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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31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제1독서 : 1코린 1,26-31
복 음 : 마태 25,1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탈렌트의 비유는 저에게 매우 강력합니다.
저에게 늘 이 비유로 말씀하시던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할 때,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탈렌트를 주실 때는 개인의 명의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그 탈렌트에 대해서 너에게 결산을 요구하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2009년 겨울에 받은 편지 한 통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 봅니다.
“그것은 너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것을 감추는 것은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십오 년이 지난 편지를 왜 지금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 말씀이 지금도 저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종들에게 맡긴 탈렌트가 그 종들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탈렌트는 묻어두거나 활용을 하거나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탈렌트가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한 탈렌트를 가진 종의 것을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종에게 주는 것은
무자비할 뿐만 아니라 불의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총은 실제로, 가꿀 때에 자라납니다.
은총을 부어 주셔도 그 씨앗에 물을 주고 가꾸지 않으면 시들어 버립니다.
은총을 잘 가꾼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시 같은 분의 말씀을 인용하면,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탈렌트를 내어놓을 때
은총은 풍성한 열매를 맺고,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라고 하실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 물가가 많이 올라서 백 원 단위의 돈은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천 원 단위의 돈 역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크지 않다고 생각했던 이 돈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새벽에 묵주기도를 하며 동네 공원을 걷습니다.
6~7km를 걸으며 묵주기도 20단을 바칩니다.
그날도 묵주를 들고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성당까지 오려면 아직도 꽤 먼 거리를 가야만 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편의점이 있어서, 얼른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글쎄 지갑이 없었고, 여기에 휴대전화도 없으니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혹시 몰라서 바지 주머니를 뒤지니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다시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일 싼 우산의 가격이 7천 원으로, 2천 원이 부족합니다.
평소에 크지 않은 돈이라 생각했는데,
그 2천 원은 우산을 살 수 없는 너무나 큰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어느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뜻밖의 사고로 자녀가 먼저 하느님 나라로 가게 된 것이지요.
가족 중의 한 명일 뿐이지만, 그 빈자리는 너무나 컸습니다.
슬픔이 떠나지 않았고,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부분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작은 부분이 전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작은 것은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특히 다른 이와 비교하면서 자기가 가진 것이 너무 적다면서 불평불만을 가집니다.
하지만 작은 부분도 소중하게 여기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탈렌트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주고 주인이 떠나지요.
다섯 텔렌트 받은 이는 그 돈을 활용해서 다섯 탈렌트를,
두 탈렌트를 받은 이는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지만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길 뿐이었습니다.
결과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그 한 탈렌트를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게 되었고,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고 맙니다.
한 탈렌트는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닙니다.
노동자가 16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를 받은 이보다 적게 받았다는 불만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한 탈렌트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작은노력이 구원의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게 받았다면서 불평 불만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받아들이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충실한 사람만이 주님께 더 큰 은총과 사랑을 받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탈렌트를 맡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탈렌트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종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의 표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의 선물’이요,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명’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선물은 ‘잘 보관하라’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라’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선물은 말씀처럼 ‘씨앗’(마태 13,1-23)으로,
곧 ‘종자돈’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 셈을 할 때는
그 선물을 활용하여 맺은 열매에 따라 대가를 지불 합니다.
결국 ‘선물에 따른 응답 실행’이
바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경기의 규칙인 셈입니다.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그리고 셋째 종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6)
사실 은총의 선물은 항상 충만히 주어지지만,
주는 대로 다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만큼만 받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임은 비워진 만큼만 받을 수 있고,
나누는 만큼 비워지는 것이기에, 결국 베풀수록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선물을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쥔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사실 그 선물은 애시당초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선물을 받은 이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충실하게 열매 맺는 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깨어 준비하는 삶'은 맡겨진 일에 충실함이요,
맡겨진 일에 충실함은 일을 ‘맡긴 분에 대한 충실함’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은총’, 곧 하느님의 먼저 주신 사랑이요,
둘째는 은총에 따른 ‘소명에 충실함’,
곧 은총을 열매 맺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힘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셨습니다.
바로 이 ‘은총’과 ‘십자가’야말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경기의 규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은총 그 자체보다도,
은총을 실현하는 데 따르는 십자가 그 자체보다도,
먼저 그것을 ‘주신 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임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란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크신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주인과 함께 기쁨을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각자의 그릇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바탕으로 나의 정성을 더 하여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선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합니다.
때때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놓고는
비참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 둘은 자기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두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하면 되는데
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탈렌트를 주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가 있었을 터인데
그 바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처음부터 주인의 동기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더 벌지 못한 것에 대해 잘못하였다고 고백하면 될 것을 오히려 뻔뻔스럽게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마태25,24). 하고
주인을 비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구제 불능입니다.
주인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안에 가둬놓은 안다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자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뭔가를 기대만 하는 사람은 불평불만, 합리화를 꾀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투덜댈 여유가 없습니다.
노를 젓는 사람은 배를 흔들 시간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각자는 자기가 받은 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말씀은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뻔히 잃을 것을 알면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성실하며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으면 그야말로 큰일을 내고 맙니다.
매사에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량에 따라 귀한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이며
적게 받은 사람에게서는 적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정해진 일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무엇인가 더 풍요롭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충실하게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증가시킬 소명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몫에 충실함으로써
주님과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탈렌트가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많고 적고는 물론 크고 작음에도 상관치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해 유용하게 쓸 뿐입니다.
당신께서 주신 것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쓸 뿐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본당에 새로운 단체가 조직되었습니다.
이름을 정하는데 몇 가지 제안이 있었습니다.
‘망치회, 요셉회, 목수회’ 중에서 목수회로 정했습니다.
이분들은 본당 ‘창고’를 만들었던 분입니다.
의기투합해서 앞으로 본당 시설의 관리와 수리를 담당하는 부서를 만들자고 했고,
그렇게 해서 목수회가 탄생했습니다. 요셉 성인도 목수였고, 예수님도 목수였습니다.
그래서 단체 이름을 목수회로 정했습니다.
목수회의 첫 번째 과제는 사제관 ‘에어컨’ 문제였습니다.
사제관 에어컨의 온도 조절이 안 되었습니다.
몇 가지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필터’였습니다.
에어컨의 필터를 6개월에 한 번은 교체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 한 분이 에어컨 필터를 교체하였고, 온도 조절이 잘 되었습니다.
앞으로 목수회는 본당의 시설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단체가 될 것입니다.
기꺼이 궂은 일을 맡아서 해 주기로 한 ‘목수회’ 형제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을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나누었으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뉴욕에서 지낼 때입니다. 저의 직책은 ‘가톨릭평화신문 미주 지사장’이었습니다.
신문사를 운영하는 임무였습니다. 주된 임무는 ‘신문홍보’였습니다.
직원들이 원고를 작성하면 교정하였고,
가끔씩 필진과의 만남도 가졌고, 광고주와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팬데믹이 왔고, 뉴욕에 온 지 6개월 만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노력하면서 신문사를 운영하였습니다.
덕분에 신문사는 팬데믹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동북부 ME 담당신부입니다.
저는 엠이 봉자들과 함께 피정을 준비했고, 가을 소풍도 함께 했습니다.
주말 봉사도 함께 했습니다. 엠이 봉사자들은 저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엠이 봉사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도 다녀왔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를 도와주었습니다.
처음에 3개월만 도와주기로 했는데 뉴욕을 떠날 때까지 3년 6개월을 함께 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는 저의 서품 30주년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는 공동체와 함께 야외 미사를 하였고, 작년에는 성지순례도 다녀왔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서의 경험은
지금 댈러스 성 김대건 성당에서 지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다섯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이웃을 위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나눌 것이 없어서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선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이 부활로 열매를 맺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찡그리면 찡그릴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이 생기고, 오해하면 오해할 일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능력과 힘을 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사와 기쁨, 이해와 사랑은 우리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미움과 분노, 오해와 불신은 우리의 능력을 땅에 묻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늘 마음에 담고 살면 좋겠습니다.
아프리카의 밀림은 늘 푸르고 많은 생명이 살아갑니다.
이는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모래에는 생명이 살기 어렵습니다.
이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곁에서 듣는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늘 생기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사람은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탈렌트의 비유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탈렌트는 각 사람의 능력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자신의 구원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또 한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맡겼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액수를 받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 탈렌트를 받았다고
결코 적은 액수를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 탈렌트는 엄청난 돈이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 탈렌트를 이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리고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이처럼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의 돈을 땅에 묻었다.
이것은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주인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욕망을 충족시키며 사는 모습이다.
“오랜 뒤에”(19절) 주인이 와서 종들과 셈을 하게 된다.
첫째 종은 자신감에 차서 주인에게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20절)
주인은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1절).
이 말씀은 온갖 축복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두 탈렌트를 더 벌은 사람에게도 같은 칭찬과 함께 영원한 보상으로 인도되었다.
한 탈렌트를 받아 땅에 숨긴 종은 자신의 것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볼 마음이 없었다.
게으른 종은 묻어두었던 탈렌트를 찾아 주인에게 돌려준다.
주인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26절) 하면서 종을 꾸짖은 다음,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종에게 주라고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9절) 한다.
사랑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선물들도 받는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가 받은 것처럼 보이는 선물들마저 빼앗긴다.
자기 능력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그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지도 모르며,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빼앗겨도 빼앗긴 줄도 모르게 된다.
그때 주인은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30절) 선언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내가 받은 탈렌트를 늘리려
노력하는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
비교는 불행을, 감사는 행복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비유 4편(24,45-25,46) 중에서
탈란트의 비유(25,14-30)에 해당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은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24,44)는 말씀에 따라
종말비유의 특징을 ‘늘 깨어 준비함’으로 규정하였다.
늘 깨어 있는 이유는 종말의 시간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고,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종말 후에 세워질 神國,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不時에 들이닥칠 종말을 깨어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종말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살아있는 동안에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으로서 연중시기에 듣게 되는 마지막 복음이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오늘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있었던 행적과 가르침을
평일 미사의 복음으로 묵상해 왔다.
이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한해 전례력의 마지막 날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는
루카복음(4,16-21, 36)을 평일미사 복음으로 묵상하게 될 것이다.
탈란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은 많은 종들을 부리는 아주 부자가 틀림없다.
주인은 먼 여행을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 각자의 능력대로 재산을 맡긴다.
루카 복음은 금화의 비유(19,11-27)에서 열 명의 종에게
각각 금화 한 개씩(100데나리온)을 맡기는데 비하여
마태오복음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종들에게 맡긴다.
한 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니 한 탈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다.
따라서 세명의 종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탈란트(30,000 데나리온),
두 탈란트(18,000 데나리온), 한 탈란트(6,000 데나리온)를 받는다.
그리고 주인은 떠났다.
종들에게 이 많은 돈을 맡기면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도 없고,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다.
따라서 맡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종들에게 달려있다.
그래서 주인이 떠나간 후에 종들은 받은 탈란트로
첫째와 둘째는 倍加시켰고, 셋째는 그냥 땅에 묻어두었다.
느닷없이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셈을 밝히게 된다.
셈의 결과는 오늘 복음이 보여 주는 바와 같다.
탈란트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종말 교훈은 두 가지다.
첫째는 ‘깨어 기다리는 것’이다.
초기 교회가 당면한 ‘재림지체 현상’을 염두에 두고
‘열 처녀의 비유’(25,1-13)와 ‘최후 심판의 비유’(25,31-46)와의 맥락에서
탈란트의 비유를 묵상하여야 한다.
출타한 주인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과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꼭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 사이의 긴장감은
일상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믿음의 마음을 굳건히 하고, 목적의식을 뚜렷이 가지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두 번째 교훈이 들어 있다.
비유가 주는 둘째 교훈은, 각자가 받은 탈란트(Talent)를
종말의 시기까지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그릇에 맞게 능력을 주셨다.
비유에서 보듯이 받은 능력의 양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받은 것을 그냥 묻어주어서는 안 된다.
‘얼마나 많은’ 능력보다는 많던, 적던,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모든 불행은 남과의 비교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듯이
양을 가지고 남의 것과 비교하는 순간 인간의 불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반대로 양에 관계없이 자기에게 맡겨진 능력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사용한다면
여기서 인간의 행복은 시작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잘하였다. 착하고 충직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5,21. 23)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오늘의 복음을 새로운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익히 잘 아시는
작가 ’코엘료‘의 유명한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코엘료가 책의 맨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에 썼듯이,
코엘료도 자신의 젊은 시절 연금술에 관한 오랜 연구와 방황을 통해 깨달은 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늙은 왕이 산티아고에게 들려준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상인이 행복의 비밀을 알아 오라며 자기 아들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현자에게 보냈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사십 일 동안 사막을 걸어가 산꼭대기에 있는 아름다운 성에 이르렀지요.
그곳에 현자가 사는 집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말을 들은 현자는 우선 자신의 아름다운 집을 모두 구경하고 오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동안 기름이 담겨 진 찻숟갈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다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집안을 모두 둘러보았는데,
오직 찻숟갈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아무것도 보질 못했지요.
그러자 현자는 젊은이에게 다시 가서 집안의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살펴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는 이번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지만,
그 사이에 숟가락의 기름이 흘러 없어져 버렸지요.
현자 중의 현자인 그 사람은
‘내가 그대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요.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도 잊지 않는데 있도다.’』 라고.
이것은 코엘료가 연금술이란 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결이며,
그것은 곧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을 경험해 보는 것이며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
곧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도 잊지 않는 것에 있다, 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법을 그는 <작가의 말>에 자기 스승인 ‘람’이 들려준 이야기로 써놓았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어느 수도원을 찾았을 때,
사제들은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성화를 그려 보이기도 하며 경배를 드렸다지요.
그런데 그중 맨 끝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한 볼품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배운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그가 경배드리는 것을 막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와 성모께 마음을 바치고 싶어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다지요.
그러자 아기 예수가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고,
성모께서는 오직 그 사람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겁니다. 』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자기 신화를 사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산티아고가 보여 준 것과 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산티아고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을 결정해야 할, 매 순간에
자신의 신화를 살기 위해서 안락함을 버리고 고난을 택하는 용기를 가졌지요.
그런데 바로 그 고난이 곧 납을 녹여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사의 용광로가 된 것입니다.
“연금술의 작업 과정은 물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신의 변화를 나타낸다.” ( C.융)
연금술은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바는
하늘나라는 선물이요 과제라는 것, 그리고 은총이요 요청이기에,
곧 현재와 임박할 종말 사이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마지막 날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자의 능력에 따라 나눠 준 액수가
당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5 탈렌트는 30,000 데나리온, 2 탈렌트는 12,000데나리온
그리고 1 탈렌트는 6,000데나리온 정도인데,
당시에 농촌 일꾼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엄청난 거금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 종은 주인이 맡긴 돈을 활용하여 큰돈을 벌어들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능력을 믿고 맡긴 주인에 대한
신의에 대한 응답이며 성실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셋째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돈을 다만 안전하게 보관만 합니다.
이는 곧 자신과 자기 능력을 믿고 맡긴 주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행동이었습니다.
아무튼 때가 되어 돌아온 주인은 종들을 불러 셈을 했고,
그에 따라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5,21. 23)
여기서 주인은 두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한 까닭은
두 종이 벌어들인 돈의 많고 적음보다 종들의 자신(=주인)에게 대한
신의와 성실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은 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기보다 주인에 대한 됨됨이를 판단하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시는 모지신 분(마태25,24)이라고 생각해서
그릇되게 주인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결국 주인은 맡긴 돈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한 셋째 종에게서 빼앗은 돈을 첫째 종에게 주었습니다.
이로써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29)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지칭하는 경제 용어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타인과 비교하고 남을 시기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더욱더 초라해진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고 봅니다.
뒤늦게 후회한다 해도 때는 그땐 이미 늦을 것입니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25,30)
“주님, 저희에게 지금 주어진 삶에 감사하면서,
또한 저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여주시고
이 모든 일을 성실히 끝내고서는 자만하고 자랑하기보다,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