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말
박용하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를 기리며
맥주를 더 좋아한다
기타를 더 좋아한다
기차를 더 좋아한다
눈물보다 피눈물을 더 좋아한다
바다 건너보다 비무장지대를 더 좋아한다
바르샤바보다 크라쿠프를 좋아한다
인간이 지닌 이성보다 숨죽이고 있는 야만성을 더 좋아한다
담장 안 셰퍼드보다 담 없는 집의 똥개를 더 좋아한다
책 좋아하지만 세상이라는 책을 더 좋아한다
형님이 계신 서울보다
노래 쓰고 노래 짓고 노래하는 친구가 있는 춘천을 더 좋아한다
릴케보다 소월을 더 좋아한다
여자보다 계집을 남자보다 사내를 더 좋아한다
신이 내린 목소리보다 조용필을 더 좋아한다
UFO보다 참새의 비행술을 더 좋아한다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보다 가망 없는 인간을 더 좋아한다
그렇다 한들 어쩔 것인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보다
너를 좋아한다는 말이 나는 더 좋고
너를 좋아한다는 말보다
너를 밝힌다는 말이 제격일 때도 있다
돌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돌을 좋아한다는 말이 부담 없어 더 좋고
돌을 좋아한다는 말보다
돌을 밝힌다는 말이 더 좋을 때도 있다
나무를 사랑한다는 말보다
나무를 좋아한다는 말이 티내지 않는 것 같아서 더 좋고
나무를 좋아한다는 말이
시를 좋아한다는 말보다 더 마음을 움직일 때도 있다
비교가
비유가 지겹다
비유 없는 비유를 더 좋아한다
통비유를 좋아한다
없어 보이지 않으려 난잡 떠는 시들보다
어깨에 힘들어가지 않은 돌의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진술이 비유인
진술이 진실인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보다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 조금 더 좋고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보다
대놓고 남자를 밝힌다는 말이 싫지 않을 때도 있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보다
너를 좋아한다는 말이 덜 힘이 들어가 있어 더 좋고
너를 좋아한다는 말보다
너를 원한다는 말이 가식적이지 않아서 좋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돈을 밝힌다
아예 돈을 사랑한다
나도 그까짓 돌보다
돈을 백배는 더 밝히지 않았던가
도래하지 않은 것
낯선 것
기이한 것
멀리 있는 것보다
첫 성교보다 오늘밤 있을 성교를 더 좋아한다
극비문서보다 난중일기를 더 좋아한다
첫 남자보다 마지막 남자를 지금 만나는 남자보다 더 좋아한다
도둑놈보다 도둑놈을 뽑은 국민을 더 좋아한다
좋은 선수, 좋은 사람으로 남겠다는
종합격투기 선수를 예수나 부처보다 더 좋아한다
별빛보다 가까이 있는 네 손등과 사타구니, 젖가슴을 더 좋아한다
대양보다 대양과 막 입 맞추는 하구의 주저하는 물결을 더 좋아한다
뜬구름보다 발길, 손길, 눈길 닿는 나라를
그 나라 사람들의 돌 입술을 더 좋아한다
진보주의자보다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일개 시민을 더 좋아한다
한 여자나
한 남자보다
되다 만 한 인간을 더 좋아한다
영원이나 불멸보다 오늘 하루 안에 있는 것들을
잔치국수나 멍게나 제비꽃이나 동동이나 영미 같은 것들을 더 좋아한다
위선 떠는 우리들보다
때때로 개가 되는, 개보다 못한 나를 더 좋아한다
구원보다 식탁과 책상과 침대를 더 좋아한다
서열이
차별이 지겹다
비교 우위가 역겹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미지를 옹호하지만 지금을 더 좋아한다
내일이 없는 오늘을
오늘 이후를
첫댓글 긴 글 올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냉차 한잔 놓고 갑니다
지금이 제일 좋아요.ㅎㅎ