렇지만
그의 사매도 역시 놀란 얼굴이라 운조는 허, 하니 탄식을 터트릴 수밖에 없
었다.
“어쩔 도리가 없군.”
운조가 쓰게 웃자 자전이 급하게 오체투지 했다.
“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단지 열여덟 명의 전검들을 두고 혼자서...”
“음...”
양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있던 운조가 주머니에서 전낭 하나를 꺼냈다.
“받아라. 얼마 되지 않는 액수지만 너희 열아홉이 하룻밤은 편히 먹고 쉴
정도는 될 거다.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말고 편히 마시고 푹
자거라.”
주저하던 자전이 운조의 재촉에 전낭을 받아 소중히 갈무리했다.
“내일부터는 더 바빠져야만 한다. 너희들의 보고에 따르면 나머지 하나의
행방은 아직까지 묘연한 셈이니 더욱 분발하여 그자의 모든 것을 파악해야
만 할 것이다.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목청이 터져나갈 듯 소리를 지르고 사라지는 자전을 지켜보던 운조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빙글 몸을 돌렸다.
“우리도 가자.”
“어딜...?”
“어디긴? 술을 마시기로 하지 않았느냐? 이젠 식충과 주충이 이중으로 난
리를 치는구나. 빨리 가자꾸나!”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발걸음도 당당하게 앞장서는 운조의 막무가내에 키득
거리던 녹미랑이 그의 눈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운조의 눈망울은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형...”
“잠깐 동안이나마 행복했다. 그래서 하루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싶은 거
다. 그래야 이 행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지 않겠느냐.”
그의 말에 그대로 굳어진 녹미랑이 운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들은
외롭지만 서로가 부둥켜 안아주기에 쓸쓸하지만은 않을지도. 아니, 단 한
사람만 있어준다면 녹미랑은 절대로 외롭지 않을지도.
“사형도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말고 편히 마시고 쉬셔야 해
요. 단 하루만... 그래주실 수 있겠지요?”
녹미랑의 별처럼 고운 눈을 보던 운조가 파안대소했다.
“하마터면 안아버릴 뻔 했다! 제발이지 그런 눈길은 거두어라!”
까르륵 웃고 녹미랑이 경쾌한 걸음으로 운조를 앞장섰다. 그녀의 재촉을 받
으며 걸음을 옮기던 그가 사매의 눈길이 다른 곳으로 향했을 때 무서운 탄
식 하나를 길거리에 남겨놓았다.
“난 나쁜 우두머리일지도 모른다...”
207
흑의인이 호북성벽을 작살내지 않고 성문으로 얌전히 들어온 이유는 나이가
들어 성질이 죽었다거나 받은 열이 수그러들어서가 아니었다. 순전히 딸내
미 때문이었다. 아름답고 착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뻗치면 도저히 제어불
가능해지는 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지라 아버지 된 입장에서 일단은 한수
접어주기로 한 거다.
산장을 나설 때만해도 그놈의 날건달을 붙잡아 땅에 질질 끌며 호북성을
열 바퀴 정도 순례할 계획이었지만 이 또한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물론 딸
내미가 폭발할지도 모르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넌 죽은 거거든, 날건달 노~옴.”
그렇다고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홀린 동네 양아치 녀석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뭐 하나라도 걸리면 그 즉시 오뉴월 똥개 잡듯 쥐어
패고 개 값을 물 준비가 되어있다.
딸내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백수 날건달에게 시집보내려고 이십 몇 년을
금이야 옥이야 기른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서로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안 될 말이다.
“분수를 알아야지, 크~흥!”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든 말든 코가 떨어져 나가도록 콧방귀를 뀌고 목을 한
번 돌리자 전신에서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전투의지가 활활 타올라 흑의인
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청빈로의 백수 녀석도 참으로 재수가 없는 편이다. 이토록 몸
상태가 완벽한 상태의 자신에게 얻어맞는다면 최하가 사망일 터였다.
붕붕-
두 팔을 돌려 근육을 풀다가 오른 주먹을 쥐고 왼손바닥으로 슬슬 쓰다듬으
며 씨익 웃는 흑의인의 모습은 그의 청수한 외모와 다르게 어딘가 비열하고
얍삽해 보였지만 흑의인으로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떤가!
“어떻게 시작할까?”
이때부터 흑의인의 상상은 시작되었다.
일단 놈의 거처를 알아낸 흑의인이 녀석의 귀가를 기다린다. 놈은 백수건달
답게 밤늦은 시간에나 집에 기어들어올 것이다, 술에 푹 쩔은 채로 말이다.
만취한 녀석이기에 흑의인이 나서도 똥오줌 가리지 못하고 시비부터 걸건
뻔한 일.
그때부터야 쉽다. 우선 점잖게 타이르는 척 하다가 - 왜냐하면 골목 한구석
에 딸내미를 대려다놓을 테니까 - 버르장머리 없는 말을 내뱉을 때 버럭
고함을 지르고 그에 분개한 녀석의 콩나물 같은 주먹을 괜히 한대 맞아주
는 거다.
당연히 하나도 안 아프지만 교묘하게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낸 후 퉤하고 뱉
고는 경천동지할 일장을 근처 바위나 나무 따위에 선사하는 거다. 물론 녀
석은 혼비백산하여 바지에 오줌을 질질 싸며 부처님이니 산신령이니 나오는
대로 다 주어 삼키며 자신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릴 거다.
그 모습을 보고 놈에 대한 환상이 깨진 딸내미가 눈물을 뿌리며 사라질 때
- 이때가 중요하다, 괜한 측은지심으로 딸을 쫓아갔다간 뒤이을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게 된다 -를 기다렸다가 녀석의 멱살을 잡아 일으킨다...
“그때부턴 죽은 거지, 뭐.”
퍼뜩 아들에게 생각이 미치자 흑의인의 기분이 썩 나빠졌다. 아무리 바쁘다
고 해도 같은 마을에 기거하면서 제 동생이 그런 상건달을 만나고 다니는데
뒷짐 지고 나 몰라라 라니!
“한심한 놈...”
뭐, 상관은 없다. 그걸 핑계 삼아 나선 강호행에서 의외의 수확도 있었으니
까.
“그 청년!”
하남에서 본 동네건달 같은 고수청년을 떠올리며 흑의인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람은 역시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
준 기특한 청년!
떠나버린 여인네를 위하는 마음씀씀이도 그렇거니와 육신으로 실현가능한
모든 동작을 구현하여 한 시대 전의 최고무공을 통쾌하게 꺾을 무예까지 지
닌, 그야말로 이시대의 올바른 청년상과도 같은 젊은이!
동네건달처럼 보여도 다 같은 동네건달이 아니라는 사실이 흑의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왜 하남의 동네건달은 그처럼 훌륭하고 건너편 호북의 동네건달은 그저
바보 백수 놈인 거야!”
우스꽝스러운 탄식이지만 흑의인의 입장에서는 자못 심각한 것이었다. 딸
가진 게 자랑까지는 아니지만 자신의 넋두리를 듣고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힐난을 할 거다.
너도 딸 나봐, 라고.
“하남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문제의 거리, 청빈로인지라 흑의인은 일
단 말에서 내려 숙소를 정하기로 했다.
시끌시끌.
어디든 다 그렇겠지만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니 복잡한 시장의 풍경까지도
흑의인에게는 단지 경망스러운 소음의 생산지로 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뭐
그리 할 말이 많고 깎을 값이 있다고, 그냥 사면 될 일이지.
야채장수가 내 놓은 야채들은 하나같이 시들어 있고 생선장수가 파는 어물
들은 모두다 맛이 가도 한참은 간 듯 했다. 그건 고기집도 매한가지라 과연
저걸 사람더러 먹으려고 팔고 있는지...
“그야말로 한심한 동네로군. 하기야... 그따위 날건달 놈의 주무대라니 안
봐도 뻔한 일이었지!”
멋대로 청빈로를 매도하면서 부지런히 투덜거리던 그의 눈에 기골이 장대한
처자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처녀는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꽤나 떨어진 거
리인데도 그녀가 하는 말들이 마치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처럼 생생히 들렸
다.
“그래서... 안 깎아주겠다는 거예요?! 됐어요! 안 사요! 한두 번 거래하는
것도 아니면서 쩨쩨하게 한 푼 가지고 이러기에요? 좋아요! 청빈로에서 생
선 파는 집이 여기 하나라고 생각하셨나본데...”
상인이 뭐라뭐라 대꾸를 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곧이어...
“뭐라고요! 지금 저더러 쩨쩨하다고 하셨어요! 내, 참 기가 막혀서! 이거
봐요, 주인아저씨! 저를 몰라도 한참을 모르니까 그런 망발을 뱉으시나본데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통 크기로 천하에서 꿇려본 적이 없다고요! 그까짓
한 푼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고요! 사람 사는데 정이 있어야지, 치사하게
물건을 팔면서 흥정조차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청빈로를 막고 우리 한
번 물어 봅시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
또 상인이 뭐라고 설명을 하자 분기탱천한 목소리가 하늘을 가를 듯 터져
나왔다. 그 음성은 가히 사자후와도 같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욧! 손해를 보는 장사라니! 세상에서 다시없는 세 가
지 거짓말 가운데 하나를 드디어 오늘 직접 듣네!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좋아요, 말해줄 테니 귀 청소 잘 하시고 들으세요! 첫째는 노인네들이 어서
죽어야지... 하는 거구요. 둘째로 과년한 처녀들이 시집가기 싫다는 거래
요.”
“맞아, 맞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흑의인이 세 번째의 거짓말을 들으려 귀를 쫑
긋 세웠으나 처녀는 더 이상 말을 안 하고 상인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상인
이 한숨을 쉬며 뭐라고 얘기를 하고 그제야 처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야지요! 그래야 엄 아저씨죠! 자자, 그러면 이걸로 두 마리 더 주세
요. 아니다, 오늘은 동생이 놀러오기로 했으니까... 에잇, 아예 네 마리 주
세요.”
거의 울상이 된 상인이 생선을 포장해서 그녀에게 건내자 호탕한 웃음과 함
께 처녀가 값을 치르고 생선가게를 벗어낫다.
“어, 세 번째는?”
자고로 듣다 만 얘기처럼 사람 미치게 하는 것도 없다. 이건 마치 볼일을
보고 닦다 만 경우와도 같이 찝찝한 거다. 특히 흑의인처럼 호기심이 왕성
한 사람들의 경우에 그 강도는 상상을 불허할 위력으로 다가온다.
“어, 어쩌지?”
그렇다고 지금 가서 하다 만 얘기를 마저 해달라고 하기도 뭐하다. 길게 말
할 것도 없이 미친 사람 취급받을 거다. 또한 흑의인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
에 무척이나 민감한 터라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생면부지의 처녀에
게 그런 말을 붙인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으음...”
불행히도 흑의인은 자신이 얼마나 둔한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나름대로의 고뇌에 빠진 흑의인과 달리 원하던 바를 성취한 포만감에 처녀
는 발걸음도 가볍게 사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생선 집 주인이 좀
튕기는 경향이 있었기에 오늘의 승리는 평소보다 값진 것이라 더 그러하다.
보통의 여인네라면 무거워서 쩔쩔맬 정도로 육중한 바구니를 공깃돌마냥 가
뿐하게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처녀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
다. 요 며칠 심심해서 죽을 판이었기에 집으로 찾아오는 의동생이 더없이
반가웠고 그래서 큰 마음먹고 장을 본 터였다.
저벅저벅.
시장을 벗어났기에 거리는 지극히 한산했는데 그녀의 발걸음에 맞추어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뭐야?’
뒤를 돌아보니 허우대 멀쩡한 중년인이 뒤에서 걷고 있었다. 그냥 허우대가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소싯적엔 여러 여자를 울리고 다녔을 만큼 멋들어지
게 생긴 중년인이었고 차림새 또한 매우 고상했다.
거기다... 키까지 컸다.
‘오, 웬일로 청빈로에 저리 괜찮은 중년이 다 돌아다녀? 얼음덩어리가 나
이 좀 들면 딱 저 모습이겠는 걸?’
힐끗 한번 보고 고개를 돌린 처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가는 길
이 일치할거라 생각하며.
저벅저벅.
‘얼레...’
한참을 걸어도 똑같은 거리로 뒤에서 누가 따라온다면 그가 제아무리 멀쩡
하게 생긴 이라도 일단은 의심을 하게 되는 게 사람 심리다. 시장과 그녀의
집까지의 거리는 수월치 않게 먼 거리였고 길 또한 복잡하다.
우연이라도 이건 아니다.
‘혹시...’
처녀의 머리에 전광석화처럼 어떤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치. 한.
삥-
그녀의 눈에서 줄기줄기 광채가 뻗어 나왔다. 소리만 지르지 않았을 뿐이지
처녀의 가슴 속에는 주체할 수없는 분노가 용솟음 쳤기에 금방이라도 폭
발할 지경이 되었지만 그녀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처녀에겐 여성으로서의 한계나 뭐, 그런 것에 좌절을
한 경험이 있었고 그래서 힘으로 여인네들을 괴롭히는 남성들에 대한 적개
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자...’
처녀는 치한들의 일반유형을 떠올렸다. 멀쑥한 옷차림에 평범하거나 괜찮은
얼굴, 어딜 봐서도 범죄가 근처에 이를 것 같지 않은 분위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힐끗!
번개처럼 고개를 돌리자 중년인은 갑자기 딴청을 부렸다. 여태까지 잘도 걷
다가 말이다. 제 갈길 잘 가는 이라면 앞서가는 사람이 돌아본다고 해서 왜
저런 이상행동을 보이겠는가.
‘아아... 이 모든 게 내 죄다!’
치한들은 대게 충동적으로 일을 벌인다고 했다. 왜 이리 아름답게 생겨서
저런 멀쩡한 중년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쓸데없는 짓 말고 토끼같은 마누라와 여우같은 자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어서가라는 충고를 하고 싶었지만 시치미를 떼고 도리어 역습을 당할 우려
가 있기에 주먹을 꽉 쥐고 그녀는 더욱 빨리 걸었다.
이럴 땐 말이 필요 없다. 완벽한 물증을 잡고 정의의 응징을 내리는 수밖에
. 상대는 자신을 그저 그런 처녀쯤으로 생각하고 터. 눈이 튀어나오게 혼쭐
을 내준다면 다시는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보폭이 커짐에 따라 뒤따르는 발소리도 급박해졌다.
하지만 처녀의 입가에 아까와는 다른 미소가, 화염이라도 단숨에 얼려버릴
만큼 차가운 웃음이 걸린 것을 뒤에서 걷는 흑의인은 볼 수 없었다.
스륵.
일부러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선 그녀가 걸음걸이를 늦췄다. 그
리고 처녀는 장바구니를 왼손으로 옮겨 들었다.
“저... 소저...”
‘딱 걸렸다!’
기다리던 반응이 왔다. 그녀는 어금니를 한번 힘차게 갈아붙이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과장된 놀라움을 표시하며 뒤를 돌아섰다. 이런 걸 두고 흔히
허허실실이라고 하던가?
“무, 무슨 일이세요?”
208
‘역시 따라오지 말걸 그랬나...’
처녀가 보인 반응에 흑의인은 한숨을 쉬어야만 했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이
가 본다면 중년의 남정네가 팽팽한 젊은 처자에게 홀려 뒤를 졸졸 따라온
형국이 아니겠는가.
이대로 발길을 돌려볼까 생각해 봤지만 여태까지 허비한 다리품도 아깝거니
와 왕성한 호기심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기에 체면불구하고 흑의인은 말문
을 열기로 했다.
“어허험, 초면에 실례지만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일부러 크게 헛기침을 해서 자신의 존재감과 위엄을 보인 후 본론으로 들어
가려던 그의 눈이 갑자기 묘하게 변했다. 입으로 뾰족한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지만 기골이 장대한 처녀의 표정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으음...’
매우 기분이 나빴지만 흑의인은 참기로 했다. 아쉬운 건 자신이고 안면근육
을 어떻게 이동시키든 처녀로서는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다.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에서는 중년만이 가진 비기로 국면전환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씨익.
흑의인의 입 꼬리가 살짝 말아 올려졌다. 이건 그만의 독문절기화한 미소로
서 입가에서 파생된 잔주름들이 눈가에까지 이르는 가운데 어찌 보면 야릇
하다고 할 만큼 특이한 선들이 얼굴에 수놓아진다.
이런 말하면 자화자찬이지만 젊었을 때 그가 이렇게 한번 웃으면 반경 일장
내의 모든 처자들이 껌뻑 죽었었다. 오죽하면 여자들 앞에서 다시는 이리
웃지 않겠노라고 스스로 봉인시켰겠는가!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다. 궁금증은 풀어야겠고 열쇠는 생면부지
의 처자가 쥐고 있으니 어떤 식으로라도 괜찮은 인상을 주어야겠고, 그래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던 거다.
“말씀해보세요.”
처음의 움츠러든 목소리는 어디로 던져버렸는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처녀
가 대꾸했다. 그것을 자신의 온화한 느낌에서 비롯되었다고 멋대로 판단한
흑의인이 아까보다는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늙으나 젊으나 사람은 역시 잘생기고 볼 일이다.
“아까 시장에서 말일세...”
“오호, 시장에서요오~?”
“맞아, 시장. 그 시장에서 말이야...”
“시장에서부터면 꽤나 기다리신 편이네요, 그렇죠?”
“생각해보니 그렇구먼. 뭐, 별수 있겠는가? 이 나이에 그 많은 사람들 앞
에서 뭘 할 수 가 있어야 말이지.”
“당연~히 그러시겠죠. 힘든 걸음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네요오~?”
“아냐! 힘든 거 없었네! 자고로 뭐든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하는
법이지! 그건 당연한 거라네!”
“아~ 그러셨어요~?”
“근데 소저는 원래부터 그리 말꼬리를 늘이는가?”
얘기를 나누잖다. 기가 막혀서 돌아버릴 지경이었지만 일단은 참고 다음 수
작을 기다리며 처녀는 스스로의 자제력에 감탄을 보냈다. 얘기라니, 생판
초면에 길을 묻는 것 빼고 중년남자가 젊은 처자와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건
가!
그렇게 서있자니 중년이 웃는다. 딴엔 어지간히 멋있게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쓴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녀가 보기엔 영 아니올시다였다. 아니, 하마터면
아침에 먹은 자채탕을 모조리 게워낼 뻔했다.
어찌 인두겁을 쓰고 이리도 느끼한 미소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미식거리는 속을 겨우 달래고 가까스로 대답을 하자 이번에는 아주 대놓고
나선다, 시장에서부터 쫓아왔노라고.
‘이거 전형적인 중년 변태 아냐?’
그녀가 비꼬아주는 말도 척척 받아넘기는데 척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느물거리며 가증이란 가증은 혼자 다 떠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나름대로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는지 사람들이 많아서 집적거리지 않았다고
대놓고 주절거리는 입술을 꿰매버리고 싶었지만 좀 더 말을 섞었다. 어디까
지 가나보자, 는 심정으로.
그러나 처녀의 자제력은 변태 중년의 마지막 말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대가라고 했다. 바로 그거다. 이제부터 힘없고 연약한 여인네들을 희롱한
대가를 치러야할 것이다. 그리고 처녀에겐 징계를 내릴만한 힘이 있었다.
슥.
처녀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흑의인은 그의 말에 대꾸도 없이 앞으로 나선
처자의 반응에 의아스러웠다.
“음?”
턱!
점입가경이라고, 처녀는 오른손을 들어 흑의인의 어깨에 척하니 올려놓는
것 아닌가?
‘아아, 이놈의 매력이란!’
문득 흑의인은 날아갈 것만 같았지만 곧 정신을 똑바로 했다. 남자로서, 그
것도 한창을 지나 초로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으로서 절은 여인네의 뜨거운
마음을 받는다면 더없이 영광이겠지만 어찌 딸 또래의 처자에게 정을 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세차게 뿌리친다면 여인의 섬세한 가슴에 금이 갈 터.
‘부드럽게 가자, 부드럽게.’
“자자, 일단 편안하게 마음을 가지라고. 비록 지금은 아프겠지만 언젠가..
.”
“지금 아프다고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흑의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타오르는 눈동자, 거침없는 말투, 이 모든 게 뭘 말하는지 미루어 짐작이
갔기에 내심 한숨을 쉬고 흑의인이 처녀를 달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주하기 뭐해서 고개를 모로 꼬고.
“그래, 지금은 아프겠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게 잊혀질 거야. 마음
을 차분하게 먹고...”
“훗!”
처녀의 짧은 조소에 흑의인이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어?’
그제야 그는 뭔가가 잘못 돌아간다는 걸 알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과
싸늘한 눈동자... 이건 흑의인이 상상했던 무엇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 반응
이었으니까. 그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처녀가 한마디 했다.
흑의인 일생일대의 저주스러운 말을.
“변. 태. 아. 저. 씨!”
콰쾅!
너무도 어이없는지라 흑의인은 일순간 처녀가 뱉은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 그게 무슨...”
“뭘 무슨 말이야, 이 변태중년!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 땅의 정의구
현이 실현되지 않는 거야! 뭐? 시장에서부터 쫓아왔고, 사람들 앞에선 변태
짓거리를 하지 못해? 미녀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좋아, 아주 자~알 걸렸
어. 당신은 명년 오늘이 젯밥 먹는 날인줄 알아. 멍청한 변태중년에게 희롱
당할 정도로 이 아가씨가 만만해 보였나본데 오늘 아주 임자 만난거야. 으
쓱한 골목길은 변태 짓 하기도 좋겠지만 정신 나간 변태중년 하나 골로 보
내기에도 그만인 장소란 걸 몰랐지?”
“그게 무슨 말인가!”
버럭 고함을 지르고 흑의인이 한발자국 물러섰다. 뭔가 꼬였다고 생각은 했
지만 저 처녀는 너무도 어이없는 자리에 자신을 취직시키고 있지 않은가!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누구긴? 변태중년이지, 그것도 아주 노련한!”
이 대목에서 광분해야 했으나 정신적인 타격이 너무 큰 관계로 흑의인은 미
쳐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염없이 손만 부르르
떠는 게 다였다.
그 반응을 수긍의 표시라고 짐작하고는 처녀가 장바구니를 길가 벽면에 세
웠다. 그리고 소매를 한번 흔들었는데 놀랍게도 나무로 만든 막대 하나가
툭 튀어나와 마치 처음부터 들려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자아~ 각오는 되어 있겠지?”
“내 말을 좀 들어...”
“말은 필요 없고. 선택하시지?”
이런 순간에서도 흑의인은 궁금했으니 그야말로 병이라고 하겠다.
“뭘 말인가?”
“하나는 나죽었소, 하고 그냥 얻어터지는 거. 물론 다른 하나는 생쥐도 궁
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달려들 듯 덤벼보는 거.”
결론적으로 두드려 맞는다는 거 아닌가?
“차이는?”
“전자는 그나마 개전의 정을 고려해서 죽기 전까지만 때리고 후자일 경우
엔...”
처녀의 싸늘한 음성이 아예 꽁꽁 얼어버렸다.
“아주... 죽을 때까지 패지.”
“허허...”
감히 누가 흑의인에게 이런 망언을 한단 말인가? 그야말로 현 무림의 최고
수라는 적미천존과도 시비가 붙는다면 일전을 불사할 그다. 새파란 처녀에
게 이런 모욕을 받을 정도로 녹록한 인물이 아니란 말이다!
허나 처녀는 한술 더 떴다.
“괜히 남자의 체면이니, 사나이의 자존심 같은 거에 매달렸다가 장독(杖毒
)에 걸려 시들시들 자리보전 하면서 황천 갈 날 기다리기 싫으면 전자를 택
하라고. 이런 말도 있잖아. 체면이 밥 먹여 주냐, 라는.”
“보자보자 하니 버릇이 없는 아이로구나! 어디 아비뻘 되는 사람에게 그런
망발을 서슴없이 토한단 말이냐!”
“어이구~ 그래서 딸뻘 되는 처녀의 차마 자락에 취해서 예까지 오셨소? 대
단하시네, 아비뻘 변태아저씨.”
으드득.
말로는 도저히 감당할 상대가 아니다. 오해 또한 풀길이 없어 보였기에 흑
의인이 쓰게 웃고 자세를 바로 했다. 처녀에게 미안하지만 여기서 따끔한
맛을 보여주지 않으면 곤란할 듯싶었다.
힘자랑 할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은 이 동네에 머물러야 하고 미적지근하게
헤어졌다간 우연히 라도 다시 만났을 때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다. 만약 날
건달을 징치하려는 순간에 조우(遭遇)하게 된다면?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고 손을 들어 담벼락을 어루만진 흑의인이 눈을 꿈뻑
이는 처자를 보다 고개를 한번 흔들고 그 부위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밀었다.
우수수.
웬만한 공력 가지고는 흉내도 내지 못할 수법. 그는 내가진기만으로 견고한
벽을 안으로부터 파괴시킨 것이다. 일류의 무인이라도 찬탄을 금치 못할
만큼의 고절한 수법!
그런데...
멀뚱멀뚱.
처녀는 몽둥이를 든 채로 멀거니 담벼락을 바라보는 것 아닌가!
‘아차, 실수다. 그저 기가 센 처녀가 이런 고차원적인 무공을 알 턱이 없
지 않은가! 이럴 땐 원초적으로...’
결심을 굳힌 그가 다소 소란스럽더라도 위맹하면서도 있어 보이는 수법을
보여주려고 팔을 치켜들었을 때 처녀가 중얼거렸다.
“뭐야, 이 변태 중년? 중수법까지 알고 있잖아? 진짜 죄질이 나쁜 인간이
네. 그래, 힘들게 무공을 익혀서 고작 젊은 처녀들 치맛자락 들추는데 써먹
고 있잖아? 정통 구제불능의 표상이로군.”
‘컥!’
자칫 잘못했으면 주화입마에 걸릴 뻔했다. 황급히 눈을 들어 막대로 제 머
리를 툭툭 치고 있는 처녀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보던 흑의인이 낮은 침음성
을 토해야만 했다.
처녀는 여염집 아가씨가 아니었다. 잘 닦인 몸이야 부모님의 축복으로 치부
하면 그만이지만 서있는 자세만으로 자신의 빈틈을 메우면서 언제라도 출수
가능한 길을 열어놓았을 정도로 빼어난 자세.
평범했던 눈동자엔 어느새 총기가 서려있었다. 그저 똑똑해서 떠오르는 혜
안(慧眼)이 아니라 무공을 익힌, 그것도 매우 놓은 경지에 다다른 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관조의 그늘이 그녀의 망막에 어려 있었다.
“방금 전의 동작은 후자를 택했다는 무언의 외침으로 봐도 무방하겠지? 스
스로 내린 결정일 테니 후회 따윈 없겠고...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도 지녔
으니 슬슬 갈 필요도 없겠고...”
머리에서 놀던 막대를 중단으로 세운 처녀가 단발마의 기합을 넣었다.
쿠쿠쿠-
사람이 이렇게 달리질 수 있을까? 외마디와 함께 시골 시비처럼 퍼져있던
처자가 하늘이 내린 검후(劍后)인양 오연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놀라운 건 단지 중극으로 세웠을 뿐인데 그녀의 나무막대는 장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서 천하의 고수라도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할 상태였다.
“자, 잠깐!”
흑의인이 급하게 소리쳤다. 싸우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이정도의 검도고수
라면 그도 칼을 뽑아야하고 봐주면서 겨룰 계제가 아닌지라 충돌 시에 어떤
여파가 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우스꽝스러운 이유 때문에 생면부지의 처자와 생사결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상대는 말한 대로 딸뻘이다!
문제는 처녀 쪽인데 그의 애타는 부르짖음에도 아랑곳없이 기세를 점점 키
워갔으며 눈빛에서 흐르는 냉기 또한 더없이 차가워졌다.
“그러게 바른 생활을 하지 그랬어... 아무리 빨라도 늦은걸 바로 후회라고
한다는 말, 들어본 적 없어?”
‘죽겠군!’
원통절통한 일이나 도리가 없다. 흑의인으로는 지금 두 가지의 길 가운데
하나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하나는 예상치 못한 여고수와 황당 그 자체의
이유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고, 다른 하나는...
고심은 짧았다. 오래 생각했다간 처녀의 칼이 날아올 판이므로.
파팍!
번개처럼 몸을 뽑은 흑의인이 장내를 벗어났다. 미처 예상치 못했고 워낙에
빠른 신법이라 처녀가 어떤 대응을 할 겨를도 없이 그는 담을 넘어 사라졌
다. 아니, 방비를 했더라도 막을 수 있었을지 의문시 될 만큼 흑의인의 움
직임은 기경할 수준이었다.
이 황당한 사태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버린 처자가 분을 삭
이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잡아 놨는데 한순간의
방심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이야.
“뭐야, 이 빌어먹을 변태중년아! 그래, 딸뻘의 처녀가 무서워서 꼬리를 말
고 줄행랑이냐! 걸음 하나는 더럽게도 빠르네! 하기야 그래서 여태까지 잡
히지 않았던 거였냐! 그래, 도망가는 게 최고의 장기라는 거냐! 나 같으면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콱 죽어버릴 거다! 그러고도 남자라고 처녀들 치마 속
이 궁금했던 거냐! 에라이~!”
길길이 날뛰던 처녀가 제풀에 지쳐 주저앉았다. 하도 악을 썼더니 목청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녀의 울화는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이때...
(“다음번에, 다음번에 재대로 얘기를 나눠보세. 급한 일이 있어서 어딜 좀
급히 가야하니 내 다음번에 이 일의 곡절을 반드시 풀어주겠네. 내 앞에서
변태 뭐... 라는 말을 할 처녀가 다 있다니... 역시 강호는 넓어, 핫핫핫!”)
단순한 전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들리지만 결코 전음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고, 거리 또한 일반덕인 전음보다 몇 배는 먼 거리에서 시전 가능하다
는 천고의 전음술이 그녀의 귓가에 머물렀다.
“육합전성?”
멍해진 그녀가 허공을 한번 휘휘 둘러보았지만 중년인의 종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멀뚱히 서있던 처녀가 머리를 벅벅 긁고 장바구니를 챙겨 집으로
향했다. 미련은 털어버리는 편이 좋고 포기는 빠를수록 이롭다.
털레털레 집에 들어서자 언제나 반기던 녀석이 코빼기도 내밀지 않아 그녀
의 볼이 퉁퉁 불었다. 그러나 부엌에서 나오는 의동생의 품에 안겨 골골거
리는 모습을 보고는 곧 화를 풀었다.
기분 좋게 늘어진 고양이에게 화풀이를 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그래
서 정혜란은 우건에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동생, 동생. 오늘 장보고 돌아오다 변태 만났다? 허우대는 멀쑥하고 옷차
림도 번쩍번쩍했는데 알고 보니 무공까지 강한 거야! 근데 중년변태였어!
어이구 그 얼굴하고 그 몸하고 옷이 아깝더라. 근데 말이야 내가 막대를 뽑
아들자마자 바로 도망갔다?!”
“세상이 말세네요, 그리 멀쩡한 중년인이 변태 짓이나 하고 다니다니! 만
약 나한테 그랬으면 아주 물고를 내는 건데!”
둘의 얘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정혜란이 만난 흑의인은 세상에서 다시없
는 흉악변태마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두 여인의 결의는 강철처
럼 단단해졌다.
“다음번에 만나면 아주 작살을 내자고!”
“두말하면 잔소리죠! 내 그 인간을 만나면 아주...”
209
너무 황당하면 화조차 나지 않는 게 사람이다. 화? 그딴 걸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을까.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수도 있는 오십 다섯 해를 살아오면
서 오늘 같은 개망신은 처음 당해보는지라 흑의인은 거의 공황상태였다.
‘그래도 전음성만큼은 그런대로 잘 처리했어, 적당히 품위도 있었고 마지
막에 호탕한 웃음과 함께 은연중에 상대를 압박하는 말을 남겼으니까 말이
야.’
처절한 자기위안 이었다.
마을 외곽에서 숨을 돌리던 흑의인이 따뜻한 양광에 취해 낮게 휘파람을 불
다가 문득 처량한 자신의 모습에 한숨을 터트렸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이 나이에 젊은 처녀랑 시비나 붙고... 그리고
, 그리고...’
변태소리까지 듣다니!
어이없어서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딜 봐서
자신이 변태과와 비슷하기라도 하다는 건가. 경망스러운 젊은 여인네의 망
발이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잊혀지지 않아서 흑의인은 쓰린 가슴을
부여잡았다.
‘화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일 거야.’
그래도...
이런 동네에서 그만한 검도고수가 숨어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
저 기골이 장대하고 대가 센 처녀라고 생각했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붙였었는데 알고 보니 일류를 상회하는 고수가 아닌가.
‘어떻게 저런 무인이 일개 시비차림으로 시장에서 물건값을 깎고 있었던
거지? 정말 알 수 없는 동네로고...’
액수가 많았다면 이해하고 넘어가겠지만 한 푼, 단지 동전 한 푼을 깎기 위
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던 그녀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자 흑의인은 머리가
다 욱신거렸고, 그래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반적으로 강호인들, 그것도 높은 무공을 익힌 여류고수들의 콧대는 거의
태산을 압도하는 수준이다. 음식점에서의 씀씀이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나가
는 거지에게 적선을 해도 그저 한두 푼을 던져주는 법이 없다.
다른 이의 이목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만 무림인에게 있어서
자존심은 거의 생명이기에 같은 시선을 받더라도 통상의 범인들과 다른 반
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니 어찌 보면 무림인이라는 자체가 구속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거기에 여성이라는 것만으로 가지게 되는 근원적 품위욕구까지 결합되면 여
류무인들의 행사가 얼마나 까다로워지는지 미루어 짐작케 된다.
그런데...
‘대체 그 아이는 어떤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는 거야?’
거침없는 언행, 일반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천진함, 동전 일 푼에 목
숨을 거는 알뜰함, 초면의 남정네에게 가지는 원초적인 거부감... 여기까지
는 그저 보통의 여인네들의 특징인데.
단봉 하나로 천지를 가두어버리는 가공할 무위와 내가중수법 같은 고절한
수법 앞에서 태연스레 하품이라도 토할 듯한 배짱... 이건 완전히 일류를
상회하는 무인들만이 지닐 수 있는 자태가 아닌가.
멍하니 앉아있던 흑의인은 문득 흥미로운 비교를 시작했다. 그건 바로 자신
이 거느린 사람들 가운데 그녀를 상대할만한 고수들을 추려보는 일이었다.
본시 무인들은 무언가를 견주어보기를 즐기니까. 그것이 주량이라도 말이다.
‘어디보자...’
일단은 일반무사 전부를 제외했다. 그들로는 목소리 큰 처녀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할게 뻔했으니까. 다음으로 산장의 기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
개 당의 고수들을 올려 보았지만 그 역시도 곧 머릿속에서 지워야 했다.
기분이 살짝 나빠진 흑의인이 할 수 없이 세 개 당의 당주들을 하나하나 꼽
기 시작했다.
비천당주(飛天堂主) 고화국, 소영당주(素影堂主) 자하경, 매환당주(魅幻堂
主) 지상호. 각기 검법과 신법, 그리고 환술을 극치까지 연마했다는 무인들
이다. 이들이라면 현 무림에서도 목에 힘주고 강호를 질타할 수준이었고 그
래서 흑의인도 자신 있는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이 정도라면...’
그의 미소는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져야만 했다.
안된다. 이들로도 어물전에서 생선 값을 깎기 위해 강짜를 놓던 이제 이십
대 중반의 처녀를 감당하지 못한다. 감당? 맞아죽지 않으면 다행이다.
검법의 달인인 고화국은 그녀의 봉에 피멍이 들 정도로 얻어터질 판이고 신
법의 달인인 자하경은 발을 놀릴 사이도 없이 치맛자락이 찢어질 거다.
지상호의 환술... 공력에서 밀리는데 무슨 놈의 환술인가? 괜히 허상을 피
워낸답시고 깝죽거리다 냉정하도록 투명한 눈동자를 지닌 처자의 차가운 비
웃음속에 쓸쓸히 환술계를 은퇴할지도 모른다.
“허허...”
허탈한 웃음을 토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흑의인이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배
회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산장의 식구들 중에서 그녀의 봉을 감
내할만한 수준의 고수를 찾을 길이 없다.
무려 이백의 식솔들 중에!
결국 남은 사람은...
‘제기랄!’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
운 딸이라야 선머슴 같은 처녀와 그럭저럭 어우러질 판이다. 물론 지엄하신
아버님까지 포함해서 셋이고 자신까지 포함한다면 고작 네 명.
가만!
“뭐야 이거!”
아무리 흥분했다고 자신을 이십대의 처녀와 동률선상에 놓고 비교를 하고
있다니! 흑의인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기절초풍할만한 일이라 그 역시도 괜
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지만 너무 창피하다.
붉어진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던 흑의인이 생각을 가라앉히고 무지막지하게
강한 처녀와의 만남을 천천히 회상했다. 아무리 청빈로가 풍운의 대지라고
해도 봉 하나로 천지를 압도하는 고수가 일반인을 가장하여 범인들 속에 끼
어있다 함은 그만한 곡절이 숨어있을 터였다.
맑은 눈망울과 천진한 목소리, 똑 부러진 성품으로 보아 어떤 꿍꿍이속으로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있다고 보긴 어렵다. 단 한번 상대했지만 그녀의 폭
급한 성격으로 미루어 음모니, 뭐 그런 것들을 품고 산다는 건 무리일 터.
‘하루 반나절이나 버티면 다행이지.’
그렇다면 뭘까? 어떤 연유로 청빈로에 머물고 있는 걸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기에 흑의인이 자리에서 일
어섰다. 난제가 닥쳤을 때 사람들은 제각기의 방식으로 풀어간다. 차분히
앉아서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람이 있겠고 정신없이 움
직여야 머리가 돌아가는 부류도 있는 법이다.
흑의인도 후자의 부류였지만 그렇게 격렬한 움직임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
고 그저 산보 정도로 사고의 흐름을 돕는 쪽이라 멀거니 앉아있자니 이런저
런 단상이 뒤엉키는 것을 느꼈기에 차라리 조금 걷는 편을 택했다.
다시 한번 시장통을 향하기는 꺼림직 한 일이다. 볼일을 다 본 처녀가 그곳
에 다시 올 일이야 없겠지만 본능적인 거부감이 머리를 옥죄었기에 그의 발
걸음은 자연스레 시장을 비켜섰다.
한산한 거리와 뜨믄뜨믄 위치한 가옥들, 뛰노는 아이들...
이름모를 들꽃들이 가을바람에 몸을 내맡겨 나른하게 흔들리는 오후의 양광
은 흑의인의 탁한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산장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고즈
넉함이 밀려와 그의 얼굴에도 천진스런 미소가 걸렸다.
‘이런 것도 괜찮구먼...’
본시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던 흑의인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마음은 이미
콩밭을 해매고 있었다. 이것저것 귀찮은 문제들 따위는 저만치 던져버리고
마냥 가을날의 정취에 취하고만 싶었다.
흐뭇해진 그가 낯선 거리를 낯설지 않은 기분으로 거닐다가 문득 고개를 돌
렸다.
따앙~ 따앙~
청명한 가을하늘처럼 맑은 쇠망치 소리가 외진 골목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어찌 망치질 소리가 이토록 깨끗하고도 깊은 울림을 간직할 수 있단 말인
가!”
저도 모르게 철장포로 옮겨지는 발걸음. 무인으로 병장기에 흥미를 갖지 않
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만은 검이나 도를 다루는 사람들은 특히나 자신의
병기에 애착이 남다른 편이다.
창이나 봉, 기타 편 따위의 무기들과 달리 검이나 도는 날이 무기의 생명이
다. 가볍고 단단한 병기가 좋은 무기라는 사실은 불문가지, 그래서 강호를
떨쳐 울리는 병기들은 하나같이 특이한 재질의 금속으로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검날은 다르다. 제아무리 좋은 재료로 만들어져도 보관을 잘못하
면 금방 무뎌진다. 입에 한지를 물고 검을 닦는 이유도 자칫 입김 따위가
검날에 서릴까 저어해서 취하는 방편이다.
격렬한 싸움이라도 한차례 치른다면 반드시 철장포에 검을 맡겨야함은 불문
가지. 그만큼 검날은 예민하고도 섬세한 부위라고 하겠다.
흑의인 역시 검을 다루는 무인으로 철장포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철장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라고 해야겠지만.
‘이정도로 깨끗한 망치질이라니!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동네에도 그나마 괜
찮은 곳이 하나쯤은 있다는 얘기인가?’
철장포의 앞에 이르러 대문에 걸린 장식물들을 눈여겨보던 흑의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작은 장식품, 스쳐지나간다면 보잘것없는 물건이지
만 눈여겨본다면 시중에서 나도는 철물들과 질적으로 다른 무엇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 참...’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던 그가 결심한 듯 문을 열었다.
화악~
밀려오는 열기에 흑의인이 깜짝 놀라 하마터면 돌아나가려 했다. 화기가 없
는 대장간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이곳에서 풍기는 열기는 통상의 철장포에
서 품고 있는 그것과 차원이 다른 뜨거움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함께 웃통을 벗어젖힌 사내가 망치질을 멈추고 걸어
나왔다. 서른 살 가량의 청년은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하고 야무진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촉촉이 젖은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렇게 갑갑한 공간에서도
사내의 눈은 화염처럼 치솟는 열기를 제어할 것만 같았다.
‘진정으로 화기를 조종한다는 건가!’
흑의인이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잠시 기다리던 사내가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 어?”
그제야 현실세계로 돌아온 그가 사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뭔가 생각이
들었었는데 청년의 질문에 그만 놓쳐버렸다. 문득 흑의인이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는 급히 입을 열었다.
뭐든 말을 해야 한다!
“칼을 맡기려하네.”
말을 뱉고 흑의인이 속으로 깜짝 놀랐다.
210
칼을 맡기겠다니! 검사에게 칼은 제 2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고 한시적이나
마 그것을 타인의 손에 건낸다 함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뒷받침 되
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얘기다. 분신과도 같은 애검을 낯선 대장장이
에게 맡기겠다니!
흑의인이 당황하고 있을 때 대장간 사내가 의뢰인의 등에 걸린 검을 바라보
며 소박한 감탄을 터트렸다.
"대단히 커다란 검이로군요! 대장장이 생활 이십 여 년이지만 이리도 거대
한 검을 처음 봅니다!"
"아아, 단지 크기만 한 게 아닐세."
당황은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흑의인의 얼굴에 득의의 빛이 떠올랐다.
자부심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표정이라 일순간 청년이 뒷머리를 긁었
지만 한번 터진 그의 말문을 막을 수 없었다. 뭐, 특별히 바쁜 일도 없으니
말을 막을 이유도 없었다.
"이 검은 말이야... 철을 잘 알 테니 하는 말인데..."
촹!
기세 좋게 검을 뽑아들자 그 크기와 무게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비좁은 대장간에 흑의인의 검이 자리하게 되자 검이 드리운 그림
자만으로 장내는 터져나갈 듯했다.
"칼집에서 은연자중하고 있을 때도 멋이 있었지만 역시 검은 검사의 손에
쥐어졌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발하는 군요!"
"물론이지! 주인장인 듯 한데 젊은 나이에 검을 아주 잘 알고 있구먼! 그리
고, 그리고 또 뭐 다른 걸 보지 못하겠는가?"
"왜 다른 것이 없겠습니까. 보아하니 칼의 재질은, 음... 빛깔로 보아 남만
의 만년묵철(萬年墨鐵)... 아니다, 묵철이라면 저리 고운 광택을 발할 리는
없지. 그렇다면 광동의 지정화절(地靜火鐵)... 아니지, 화기를 느낄 수 없
으니 그도 아니고..."
젊은 대장장이의 고심이 흑의인을 즐겁게 했다. 맞추든 못 맞추든 상관 없
었다. 그는 그저 청년이 자신의 검에 보내는 예우가 기뻤으니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대장장이가 문득 고개를 쳐들고 박수를 쳤다.
"아! 혹시 이 칼은 천산의 빙로주철(氷露鑄鐵)로 만든 것 아닙니까?!"
"왜 아니겠나! 하하핫! 주인장의 안목이 이리도 깊을 줄은 정말 몰랐네! 맞
아, 이 칼은 빙로주철 이외에 어떠한 불순물도 첨가되지 않았다네!"
"빙로주철... 그저 말로만 들어본 광물이었는데..."
대장장이는 역시 대장장이인가. 청년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의 광채
가 일렁였다. 그러다 젊은 대장장이의 고개가 갑자기 갸우뚱 옆으로 꺾였다.
"근데... 저를 아십니까?"
"음?"
"손님께선 저희 철장포에 처음 오신 듯합니다만 어찌 이런 명검을 생면부지
의 저에게 맡기시려 하시는지요?"
"음, 그게..."
어쩌다 튀어나온 말이라고는 절대로 할 수 없다. 청년의 자존심도 자존심이
려니와 그런 뚱딴지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실없는 중년이라
고 생각하겠는가. 변태중년의 여파가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실없는 중
년이라고까지 불리게 된다면 정말 참기 힘들다.
"음, 뭐라고 할까... 아! 그래, 망치질 소리를 들었다네! 어찌나 맑고 청아
하던지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던 나그네의 발걸음을 잡아채더군. 그래, 그
랬었어.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 듯 그렇게 들어왔다네."
"망치질 소리요..."
"만약 망치질 소리만이었다면 칼까지 맡기겠다고는 안 했겠지."
"그럼?"
청년의 의아한 시선을 외면하고 흑의인이 고개를 돌려 대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바람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몸을 흔들고 있는 장식물 몇 개가 서로
부딪치며 가을의 넉넉함을 흩뿌리고 있었다.
"자신이 다루는 사물에 대한 존중, 그것을 느낄 수 있었네. 작고 아담한 장
식물에서."
"아..."
지음(知音)이라는 걸까? 청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손님의 검은 제가 책임지고 처음처럼의
검명(劍鳴)를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처음처럼의 검명이라..."
검을 풀어 청년에게 넘기고 선수금을 치른 후에 대장간을 나서던 흑의인이
빙글 몸을 돌려 거검을 쓰다듬고 있는 대장장이의 손길을 주시했다. 정인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처럼, 잠든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받쳐드는 어머니
의 사랑처럼, 청년의 손 마디마다 애정이 담겨 있었기에 흑의인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어렸다.
"오랜만에 단설(丹雪)이 편안한 휴식을 취하겠군."
"붉은 눈이라...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로군요."
"그런가..."
자식들의 이름자중에서 하나씩 따왔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흑의인이
사람 좋게 웃었다. 믿을만한 보모에게 자식을 맏기고 나들이가는 부모의 심
정이 이럴까. 그의 눈가에 접힌 잔주름은 그래서 여느때와 달리 여유로웠다.
"다시 한번 부탁하네. 그녀석...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사실 많이 피곤했을
것이야. 아프고 힘들어도 결코 내색하지 않고 무정한 주인을 말없이 지켜주
었다네."
"비록 힘겹고 피곤한 길을 걸었을지 몰라도 단설은 결코 주인에대한 믿음을
저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보십시오."
청년이 거검의 검신을 검지 손가락으로 한번 팅 쳤다.
우웅~
"그만큼의 전투와 그만큼의 혈로를 주인과 함께하며 이미 단설은 주인과 하
나인 겁니다. 이녀석은 이미 쇠붙이가 아니지요. 정말로 훌륭한 전우를 두
셨습니다."
묘한 청년이다. 그저 철과 검에대해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보니 마치 강호의 노고수와 인생을 교환하는 것만 같다.
'처음처럼의 검명...'
단지 검을 보고 주인의 마음과 지나온 길까지 엿볼 수 있는 젊은 대장장이.
그리고 그를 단번에 느끼고 애검을 스스럼없이 맡긴 중년의 검도고수. 장
내에는 후덥지근한 열기가 쉼없이 뿜어져나왔지만 시대를 초월한 그들의 교
감을 막지 못했다.
***
"과식을 했을 땐 산보가 최고라네. 배 터지도록 먹고 몸을 가누지 못한다고
방구석에 쳐박혀있는 것처럼 바보짓도 없는 법이지."
"그건 노인네들 한테나 해당되는 말이오! 나같은 놈은 아무리 많이 먹더라
도 방구석에서 일다경 정도 뒹굴거리면 그냥 소화가 된다구요! 사람 귀찮게
끌고 나와서는 뭔 엉뚱한 소리로 때우려는 거요! 아이구, 귀찮아..."
장추삼은 쉬고 싶었다. 저녁으로 나온 생선 튀김이 그럭저럭 먹을 만 해서
열심히 먹어준 것 까진 좋은데 간만에 많은 양의 음식물이 들어가서인지 도
통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늘어져 있는데 노인네가 심심했는지 시장
구경을 가자고 자꾸 잡아끌어서 할 수 없이 끌려 나온 거다.
시장구경이라니...
청빈로의 시장통을 제집 드나들 듯 누비고 다닌 그에게 어떤 시장이라도 감
흥을 주지 못한다. 진귀한 물건? 그딴 거에 애시당초 관심도 없었고 흥미도
없다. 고장만의 특산물? 배 불러 죽겠구만 특산물은 무슨 얼어죽을 특산물
인가?
"쉬고 싶어, 쉬고 싶어..."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는 장추삼의 타령도 대단하지만 그런 놈을 옆에 끼고
눈썹 한올 움직이지 않고 시장을 돌아 다니는 유한초자의 무신경 또한 일절
이라고 하겠다.누가 보면 귀머거리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로.
아무리 투덜거려도 답이 나오지 않자 곧 체념했지만 장추삼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으음... 요즘 노인네가 무서워졌어. 전에는 뭐라고하면 듣는 척이라도 하
더니 이젠 안면몰수는 물론이고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잖아.'
처음의 신비로움과 무게감은 덜해졌지만 그것이 묘한 이물질과 융화되면서
유한초자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소문이나 흘리고 다니는 노인
네가 뭐 이런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건가.
눈치 하면 장추삼이고 장추삼 하면 눈치다. 그런 견지에서 노인네는 그저
그런 무림의 변설자가 아니다.
'오래 살아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른다. 관록처럼 분명한 무기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인생역정(
人生歷程)만으로 치부하기엔 뭔가 특별한 것을 품고 있는 노인이다.
장추삼이 생각하는 가설이 맞다고 해도 도저히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단
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그가 어디선가 들려온 소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고
개를 돌리고 뭐라고 투덜거리려는데 앞서걷던 유한초자가 발길을 멈추고는
급히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은 소음의 진원지인 시장의 귀퉁이였다.
"뭐예요?"
"이리 오게. 재미난 구경거리가 펼쳐진 것 같네!"
'뭐길래...'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혼자 멀뚱히 서있기도 그래서 장추삼도 유한초자를
따라 사내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자, 돈 놓고 돈 먹기! 부담갖지 마시고 거세요! 열배, 무려 열배입니다!
눈썰미만으로 건 돈의 열배가 생겨요! 완전 거저! 땅짚고 헤엄치기! 한푼이
열 푼 되고 세푼이 서른 푼! 자자, 돌립니다. 돌아라, 돌아라! 자~알 도는
구나아~!"
시장통에 흔히 있는 도박꾼들이었다. 얼핏 보면 혼가서 도박판을 벌이고있
는 듯 싶었지만 시장통 경력 십여년의 장추삼에겐 그들 패거리가 훤히 보였
다.
'오른편에서 연신 오오, 하고 감탄성을 늘어놓는 덩치 큰 녀석. 중앙에서
사방을 쓸어보고 있는 애꾸. 왼쪽에서 돈을 거는 생쥐 수염... 모두 합쳐
네 놈이로군.'
도박 방식은 간단했다. 밥사발 세 개를 엎어놓고 그중 하나에 붉은 실타래
를 집어 놓은 상태에서 마구 사발들을 섞은 후에 실타래가 숨어 잇는 사발
을 찾는, 매우 원시적인 것이었다.
"아, 이런 재미도 없는 구경을 뭐하러 하자는 거요? 이런 유치한 구경을 하
자고 시장에 나오자고 한 거예요? 이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낮잠을 자겠
네."
"누가 도박판을 보자고 했나?"
툴툴거리는 장추삼의 손목을 잡고 인파를 헤치며 유한초자가 군중들의 가운
데에 섰다.
"잘 보라고."
"뭘요?"
"사람들을 보란 말이야."
"사람들?"
유한초자의 말에 장추삼이 주위를 둘러 보았다. 늘 그러하지만 도박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원초적인 감성으로 변해 버리는 사람들. 일확천금의 유혹은
그들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완전히 말소시켰고, 그래서 군중들의 눈엔 어떤
광기가 흘렀다.
"보기 싫네, 추해..."
"그렇지만 인간 본연의 모습이지."
"엥?"
유한초자가 한 사내를 주시했다. 그는 전낭을 들고 앞으로 나설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꽤 무거워 보이는 전낭과 허름한 차림새로 보아 며칠을
고생해서 얻은 무엇을 내다 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 같았다.
"아마 저자는 끝내 돈을 걸 거야. 눈가에 어린 탐욕의 빛이 이미 마음을 잠
식하고 있거든. 열 배의 유혹이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욕망이 꿈틀거리는
게지. 저것도 일종의 승부라고 할 수 있거든. 전부 아니면 전무, 그래봐야
확률은 삼분지 일이라고 생각할 테고."
"삼분지 일은 무슨!"
장추삼이 코가 비틀어질 정도로 콧방귀를 꼈다.
"우리 동네에도 도박판이 있는데 한심하게도 처음부터 정해진 승부에 모두
들 목숨을 걸더군. 얼마 후의 후회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달려들지만 결과는 명약관화지. 꾼들에게 일반인은 그저 먹이에 불과하다는
걸 왜 모를까?"
그의 중얼거림에 유한초자가 빙긋 웃었다.
"자네 말이 맞네. 또한 사람들도 알고 있지. 하지만 인간이라는 족속들처럼
미련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류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깨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경우의 수를 염두하고 돈을 거는 거라네."
"에휴..."
"인간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뭐라고 생각하나?"
" ? "
뜬금없는 유한초자의 질문에 장추삼이 먼산을 바라보았다. 인간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라니, 그런 거창한 주제는 생각해 본 적 없다.
"글쎄요?"
"욕망이지. 시링이니 믿음, 그리고 정의 따위는 그의 부산물에 불과하다네.
욕망이 수반되지 않는 인간의 행위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아."
"욕망이라..."
갑자기 있어보이는 유한초자의 말에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욕망, 뭐든
하려거나 원해서 간절히 바라는 마음.
"그렇군. 욕망, 신선이나 도사급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 뭐든 간에 원하고
바라는 일이 분명 있을 테니까."
"그렇지. 그래서 욕망을 탓할 이유는 없네. 문제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버린
사람들이겠지. 일단 그것에 사로잡히면 인간으로 지켜야할 기본적인 모든
걸 포기하게 된다네. 아니, 철저히 무시하게 되지. 이미 그는 노예니까."
"으음..."
장추삼과 유한초자의 철학적인 문답은 도박판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인
간의 본능이 적나라하게 분출되는 현장에서의 대화였기에 묘한 합일점을 찾
을 수 있었다.
이른바 부조화 가운데의 조화라고 할까.
첫댓글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욕망이 없는자는 무덤속에 누어있는자 뿐이 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